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0 10:53:45

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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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위치4. 패서 호족5. 여담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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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패서(浿西)

옛날 황해도, 평안남도, 경기도 북서부[1] 일대를 아우르던 지명으로, 나말여초[2] 시기의 기록으로 주로 등장한다. 패서의 패(浿)는 패강, 이른바 지금의 대동강 또는 예성강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나말여초와 후삼국시대를 다룰 때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바로 고려의 건국 세력인 패서 호족들[3]이 바로 이곳에서 태동했기 때문이다. 이후 패서 일대는 고려 내내 수도권이자 내지(內地)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2. 역사

패서는 옛 고구려의 남부지역인 동시에 핵심 배후지[4]였으며, 고구려 3경 중 한성[5]이 있었던 비옥한 곡창지대였다. 이곳을 토대로 성장한 고구려 유민[6] 출신의 패서 호족과 주민들의 지지와 도움을 얻고 궁예후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도 옛 고구려의 후기 명칭을 딴 고려로 정한 것이다.[7]

패서 일대는 상대적 자치를 누리면서 통일신라의 영향력 안에서도 그 일대 호족들의 실력은 점차 상승하고 있었다. 이는 선덕왕이 갑자기 문득 한산주 일대에 내지(內地)의 신라인들[8]을 패강진에 대거 이주시키고, 흥덕왕 때 한산주 일대에서 부를 많이 쌓은 요사스런 부류의 행태에 대해 특별히 벌했다는 기록에서 나타난다. 다만 패서 일대는 원성왕계 신라 왕실의 예측과는 달리 오히려 신라 왕실 자체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었고, 거꾸로 직접 지배 역사가 오래되어 이들이 다소 방심했던 옛 백제 지역에서 대대적인 반신라 감정이 일게 된다.[9]

후삼국을 통일한 시점에서는 고려의 핵심 지역이자 정치적 기반으로 거듭나게 되면서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유입된 수만 호의 발해인들이 주로 북방[10]과 패서에 정착[11] 하게 되면서 영남 일대와 더불어 한반도의 양대 인구 밀집지로 다시금 성장하게 되었다.

3. 위치

일단 정설은 후삼국 시대까지의 패서는 임진강 이북~대동강 이남, 대략 지금 북한미수복 경기도황해도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일단 경기도 북부인 개성시, 개풍군 지역도 나말여초에는 패서로 인식했기 때문에 왕륭, 왕건도 패서 호족으로 여겨졌다.[12] 고려 초기에 10도를 만들 때 패서도는 지금의 황해도가 아니라 평안도 지역이었다.

신라 하대에 패서 지역을 지배한 신라의 특수 행정구역 패강진이 있었는데, 평양 지역까지 패서라는 범위에 포함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설이 나뉜다. 본래 신라의 북방 경계를 대동강~원산만으로 보던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평양은 패서 지역이 아니었지만 궁예태봉을 건국하자 ‘평양성주’ 검용이 귀부한 사건, 고려사 지리지에서 평양을 신라령으로 비정한 구절 등을 미루어 볼 때 평양도 패서에 포함된다는 설 역시 설득력을 얻고 있다.

4. 패서 호족

미천왕 대에 정복돼 장수왕 대부터 고구려의 핵심 수도권으로 기능하게 된 패서는 마찬가지로 고려 왕조의 발상지이자 수도권으로서 그 역할을 똑같이 수행하였다. 그 이전에는 이곳을 토대로 힘과 세력을 키운 고구려계 호족과 주민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 패서 호족이라고 부른다. 아래는 패서 호족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이다.[13]

5. 여담

• 패서라는 지명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00년 4월부터 23개월간 KBS 1TV를 통해 방송된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6. 같이보기


[1] 후술된 패서 호족들 중에 왕륭의 송악, 유천궁의 정주 등은 현재 기준으로 경기도 북서부다.[2] 신라말부터 고려초까지의 시기[3] 왕륭, 유천궁, 황보제공, 유긍순, 류차달, 염형명, 윤신달, 유금필, 박지윤, 두은점, 강호경, 최온, 김락 등. 박지윤이나 김락처럼 본향이 신라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고구려계다.[4] 미천왕 대에 고구려가 정복하면서 패권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한 핵심적인 기반이 된 사실상의 수도권이었다. 패서 이외에도 요동, 책성, 국내성 일대 또한 고구려의 대표적인 인구 밀집지였다.[5] 현 황해도 재령군으로 추정. 조선시대의 수도였던 한성/한성과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다른 성이다. 고구려의 한성은 압록강 일대의 국내성과 수도인 평양성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성(大城)이자 인구 밀집지였다.[6] 패서는 요동이나 평양과는 달리 강제이주나 인구 유출이 없었던데다가 그곳에서 살던 기존의 고구려인들 외에도 고구려 멸망 직후 흩어져 있던 타지역 출신의 고구려 유민들까지 대거 자리잡게 된 곳이다. 그런만큼 호로하(瓠蘆河)라 불리우던 임진강 일대와 그 이북은 실질적으로 고구려 유민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7] 다만 궁예 본인은 신라 왕족 방계설이 떠도는 만큼 고구려 유민 의식에 속한 인물은 또 아니었고, 곧 고려란 이름을 마진에 이어 태봉으로 바꿔버리고, 수도도 패서 바깥 철원으로 옮기는 등 고구려색 빼기를 시도한다. 왕건을 필두로 한 쿠데타도 이것에 반발한 게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8] 평주 호족인 박지윤처럼, 패서로 이주해간 신라인들이 주류인 현지의 고구려계 주민들에게 동화되는 양상이었다.[9] 이 때문에 후백제는 신라의 서라벌을 침공하여 수도 경주시를 약탈하고 경애왕을 죽음으로 몰아간 뒤 신라인 상당수를 후백제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으나 패서지역이 중심이던 고려는 오히려 친신라 정책을 펴서 경순왕을 귀순하게 만들었다.[10] 제2수도인 서경과 철령 이북[11] 일례로 발해의 세자인 대광현은 오늘날 배천군 일대였던 백주(白州)를 식읍으로 하사받으면서 일대를 통치하였다.[12] 반면 개성-장단 이동의 임진강 이남 지역은 이미 진흥왕 시기부터 신라의 영토였고 패강진의 설치 역시 개성 지역부터 시작했기에 패서 지역이라 보기 어렵다.[13] 호족 이외에도 패서 계열의 여러 씨족 집단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해주 정씨, 우봉 최씨, 제안 황씨, 곡산 척씨, 당악 김씨, 연주 현씨, 파주 염씨, 연안 차씨, 곡산 연씨 등이 대표적이다.[14] 선대가 신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