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0:42:23

고려/문화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고려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ord-break:keep-all; min-height:2em"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시대 구분<colbgcolor=#fff,#1f2023>건국 초기(후삼국시대)문벌귀족기무신정권기원 간섭기(몽골복속기)말기(반원개혁기)
관련 문서역사 · 왕조 · 인물 · 문화 · 창작물 · 군사 · 외왕내제 여부 · 평가 (고대국가와의 비교 · 조선과의 비교) · 왕실
기타고려청자 · 패서
경제건원중보 · 활구
관련 틀국왕 · 제후왕 · 중앙정치기구 · 사회 지배층 · 재상지종 15가문 · 개국공신 · 배향공신 · 궁궐 · 왕립 사찰 · 대외 전쟁 · 군대 편제 · 건국설화 등장인물}}}}}}}}}
파일:external/file.agora.media.daum.net/pcp_download.php?fhandle=MWpoMEh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SzE1MC8xMzUvMTM1MTAuSlBH&filename=go5.jpg

1. 개요2. 불교3. 유교4. 고려조 편찬 사서5. 고려청자6. 회화7. 장례8. 음식
8.1. 국수8.2. 만두8.3. 육식
9. 문학10. 성문화
10.1. 고려의 여인들

[clearfix]

1. 개요

고려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화려한 귀족 문화'다. 앞서간 기술력과 매우 아름다운 예술품들을 다수 남겼으며, 이러한 문화 발달은 문벌 귀족의 집권기 때 가장 번영했다. 오늘날에도 고려청자가 아주 유명하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문화는 귀족과 상류층에만 한정된 것이었으며, 반면에 민간 문화는 대체적으로 투박하고 토속적인 면이 많았는데 이는 지금도 남아있는 고려 시대의 석불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벽란도(오늘날 경기도 개풍군 서면) 및 금주(경상남도 창원시 합포)를 통해 해외 문물을 꺼리낌없이 받아들였던 나라였다.

워낙 문화가 화려하고 정교하고 섬세하게 발달했기에, 다른 나라들에겐 고려가 멸망한 뒤에도 한반도 국가들을 '고려'라고 부를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특히 일본의 경우 '고려(코우라이:こうらい)'라는 말 자체가 중화문물인 '당물(唐物)' 과 더불어 명품 프리미엄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의외로 개방적이였다. 조선의 배타적인 문화 때문인지 고려의 문화도 배타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여성의 이혼도 허용되는 등 나름대로 개방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2. 불교

초기부터 사실상 불교가 국교화되었을 정도로 불교가 흥성한 시대였던 만큼 불교 문화 역시 융성한 발달을 이뤄냈다. 해동 천태종을 일으킨 의천조계종을 세운 지눌의 사상은 오늘날 한국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려 불교의 특징은 화려한 귀족문화와 더불어 왕실과 귀족 세력의 후원을 받아 세를 불렸다는 것인데, 특히 흥왕사나 귀법사같은 대형 사찰부터 팔만대장경이나 초조대장경같은 대장경 주조도 왕실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태조 왕건이 지은 훈요 10조에도 불교 장려와 관련된 내용이 있으며 성종 당시 최승로의 건의로 팔관회연등회가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는 했지만 현종때 부활하여 고려 멸망때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대신 현재의 천태종과 태고종, 천태종은 사상적 시조를 고려 ~ 여말 선초기로 잡고는 있지만 고려 시대의 같은 이름의 종파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불교는 종파주의를 유지할 수 없어 종파보다 승려간 사제 관계를 중시하는 문중 불교 형태로 변모했고, 종파적 특성도 약해져 다양한 종파가 혼재되어 있는 통불교 형태로 변했다. 물론 한국이 이게 좀 심해서 한국 불교의 특성으로 내세울 정도긴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똑같이 근세로 오면서 불교가 약세에 들어간 중국도 어느 정도 비슷한 현상은 있다.(일본 같은 경우는 아예...)

불교 문화가 발전하면서 경전들이 다수 쓰여진 시기기도 한데 이에 따라 출판 기술도 꽤 발달해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가 개발됐다. 공식적으로는 1234년 상정고금예문의 재인쇄를 주자(鑄字)로 한 자료가 있으며 남아있는 출판물로는 1377년의 직지심체요절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최근 들어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제758-2호)이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는데,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선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출판물이 될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활자 유물의 경우 14세기 후반의 고려활자 복(復) 자 한 글자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2010년 11세기 후반 ~ 12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하는 증도가자 24자의 떡밥이 생겼으나, 결국 5년 뒤 증도가자 유물은 진품이 아닌 조작으로 판명났다.
ᄉᆞ애 블 혀라 가고신ᄃᆡᆫ
그 뎔 社ㅣ 내 손모글 주여이다
...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그 잔 ᄃᆡ가티 더ᇝ거츠니 업다
삼장사에 불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
...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같이 답답한 곳이 없다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 中
중기를 고비로 불교는 점점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절에서 을 빚어 마시며 놀고, 세금도 면제 받으며 노비까지 하사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서도 절의 지주가 여인의 손목을 잡은 뒤,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렇듯 불교의 세력화는 결국 고려 망국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3. 유교

유교 문화도 발전했는데 고려 광종의 과거제 도입을 시작으로 친유학 군주로 알려진 고려 성종 때는 더 발전하게 된다. 대체로 고려의 유학자들은 조선의 유학자들과 달리 개혁이나 개척보단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입장이었고, 공맹을 좋아하나 실질적으론 순자의 사상을 따라 정관정요 같은 책들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이는 초기부터 거란과 전쟁으로 유학자들이 칼을 차고 지휘했기 때문에 그러기에 대체로 유학자들이 전란에 나가 싸우거나 혹은 반란을 진압하기 때문에 충효예중 충이 가장 강하고 효가 두번째고 예가 가장 약한 편이었다.

그리고 불교를 믿는 유학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예가 밑으로 오는 경향이 더 강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나 동국통감을 쓴 유학자들은 일단 나당 전쟁을 김부식은 긍정해서 무열왕보단 문무왕을 상하로 놓게 되었다. 동국통감을 쓴 유학자는 문무왕의 나당 전쟁을 부정하고 무열왕을 좋아한다. 후일 의종의 실정과 무신 정권부터 원 간섭기까진 효와 예가 강해지고 충이 약해지는데 이는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를 거치며 왕실의 권위가 대폭 추락하고 이로 인해 생겨난 거듭된 반란과 자주성의 추락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중간 중간 무신 정권이 종식될 번 할 때는 충이 강해지고 효예가 약해지는 경향이 강해지다가 다시 무신 정권이 이어지자 효와 예가 중시되며 원 위치가 된다.

이후 원 간섭기가 끝난 고려 말 충을 중시하고 예와 효를 중시하는 세력이 동시에 나오는데 권문세가가 득세할 때는 힘을 합치다가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전자의 경우는 온건 사대부가 되고 후자는 급진 사대부가 되어 양분되게 된다.

대체로 고려의 유학자는 전란이나 반란을 진압하는 쪽이 많아서 상무 정신을 중시하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상무 정신보단 우애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대체로 좌주문생이라고 하여 스승과 제자를 이루어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좌주문생 체제가 조선 왕조에 깨지며 이 경향은 조금 사라지나 성균관 체제로 여전히 남게 된다.

고려 시대의 백성들도 대부분 글을 잘 알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고려는 땅이 넓지 못하나, 백성이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業) 중에 유(儒, 선비)를 귀히 여기므로, 그 나라에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이 지극히 많고 땅이 넓고 편평한 데가 적기 때문에, 농민이 장인(工技)에 미치지 못한다. 주(州)나 군(郡)의 토산(土産)은 다 관가의 공상(公上)에 들어가므로, 상인은 멀리 나들이하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도시에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필요한 것을 서로 바꾸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듯하였다.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中.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中.

그리고 고려사 김방경 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훈둔(忻都, 忽敦)이 김방경더러, "황제께서 나에게 몽골군을 지휘하고 당신에게 고려군을 지휘하게 했는데 당신은 모든 일을 왕에게 미루고 왕도 당신에게 미루니 과연 누가 고려군을 지휘하는 거요?"하고 불평했다. 이에 김방경은, "변방의 군무는 장군이 통제하고 국내의 정무는 국왕의 통제를 받는 것이 마땅하오."라고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 마침 참새 새끼가 마루 아래에 나타나자 훈둔이 그것을 잡아 오게 한 다음 한참 어르다가 박살을 내고는 김방경더러 어떠냐고 물었다. 김방경이, "농부가 고생해 농사를 지으면 이놈들이 한꺼번에 모여 들어 다 쪼아 먹어버리니 공이 그놈을 죽인 것도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일거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훈둔이, "내가 고려 사람을 보아하니 모두 글을 알고 부처를 믿는 것은 한인(漢人)과 서로 비슷하오. 그러면서 늘 우리를 경멸하며 ‘몽골인들은 살육을 일로 삼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싫어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소.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육하는 습속을 내려주어 그것을 순리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니 하늘이 죄로 여기지 않을 거요. 그대들이 몽골인들의 종이 된 이유는 바로 이것이외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

이런 증거들 때문에 단순히 고려의 백성들이 대부분 문맹이였다는 이유로 고려시대 백성들에게 유교보다 불교가 더 많이 퍼질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알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충, 효, 인, 의, 예, 지, 신 등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는 면이 불교에 비해 많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에서 마음의 위로를 주는 면이 없는 유교보다는, 유교에 비해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는 면이 훨씬 적고 마음의 안식을 주는 기능이 강한(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불교를 봉건시대의 민중들이 훨씬 더 선호하게 된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고려 시대는 유교가 본격적으로 형이상학적 색채를 띄기 시작하는 성리학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유교는 학문으로서 받아들여지던 시대이기도 했다. 때문에 종교로선 불교가 선택되고, 실제 통치 이념은 유교에서 기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리학이 등장하기 전의 고려에선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형태를 띄었지만, 고려에서 성리학이 정착되었던 공민왕 대에 들어서면서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한 견해면에서 둘로 나눠지게 되는데, 이색, 정몽주, 이숭인, 권근, 원천석 같이 불교를 포용했던 측과 정도전, 조준, 하륜, 윤소종 같은 철저한 불교 배척파로 나뉘어져서 서로 맹렬히 대립했고, 위화도 회군 이후 철저한 불교 배척파인 정도전, 조준 등이 정권을 잡으면서 불교가 배척되기 시작했고,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는 완전히 배척되게 된다.

4. 고려조 편찬 사서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사의 사서로 남아 있으며, 13세기 이후에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 지식인의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졌다. 이외에 단군과 관련된 고기(古記), 구삼국사, 고려실록 등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나마 구삼국사이규보동국이상국집에서 동명왕, 유리왕 부분이 통째로 필사되어 전해지기에 사정이 나은 편이다.

5. 고려청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고려청자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은입사 기법, 칠기 제작 등이 번영했으며, 이는 상감법으로 이어져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고려청자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청자의 유래는 중국이었으나 고려는 독창적인 기술과 장식으로 청자 문화를 더욱 진보시켰다. 청자 문화 중에서도 특히나 주목할 만한 것은 상감청자로 이는 순전히 고려의 기술로만 이룩한 것이다.

이러한 고려청자들을 주로 전라남도 강진, 부안, 해남 등에서 생산되었는데, 대표적인 산지가 바로 강진 고려청자 요지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라있다.

6. 회화

파일:고려 아미타여래도.jpg
파일:고려시대 관경서분변상도 그림.png
파일:고려시대 미륵하생경변상도.png
{{{#000000 '《아미타여래도》'
2035 x 1051mm, 1286년, 고려, 자회(自回)
[1], 일본은행 소장}}}
.
{{{#000000 '《관경서분변상도》'
비단에 색, 1505 x 1132mm, 1300년경, 고려, 일본 쓰시마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
.
{{{#000000 '《미륵하생경변상도》 中'
비단에 색, 1718 x 921mm, 1350년대 이전, 고려, 일본 신노인(親王院) 소장}}}
.
회화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으며 수월관음도를 비롯한 불교 회화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후대 왕조인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현존하는 고려 불화 약 160점의 대부분은 국내보다는 일본, 미국, 유럽 등지에 분포해 있다. 고려 귀족들의 개인 불당에 안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불화들은 관음보살,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미륵보살 등의 다양한 도상을 표현했으며, 금니를 포함한 여러 안료를 활용하여 세밀하고 화려하게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또한 관경서분변상도, 미륵하생경변상도, 관경십육관변상도 등의 작품에서는 불교의 신들뿐만 아니라 고려 왕족과 서민들의 모습도 포함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의복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불화 속에 그려진 건축물들도 고려 후기의 건축물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불교 회화 이외의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천산대렵도가 남아있으며, 비교적 최근 고려 시대 봉분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관제와 문인화로의 계승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고려 시대 고분은 고구려 고분의 전통을 이어받아 프레스코 기법으로 사신도와 별자리 그림, 풍속화가 그려졌으나 화풍에 있어서는 고구려 당대의 것보다는 고려 당시에 유행하던 화풍을 따랐으며,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십이지신이 같이 그려진다. 별자리 그림도 거창 둔마리 고려 고분 벽화를 보면 고구려 시절처럼 천문도 전체를 그리기보단 북두칠성과 삼태성 등 중요하게 여긴 별자리 일부만 그렸다. 이미 고구려 중후기 때부터 고분 벽화의 양식이 변화하여 풍속화보다는 도교, 불교 계통 위주의 벽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7. 장례

고려 시대 장례 문화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장이 많이 퍼졌고, 사람이 죽은 후 제사를 지낼 때는 아들 / 딸들이 돌아가며 지냈고, 재산도 균분 상속되는 편이었다. 일일이 제사를 챙기기 힘들 때는 절이나 신당에 노비나 토지 등 재산의 일부를 주고 대리로 맡겼는데, 이는 유교 사상을 근간으로 억불 정책을 시행한 조선 시대에 들어 전면 금지되었다. 그러다 해방 이후 2000년대인 현재에 들어 다시 퍼지고 있다.

8. 음식

불교의 영향으로 제사상에 고기류를 올리는 대신 한과 중 고기와 과일을 대신하는 유밀과를 올리는 게 많이 유행했다. 고려의 유밀과는 원 간섭기 원나라에도 전해졌는데, 맛이 좋아 원나라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유밀과는 크게 유행하던 고려 당시에도 상당히 귀한 음식이라 나라에서 사치 금지령이 내릴 때마다 항상 지적당했고,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불교 억제 정책과 더불어 사치스럽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지만 제삿상의 필수 음식으로 계속 사랑받았다.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젓갈을 좋아한다(참조)" 등의 기록이 나오고, 술 안주로 어포, 육포, 생선과 채소를 내왔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고려 시대 양수척(조선 시대의 백정)들은 고리짝[2] 제작 / 판매 외에 사냥과 도축업 등을 생업으로 삼으며 살았으며, 고려사에도 광종 19년에 도살을 금지하자 왕이 반찬으로 쓸 고기를 시장에서 사서 올렸다는 기록과 이자겸이 세도를 부렸을때 선물용 고기를 너무 많이 받다보니 다 먹지 못해서 썩는 고기가 한가득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처럼 제수용 고기를 시장에서 사서 채우거가 고기를 뇌물용으로 주고받았는데 고기를 안 먹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더욱이 2011년 발굴된 고려 시대 침몰선 마도 3호선에서 다양한 해산물 가공품과 더불어 젓갈, 개고기 육포 등이 발견되어(참조1/참조2) 고려도경의 기록을 증명해 주고 있다. 참고로 마도 3호선의 침몰 연대는 같이 발굴된 죽간에 따르면 무신정권김준이 집권한 시대로, 몽골의 식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이라 일각의 주장처럼 몽골의 식문화 유입으로 육식 시작 / 어식이 늘어났다고 보기도 힘들다. 애초에 몽골은 내륙 국가라 해산물을 잘 안먹거나 혐오한다. 몽골/문화 문서 참조.

그리고 음식을 먹는 방식에서는 적어도 귀족층이상에서는 독상문화였으며 왕족의 경우 여러 독상을 한꺼번에 받았다는 (참조) 기록이 명확하게 나온다.

8.1. 국수

식문화의 경우, 국수를 식용했던 게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이 고려시대다. 그런데 고려 시대 기록들이 "국수란 음식이 새로 들어왔다"가 아니라 "국수를 먹는다 / 팔았다"식이라 국수 자체는 그 이전에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대표적으로는 <고려도경>과 <고려사>에 고려에 국수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당시 고려에서 밀이 귀하다 보니 국수도 귀한 음식으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주로 먹는 음식이었으며, <고려사>에서는 사찰에서 면을 만들어 팔았다고 하나 <고려도경>의 기록이나 훨씬 뒤인 조선 시대의 기록에도 국수를 만들 때 메밀 가루를 주로 썼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귀한 음식이었던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8.2. 만두

또한 이때 만두가 전래되었고 만두를 파는 쌍화점이란 것도 생겼다. 이때 전래된 만두는 속에 고기와 야채 등을 다져넣은 우리가 아는 형태의 교자만두가 아니라 쌍화(雙花) / 상화(霜花)라 부르던 것으로, 밀가루에 삭임[3]이나 막걸리를 넣어 발효시킨 뒤 빚어서 쪄낸 것으로, 오히려 외형으로는 지금의 만터우호빵, 만드는 방법 기준으론 지금의 술떡에 가까운 것이었다. 언제 상화가 들어왔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사>에 쌍화에 대한 기록이 나와 일단 고려 시대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기록 역시 만두가 들어왔다 이런 게 아니라, 충혜왕 때 어떤 사람이 궁중 부엌에 만두 훔쳐먹으려고 들어와 훔쳐먹다 걸려서 처벌받았다는 기록이다.

8.3. 육식

고려의 식문화 중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이전 / 이후 시대에 비해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가 많이 쇠퇴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종종 동물을 방생하거나 도살을 금하고 사냥 / 낚시 도구를 국가 차원에서 폐기하는 일이 종종 있긴 했지만 이때는 어디까지나 왕이 보여주기식 성격이 강했다면 고려 시대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육식 문화가 많이 쇠퇴하였고, 이러다 보니 도축 기술도 쇠퇴하였는지, 도축시에 가축의 네발을 묶어 불 속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살아 있는 가축을 바로 칼로 상하게 하면 악업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살아 있으면 몽둥이로 쳐서 죽였다고 나온다. 도축시 몽둥이로 쳐서 죽이는 것은 아주 원시적인 도축법으로, 다른 걸 떠나 일단 고기의 맛을 보장할 수 없다. 도축 문서 참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료가 바로 <고려도경>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전에 비해 육식 문화가 쇠퇴했다는 것이지 고기를 아주 안 먹은 건 아니다라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애초에 전근대 시기 식품 공학 기술로 완전한 채식은 불가능하다. 한국보다 국가 차원의 동물 살육 금지가 더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되었던 일본조차 어식은 매우 발달했다.

몇몇 교조주의적 채식주의자 단체에서 고려 시대에는 완전한 형태에 가까운 채식주의가 일반화된 청정 시대로 보고 이상향으로 여기는 일이 종종 있지만, 사실 아니다. <고려사>에도 나라에서 도살을 금하면서도 궁중에서 왕의 반찬을 만들 고기를 시장에서 사서 올렸다고 나오는데, 링크에 나오듯 나라에서 도살을 금지한 상황인데도 시장에서 고기를 파는 것을 사다 올리는 게 가능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지는 누구나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고려도경에 이름이 나오는 이자겸은 나중에 와서 인종을 옹립한 뒤로는 한 동안 세도를 부렸는데뇌물용 고기를 하도 많이 받다보니 다 먹지 못해서 날마다 썩을 지경이라는 기록이 <고려사>에서 나온다. 그 양도 어마무시해서 수만근[4]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 묘사 자체는 이자겸과 그 일당에 대한 부패상을 비꼬는 표현이라서 과장이 섞인것으로 보면되지만 그럼에도 도축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나 고기를 귀한 선물로 취급했다는 점을 동시에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심지어 고려에서 "고려 사람들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한다"고 기록한 <고려도경>에도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양과 돼지를 먹지 못하고,(다시 말해 지배층은 먹었다는 소리다.) 백성들은 물고기, 조개, 새우 등 해산물을 많이 먹었다"고 되어 있다. 물고기의 경우 당시 보관기술이나 운송수단을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장기보관을 위해 포로 만들어먹는 방식을 많이 취한 것 같다. 상술한 마도 3호선에서도 육포와 함께 상어고기포 등의 다양한 어포가 발견되었다.

고려도경 제 23권 잡속 2. 미꾸라지(鰌), 전복(鰒), 조개(蚌), 진주 조개(珠母), 왕새우(蝦王), 문합(文蛤, 백합 조개), 붉은게(紫蟹), 굴(房), 거북이 다리(龜脚)[5], 해조(海藻), 다시마(昆布)등 현대 한국인들한테도 익숙한 해산물들을 고려인들이 즐겨 먹었다고 나온다.

다만 도축 기술이 후퇴한 것처럼 불교 영향으로 어구의 발달은 다소 부족했는지 "고기잡이는 썰물이 질 때에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되, 그물은 잘 만들지 못하여 다만 성긴 천으로 고기를 거르므로 힘을 쓰기는 하나 성과를 거두는 것은 적다. 다만 굴과 대합들은 조수가 빠져도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이 줍되 힘을 다하여 이를 주워도 없어지지 않는다."라는 기록도 같이 실려있다. 조개 : 야이... 우리 목숨은?

여하튼 원 간섭기가 되면서부터 육식 문화가 발달한 원의 영향으로 고기 요리가 본격적으로 다시 성행하였고, 이 시기에 아랍 지역의 증류주몽골을 통해 건너와 지금의 증류식 소주가 나타났다.

9. 문학

국문학으로는 고려장가나 시조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다. 청산별곡, 가시리 등의 고려가요는 특히 후렴구가 특징인데,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등이 유명하다.[6]

이 밖에도 "묵책요", "아야가", "보현사찰요" 등의 참요가 만들어졌으며, "사리화", "장암" 등의 민요가 민간에서 널리 불려졌다.

또한, 고려의 문화재 중에 일본에 있는 문화재가 많다.

10. 성문화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 따르면, 당시 고려에서는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으며 남녀혼욕 풍습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사찰들이 남녀가 눈이 맞는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하며 여타 기록들로도 혼전 관계나 (공식적으로는 부정되었지만) 혼외관계가 드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후술할 만전춘 같은 부분에서는 현대 한국보다도 개방적인 부분이 있을 것이다.

불교의 지위가 하락하고, 혼욕문화가 사라지는 일부 변경은 있으나 기본적으로 양란 이전의 조선과 별 차이 없었다. 흔히 조선의 유산으로 알려진 현대 한국의 기묘하게 꽉 막힌 성풍속은 시집살이, 남녀칠세부동석, 동성동본 항목이나 심지어 일본을 싫어한 성리학자 유인석이 여학교를 반대할 정도로 아예 조선의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호주제는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소수 계층의 문제가 더 확산되고 자신의 풍습을 고유 풍습으로 받아들이라고 한 부분도 있었다. 호주제를 폐지할 때도 일부 유림이 나서서 반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고려는 '공식적으론' 일부 일처제 사회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래의 통설은 일부 다처제 사회였다는 설이었으나 고려 말의 특수 상황을 고려 시대 전체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현재는 일부일처제 설이 통설이다. 물론 왕은 해당 사항이 아니라서 고려 태조나 현종은 많은 부인을 두었다. 그리고 고위층은 지키지 않았다. 이미 처가 있는데도 또 첩을 들이는 중혼이 고려 시대 동안에 횡행했다. http://blog.naver.com/lord2345/220374353356 이 첩과 서얼들은 조선처럼 차등은 둘지언정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중세 유럽의 정부와 사생아와 유사한 대우를 받았다.

많은 고려가요들은 훗날 조선의 보수적 성리학자들에게 '사리부재'라는 명목으로 음란, 퇴폐 가요로 낙인찍혀 제목만 전해지거나, 쌍화점과 같은 가요를 개사를 시키고자 하여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없지는 않았다. # 만전춘도 퇴폐적이라는 시각은 있긴 했고, 심지어 조선시대의 영향이 적지 않은 현대의 시각에서 보기에도 바람 핀 남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상상하며 여자가 그 남자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파격적인 내용이라 '가요'가 되지는 못했지만[7] 아예 전하지도 못하게 한 것도 아니다. #

10.1. 고려의 여인들

양측적 친족관계 하에서 부계와 모계 가문의 지위가 동등했다. 남녀의 지위가 동등한 게 아니다.

조선하면 떠올리는 재혼 금지나 성적 금기는 육체 노동의 필요성이 적은 지배층 한정이다. 그나마도 조선 중기까지와 조선 후기가 다르다. 평민 이하는 고려나 조선이나 도긴개긴이었다. 애초에 전근대시대에 요구되는 강도높은 육체적 노동을 여성이 감당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평민들에게 남편이 죽으면 재혼은 필수였고 당시 평균 수명이 짧으니 가정이 해체되었다 다시 새로 만들어지는 사례가 빈번했다.

고려시대의 이혼 및 재가는 철저히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돌아가서 탓이 커서 많은 여성들이 가문을 위해 강제로 이혼당하거나 재가하는 일도 많았었고 고려도 기본적으로는 가부장제의 사회였기 때문에 일부에서 생각하는 대로 여성들의 지위가 남자들보다 동등 이상이란 건 절대 아니다. 처가나 외가를 중시한 건 어디까지나 가부장(장인)의 권위와 가문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계와 모계의 동등함은 편견과 달리 서얼들이 조선보다 고려에서 더 차별받는 원인이기도 했다. 부계를 중시한 조선 중기 이후와 달리 부계와 모계 가문 둘 다 중시하다보니 후자가 확 쳐지는 서얼들은 감히 목소리조차 못낼 정도로 차별을 받았고 부계 중심으로 옮겨간 조선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사회적 차별도 완화되기 시작한다.

여성이 사채를 놓거나 재산을 불리는 행위는 조선 때도 흔히 보이는 모습이었다.[8] 또한 고려 후기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여성들이 사법적 보호 장치에서 소외된 삶을 살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9] 고려 시대에 여권이 높았다는 것에 대한 추가적인 반론은 논문[10]과 도서[11] 등을 참고.

조선은 균분 상속의 역사가 길었다. 조선도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다가 가문의 재산을 장남에게 몰아주고 대신 부양 책임도 떠맡기면서 전담하게 된 것이지 원래부터 여자들이 제사를 안 지내는게 아니었고 사위가 집안에서 제사를 이어가는 것도 조선 중기까진 드문일이 아니었다.

한반도가 전부 개간되고 북쪽으로 확장이 막혀 더 파먹을 게 없어진 조선 후기에 균분 상속이 사실상 가난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면서부터 장자에게 몰빵하게 부양, 봉제 의무도 떠맡기는 방식으로 상속이 변화한다. 말 그대로 현실적인 이유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호주제와 같은 풍습이 들어오면서 가부장제가 심화된 면도 있었다.


[1] 고려 후기의 화공, 생몰년 미상. 화면 좌우 모서리에 적힌 화기(畵記)에 의하면 봉익대부(奉翊大夫) 겸 좌상시(左常侍)였던 고려의 귀족 염승익(廉承益, ?~1302)이 자신이 임종할 때에 아미타불을 만나 즉시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자회에게 하여금 이 불화를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2] 놋쇠로 만드는 유기가 아니다. 버드나무 가지 등을 엮어 만드는 물건으로, 조선 초까지도 백정들의 유랑 문화가 많이 살아있다 보니 가볍고 만들기 쉬운 고리짝을 많이 사용하고 팔기도 했다.[3] 밀기울죽에 가루 누룩을 섞어 하룻밤 발효시킨 다음 거른, 매우 도수가 낮은 발효용 술[4] 1근이 약 600g이라고 한다면 1만 근은 약 6톤이다.[5] 진짜 거북의 다리라고 보기엔 한국에선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 <현산어보를 찾아서>에서는 거북손이라는 설을 제시한 바 있다. 실제로 거북손을 한자로 龜脚이라고도 쓰고, 거북다리라는 방언도 있다.[6]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외계어처럼 이해하기 난해할 수도 있으나, 이는 사실 악기의 소리를 본 뜬 음차라고 한다. 현대적으로 보자면 아카펠라? 현대에서도 여기서 따온 곡 제목이 있다.[7] 어떤 여가수가 이런 내용의 노래를 불러도 현대 한국에서는 논란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이 정도 수위의 노래는 카디 비 정도나 가능하다. 이게 주민들 사이에서 조선 초기까지 불린 것을 채집하여 알려진 것이라,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고려시대보다 현대 한국이 이런 내용이 '가요'가 되기 어려운 점에서 엄격해진 부분도 존재한다.[8] 강혜선, 조선후기 사족 여성의 경제활동과 문학적 형상화 양상,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24, 2012.[9] 김남옥, 고려 후기 여성의 법적 지위-범죄와 형벌을 중심으로-, 한국고전 여성문학연구 19, 2009.[10] 권순형, 고려 시대 여성의 규범과 삶, 유교사상문화연구 14, 2000.[11] 권순형, 고려의 혼인제와 여성의 삶, 서울: 혜안,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