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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673 | 한성의 고구려국 | 검모잠 / 고연무 / 안승 | 실패 | |
681 | 안동도호부에서의 보장왕의 모반 | 보장왕 | 무산 | |
684 | 금마저에서의 보덕국의 반란 | 대문 | 실패 | |
696~698 | 요동 일대의 반당전쟁 | 걸걸중상 / 걸사비우 / 대조영 | 발해 | |
897~901 | 송악의 궁예 정권 | 궁예 | 후고구려 | |
918 | 왕건의 역성혁명 | 왕건 | 고려 | |
1217 | 최광수의 난 | 최광수 | 실패 |
보덕국(報德國), 고려(高麗)[1] | ||
위치 | 고구려 고토 → 금마저 일대 | |
수도 | 한성 → 금마저 | |
종족 |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 말갈인 | |
국가원수 | 왕(王) | |
국성 | 고(高) | |
존속 기간 | 669년[2] / 674년[3] - 683년(9년) | |
성립 이전 | 고구려 | |
멸망 이후 |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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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가 백제의 제2수도권이었던 금마저에 세웠던 고구려의 후계국.수도는 금마저(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다. 익산 왕궁리 유적이 보덕국 왕궁 유적이란 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흔들리는 편. 왕궁리 유적 발굴 초창기에는 보덕국 왕궁설이 통설에 가까웠지만, 백제 왕궁의 증거가 추가로 나와 최근 학설로는 왕궁리 유적을 백제 무왕 때의 별궁이라고 보는 편이다. 그 백제 왕궁을 보덕국이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4]
그 시작은 검모잠이 주도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앉히고 일어난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를 상대로 싸우기 위해 서로 손을 잡은 것에서 시작했다. 즉 보덕국의 전신은 신라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인들과 신라가 서로 협력하는 공생관계에 가까웠고, 이들은 옛 고구려 남부 지역, 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근거지가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부흥운동 내부에서 분열이 생기고 나당전쟁 과정에서 타격을 입으면서, 신라는 안승왕을 비롯한 피난하는 고구려인들을 백제 무왕, 의자왕 집안의 근거지이던 남부지방 금마저에 정착하도록 유도했다. 이렇게 신라 내부의 옛 백제 땅에 있는 고구려인의 자치국가라는 기묘한 모습이 된 것이 보덕국이다.
신라 땅 안에 있었지만 그저 이름만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일본 등에 고려의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 받기도 하고 옛 고구려와 동일한 5부와 관등 체계를 갖추었으며, 신라와 외국의 예로 국서를 주고 받는 형식을 취하는 등 의외로 국가의 형태를 제대로 이룬 모양이지만, 신문왕 시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어 멸망했으며,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은 일부는 남원소경, 또 다른 일부는 금성(서라벌), 그 나머지는 익산 이남 전라남북도에 분산 배치되었다.
문무왕 10년(670)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복속시키려는 야욕을 드러내는 당나라에 맞서 전쟁을 준비하는 때였다. 신라는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고자 고구려부흥운동을 지원하고 고구려 유민 세력을 흡수하고자 했다.
이런 와중에 보장왕의 서자, 혹은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 안승이 신라에 투항했다. 안승의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다. 심지어 같은 삼국사기 안에서도 말이 다르다. 보장왕은 연정토의 딸과 결혼했으므로 보장왕의 아들이자 연정토의 손자일 수도 있다.
안승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옛 고구려 땅 한성(漢城)[5]에서 검모잠에게 고구려 왕으로 추대되어 고구려부흥운동을 하다가 실패한 후 신라로 남하했다. 안승은 이미 신라로 남하하기 전부터 고구려 유민들이 왕으로 추대할 만큼 혈통적 정당성이 확실히 있는 거물 왕족이었으므로, 신라는 안승을 받아주어 정통성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인의 임시정부로 시작했던 보덕국을 신라가 흡수한 것도 신라가 고구려를 관념적으로 통합, 즉 삼국통일 인식의 근거였다는 연구도 있다.[출처]
고대세계에서는 변방영토(만주)보다는 왕족과 천명 등 명분론적 정통성의 확보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가 발해에 대해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지만 방계로 비하한 것도 고구려의 직계 정통은 신라가 흡수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덕국인 대부분은 고구려계였지만 원래 고구려의 민족구성이 그렇듯 말갈족도 따라서 일부 귀순했던 듯하다. 그 근거로 일본서기에는 677년 11월 신라 사신 김청평이 숙신 사람 7명을 데리고 일본을 다녀온 기록이 있는데, 시기와 정세상 고구려 치하에 있다가 멸망 후 고구려인들을 따라서 신라로 귀순한 보덕국 소속인 듯하다. 그리고 삼국사기 무관지에 따르면 683년에는 말갈인으로만 구성된 부대인 흑금서당(黑衿誓幢)을 만들기도 하는데 신라 안에 말갈인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부대로 편성할 정도로 상당수가 있고 그 등장 시기도 하필 683년이라면 고구려 영토의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고구려 멸망 때 함께 남하한 말갈인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 역사
2.1. 고구려부흥운동 시기
2.1.1. 검모잠의 궐기, 신라에 형식적 귀순
六月 高句麗水臨城人牟岑大兄 收合殘民 自窮牟城 至浿江南 殺唐官人及僧法安等 向新羅行 至西海史冶島 見高句麗大臣淵淨土之子安勝 迎致漢城中奉以爲君 遣小兄多式等 哀告曰 "興滅國 繼絶世天下之公義也. 惟大國是望, 我國先王以失道見滅今臣等得國貴族安勝 奉以爲君 願作藩屛
(670년) 6월,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 현재 인천의 소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大國)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니,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신문왕조 등에서 발췌
(670년) 6월,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대형 모잠(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史冶島, 현재 인천의 소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大國)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니,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신문왕조 등에서 발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보장왕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다. 그러나 남은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를 부활시키기 위해 뭉쳤고 그 중 검모잠은 초기 고구려부흥운동의 핵심이었다. 검모잠이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만들었지만 보장왕이 끌려가 없으니 정통성이 있는 고구려 왕족이 필요했고, 그의 눈에 들어온 자는 서해의 사야도(史冶島, 현재 인천광역시의 소야도)에 피신해 있던 안승이었다. 검모잠은 안승을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한성(漢城)[7] 안으로 맞아들여 보장왕의 뒤를 잇는 고구려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검모잠의 부흥군은 우군을 만들기 위해 신라에 사신을 보내, "신라가 원병을 보내어 나라를 되찾는 것을 돕는다면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주겠다"며 충성을 맹세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고구려계 입장에서 신라는 그래도 당나라보다는 덜 원수진 사이였고, 신라 역시 슬슬 당나라와의 나당전쟁을 준비하던 상황이어서 당나라를 몰아낸다는 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인들도 그저 신라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협조한 것만은 아니고 이 당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구려 부활이었을 것이므로 윈윈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2.1.2. 신라의 제후분봉
遣沙飡須彌山,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建産兄弟 禍起蕭墻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湮滅 生人波蕩 無所託心 公避危難於山野 投單身於隣國 流離辛苦 迹同晉文 更興亡國 事等衛侯 夫百姓不可以無主皇天必有以眷命 先王正嗣 唯公而已 主於祭祀非公而誰 謹遣使一吉飡金須彌山等 就披策命公爲高句麗王 公宜撫集遺民 紹興舊緖 永爲隣國 事同昆弟, 敬哉敬哉. 兼送粳米二千石, 甲具馬一匹, 綾五匹, 絹細布各十匹, 綿十五稱. 王其領之."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8]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9]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10]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요, 역사가 8백 년이나 되었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사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산과 들에서 위기와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나라에 투신하였으니,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고 하겠다.
무릇 백성에게는 주인이 없으면 안 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전하여 그대를 고구려왕으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비단 다섯 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짠 베 각 10필, 목화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8]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9]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10]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요, 역사가 8백 년이나 되었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사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산과 들에서 위기와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나라에 투신하였으니,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고 하겠다.
무릇 백성에게는 주인이 없으면 안 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전하여 그대를 고구려왕으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비단 다섯 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짠 베 각 10필, 목화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문무왕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인정하고 책봉하는 형식을 취한 뒤 군량미와 옷 등 전쟁물자를 보내주었다. 후에 안승 일행을 오늘날의 전북 익산인 금마저(金馬渚)에 머물게 하였다는 부분이 나오지만 이는 검모잠이 죽고 안승이 신라로 내려온 이후의 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안승의 측근으로 보이는 고연무 등과 협조해서 힘을 합쳐 당나라에 대항해 나당전쟁을 진행하게 된다.
위 책봉 기사는 신라의 외왕내제적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신라는 비록 군주를 왕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상 아래인 안승을 왕이라고 봉했던 것처럼, 왕 위의 왕인 황제처럼 군림한다는 형식을 갖춘 것이다. 그외의 제후왕으로는 갈문왕이나 명주군왕이 있다.
2.1.3. 부흥운동의 실패와 안승의 신라 망명
唐髙宗遣大將軍髙侃爲東州道行軍㧾校勘, 發兵討之, 安舜殺劒牟岑, 奔新羅.
당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삼고 병력을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당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삼고 병력을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그러나 고구려부흥운동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과거 백제 부흥운동 때 부여풍이 복신을 죽인 것과 같은 일이 반복된 것이다. 안승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검모잠을 죽이고, 곧 신라로 직계 무리를 이끌고 달아났다. 문무왕은 그들을 금마저(전북 익산)에 살게 하고 안승을 다시금 고구려인들의 왕으로 봉했다. 이전까지는 고구려 고토라는 실제 영토를 기반으로 한 나라의 형태가 있었지만, 금마저에 정착한 이 시기부터는 어디까지가 '고구려국'의 영역인지 불분명한 상태가 되었다. 사실상 간판만 있고 실체는 애매한 신라의 속국이 된 것이다. 신라의 번국 비슷한 지위로 탐라국, 우산국 등이 있었지만, 이런 섬나라들에 비해 보덕국은 훨씬 괴뢰국가의 성격이 강했다.
원래 고구려의 영역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금마저에 터를 잡게 한 것은 금마저가 백제 무왕이 별궁으로 추정되는 왕궁리 유적, 원찰인 미륵사를 세우고 그곳에 묻히는 등 옛 백제 무왕-의자왕계의 주요한 세력 기반이었으므로 신라에 대한 저항감이 비교적 심한 지역으로 유추할 수 있다. 멸망하기 이전 삼국시대 때에도 신라는 고구려보다는 백제와 훨씬 사이가 나빴다. 금마저에 터를 잡은 것은 신라인이 아닌 제3자인 고구려인의 손으로 억누르려는 이이제이를 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혹은 7세기 고구려가 기자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기자의 후손(으로 당시에 알려져 있었던) 준왕이 위만에게 찬탈당한 뒤 평양을 떠나 마한 땅으로 남하해서 한왕이 되었다는 전승에 근거해서 이에 연결시켜 고구려 피난민들에게 익산 지역을 내준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현대에는 고고학의 발달로 실제 마한의 중심지가 충청남도 천안 청당동이 유력하다고 추정하는 중이지만, 고고학이 없던 조선시대까지는 준왕이 남하해서 자리잡은 곳이 익산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안승이 신라로 망명한 후에도 옛 고구려 땅에서는 부흥운동이 계속되었고 신라도 한동안 그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672년 8월 석문 들판(현 황해도 서흥군)에서 신라군과 당군 사이에서 벌어진 석문 전투의 큰 패배 이후 신라는 고구려부흥군을 더 이상 지원하기 힘들게 되었고 수세로 전환했으며, 이후 고구려부흥군은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에 각개격파되어 673년 호로하 전투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소멸한다. 남은 부흥운동군은 신라로 망명했고 신라는 이들을 금마저에 모았으며, 금마저에서는 고구려인들이 모여 자치를 하게 된다.
2.2. 금마저의 보덕국 시기
2.2.1. 보덕국왕 책봉
이후 안승은 문무왕 14년(674) 보덕국왕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책봉되었다. 그 전까지는 '고구려왕' 내지는 '고려왕'이었고, '보덕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九月 命義安法師爲大書省 封安勝爲報德王
9월,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고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에 책봉하였다.
9월,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고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에 책봉하였다.
다만 일본에 보내는 사신은 계속 고려(고구려)라고 자칭하는 등 보덕국과 고(구)려국을 혼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덕국은 사료마다 그 국명과 국왕의 칭호가 다르게 나오는데 신라의 괴뢰국에 불과했기에 큰 의미는 없다. 또한 보덕국은 신라 본국과 별개로 자국만의 관직과 지위 체계가 있었던 듯 보이는데, 기록된 관직에는 대장군, 소형, 태대형 등 고구려계 관직명이 많이 보인다.
정부 수립 이후, 백제 부흥군 토벌에 동원되었다가 나당전쟁 종결 후 안승은 문무왕의 조카와 결혼했다.
2.2.2. 국혼과 답례
三月 以金銀器及雜綵百段 賜報德王安勝 遂以王妹妻之[一云迊飡金義官之女也] 下敎書曰 人倫之本 夫婦攸先 王化之基 繼嗣爲主 王鵲巢位曠 雞鳴在心 不可久空內輔之儀 永闕起家之業 今良辰吉日 率順舊章 以寡人妹女爲伉儷 王宜共敦心義式奉宗祧 克茂子孫 永豊盤石 豈不盛歟 豈不美歟
3월,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채색 비단 100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려주고 임금의 여동생[11]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무엇보다 우선이고, 왕의 교화의 기초는 자손을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왕의 까치 둥지에 자리가 비어 있어 닭이 울었음을 일러줄 아내를 얻을 마음이 있을 것이다. 내조할 자리를 오래 비워두어 집안을 일으킬 사업을 영원히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좋은 때 길한 날을 맞아 옛 법도를 따라 내 누이의 딸로서 배필을 삼게 하니, 왕은 함께 마음과 뜻을 돈독히 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무성하게 함이 마땅하리라. 길이 반석같이 번창한다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夏五月 高句麗王使大將軍延武等上表曰 臣安勝言 大阿飡金官長至 奉宣敎旨 幷賜敎書 以外生公女 爲下邑內主 仍以四月十五日至此 喜懼交懷 罔知攸寘 竊以帝女降嬀 王姬適齊 本揚聖德 匪關凡才 臣本庸流 行能無筭 幸逢昌運沐浴聖化 每荷殊澤 欲報無堦 重蒙天寵 降此姻親 遂卽穠華表慶 肅雝成德 吉月令辰 言歸弊館億載難遇 一朝獲申 事非望始 喜出意表 豈惟一二父兄 實受其賜 其自先祖已下 寔寵喜之 臣未蒙敎旨 不敢直朝 無任悅豫之至 謹遣臣大將軍太大兄延武 奉表以聞
이에 안승은 상표하여 답례한다.
여름 5월, 고구려왕이 대장군 연무(延武) 등을 보내 표(表)를 올려 말하였다.
“신(臣) 안승이 아뢰옵니다. 대아찬 김관장(金官長)이 와서 교지를 받들어 선포하고 아울러 교서를 내려, 임금의 조카 따님을 저의 안주인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건대 요임금이 자기의 딸을 규(嬀, 순임금)에게 시집보내고 주의 왕이 공주를 제(齊)나라에 시집보낸 것은 본래 성스러운 덕이 드러난 일로써, 사위될 자가 평범한 사람이라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원래 용렬한 부류로 행실과 재능에 이렇다 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성인의 교화에 젖게 되었고 매번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나,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해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거듭 대왕의 인척을 보내주시는 총애를 입었습니다. 마침내 만발한 꽃이 경사스러움을 표하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이 갖추어졌습니다.
이제 좋은 달 좋은 때에 누추한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억년(億年)을 살더라도 만나기 힘든 행운을 하루아침에 얻은 셈입니다. 본래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며, 생각하지도 못하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부형(父兄)만이 실로 이러한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선조 이하가 모두 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저는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감히 직접 찾아가 뵙지는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을 어찌할 수 없어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글을 올려 아뢰옵니다.”
3월,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채색 비단 100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려주고 임금의 여동생[11]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무엇보다 우선이고, 왕의 교화의 기초는 자손을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왕의 까치 둥지에 자리가 비어 있어 닭이 울었음을 일러줄 아내를 얻을 마음이 있을 것이다. 내조할 자리를 오래 비워두어 집안을 일으킬 사업을 영원히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좋은 때 길한 날을 맞아 옛 법도를 따라 내 누이의 딸로서 배필을 삼게 하니, 왕은 함께 마음과 뜻을 돈독히 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무성하게 함이 마땅하리라. 길이 반석같이 번창한다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夏五月 高句麗王使大將軍延武等上表曰 臣安勝言 大阿飡金官長至 奉宣敎旨 幷賜敎書 以外生公女 爲下邑內主 仍以四月十五日至此 喜懼交懷 罔知攸寘 竊以帝女降嬀 王姬適齊 本揚聖德 匪關凡才 臣本庸流 行能無筭 幸逢昌運沐浴聖化 每荷殊澤 欲報無堦 重蒙天寵 降此姻親 遂卽穠華表慶 肅雝成德 吉月令辰 言歸弊館億載難遇 一朝獲申 事非望始 喜出意表 豈惟一二父兄 實受其賜 其自先祖已下 寔寵喜之 臣未蒙敎旨 不敢直朝 無任悅豫之至 謹遣臣大將軍太大兄延武 奉表以聞
이에 안승은 상표하여 답례한다.
여름 5월, 고구려왕이 대장군 연무(延武) 등을 보내 표(表)를 올려 말하였다.
“신(臣) 안승이 아뢰옵니다. 대아찬 김관장(金官長)이 와서 교지를 받들어 선포하고 아울러 교서를 내려, 임금의 조카 따님을 저의 안주인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건대 요임금이 자기의 딸을 규(嬀, 순임금)에게 시집보내고 주의 왕이 공주를 제(齊)나라에 시집보낸 것은 본래 성스러운 덕이 드러난 일로써, 사위될 자가 평범한 사람이라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원래 용렬한 부류로 행실과 재능에 이렇다 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 성인의 교화에 젖게 되었고 매번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나, 그 은혜에 보답하려 해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거듭 대왕의 인척을 보내주시는 총애를 입었습니다. 마침내 만발한 꽃이 경사스러움을 표하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이 갖추어졌습니다.
이제 좋은 달 좋은 때에 누추한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억년(億年)을 살더라도 만나기 힘든 행운을 하루아침에 얻은 셈입니다. 본래 바라지도 못했던 일이며, 생각하지도 못하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부형(父兄)만이 실로 이러한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선조 이하가 모두 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저는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감히 직접 찾아가 뵙지는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을 어찌할 수 없어 삼가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글을 올려 아뢰옵니다.”
2.2.3. 일본과의 외교
보덕국은 '고려' 국명을 걸고, 신라 사신과 나란히 사신을 보내 일본과 국교를 맺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十年春正月) 丁未 高麗遣上部大相可婁等進調
(텐지 10년[671] 봄 정월) 丁未 고려가 상부(上部) 대상가루(大相可婁) 등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텐지 10년[671] 봄 정월) 丁未 고려가 상부(上部) 대상가루(大相可婁) 등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秋八月 甲申朔) 癸卯 高麗遣上部位頭大兄邯子·前部大兄碩干等朝貢 仍新羅遣韓奈末金利益 送高麗使人于筑紫
(텐무 3년[674] 가을 8월 甲申 초하루) 癸卯 고려가 상부 위두대형(位頭大兄) 감자(邯子)·전부(前部) 대형(大兄) 석간(碩干)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신라는 한나마(韓奈末, 대나마) 김이익(金利益)을 보내 고려의 사신을 치쿠시(筑紫)까지 호송하였다.
(텐무 3년[674] 가을 8월 甲申 초하루) 癸卯 고려가 상부 위두대형(位頭大兄) 감자(邯子)·전부(前部) 대형(大兄) 석간(碩干)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신라는 한나마(韓奈末, 대나마) 김이익(金利益)을 보내 고려의 사신을 치쿠시(筑紫)까지 호송하였다.
六月壬戌朔 高麗王遣下部助有卦婁毛切·大古昻加 貢方物 則新羅遣大那末金釋起 送高麗使人於筑紫
(텐무 12년[683] 6월 壬戌 초하루) 고려 왕이 하부(下部)의 조유(助有) 괘루모절(卦婁毛切)과 대고앙가(大古昻加)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 신라가 대나마(大那末) 김석기(金釋起)를 보내 고려의 사신을 치쿠시까지 호송하였다.
(텐무 12년[683] 6월 壬戌 초하루) 고려 왕이 하부(下部)의 조유(助有) 괘루모절(卦婁毛切)과 대고앙가(大古昻加)를 보내 방물을 바쳤다. 신라가 대나마(大那末) 김석기(金釋起)를 보내 고려의 사신을 치쿠시까지 호송하였다.
참고로 일본서기는 우직하게 보일만큼 일관적으로(...) 일본 중심적 서술을 하기 때문에 자기들한테 조공을 바쳤다=사신을 주고받았다고 이해하면 된다.[12]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보덕국)는 마치 멀쩡한 주권국가와 같이 일본과 외교하고 있다. 위두대형 같은 관직명은 고구려가 멀쩡하던 시절 사용하던 시스템을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이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라인의 통제를 받고 있는 속국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측이 보덕국이 괴뢰국인지 뭔지 인식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고 평범하게 사신을 주고받았다. 보덕국만이 아니라 일본도 보덕국에 '견고려사'라는 명칭으로 사신을 몇 번 보냈는데, 이 역시 보덕국이 일본과 교류할 때 '고려'란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견고려사는 685년 5월 28일에 파견되었는데, 이미 보덕국은 684년에 신문왕이 토벌해 멸망한 뒤였다(...) 마지막 견고려사는 그 소식이 들어오기 전에 헛걸음한 것으로 보인다.
2.2.4. 보덕왕을 금성으로 오게 하다.
이후 681년 신문왕이 즉위하여 김군관, 김흠돌 등 반역자를 처벌하자 소형(小兄) 수덕개(首德皆)를 사신으로 보내 축하한다. 신문왕 3년(683) 왕은 안승에게 김씨 성을 사성하고 소판 관등을 주고 금성으로 데려온다. 소판은 신라 17관등 중 3관등 잡찬과 같은데, 이는 신라의 골품제에서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이므로 신라 왕가 이외에 금관국계 김해 김씨와 더불어 진골 대우를 받은 두 번째 외부 출신이 된 것이다. 그리고 보덕국은 왕이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2.2.5. 이후와 몰락
왕이 타지로 나가 없는 이상한 상황에 고구려 유민들은 혼란에 빠져, 1년여가 지난 684년에 안승의 조카이자 보덕국의 장군인 대문(大文)이 반란을 꾀했는데 사전에 발각돼 처형되었다. 그러자 남은 무리들이 크게 반란을 일으킨다. 신라 조정은 귀당제감 핍실을 파견하지만 반란의 세가 강해 신라군이 패배해 핍실은 전사했고, 이후 김영윤[13] 열전에 따르면 보덕국의 반란을 진압할 때 투입한 부대는 지휘관은 신라인 김영윤이나 휘하는 옛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인 황금서당(黃衿誓幢)이었다. 즉 고구려인의 반란을 고구려인으로 진압한 셈. 이로써 그나마 이름만 있던 보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보덕국의 중심지였던 금마저는 금마군으로 바뀌어 신라가 직접 지배를 관철하게 된다.十一月 安勝族子將軍大文 在金馬渚謀叛 事發伏誅 餘人見大文誅死 殺害官吏 據邑叛 王命將士討之 逆鬪幢主逼實死之 陷其城 徙其人於國南州 郡 以其地爲金馬郡【大文或云悉伏】
11월, 안승의 조카뻘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남은 무리들은 대문이 목이 베여 죽은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토벌하였는데, 그들과 맞서 싸우던 당주 핍실(逼實)이 그곳에서 죽었다. 성을 함락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대문(大文)을 혹은 실복(悉伏)이라고 한다.】
11월, 안승의 조카뻘인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남은 무리들은 대문이 목이 베여 죽은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병사들에게 명하여 토벌하였는데, 그들과 맞서 싸우던 당주 핍실(逼實)이 그곳에서 죽었다. 성을 함락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대문(大文)을 혹은 실복(悉伏)이라고 한다.】
이때 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거셌는지 보덕국의 난 진압에 신라 지휘관 2명(핍실, 김영윤)이 전사할 정도였다.
비록 보덕국 땅(익산)에서 일어난 이 반란 사건에서 동쪽 신라의 수도 금성에서 머물던 안승 본인이 개입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이후 안승의 후손으로 보이는 진골 출신 인물이 아무도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반란 사건 때문에 안승도 진골로 편입되지 못하고 6두품 이하로 강등되지 않았는가 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단명 등 이유로 안승에게 후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적어도 안승이 진골로 편입하지 못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승이 반란에 협조했다는 기록 또한 없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이후 시대에도 성을 생략하고 이름만 나오는 인물이 워낙 많아, 안승계가 이 중에 있는지 없는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멸망 직후인 686년에 보덕국 백성들을 모아 새로운 부대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을 창설하는데, 고구려인[14]으로 이루어진 서당이 1개, 백제인으로 이루어진 서당이 2개였음을 감안하면, 보덕국이 후대인들에게 별 인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규모가 상당히 컸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계는 3서당으로 가장 많다.
2.2.6. 후일담
그냥 한마디로 요약하면 고구려계의 정체성을 상실했다가 되겠다. 패서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간접 지배 하에, 옛 백제 유민들은 신라의 직접 지배 아래 있었으나 그래도 정체성을 완전히 잃진 않았던 반면, 유독 이 보덕국 유민들만은 정체성을 완전히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이유는 철저한 분산 배치와 해체. 물론 신라는 백제 유민에 대해서도 비슷한 정책을 실시하긴 했다. 기회만 되면 옛 백제 지역에 신라 원지역 주민들을 식민하고 옛 백제 유민은 신라 본토로 데려갔는데, 이 과정에서 주로 혜택을 본 지역이 전남 중동 내륙 지역과 전남 동부였고, 상대적으로 홀대받은 지역이 옛 침미다례인 전남 서남부 해안 일대였다. 이로 인한 갈등이 옛 마한-백제 시절부터 내려왔던 갈등과 합쳐져 증폭된 게 나주 공방전.
하지만 백제는 그 인구가 백만에서 이백만 정도로 추산되는 어엿한 고대국가였기에 그 전체한테 이런 정책을 실시하는 건 무리였다. 반면 보덕국 유민들은 꽤 많이 오긴 했어도 백제 유민에 비하면 조족지혈 수준이라 각기 그 이주당한 지역의 정체성에 동화되고 말았다. 결국 이들은 후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후백제에 순순히 포섭되어 후백제의 배후지에서 일익을 담당하며 친척인 고려에 대항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보덕국 유민들과는 달리 순순히 신라의 완전한 우위와 패권을 인정하였으나, 그 대가 및 지리적 이유로 자치를 통해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여 훗날 패서호족으로 진화하기에 이르렀던 황해도-경기 북부 일대의 옛 고구려 유민들과는 정반대의 결말이었다.
개중 특히 중요한 인구는 남원소경(현 전라북도 남원시) 일대에 사민되었던 걸로 보이는데, 요충지인 소경이니만큼 친신라 고위층을 중심으로 사민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남원소경은 보덕국이 소멸된 직후인 685년에 설치된 걸로 보아 아예 대놓고 보덕국 유민들을 이치시키기 위해 설치되었던 걸로 보이는데, 금마저와 마찬가지로 남원소경의 전신인 고룡군도 백제 유민들의 저항이 거셌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남원소경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했고, 거문고 명인 등의 예술인들 또한 많이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15] 신라계가 아니라 출셋길이 막히고 지방호족으로 전락한 고구려계인 보덕국 출신들이 보덕국을 통해 남원소경에도 전수된 고구려의 유산을 거름삼아 문화예술 및 종교 분야로 많이 진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3. 기타
고려 말의 사서 제왕운기에서는 발해의 건국 시점을 주(周) 측천 원년 갑신(684년)으로 "신라가 고려(=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17년 뒤(羅之滅麗後十七年也)"라고 했다. 그런데 하필 측천무후 갑신년인 684년은 보덕국이 신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멸망한 해이기도 하다. 발해와 보덕국 사이의 뭔가 연관점을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가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지만 현재 사학계에서는 제왕운기의 해당 기록을 오류로 보고 속일본기의 기록을 따라 발해가 698년에 세워졌다고 보고 있다.3. 왕사
대수 | 왕호 | 성 | 휘 | 재위기간 | 비고 |
01 | 보덕왕(報德王) | 고 | 안승 | 669년 ~ 671년 | 부흥운동 때 추대 보덕국 왕 재위 |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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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의 발해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보내는 보덕국 사신은 자기 나라의 국호를 고려로 칭했다. 훗날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현대에는 이렇게 부르지는 않지만, 당시 한국, 일본의 1차 사료에서는 고려라고 불렀다. 혹은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이란 표현도 있지만 이 역시 궁예가 건국한 나라와의 구분을 위해 현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2] 고구려 땅에서 안승이 추대, 신라에 형식적으로 항복[3] 보덕국의 칭호를 받고 실질적인 신라의 속국화[4] 왕궁리 유적은 고려시대까지 존속했다.[5] 황해도 재령에 위치해 있던 고구려 3경 중 하나.[출처] 노태돈,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1982; 김영하, 일통삼한의 실상과 의식, 한국고대사연구 59, 2010[7] 서울을 뜻하는 한성이 아니라, 오늘날의 황해도 부근의 지명이다. 황해도 재령군 일대.[8] 주몽을 의미[9] 고구려, 신라, 백제의 별칭.[10] 한군현의 현도군에서 유래한 별칭으로 역시 고구려, 신라, 백제를 의미.[11] 혹은 잡찬 김의관(金義官)의 딸이라고도 한다.[12] 물론 모든 지역국가들이 자신들만의 우물 속에서 천하의 중심으로 군림하던 고대시대의 특성상 동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들의 기본 행태였으나, 대부분의 문명국들은 고대시대의 사료가 소실된 반면, 섬나라라 병화로부터 그나마 상대적으로 많은 사료가 남아있기 때문에 고대의 자의식 과잉식흑역사 사료가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13] 김흠순의 손자로 아버지는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김반굴이다.[14] 물론 보덕국인들도 옛 고구려인이지만, 당시에는 보덕국인과 고구려인을 편의상 구분해서 다른 부대에 소속시킨 듯하다. 무슨 기준으로 분류했는지는 불명. 단 보덕국이 신라에 편입되기 전에 황금서당을 창설했으므로 대만의 외성인과 본성인 구분처럼 고구려→신라에 편입된 시기가 기준일 수도 있다.[15] 거문고 명인으로 유명한 옥보고(玉寶高) 또한 남원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원래 고구려 악기였던 거문고의 전통이 이로 인해 남원 일대에서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