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17:54:58

부하(삼국지)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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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嘏
(209년 ~ 2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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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관이며 자는 난석(蘭石)으로 부개자(傅介子)[1]의 후손. 백부는 부손으로 양주 북지군 이양현 사람.

삼국지 매체에서 흔히 사마씨 가문의 참모로 가충이 그 역할을 많이 맡지만, 가충은 실상 거친 일을 맡아 하는 행동대장에 가까웠고 사마씨의 군사참모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부하와 우송이다.

2. 생애

약관의 나이일 때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진군의 추천으로 사공연이 된다.

부자(傅子)에서 이르길 이때 하안(何晏), 등양(鄧颺), 하후현(夏侯玄)이 교제하고자 하였으나 부하가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부하의 친구 순찬(荀粲)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부하에게 묻길
하후태초(夏侯泰初; 하후현)는 지금 시대의 뛰어난 호걸로서, 허심탄회하게 교제를 원하고 있는데, 둘 사이의 교제가 이루어 진다면 더 좋을 것이 없겠지만 만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곧 원한이 생길 것이오. 현명한 두 사람이 친해지지 않는다면 국가에도 이롭지 않지만 친해진다면 저 인상여(藺相如)가 염파(廉頗)에게 머릴 숙인 것처럼 미담이 될 것이오.

부하가 답하길
태초(泰初)의 뜻은 그가 헤아리는 것이 크지만 능력은 헛된 소리에 합치되어서 실재적인 재주가 없소. 하평숙(何平叔; 하안)은 원대한 것을 말하고 있지만 정실을 가까이하며, 변론을 좋아하지만 진실성이 없어서 이른바 '이로운 말을 잘하지만 나라를 뒤엎을 사람'이오. 등현무(鄧玄茂; 등양)는 하는 것은 있지만 끝맺음이 없으며, 밖으로는 명리를 욕하면서 안으로는 단속하지 못하여 자기와 같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말을 많이 하면 틈이 많이 생기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투기하면 친한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오. 내 입장에서 이 세 사람을 보니, 모두가 장차 자기 집안을 패망시킬 사람들이오. 이들을 멀리 하여도 오히려 화가 미칠까 두려운데, 하물며 이들을 가까이 하겠소?

산기상시 유소라는 사람이 근무평가제도를 만들자, 이 일을 삼공(三府)의 관소에게 토론하게 되었다. 부하는 유소의 주장을 비난하며 논술하였다.
황가의 제도는 방대하고 깊으며,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오묘하고 심원하다고 들었는데, 만일 재능 있는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실행될 수 없을 것이고, 신비함을 체득하여 그것을 밝히는 것은 그 인물에게 달려 있습니다. 왕의 제도가 훼손된 이후로 성인의 도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정미한 말은 이미 손실되었습니다. 여섯 경전은 더럽혀지고 하자가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인의 도는 방대하고 깊지만,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분명하게 깨우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소의 관리에 대한 근무평가 논의는 비록 이전 시대의 임용과 파면에 관한 문장에서 근거를 구하려고 했지만, 그 제도는 정말로 결여되고 산실되었습니다. 예(禮) 중 현존하는 것은 오직 주대(周)의 전례(典禮)가 있는 것뿐입니다. 밖으로는 후(侯)와 백(伯)을 세워 구복(九服)에 대하여 보호하고, 안으로는 여러 관직을 세워 여섯 개의 직책을 담당하도록 했으며, 토지에는 천자에게 바치는 일정한 세금이 있고, 관직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모든 관리는 모두 임무를 맡고 있고, 사농공상의 백성들은 맡은 일이 다릅니다. 때문에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것이 이치가 있고, 관리를 선발하고 파면하는 제도는 쉽게 실행되었습니다. 위대한 위(魏)는 백왕(百王)의 뒤를 이었고, 진(秦)과 한(漢)의 공적을 계승했지만, 제도로는 정돈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건안(建安) 이래로부터 청룡(青龍) 연간에 이르기까지 신은 같은 무력을 갖고 동란을 다스리고 제위의 기초를 공고히 했는데, 흉악하고 반역하는 자를 한 번에 쓸어내고, 남아 있는 적을 소멸시키며, 전쟁 깃발을 거두었다가 폈다가 하였으므로 매일 정무를 처리할 틈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라와 군대를 다스릴 때, 권력과 법률을 함께 사용하고, 관리는 군사와 국정 두 방면을 통하여 임명되며, 때에 맞게 적절히 처리하여 정치의 변화에 대응합니다.

과거의 제도를 오늘 시행해도 사태는 복잡하고 내용도 다르므로 적용이 곤란합니다. 그러한 원인은 적합한 법령을 만들면 오래 시행할 수 있지만, 간혹 현실의 수요에 맞지 않을 수 있고 제정한 법령이 당시의 수요에는 부합되지만, 후세에 전해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관직을 세워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은 국가를 세우기 위한 근본이며, 법령에 따라 실제를 고찰하고 이미 제정된 법규를 감찰하여 면려하는 것은 끝을 다스리기 위한 것입니다.

현재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고, 법령의 세칙 또한 확정되지 않았으며, 국가의 정도(政道) 존중되지 않으면서 근무평가를 하는 제도가 선행되는 것은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의 구분을 정하는 것과 유형과 무형의 도리를 구분할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 이전에 선왕이 재능 있는 사람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주 안에서 품행이 단정한 것을 기초로 하여, 학교에서 도의를 가르치고 덕행이 갖추어져 있으면 현자(賢者)라고 불렀고, 도덕을 닦은 자는 능자(能者)라고 불렀습니다. 향로(鄕老)는 왕에게 현자와 능자를 기록하여 바치고, 왕은 그것을 경의를 갖고 수리하여 그 현자를 기용할 경우는 지방으로 나가 장관(長)이 되게 하고, 그 능자를 선택할 경우에는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여 해정을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선왕이 인재를 거두는 방법입니다.

지금 국가의 백성들은 경성으로 나아가는데, 여섯 향(鄉)에서 추천한 적이 없고, 그 인재를 선발하는 직무는 이부(吏部)에 전임되었습니다. 품행을 살펴 선발한다면 실제 재능은 반드시 적합하지 않을 것이고, 다소의 공로를 갖고 평가한다면 덕행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으면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낮은 제도를 갖고 평가를 해도 인재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정의 제도를 통합적으로 서술하고, 국가의 전범에 전체적으로 조력하는 것은 내용이 심오하고 뜻이 넓은 것이므로 모두 얻기는 어렵습니다.

240년에 상서랑, 황문시랑이 된다. 골수 친사마씨 인사로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조상과 하안을 마뜩찮게 보고 조상의 동생 조희에게 하안을 쓰면 결국 망하게 될 것 이라고 조언했다.
하평숙(何平叔)은 겉모양은 조용하지만 속마음은 간사하고 이익을 좋아하여 근본적인 일에 힘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먼저 당신의 형제를 미혹시키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진 사람은 조정에서 멀어질 것이고, 조정의 정치는 파괴될 것입니다.

이 일이 하안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와 사이가 나빠졌고, 얼마 후 사소한 잘못으로 파면되고 만다. 후에 형양태수로 임명되었으나 사임했고 태부 사마의가 청하여 종사중랑이 되었다.

249년에 조상이 척살된 후 하남윤, 상서로 승진했으며, 부하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진(秦)이 처음으로 제후를 폐지하고 군수를 설치하였고, 관위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배했으며, 고대 제도와 다르다. 한과 위(漢魏)는 진의 관제를 따랐으며 줄곧 지금까지 왔다. 그러나 유생(儒生)과 학사(學士)는 모두 삼대(三代)의 예제로써 현재 제도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그 예제가 넓고 심원하여 그 시대 정치와 합쳐지지 않았으며, 일과 제도가 위배되었고 명칭과 실질이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시대를 지났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국면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대적으로 관제를 개정하고, 고대에 의거하여 근본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지금은 황실이 매우 어려운 시기이므로 변혁할 수 없다.

252년에 손권이 죽자 사마사는 이를 틈타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는데 부하가 말렸으나 사마사는 듣지 않았고, 결국 위나라의 군대는 패퇴하게 된다. 당시 논의하는 자들은 스스로 오(吳)를 토벌하려는 의견을 저술했는데, 세 명의 정토장군(征獻)장군이 바친 계책은 각기 달랐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부하의 의견을 물었고, 이에 대답했다.
옛날 부차(夫差)는 제(齊)나라를 누르고 진(晉)나라를 이겨서 위세를 중원에 떨쳤지만 고소대(姑蘇臺)에서 최후를 만났고, 제(齊)의 민왕(閔王)은 영토를 병합하고 변방을 개척하여 국토가 천 리나 확대되었지만 몸은 국가의 전복을 밟았습니다. 시작이 좋다고 끝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에 증명되었습니다.

손권(孫權)은 친히 관우(關羽)를 격파하고 형주(荊州)를 병합한 후에 야심에 차고 욕망이 가득해져 흉악함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선문후(宣文侯, 사마의)는 원대한 계책을 제시했습니다. 현재 손권은 죽었고, 어린 아들은 제갈각(諸葛恪)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손권의 가혹함을 바로잡고 잔혹한 정치를 없애서, 백성들은 혹독한 학대를 받지 않고 은혜로 막 안정되며, 조정의 안과 밖에서 함께 국사를 걱정하며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사람으로 여긴다면, 비록 끝까지 안정을 지킬 수는 없을지라도 손권은 장강(長江) 밖(형주)에서 멸망의 시기를 연장하여 생명을 길게 할 수 있었겠지요.

의론하는 사람들은 간혹 배를 띄워 장강을 건너 형주를 소탕하려고 하고, 간혹 사방의 길로부터 동시에 진격하여 그 성이나 보루를 공격하기를 원하며, 간혹 변방지역에서 대규모의 둔전을 행하여 기회를 타서 행동을 일으키기를 원합니다. 이런 것들은 확실히 모두 적을 공격하여 취하는 일상적인 계책입니다. 정병이 출발하였을 때부터 물러날 때까지는 3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적을 침략한 지 60년이 되었지만, 군주와 신하를 거짓으로 칭하고, 길흉은 함께 재난을 맞이하며, 또 그 총대장(손권)을 잃어서 상하가 국가의 위기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설령 중요한 나루터에서 배를 나란히 하고 성을 공고히 하고 험한 곳을 점거할지라도, 장강을 가로지르는 계책은 아마 승리를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단지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커다란 밭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병사들이 백성들을 향해 나와서 침입하여 약탈하지 않는다면, 앉아서 쌓아놓은 곡물을 먹고 운송하는 병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되며, 적군을 습격하여 원정하는 노고와 비용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군대에서 당면한 급한 일입니다.

옛날 번쾌(樊噲)는 10만 병사로 흉노(匈奴) 땅에서 돌아다니기를 원했는데, 계포(季布)에게 당면하여 그러한 단점을 지적당했습니다. 지금 장강을 넘어 적의 영토를 밟으려는 책략 또한 번쾌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법령을 밝히고 병사를 훈련시키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것 같은 상황 하에서 계책을 펴고 뛰어난 계책을 펼쳐서 적의 패잔병을 제어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은 승리를 얻는 필연적인 방법입니다.

제갈각의 동흥제 재축조 소식을 들었을 때, 사마사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사마의의 죽음과 황제+반 사마씨 세력과의 미묘한 균형으로 인해 정국이 교착화 되는 상황에서,적국과의 전쟁이야 말로 국면의 전환점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마씨가 지금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전부 아버지 사마의가 촉과 오 두 나라를 상대로 싸우며 적립해 온 군공 덕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정작 그 위대한 사령관의 아들인 사마사 본인의 군공은, 같은 나라의 중신을 상대로 벌인 쿠데타 성사 뿐이라는 것이 치명적 약점이었다. 군공에 대한 절박함은 누구 못지 않으면서도 정작 군사적 능력과 경험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대책을 세우기 보다는 일단 해당 방면 사령관 - 호준, 제갈탄, 왕창, 관구검 등과 논의부터 시작하는데,세 가지 방안이 그에게 접수되었다.

말 그대로,제갈각의 도발을 직접적으로 요격하는 대신,변경 지대의 주둔 병력을 늘리고 이들을 전진시켜 대규모로 둔전을 일으키자는 의견. 첫 발안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사마사의 수석 참모인 부하가 강력하게 지지/보충하고,또한 사마표의 전략에 위서 이상으로 자세한 기록이 남아 그 풍부한 논리를 살펴볼 수 있는 의견이기도 하다.

얼핏 보기에는 가장 소극적인 의견이고,부하의 지지 또한 문관 특유의 척수반사적인 '전쟁 반대'의 연장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실상은 정반대로 부하는 '호준과 왕창으로 하여금'(각각 양주/형주라는 대 오 전선 동/서 방면의 최고 사령관이다) '3개 지역에서 일시에 진격해 땅을 점령' 해야 한다며 사실상 3로 진공 급의 군사 동원을 촉구했다. 다만 다른 의견과는 달리 도하/교전을 피하고 단순히 변경 지역의 땅을 확보한 뒤 그곳을 지키며 둔전하자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니,3로 침공이라기 보다는 3로 전진 배치(+둔전)이라는,일종의 '압박' 전략인데...

관점에 따라 쓸데없이 거창하며 번거롭기만 할 뿐, 소극적인 용두사미 전략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전략이야 말로 부하라는 인물이 얼마나 뛰어난 식견을 가진 참모 였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부차제민왕의 사례를 들며 한때의 위세가 반드시 좋은 결말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서두를 뗀 부하는,본론으로 들어가면서 손권의 죽음 이후 어린 후계자와 권신 제갈각으로 정권이 교체된 오나라의 사정을 거론하는데,여기서 그는 有同舟之懼 - 즉,'같은 배를 탄 이들이 공유하는 두려움'이야 말로 오나라가 그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결속력의 근원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미 그는 어렴풋이나마 동흥제 도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손권의 계승 문제가 불러온 유혈에 대해서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오랜 투쟁 끝에 결국 제위에 오른 인물은 원래 대로라면 승계권 바깥이어야 할 막내 아들 손량이었고,그 후원자는 계승 직전까지 정적들의 암살 위협에 시달린 제갈각. 결국 손오 조정 역시 조위 못지 않은 살얼음 정국을 유지하는 형편이었고,외부의 적을 통해 그 상황을 타개하고자 한 것이 동흥제 건축의 목적이었음은 이미 앞서 다룬 바 있다.

여기서 위나라가 도발에 넘어가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다면 손오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제갈각은 조씨의 침략자들이야 말로 손오 최대의 적임을 부르짖으며 그에 대항한다는 기치 아래 정치적 통합을 이룰 것이고, 자신은 조국을 수호하는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입지를 굳힐 것이다. 그리고 위기감에 일치 단결한 손오가 방어전에서 어느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이미 적벽대전 이래 수차례 입증된 바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여기서 제갈각의 의도대로 움직여 벌집을 쑤실 필요는 없다 - 이것이 부하가 즉각적인 교전을 꺼린 첫번째 이유였으리라. 허나 단순히 그것 뿐이라면,그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된다. 동흥제 축조가 손가 내부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든 간에,위나라에 실질적인 위협은 없다. 그나마 소호 범람이 문제가 되겠지만,그것도 이듬해 여름(우기) 이후 부터의 문제니,그에 맞춰 약간의 대비만 해두면 될 터이다.

허나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부하 또한 다른 장수들과 마찬가지였다. 앞서 말했듯 부하는 즉각적인 교전에 반대했을 뿐, 손오와의 전쟁 자체에 반대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주장한 전략이 3년 정도만 무리없이 진행된다면, 좌우로 적을 뒤흔들어 얼음을 깨듯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며,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전략이 손오 정벌을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다만 그 방법론 면에서 다른 장수들과 의견의 불일치가 있었을 뿐이며, 그 불일치는 일개 무장들의 시야를 아득히 뛰어넘는, 부하의 냉철한 자기(이 경우에는,위나라 전체) 평가와 전략적 안목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부하는 직접적인 교전을 주장하는 장수들을 비판하기 위해 두 가지 고사를 드는데,하나는 번쾌가 10만 군사를 동원해 흉노를 정벌할 것을 주장했을 때 계포가 준엄하게 그를 꾸짖은 사건이고,또 하나는 (왕전이 주장한 병력보다 적은) 20만 대군으로 초나라를 정벌할 수 있다 큰 소리치다 크게 패한 이신의 실패담이었다. 둘 모두 장재(將才)가 모자른 자들이 분수를 모르고 성급하게 나서다가 망신을 당한 고사들.

과거 조상 일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은 바 있는 부하는 조위의 현역 장수들 - 최소한 동부 전선의 장수들에 대해서도 별로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었고,번쾌와 이신의 인용을 통해 그러한 불신임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시기, 동부 전선에서는 만총, 손례, 왕릉 같은 혁혁한 경력의 인물들이 세상을 떠나고,일개 방면 사령관으로서는 검증이 덜 된 호준, 제갈탄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나마 가장 믿을만한 인물이 관구검) 고작 이 정도 장수들로 본격적인 손오 침공은 무리다 - 이것이 부하의 판단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인재 면에서의 단점을 상쇄시킬 위나라의 강점은 어디에 있나?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막강한 '물량'이었다. 픽션적 신산묘책에 익숙한 사람들은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물리치는 것을 전략/전술의 지향점으로 여기고 단순히 물량으로 밀어 붙이는 것을 우행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설령 한 두 번의 전투를 기책으로 이길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국가 대 국가 단위의 전쟁을 판가름 짓는 것은 결국 '총생산량'의 싸움이다. 이 점에서 말할 것도 없이 위나라는 오나라에 대해 큰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완전히 신임할 수 없는 장수 개개인의 장략에 의존하기 보다는,자신의 강점이자 적의 약점인 인력과 물자의 격차를 더욱 더 크게 벌려 놓음으로써 적을 압도한다 - 이것이 바로 부하가 주장한,지극히 타당한 전략론이던 것이다. '대국에 소국을 칠 군사가 있다면, 소국에는 대국을 막을 계책이 있기 마련' 이라는 조자의 발언은 그 순서를 뒤집어도 성립하는 셈.

여기에 더해,이 전략은 그야말로 제갈각에게는 치명적인 반격이 되는데,이유인 즉슨 몇차례 언급했던 것 처럼 동흥제 축조의 본 목적은 위나라의 출병을 유도하기 위한 '도발'에 있으나,부하의 압박책은 그러한 도발에 '역도발'로 답함으로써 선제 출병의 폭탄을 제갈각에게 떠넘기는 형세가 되기 때문.

과거 위나라는 좁아 터진 옹주 국경에서 한 줌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벌인 제갈량의 둔전 전략에 적지않은 부담감과 압박감을 느낀 경험이 있었다. 헌데 만약 정반대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대국이, 소국과의 국경 지대 전면에 대병력을 주둔시키고 둔전을 실시한다면, 그것이 적에게 주는 심리적 타격은 어느 정도일까?

더군다나 이 관점에서 접근하면,동흥제 축조는 오히려 장기적으로 오나라의 목을 죄는 악수로 뒤집힌다. 앞서 다뤘듯 동흥제 축조 시 둑 서쪽의 소호는 불어나지만,반대로 둑 동쪽의 유수는 말라 버리게 된다. 즉 동관 국경 일대의 손오 측 농업 잠재력과 보급 여건이 모두 악화 된다는 얘기다. 그에 반해 합비 일대는 등애의 대운하로 농업 용수가 풍부해져 농업 잠재력이 껑충 뛰어 오른 상태. 여기서 조조군이 대규모로 둔전을 시행 한다면,몇년 내에 이 전선의 양 군 비축 물자 차이는 큰 폭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다.

당연히 제갈각의 전략은 수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최악의 경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장악력과 오나라의 국력을 담보로 선제 침공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할지도 모르고,위나라가 그에 적절히 대처한다면 오의 멸망은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부하가 궁극적으로 노린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전략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부하의 건의는 정치적인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했듯,위나라의 통수권자인 사마사 자신도 정치적 입지가 불안했으며,따라서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군공에 대한 절박감이 제갈각 못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 그런 그에게 있어 3년이라는 '장기 투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 제갈각도 거기까지 계산해 뒀기에 이렇듯 맹랑한 도발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여담이지만,부하가 내놓은 계책에 대해서는 위서 이상으로 (배송지가 인용한) 사마표의 '전략(戰略)'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전략 인용은 유표전이나 왕기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이들 모두 뛰어난 군사적 발상 혹은 통찰력에 대한 사례들. '승인되지 않은 안건'에 불과한 부하의 전략이 그들과 나란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후대에 이르러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는 뜻이니,부하에게는 그나마 한 조각 위안이 되는 얘기일 지도 모르겠다.

후에 오나라 대장 제갈각(諸葛恪)은 동관(東關)을 막 공격한 후, 승기를 타고 성가를 날리며 청주와 서주(青徐)로 향하려 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준비를 하려고 했다. 부하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수와 바다(淮海)는 적군이 쉽게 병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또 옛날 손권(孫權)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침몰하여 익사하였고, 거의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제갈각이 어떻게 근본이 되는 힘까지 기울여 운명을 용솟음치는 바다에 맡기고 승리를 얻기를 구했겠습니까? 제갈각은 평소 북과 수군의 별 볼일 없는 작은 장수만을 보내 바다에서 역류하여 회수(淮)로 들어가게 하여 청주와 서주(青徐)에 대해 시위운동을 하게하고, 제갈각 자신은 병사들을 모아 회남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후에 제갈각은 과연 신성(新城)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254년에는 관내후가 되고 얼마 있어 조모가 즉위하자 무향정후로 승진한다.

255년에 관구검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모두 사마부만을 보내도 충분하다고 할 때 왕숙과 부하만이 사마사가 직접 가서 반란을 진압해야 된다고 했으며, 이에 사마사는 그에 계책을 좇아 그를 상서복야로 임명해 같이 반란을 진압한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부하는 사마사에게 함께 출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했지만 사마사가 따르려 하지 않았다. 부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초(淮楚) 지역의 병사들은 날래고 관구검 등은 전력을 기울여 멀리 싸우러 왔으니 그 예봉을 당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 장수들이 전투를 하다보면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는데 대세를 놓고 한 번 실수하게 되면 즉시 공의 대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 당시 사마사는 눈에 난 혹을 막 째었는데 상처가 몹시 심했다. 부하의 말을 듣더니 결연히 일어나 말했다.
내가 수레를 불러 급히 동쪽으로 가겠다.

부하로써 상서복야(尚書僕射)를 대리하도록 하여 함께 동쪽으로 갔다. 관구검과 문흠을 격파시킨 것은 부하의 책모가 있었다. 사마사가 죽자 낙양으로 돌아가 사마소를 보좌했다. 종회한테 오만함을 경계하라고 핀잔을 줬다
그대의 뜻은 원대하지만, 공업을 세우는 것은 어렵습니다.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부하는 공적으로 승진하여 양향후(陽鄉侯)에 봉해졌고, 식읍이 6백호 증가하여 이전 것과 합쳐 1천2백 호가 되었다. 이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47세였다. 태상(太常)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후(元侯)라고 했다.

부자에 따르면 이풍(李豐)은 부하와 같은 마을 출신이었는데, 어려서 뛰어나다고 명성이 대단했고, 어린 나이에 관직에 올라, 명성이 대단했지만, 부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부하는 이렇게 말했다.
이풍은 거짓으로 수식을 하고 의심을 많이 품고 있으며, 자기의 작은 지혜를 자랑으로 여기며 권력과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있으니, 만약 기밀에 관한 일을 맡게 된다면 그가 죽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다. 이풍은 나중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었고, 하후현(夏侯玄)과 함께 반란을 꾸몄다가 부하가 말한 대로 죽었다. 부하는 일찍부터 기주자사 (兾州刺史) 배휘(裴徽)와 산기상시(散騎常侍) 순감(荀甝)과 사이가 좋았지만, 이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죽었다. 또한 진북장군(鎮北將軍) 하증(何曾), 사공(司空) 진태(陳泰), 상서복야(尚書僕射) 순의(荀顗), 후장군(後將軍) 종육(鍾毓)등과 친하였는데, 다들 명신(名臣)이 되었다.

부자에 따르면 정치에 숙달되고 올바름을 좋아했으며, 이치에 밝아 그 요체를 체득했다. 재, 성을 논한 것을 보면 그 근원에 대한 탐구가 정미해 그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하며, 종회가 부하와 친구로 사귀었다고 한다. 다른 명사들은 죄다 깐 주제에 출사할 적부터 저 녀석은 (안 좋은쪽으로) 큰 일을 낼 것'이라며 경계 대상이 된 종회와 친했다는 부분은 특이하다.

부하는 항상 재성(才性)의 동이(同異)에 대해 논하였고, 종회(鍾會)는 그의 관점을 종합하여 사본론(四本論)을 지었다.

그의 아들 부지(傅祗)가 뒤를 이었으며, 그의 손자 부창(傅暢)은 서진에서 비서감, 하음현령을 지내다가 영가의 난 이후 전조에 투항하여 석륵을 섬겼고 후조의 건국공신 되었다.

3. 미디어 믹스

3.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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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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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3, 14[2]

삼국지 9부터 등장한다. 내정형 문관으로 나오는데 정치력이 높다. 후기 인물답게 나오는 시나리오가 적고 그나마 수명도 길지 않다는 게 아쉬울 점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6/무력 36/지력 82/정치력 88. 정란, 투석, 조영, 혼란을 가지고 있다. 장안에 속한 임진의 재야로 등장해, 같은 임진의 재야 고급 문관인 장기와 함께 플레이어에게 임진을 탐색해야 할 당위를 제공한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44/무력 36/지력 85/정치력 92/매력 69에 명사 특기가 있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농업, 상업, 기술, 항변, 명사. 총 5개다. PK전용 고전분투 시나리오까지 가면 부하보다 정치력이 높은 인물은 하후현(94) 밖에 없다.

코에이가 삼국지 10에서의 부하의 정치력이 너무 높다고 생각했는지, 삼국지 11에서는 정치력이 뭉텅 깎여서 능력치가 통솔력 44/무력 35/지력 81/정치력 82/매력 70에 그쳤다. 그래도 여전히 정치력 90대를 유지중이지만 지력이 70대 중반에 불과한 하후현에 비하면 지력이 높아 계략 방어용으로 쓸 만한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삼국지 13에서 다시 복귀했는데 능력치는 삼국지 11 때의 능력치에서 매력만 빠졌다. 특기는 상업 3, 농업 3, 문화 3, 언변 4. 전수특기는 언변이고 전법은 궁병도발. 일러스트는 두 손을 펼친 채 사마사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반대편 방향으로 되어있다.

삼국지 14에서는 이러한 오류를 알았는지 일러스트를 다시 정상적인 방향으로 수정했으며 능력치는 통솔 44, 무력 35, 지력 81, 정치 82, 매력 70이며 개성은 명경, 법률, PK에서는 보좌 개성이 추가되었고 주의는 왕도, 정책은 정령철저 Lv 4, 진형은 안행, 투석, 전법은 제사, 진정, 투석, 친애무장은 순찬, 위관, 종회, 진태, 혐오무장은 하안, 하후현이다. 안행진이 있고 보좌 개성도 있어서 쓸만한 편이며 정령철저 정책 덕분에 초반 선택 시 명령서를 늘릴 수 있다. 다만 공격용 전법이 있지만 무력이 낮은게 흠이다.

3.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저코스트 풍수사 계의 희망이다. 상태이상 면역과 주위 각성이라는 특성으로 사신전 청룡에서 대활약을 하며 1힐러 조합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3.3. 삼국전투기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로 패러디되었다. 이름이 이름인지라 사마사는 '부하같이 생겼다'고 말한다. 장그래처럼 통찰력이 강해서 전술과 정확한 인물평을 내리는 모습을 보인다. 동흥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소개컷에는 뛰어난 재능과 식견을 가졌다고 소개되었다. 동시에 큰아버지가 부손이라는 점도 언급됐는데, 정작 부손은 삼국전투기에서는 짤려서 언급만 되고 안 나온다.

동흥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제갈각이 동흥에서 둑과 성을 쌓는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사가 그에게 대책을 묻자, 어차피 대치 상태가 몇 십년째 이어지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전술과 군세를 꿰고 있어 일반적으로는 공격측이 상대의 수비를 뚫지 못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전술의 초점을 교전에만 두니 운용의 폭이 좁아진다고 말하며 불리한 공략을 강행하기보다는 주변 요지를 점거해 둔전을 하며 상대를 괴로워하게 하여 말리게 하는 것을 제안한다. 사마사는 부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했지만, 당장의 지지도를 올릴 수 있는 교전을 원했기에 부하의 제안을 거절한다.

적도 전투 편에서는 과거 순찬이 부하가 하후현이나 이풍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하후현은 자신의 능력치보다 야심이 크고 허명은 모을 수 있으나 현실에서 통용되는 재능이 없다고 평했었고, 이풍은 겉을 꾸미는 걸 좋아하고 의심이 많으며 작은 과실에는 신경을 쓰되 권력과 이익에는 어두우니 한직에 있으면 나쁘지 않지만 높은 사람들과 어울리면 반드시 살해당하리라고 평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

낙가 전투 편에서는 관구검과 문흠이 난을 일으켰음에도 사마사가 병을 이유로 사마소를 보내서 진압하게 하려 하자 직접 출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마사는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직접 움직이기를 주저하지만 부하는 회남의 병사들은 강군에 관구검은 뛰어난 장수라 작은 실수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직접 가서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전투외편 7편에서 사망했다고 언급됐다.


[1] 전한 때의 인물로 누란국에게 파견되었다가 누란국의 왕을 암살한 인물이다.[2] 14에서는 일러스트가 반대편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