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NondescriptCapriciousThreateningTray, 합의사항1=한사군과 미소군정을 틀에 존치하는 대신 첨자로 추가설명, 토론주소2=AnUtopianAndLudicrousThrill, 합의사항2=대한민국의 역대 공화국들은 글자 크기를 줄여서 존치, 토론주소3=SelfishFaultyLongingTurkey, 합의사항3=부제에 강조 표현을 삽입하기, 토론주소4=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4='구한말(개화기)' 서술을 '개화기'로 서술, 토론주소5=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5='남북국시대'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6=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6='삼국시대' 시대구분 표 내 칸은 세로 3칸으로 분리하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첫 번째 칸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 -> 두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하며 -> 세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서술, 토론주소7=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7= '주호'는 삭제하되 -> '탐라' / '우산'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8=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8=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술은 존치하되 -> 남북한 / 임시정부 / 미군정 / 소련군정을 제외한 현대의 단체들의 이름 및 수식어는 모두 삭제한다., 토론주소9=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9=세로 열에 height를 모두 동일하게 지정하여 시각적으로 각 칸이 구별될 수 있도록 한다., 토론주소10=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10=본 틀 내 가야에 대한 첨자로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을 서술한다., 토론주소11=RealChildlikeExclusiveJewel, 합의사항11=근대시점을 개화기\, 일제강점기로 구분하고 해당 정치체로서 개화기에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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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 | 부조 沃沮 | 夫租 매구루(買溝婁) Okchŏ (Okjeo) | |||
고구려의 속국[1] | |||
■ 옥저와 북옥저의 세력권.[2] | |||
기원전 3세기[3] ~ 285년?[4][5]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성읍국가 | 고구려 | ||
<colbgcolor=#000> 국호 | 옥저 (동옥저,추정,/남옥저 (동옥저,추정,)[6]) 매구루[7] (북옥저,추정,[8]) | ||
위치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함경도 [[북한| ]][[틀:국기| ]][[틀:국기| ]] 량강도 [[중국| ]][[틀:국기| ]][[틀:국기| ]] 지린성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프리모리예 지방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하바롭스크 지방 | ||
군주 | 군장 (읍군, 삼로) | ||
민족 | 예맥[9] | ||
언어 | 고대 한국어[10] | ||
현재 영토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 ||
사건 | 기원전 3세기 성립 기원전 2세기 남옥저 고조선 복속 기원전 1세기 한사군 편입 기원전 28년 북옥저 고구려 예속 56년 동옥저 고구려 복속[11] 244년 비류수 전투 285년 북옥저 고구려 복속[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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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옥저(沃沮)는 늦어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14] 기원후 285년까지 강원특별자치도, 함경도에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남쪽,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퍼져 있었던 국가 집단이다. 남옥저, 동옥저, 북옥저가 존재했다. 남옥저의 경우,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전에서 북옥저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할 때 한 번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다. 따라서 남옥저를 동옥저와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도 하고, 별개의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기원전 3세기경 북옥저와 남옥저가 성립된 것으로 추정한다.이명인 '매구루'의 '구루(溝婁)'는 대표적인 고대 한국어 어휘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보이는 홀(忽)과 동원이며 현대 한국어의 '골'로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는 단어이다. 그 뜻은 본래 '사람이 사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고구려어와 백제어에서 '성읍'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고, 시간이 지나 '성' 등의 한자어에 밀려 '골짜기'에서 볼 수 있듯이 길쭉하게 들어간 지형을 뜻하는 말로 축소되었다.
《환단고기》는 서옥저도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역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바가 없다.
2. 역사
옥저는 세형 동검 문화를 기반으로 한 단결-크로노프카 문화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초기 중국의 사서에 '옥저'라는 말은 종족명 또는 영향권의 읍락 집단 명칭으로 나오며, 이들은 단결-크로노프카 문화 3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세기 전후부터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문안식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함흥 지역은 기원전 1세기 전후부터 본래 '임둔'이라 불리는 세력권의 영향력 하에 있었는데, 북옥저인들의 함흥 진출과 고조선에서의 대외 교섭으로 인해 남옥저 혹은 동옥저가 형성되었고, 북옥저는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전한이 쇠퇴하면서 남옥저와 북옥저는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기원전 1세기는 사서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고구려가 성립된 시기이기도 하다.한나라 초기에 연나라의 망인인 위만이 조선에서 왕을 할 때, 옥저가 모두 (조선에) 복속하였다. 한무제 원봉 2년(BC 109)에 조선을 정벌하였다. 위만의 자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삼았다(BC 108).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는데, 후에 이맥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을 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옮기니(BC 75), 지금 소위 '현토고부'라는 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는 지역에 동부도위를 나누어두고, 불내성을 치소로 한 영동 7현을 따로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에 옥저(의 읍락)가 모두 현이 되었다.[원주]
《삼국지》 동이전 옥저조[16]
전한에 의해 위만조선이 합병된 뒤 세워진 한사군 중 임둔군이 기원전 82년에 현도군에 합병되었고,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고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이동하자 이 중 영동 7현을 낙랑군 동부도위가 담당했다.[17]《삼국지》 동이전 옥저조[16]
후한[後漢] 광무建武 6년(A.D.30;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 13)에 변경의 군郡을 줄였는데, [옥저沃沮의 동부東部]도위都尉도 이 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거수渠帥)로 모두 현후縣侯를 삼으니, 불내不耐·화려華麗·옥저沃沮등의 모든 현縣은 전부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들 이적夷狄들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후국侯國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공조功曹·주부主簿 등의 제조諸曹를 두었는데, 예인濊人이 모두 [그 직職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우두머리(渠帥)들은 스스로를 삼로三老라 일컬으니, 그것은 옛 [漢나라] 현국縣國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동옥저[18]
후한 때 광무제가 낙랑군을 재정복하자, 기원후 30년에 동부도위를 폐지했다.[19] 이때 영동 7현 또한 함께 폐지한 것으로 보이며, 그 대신 남옥저와 동예의 토착 유력자들을 귀의후(歸義侯)로 임명했다. 군현제를 통한 직접 지배를 포기하고 토착 유력자들에게 조세와 군역의 의무만 부과한 것이다. [20] 《삼국지》위서 동이전 동옥저[18]
이 당시에 독립한 영동7국 중에서 불내不耐를 제외한 화려華麗, 옥저沃沮(부조夫租)등의 국가들은 모종의 갈등으로 인해서 서로 전쟁을 벌였던 기록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전해진다.
53년(기원전 5),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나셨다는 말을 듣고, 저를 시켜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 曰 寡君聞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21]
“우리 임금이 남한에 성인이 나셨다는 말을 듣고, 저를 시켜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 曰 寡君聞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21]
17년(서기 40) 가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병사를 동원하여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유리 이사금- [22]
동해안을 따라서 신라와 접촉하기도 했다. 박혁거세가 신라를 다스릴 무렵에 동옥저에서 사신을 보내온 기록과 후한이 동부도위를 폐지하여 독립한 뒤로 화려국과 불내국이 신라를 침공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신라는 고고학적으로 2세기 후반에 건국되었으며 유리 이사금이 혁거세 거서간의 손자임을 감안하면 2세기 후반~3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유리 이사금- [22]
고구려의 태조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동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에 복속된다.
북옥저는 매구루(買溝婁, 《삼국지》 동이전), 매구(買溝, 《삼국지》 관구검전), 미구루(味仇婁, 〈광개토대왕릉비〉) 등으로도 불렸으며, 그 중심지는 훈춘(琿春) 일대로 추정된다. '구루'는 '골', '홀'처럼 성(城)을 뜻하며, 곧 매구루가 고구려의 책성(柵城)이었다. 태조왕은 98년 봄 책성을 순수하고 그해 겨울에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두만강 유역과 함흥 평야가 이들 옥저의 영역이었기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했고, 영역이 동해 바다 연안에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여 주변국에 조공했다. 가장 가까운 강국인 고구려에 주로 조공했으나, 남쪽의 신라에도 말을 바치며 친선을 시도한 기록이 있다. 여담으로《후한서》와 《삼국지》동이전에서 모두 옥저가 보병전에 능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2.1. 이견
옥저에 대하여 학계에는 두 가지의 의견이 있는데, 하나는 3옥저설(남옥저, 북옥저, 동옥저)이고, 나머지 하나는 2옥저설(남옥저, 북옥저)이다. 4세기 후 옥저는 동예처럼 고구려의 간접 지배를 받아 형식적으로나마 존속했으나, 대외적으론 고구려의 내지로 인식되면서 사라진 세력이 되었다. 어차피 중세 시대까지도 조선 왕조 이전에는 지방 수령이 그 고을 토호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미 고구려에 편입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중국 정사인 《후한서》와 《삼국지》에는 동옥저(東沃沮)로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에서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연해주 남부 내륙과 동해안 지역(함경도 포함)에 등장한 얀콥스키 문화와, 얀콥스키 문화 이후 연해주 남부, 수분하 유역, 동북한 지역에 위치한 단결 문화, 크로노프카 문화를 옥저로 비정한다.최씨낙랑국 미스테리와 관련하여, 최씨낙랑국의 정체를 조선과 낙랑군에 복속했던 옥저의 일파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23]
2.2. 위치
동옥저는 함경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으며 아래로는 동예에 닿았다고 한다. 남옥저는 함경남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북옥저는 북간도 및 연해주 최남단 일대에 있었다. 처음에는 남옥저와 붙어있었으나 후에 떨어졌고,[24] 동옥저와도 붙은 적이 있다고 되어있다. 동옥저는 남옥저와 동일한 집단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2.3. 풍속
한국사 교과의 고대사 파트에서 신랑과 신부가 어릴 때 약혼을 한 뒤, 신부가 신랑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신랑이 신부 집에 예물을 건네고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민며느리 제도와 시신을 가매장했다가 살과 피부가 썩으면 뼈를 추스려 10여 장(丈) 정도 되는 길이의 목곽[25]에 안치하는 골장제 풍속과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골장제는 옥저의 영역이었던 함경도 해안 지역에서 분묘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로 추정된다고 한다. 옥저가 언제 고구려에 흡수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혼인, 장례, 특산품, 정치 제도가 옥저에 대한 문제로 출제된다.2.4. 멸망
나라가 작아 대국의 사이에서 시달리다가 끝내 구려에 신속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옥저조
《삼국지》 동이전 옥저조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15, 태조대왕 4년(AD 56년)
우선 동옥저는 서기 56년에 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에 의하여 정복되었다.[26] 논란이 많은 남옥저는 기원전 2세기에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가 이후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에 편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도군은 고구려의 공격에 근거지를 빼앗기고 서쪽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아마 남옥저 일대 역시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확보했을 것으로 추론 가능하다. 일부 자료에서는 남옥저가 서기 260년에 백제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삼국사기》 권15, 태조대왕 4년(AD 56년)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게 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13 동명성왕 10년
마지막으로 북옥저는 기원전 28년 고구려 동명성왕에 의해 멸망했다고 되어 있으나 이후에도 몇몇 기록이 있다. 서기 244년 조위의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제11대 동천왕이 패배한 이후 북옥저로 도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북옥저도 관구검의 침입을 받았고[27] 285년 고구려 제13대 서천왕에게 귀속했다.《삼국사기》 권13 동명성왕 10년
이후 흩어진 옥저인들이 백두산으로 도망가 주변 말갈인들과 뒤섞여 새롭게 탄생한 종족을 백산말갈로 보는 학설이 있다. 흉노의 침공을 받고 선비산으로 도망가 선비족이 된 동호족의 예와 비슷한 경우이다. 하지만 백산말갈은 퉁구스계가 상대적 다수인 가운데 퉁구스계에게 동화되지 않은 부여 유민이 소수로 존재해 섬처럼 있어 서로 덜 섞인 경우인 속말말갈과는 달리, 유입된 말갈계가 소수였고 결국은 전부 예맥계 문화에 동화되어버린 현상이 관찰된다. 즉 백산말갈은 주민 구성이 대부분은 예맥계였기에 소수 유입된 말갈계가 문화 양상을 바꾸기는커녕 그 반대가 되어버린 것이고, 속말말갈보다 훨씬 빨리 고구려에게 복속되는 바람에 말갈계가 기존 옥저 예맥인들을 압도하는 지배자 행세도 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28] 요약하면 백산말갈은 퉁구스계가 약간은 섞였으나 전체적으로는 퉁구스계 말갈은 아닌, 고구려화된 옥저인들인 예맥계 말갈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3. 기타
- 일설에는 여진족의 일부인 '와지'가 이들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현대 한국 한자음에만 의존한 설이라 그리 지지받지는 못한다. 특히 옥저(沃沮)라는 국명 자체가 부조(夫租)에서 와전된 것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 얀콥스키 문화의 기원전 8세기 ~ 5세기 유적인 페스차느이 유적, 말라야포두세치카 유적에서 주조 철부를 비롯한 철기가 발굴되었고, 얀콥스키 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기원전 5세기 ~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바라바시-3 유적에서 제철 시설이 발굴되어 고조선의 영역으로 비정되는 동만주 ~ 서북한 지역에 비하여 더 이른 시기에 철기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29]
- 얀콥스키 문화 이후 크로노프카 문화의 유적에서는 한민족에서 가장 오래된 온돌이 발견된다. 한반도로 온돌을 보급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온돌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반드시 온돌의 흔적이 발견되는 반면, 옥저인들의 이웃인 읍루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온돌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옥저인과 읍루인은 사서에서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계통의 민족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 옥저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처럼 전통 행사가 없었는데, 고구려에 일찍이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예와 고구려와는 혈통이 같은 민족이나 다름없다 보니, 행사도 이들과 같거나 비슷했을 걸로 추정된다.
- 옥저인들은 그들의 영토에서 나는 모피들을[30] 중국인들한테 파는 대가로 중국인들이 주는 화폐를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 옥저의 영토였던 함경도 일대에서 발굴되는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전국 시대 위나라의 동전이나 전한의 오수전 같은 중국 화폐들이 나온다. 옥저인들이 중국 화폐들을 들여와서 상거래에 사용했으리라고 추정된다.[31] 그래서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화폐들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출토되기도 한다. 또한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전국시대 인상여가 만든 창 같은 청동기 무기들도 출토되는데, 옥저인들이 중국인들과 모피를 주고받는 교역의 대가로 청동기 무기들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옥저/창작물
- 마종기 시인의 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 주제로 등장한다.
- 천손의 시대 주조연으로 등장한다.
옥저는 염전에서 고무래질하는[32] 염부 컨셉을 하고 있다. [33]
5. 관련 문서
[1] "그 땅이 소박하며 큰 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하국으로서 복속되었다.(其土迫小, 介於大國之間, 遂臣屬句驪.)" — 《후한서》(5세기), 제85권 중.[2] 저 지도의 세력권 표시는 엄밀히 따지자면 잘못된 것인데, 《삼국지》에는 남옥저와 북옥저가 800여리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3] 이 지역의 고고학 문화 분석에 따라 유정동 유형인 기원전 18세기로 보는 경우[34][35][36][37][38][39]가 있고, 얀콥스키 문화의 시작 시기인 기원전 12세기로 보는 견해[40], 단결-크라우노프카 문화의 시작 시기인 기원전 11세기[41][42][43][44]로 보는 견해도 있다.[4]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46쪽, 표21.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절대연대(김재윤 2016 재인용),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올레니A, 6호주, 830 B.C. ~ 389 A.D., B.C.50 ~ A.D.530[5] 유감스럽게도 김재윤 교수의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의 지적대로 옥저를 간접적으로 지배했으리라고 여겨진다.[6] 《삼국지》 동이전, 《후한서》.[7] 《삼국지》 〈관구검전〉에서는 매구(買溝),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치구루(置溝婁)라고 기록되었는데 이 둘을 절충한 표기이다. 치(置)와 매(買)의 자형이 비슷하여 둘 중 한 쪽이 오기일 가능성이 높으며, 삼국시대 지명에 치(置)는 잘 보이지 않지만 물을 뜻하는 지명어 매(買: *mer)가 자주 사용되었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미구루(味仇婁)라고 언급되었으므로 원래 표기를 매구루(買溝婁)라 추정하는 것이다. '구루'는 오늘날 골의 원형이고, 《삼국지》 〈동이전〉에서 직접 언급한 바와 같이 성(城)을 뜻하는 말이었다. 《삼국사기》 속 고구려 지명에서도 홀(忽)이 한자 성(城)과 대응되는 지명어로 등장해 교차 검증된다.[8] 《후한서》.[9] 삼한, 말갈족[10] 부여어족, 고구려어,추정,[11] 신라와 함께 조공을 하기도 했다.[12]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46쪽, 표21.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절대연대(김재윤 2016 재인용),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올레니A, 6호주, 830 B.C. ~ 389 A.D., B.C.50 ~ A.D.530[13] 완전한 복속이 아닌 고구려의 간접적인 지배로 추정된다.[14] 기원전 3세기가 기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에 의하면 옥저인들의 유적지와 유물들은 이미 기원전 11세기부터 그 흔적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옥저의 역사는 기원전 3세기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원주] “漢初 燕亡人衞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16] 장병진, 〈고구려의 영동지역 진출과 관할 방식〉, 《동북아역사논총》 vol.58에서 재인용.[17] 군(郡)에 설치된 도위(都尉)는 현(縣) 등에 배치된 위(尉)를 통솔하는 직책으로, 치안을 담당하는 상비병력을 주관하며, 원칙적으로 1군에는 한 명의 도위만 임명되었다. 하지만 군의 영역이 넓거나 치안상황이 악화될 경우에는 여러 도위를 임명하여 관할구역을 나눴는데, 그 관할 구역을 부(部)라고 한다. '○부도위'는 이럴 때 별도의 부를 맡은 관직이다. 한국과 일본의 사학계에서는 이들이 이민족이 다수인 변군(邊郡)에만 설치된 것으로 이해하고, 심지어는 이민족의 자치구역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부도위는 변군에만 설치된 것도 아니고, 전한 당시에 부도위에겐 치민(治民) 권한이 없었다.(김병준, 2015, 「낙랑군 동부도위 지역 邊縣과 군현지배」, 『한국고대사연구』 78.)[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jo_004r_0010_0040_0030[19] 광무제는 지방에 너무 많은 관리들이 배치되어 예산을 낭비한다고 보고, 여러 현(縣)을 통폐합하고 군(郡)에 배치된 도위를 폐지하여 해당 업무를 태수가 맡도록 했다. 낙랑군 동부도위 또한 그 통폐합 대상이 된 것이다. 이후 안제 때 치민 권한이 주어지는 '부도위'가 생겨났다. 이처럼 후한 중엽에 부도위에게 치민 권한이 주어진 것에 근거하여,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에서 '변군의 특수성'이란 거창한 표현을 붙여가며 부도위의 관할구역은 소수민족의 자치구역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20] 3세기 중엽 무렵에는 옛 영동 7현 지역에서 불내국(不耐國)만 현의 면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고 전한다.[21] 네이버 지식백과 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赫居世居西干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662&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22] 네이버 지식백과 유리 이사금 儒理尼師今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42664&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23] 당대 고구려와 낙랑군의 위치상 최리가 있을 만한 가장 적절한 장소가 과거에는 옥저로서 독립적인 국가였고, 이후 고조선과 낙랑군 치하에서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 반독립적 형태의 국가로서 낙랑군의 위세만을 빌어 쓴 소국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이부분은 고고학적/문헌적 근거가없어 설득력이 부족하고, 중국의 노골적인 역사왜곡으로 인해 잘못하면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24] 리원군 등 추정.[25] 목곽의 한 쪽 머리를 열어놓아 문을 만들었으며, 온 집식구를 곽 하나에 다 묻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살아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로써 모양을 새겼으며, 질솥(질흙으로 구워 만든 솥)에 쌀을 담아 곽의 문 곁에다 엮어 매달았다고 한다.[26] 동남북 3옥저 중 유일하게 멸망 연대의 논란이 없다.[27] 이때 조위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사로잡힌 옥저인들의 수가 3,000명에 달했으며, 옥저의 모든 마을들이 조위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28] 아무리 소수일지언정 지배자 계층이면 극소수가 아닐 경우 이런 양상이 드러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은 바이킹-슬라브 및 바이킹-브리튼 원주민간 상호관계 연구에서 드러나 있다.[29] 〈동아시아 고대 철기 문화 연구〉, 2012. 05. 04, 국립 문화재 연구소 고고연구실.[30] 아마 담비나 호랑이, 표범 같은 동물들의 가죽이었을 것이다.[31] 왜 옥저인들이 스스로 화폐를 만들어서 사용하지 않았느냐 하면, 화폐 즉 돈은 단순히 만들어낸다고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돈의 가치를 인정해야 비로소 상거래에 사용이 가능한 신용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공신력이 미비한 옥저 자체의 화폐보다는 이미 동아시아에서 오늘날 미국 같은 초강대국인 중국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상거래에 유리하다. 비슷한 이유로 일본 전국 시대 오와리 지방의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 또한 중국 명나라의 동전인 영락전을 그대로 들여와 사용했고, 심지어 자기 군대의 군기에 영락전 3개를 그려 넣을 만큼 영락전을 중요시했다. 조선도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가 폭등하자 청나라 화폐들 들여와 썼었다.[32] 다들 넓게 퍼진 물걸레 모양의 도구로 염전을 오가는 장면을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다만 이 연장의 정확한 이름은 고무래. 수정 전 적힌 써레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33] 다만 이는 고증오류. 이 시절에는 염전에서 고무레질하는 천일염식 소금 제조가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다.
[34]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24쪽, 225쪽, 표 20. 얀콥스키 문화와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유적(김재윤 2008 재편집), 슬라반카1, 포이마강 입구, 바닷가(아무르만), 얀콥스키, 패총, 1130 ~ 90cal B.C. 1970년, 1975년, 안드레바 외 1976[35]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46쪽, 표21.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절대연대(김재윤 2016 재인용),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올레니A, 6호주, 830 B.C. ~ 389 A.D., B.C.50 ~ A.D.530[36]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62쪽, 그림 128.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청동유물[37]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63쪽, 그림 129. 이즈웨스토프카 유적 출토 세형동검과 동경(클류예프 2008 재인용)[38]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46쪽, 표21.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절대연대(김재윤 2016 재인용), 유정동 유형, 유정동FI, B.C.1405, B.C.1560 ~ B.C.1250[39]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46쪽, 표21.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절대연대(김재윤 2016 재인용), 유정동 유형, 금곡석관묘, B.C.1545, B.C.1745 ~ B.C.1345[40]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24쪽, 225쪽, 표 20. 얀콥스키 문화와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유적(김재윤 2008 재편집), 슬라반카1, 포이마강 입구, 바닷가(아무르만), 얀콥스키, 패총, 1130 ~ 90cal B.C. 1970년, 1975년, 안드레바 외 1976[41] 동북아역사재단, 강인욱, 김재운, N.A.클류에프, A.L.수보티나 지음 "고고학으로 본 옥저문화" 101쪽, 표 3. 단결-크로우노프카문화 유적, 세미퍄트나야, 노보찰린스크의 구릉부, 주거지 1기, 방추차, 장방형 구슬, 석제 모루돌, 철기편, 1957년, 주거지 2기, 외반구연호가 주류, 봉상파수, 주상파수부발, 1983년~1984년, 1020 ~ 430 cal B.C.[42]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46쪽, 표21.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절대연대(김재윤 2016 재인용),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올레니A, 6호주, 830 B.C. ~ 389 A.D., B.C.50 ~ A.D.530[43]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62쪽, 그림 128.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청동유물[44] 진인진, 김재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263쪽, 그림 129. 이즈웨스토프카 유적 출토 세형동검과 동경(클류예프 2008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