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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鮮卑 | Xianbe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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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선비어(준몽골어족) | ||
문자 | 불명 | ||
종교 | 텡그리 신앙(?) | ||
국가원수 | 탱리고도선우 | ||
성립 이전 | 동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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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제의 서현수(徐顯秀)묘 벽화. 6세기 경 선비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현재 남아 있는 선비족의 언어를 학계에서는 준몽골어족(Proto-Mongolic)으로 보고 있으며, 단어와 어휘가 현대 몽골어와 대조해봐도 방언에 가까울 정도로 가깝다. 언어 측면에서는 현대 몽골어 화자 뿐만 아니라 칼미크어, 부랴트어 등의 여타 몽골어족 언어 화자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인데[1], 특히 표기 심도가 매우 깊어서 중세 몽골어가 잘 보존된 몽골 문자의 발음대로 대조해볼 경우 언어적 측면에서는 몽골의 직계조상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한자 기록에 의하면 동호의 일종으로 처음에는 흉노의 동쪽에 있어 그들에게 복속되어 있다가 흉노가 멸망한 후 자립하여 각지로 진출했다. 하지만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할 때, 100,000명의 흉노 지배층을 선비족에 남겨 통솔하다가 국가를 성립했다고 하여 지배층 일부를 흉노계로 보기도 한다.[2] 일단 선비족 자체가 혈연을 기반으로 한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내몽골~서만주의 여러 부족이 선비라는 이름 안에 느슨하게 연결된 초대형 부족연합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형질과 언어를 가진 것은 당연하다. 단석괴 이전에는 확고한 맹주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부족 추장에 해당하는 여러 대인이 난립했다.
2. 명칭
중국어: 鮮卑, 병음: Xiānbēi(셴베이), 상고한어: 사르페(*S[a]r-pe)[3], 중고한어: Sjen-pjie현재 알려진 대선비산의 위치는 대흥안령 북부의 알선동(嘎仙洞)이라고 하는데, 알선동 동굴에는 선비족 중에서 훗날 북위를 건국한 탁발선비의 원거주지를 알려주는 북위 시대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알선동 비석은 북위가 화북에서 위세를 떨치던 태무제(제3대) 시기에 세워진 것이었다. 알선동 지역에 사는 오락후국에서 사신이 와서 북위 황제들의 선조들이 살던 옛터가 바로 자신들의 거주지라고 말하니, 태무제는 중서시랑 이창 등을 보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축문을 이곳에 세웠던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다만 대선비산은 지금의 하얼빈 근처에 있는 산의 명칭으로서 고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대선비산'(大鮮卑山)이라는 명칭이 청나라 시대 《만주원류고》가 쓰여질 때 나타난 것으로 보아 민간어원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하게 선비에서 갈라진 오환 역시 대흥안령 남부 오환산에서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고고학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유물 또한 남만주 지역에서 더 많이 출토된다. 또 하나의 설은 원시 튀르크어로 벨트, 혁대를 뜻하는 '샤르비'(Sarbi)에서 나왔다는 것이며, 실제로 선비족 유물에도 벨트가 주로 출토되고 있다.
고대에는 진나라(Qin)가, 중~근세에는 거란(요나라, Khitai 또는 Khitan)이, 근대에는 청나라(Qing)가 서양에서 중국을 대표했다면, 고대 후반부터 중세 전반 서양에선 '선비'가 중국을 대표했다. 돌궐(쾩튀르크)이 중국을 일컫는 단어였던 '타브가치'(Tabgach)는 고어로 중국을 말하는 또 다른 단어인데, 그 어원은 선비족의 부족 중 하나인 탁발부(拓跋氏)에서 온 것이었다.[4]
갓 쓰고 도포 입은 이미지로 흔히 알려진 '선비'와 거짓짝이다 보니 한국사 시간에 혼란을 주기도 한다.
3. 역사
처음에는 훗날 거란족의 근거지가 되는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흉노의 피지배 민족으로 지내다가 흉노가 남·북으로 나뉘어졌을 때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번영했다.후한 말기에는 단석괴의 등장으로 한때 북방 제민족을 통일하여 중국을 위협했으나 단석괴의 사후, 선비는 분열하여 그 세력이 빠르게 쇠락했다.
이후 삼국시대에는 같은 동호의 일원이었던 오환족의 세력이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오환은 공손찬을 멸망시킨 원소에게 복속했고, 원소 사후 원상과 손을 잡고 조조에게 대항했다.
한편 오환이 멸망한 후[5] 조용히 세력을 기르던 선비는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서진이 팔왕의 난이라는 심각한 내전에 휩싸이고, 이 틈을 타 각지의 이민족들이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자 이때 같이 독립했다. 그 중 탁발부는 훗날 북위의 전신이 될 대나라를 세운다.
선비족은 위진남북조시대에 남하하여 내몽골 지역에 정착하면서 한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탁발선비족이 침투왕조[6]인 북위를 세운 후, 북중국은 그야말로 선비족의 무대가 되었다. 탁발선비의 북위는 육진의 난과 이주씨의 난을 통해 서위와 동위로 양분되었고, 각각 우문씨의 북주, 고씨의 북제로 이어졌다.
DNA 분석을 통하여 도출한 북주 3대 황제 무제 우문옹의 얼굴. 북주는 선비족이 건국한 국가였다. 중국 황제의 유골을 생물학적으로 분석하여 만든 최초의 복원도이며 2024년에 발표되어 전세계 학계에 큰 이슈가 되었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각국의 인류학자들도 매우 설득력이 있고 사실에 가까운 복원도라고 평가했다. 복원된 황제의 얼굴은 전형적인 동북아시아인이었으며, 일부 학자들이 주장했던 서구적인 외모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DNA 분석 결과 혈통의 약 2/3가 현대 몽골인 및 다우르족과 매우 유사했으며, 약 1/3은 북부 한족과 유사했다고 한다. 이 분석 결과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하나는 고대 선비족이 현대의 몽골인과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했으며 외모도 그만큼 비슷했다는 것이고, 하나는 선비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한족과 통혼했다는 것이다.## |
선비족은 한족을 정복하여 화북을 제패했으며, 우문씨의 북주에서는 청나라의 만주족이 한족(漢族)들에게 변발을 강요했던 것처럼 피지배민인 한족들에게 선비족의 풍습과 선비족의 성씨를 따를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렇게 중원에서 선비족이 확실한 지배층이 되어가는 과정은 탁발선비족이 북위를 세우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선비계의 무천진 군벌 8주국이 중심이 된 관롱집단이 북주·수·당의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선비족 탁발부의 북위는 439년에 화북을 통일하여 5호 16국시대를 종식시키고,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그후 탁발씨, 즉 원씨의 북위는 극심한 대혼란을 겪은 후, 우문씨의 북주와 고씨의 북제로 나뉘어졌으며 수나라의 양견에 의하여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수문제 양견은 북주 우문씨 황실의 외척인 선비계 보륙여(普六茹)견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유는 북위 때부터 계속 선비계 무천진 군벌 8주국 관롱집단이 한족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선비족의 다얀씨(大野氏, 대야씨), 즉 훗날 당나라의 황실이 된 농서 이씨는 북주의 최고 귀족이었다. 탁발선비족의 북위 효문제는 한자라는 문자를 가진 한족(漢族)의 풍습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화정책을 실행했다. 하지만 당시 한족(漢族) 출신의 북위의 명신 최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정복된 피지배민이었던 한족(漢族)이 얻을 수 있는 높은 직책들은 한정적이었다.
수, 당 이후 만주 서부에 남아있었던 선비계 후손들은 거란·해족·습족·실위였으며, 훗날 습족은 해족에 흡수되었고, 해족과 일부 습족들, 실위의 대부분은 거란에 정복되었으며, 거란은 요나라를 세워 해족과 함께 중국 북방에서 맹활약했다.
선비족은 오호십육국시대에 북중국을 정복하여 많은 왕조를 세웠다. 이 시대의 5호 계열의 왕조를 침투왕조라고 부르는데, 훗날 등장하는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같은 정복왕조와는 다르다. 특히 유명한 선비족 왕조로는 모용부(慕容部)의 모용황이 세운 정복국가 전연, 모용수가 세운 후연과 탁발부(拓跋部)가 세우고, 균전제를 실시했던 효문제의 북위가 있다. 북위는 우문씨의 북주와 고씨의 북제로 갈라졌으나 결국 북주 무제에 의해 통일되었다.
당시 선비족은 북중국을 정복하고 점점 한족의 문화를 수용했으며,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한족에 동화되어 중국 역사에서 소멸했다. 하지만 황실 문화나 개방적인 국가 성향은 당나라까지 이어졌다. 당장 수나라의 황족인 홍농 양씨와 당나라의 황족인 농서 이씨부터가 한화된 선비족이었으며[7] 북위의 황족 탁발씨(원씨), 연의 모용씨, 남량의 독발씨, 독고씨, 북주의 우문씨도 선비족이었다.
고구려-수 전쟁 때의 수나라 장수 우문술 등도 선비족이었으며, 수문제는 서위의 권신인 우문태가 하사한 성씨를 사용했다.
선비 모용부에서 갈라져 나온 유목민족 토욕혼(吐谷渾)의 후예들인 몽구오르인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현존하는 선비계 민족으로 추정된다. 다만 투족은 티베트 계열의 강족(羌族. 삼국지에 이민족으로 등장하는 그 강족)과 혼혈된 민족으로 어느 정도 일부분 티베트화된 민족이었다.
4. 부여, 고구려와의 관계
4.1. 주적
국내 역사에는 고구려와 부여에 관련된 기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3세기경 부여에 꽤 많은 피해를 입혔는데, 부여를 공격해서 무려 50,000명을 포로로 끌고 가기까지 했다. 특히 전연의 모용황은 고국원왕이 재위 중이던 고구려를 공격해서 수도 환도산성을 함락시키는 동시에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능을 파헤쳐 시신을 도굴했다.[8] 이후 계속 수세에 몰리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전연의 후신인 후연을 몰아내고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9] 또한 북주의 무제와 배산 전투를 치러 온달이 활약하기도 했다.이후에도 고구려는 살수대첩에서 수나라를 격파하는 활약을 벌였지만 그 후신인 당나라의 지속적인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4.2. 교류
국내에서 선비를 비롯한 북방 유목민 계열의 집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다소 멸칭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역사 기록상으로는 그럴 수 있는데, 다만 문화사적으로는 다소 이야기가 다르다.초기 부여와 관련된 유적인 중국 지린성 유수시 노하심촌의 노하심 고분군의 발굴조사 내용을 보면 선비족과의 관련성이 매우 높다. 동북지역, 내몽골자치구 동북쪽에서 발원한 선비[10]족들과 관련된 무덤들의 장법(葬法)상의 특징은 사다리꼴 형태의 결구된 목곽묘를 채용한다는 점인데, 유수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또한 피장자의 머리 쪽에 동물뼈를 놓는 선비 계열 무덤의 장례 풍습이 마찬가지로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나타나며, 특히 선비족의 아이덴티티를 표상하는 유물─조개로 만든 돈(?), 특유의 그물 형태의 청동 방울 등의 청동 유물 구성, 동물 문양의 장식, 꼬아 만든 귀걸이 등이 유수 노하심 고분군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추가적인 해석과 분석을 요하는 부분일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선비족과 초기 부여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봐야하지 마냥 상호 적대적이라고 볼 순 없다.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가 그러하듯, 위의 밀접한 관계는 중기에 가서도 비슷하다. 위의 서술된 내용과는 다소 상반될 수도 있지만 한국의 삼국시대 무렵에 건국된 선비 계열의 몇몇 국가들은 고구려와 역사적으로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북연을 보더라도 선비족 계열이되 고구려 출신이 황제가 된 고운의 케이스도 있었는데, 북연은 줄곧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되었다. 북위 같은 경우에는 패권국끼리의 으레 존재하는 긴장으로 전쟁위기에 몰리기는 했지만 전면전에는 이르지 않았고, 서로의 패권을 존중하여 고구려를 남조와 동등하게 대접했으며, 효문제의 문소황후를 비롯하여 고구려인 권력자들이 집권하거나 당파를 이루는 등 서로간에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
지린성 유수 노하심 고분군 출토 이식과 동물문 장식, 길림성박물관 |
이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무수한 교류관계가 확인되고 있으며, 그 흔적들이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나 그 모체였던 부여의 역사고고학적 이해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보니 단순히 선비는 한국사에서의 주적이었다라고만은 보기 어렵다.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와 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서쪽으로 대완을 정벌하고 36국을 아우르며 오손과 관계를 맺고 돈황(敦煌)·주천(酒泉)·장액(張掖)을 세워 야강을 막아 흉노의 오른팔을 찢었다. 선우는 홀로 고립되어 멀리 막북으로 돌아갔다.
《사기》 <위현전>
고대 사서에는 고구려와 부여, 고조선과 유라시아 유목민족과의 관계가 간략하게 언급되어 자세한 정황은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고구려와 부여 이전, 이미 고조선이 흉노 연맹[12]의 왼팔이었다는 사마천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이미 부여 이전 고조선부터가 내몽골 지역 유목민들과의 교류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과 동호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고, 특히 비파형 동검 문화를 공유하였다는 점이 잘 알려져 있다. 동호의 뒤를 이은 선비족의 초창기 발흥지는 내몽골 동부로 만주와 인접해있다. 고조선과 동호 사이의 연계점이 부여와 선비족 사이로 이어졌다고 해서 특이한 일은 아닌 것이었다.《사기》 <위현전>
정리하자면 꼭 민족집단의 피아식별이 세부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양분되어 있지 않고, 또한 선비와 한반도와 그 북부의 역사상의 국가들이 무수한 인적, 물적 교류가 있어왔다는 것이다.[13] 특히 선비는 아래 항목에 있듯이 다양한 계열로 나뉘어져 있어서 각각 이해관계가 복잡했을 수 있다.[14] 당장 같은 민족일지라도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며, 원래 친했어도 전쟁하여 미워하는 경우가 있어서 "선비= 한국사의 주적들" 이라는 수식으로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4.3. 언어학 관점
알렉산더 보빈 교수가 제시한 관점에 의하면 선비어는 한국어족과 많은 교류를 하며, 많은 차용어를 주고받았다. 더 나아가 아예 보빈 교수가 선비어를 부여어로 분류하는 가설을 내놓았다고 설명하기도 하나, 이는 논문을 오독한 것으로 사실이 아니다. 실제 해당 논문의 주장은 선비-거란 계통의 언어에 한국어와 친연성이 있는 외래어가 다수 발견되는데 위치와 시기상 한국어와 연관이 있을 법한 언어는 고구려어(+부여어)밖에 없으므로 선비어와 거란어에는 고구려어에서 들어온 외래어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15]
유하 얀후넨은 선비어를 거란어와 함께 몽골어족의 자매 언어군인 준몽골어족으로 분류하는 가설을 제안했다. 실제로 현전하는 문헌 속 선비어와 그 후예인 토욕혼어는 거란어와 상당히 유사하다. #
5. 주요 집단
선비족을 묘사한 그림들 |
- 모용부(慕容部) - 현재 랴오허 유역 - 전연(前燕), 후연(後燕), 서연(西燕), 남연(南燕), 토욕혼
- 단부(段部) - 난하 유역 - 금방 분열되어 멸망, 단제(段齊).
- 우문부(宇文部) - 시라무렌 강 유역 (흉노+선비) - 북주(北周)
- 하란부(賀蘭部) - 5호 16국시대 때 대나라에 복속해 탁발씨 황실의 외척이 되었으며, 대나라가 멸망한 후에 도무제 탁발규를 추대해 북위를 건국하게 했다.
- 탁발부(拓跋部) - 음산산맥 동부 일대 (선비+흉노) - 대(代), 북위(北魏){후일 원(元)씨로 개명.}
- 독발부(禿髮部) - 하서 인근 (선비+흉노+강·저) - 남량(南梁)
- 걸복부(乞伏部 혹은 흘복부로 읽음) - 농서 인근 (칙륵+선비+강·저) - 서진(西秦)
6. 관련 집단
- 녹결부(鹿結部)
- 다란부(多蘭部)
- 독고부(獨孤部) - 흉노족(남흉노)을 기반으로 선비족(탁발부)과 동화
- 몰록회부(沒鹿回部)
- 질간부(叱干部)
- 철불부(鐵弗部) - 흉노족(남흉노)을 기반으로 선비족(탁발부)과 동화
- 유연(柔然) - 선비족 탁발부에 부속되어 있다가 이후 분화
- 북위, 서위, 동위, 북주, 북제, 수 & 당 왕조 - 황실과 지배층은 선비족과 한족등 이민족의 혼혈 집단(무천진 관롱집단)에서 출발했다.
7. 소속 인물
선비족이 세운 국가 또는 서진 이후의 선비족 소속 부족 계열은 제외.- 가비능 - 후한 말, 안으로는 선비족을 규합하고, 밖으로는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해서 위나라에 대항했다.
- 건만(騫曼)
- 걸문니(乞文泥)
- 곡곡제(斛穀提) - 선비족의 인물. 343년에 후조의 석선의 공격을 받아 대파당해 30,000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 괴두
- 구륜(丘倫) - 선비족의 대인. 109년 9월에 무하, 남흉노의 골도후 등과 함께 7,000여 기병을 이끌고 오원을 노략질해 고거곡에서 한나라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겨울 11월에 하희, 방웅, 경기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방웅, 경기의 공격으로 흉노의 욱건일축왕이 격파되자 철수했다.
- 궐기
- 기지건
- 길가라(吉軻羅)
- 능신저(能臣氐)
- 능신저지
- 단석괴 - 선비족을 통일하고, 흉노의 옛 영토를 점령하여 서쪽으로는 신장, 동쪽으로는 요동에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선비족의 영웅.
- 대호아랑니(戴胡阿狼泥)
- 독발수기능 - 서진 초기에 독발수기능의 난을 일으킨 인물. 한때 서진에게 큰 위협이 되었으나 사마준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마륭에게 토벌되었다.
- 목환진(木丸津), 소희련(素喜連) - 요동의 선비족 인물. 309년에 요동군 태수 방본의 습격으로 동이교위 이진이 죽자 이진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여러 현을 공격해 함락했으며, 봉석이 화해를 요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311년에 모용한의 공격을 받아 참수되었고, 이들의 무리는 모두 모용외에게 병합되었다.
- 몰혁간(沒奕干) - 선비족의 인물. 360년 겨울 10월에 독고부와 함게 수만 명의 무리를 인솔해 전진에 항복했다.
- 미가
- 보도근
- 부두
- 부라한(扶羅韓)
- 사말한
- 아라다(阿羅多)
- 설귀니
- 성률귀
- 소리
- 쇄노
- 연려양(燕荔陽) - 선비족의 대인. 107년에 한나라 낙양의 조정에 조현했고, 태후로부터 왕의 인수, 붉은 수레, 삼가(세 필의 말이 끄는 수레) 등을 받았다. 이어서 오환교위가 거주하는 영성 아래에 사는 것, 호족과의 무역 개통, 남·북 양부에 귀부한 인질이 머무는 관사를 건축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선비 부족의 읍락 120부가 각기 인질을 보냈다.
- 연휴(連休) - 요서의 선비족 인물. 117년에 한나라를 공격했다가 오환족의 대인인 어질거의 공격으로 격파되어 1,300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 열경(熱冏)
- 오륜(烏倫) - 선비족의 요서 대인. 120년에 무리들을 이끌고 등준에게 항복했다.
- 울축건
- 육연(育延)
- 육축연(陸逐延) - 선비족의 인물로 308년, 유연이 세운 한에 항복했다.
- 저라후
- 포두(蒲頭)
- 화련
- 후금다(侯金多)
8. 대중매체에서
- 각종 무협지 - 모용세가
- 《고구려》: 김진명의 역사소설. 고구려와 주로 충돌했던 모용부가 메인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작중에서 문명적이고 숭고하게 그려지는 고구려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야만적이고 잔인하며 호전적인 종족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소설일 뿐이다. 모용외와 모용황 등이 저승에서 보면 팔짝 뛸 만한 온갖 엉뚱한 묘사로 가득하다.[16]
- 광개토태왕
-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하던 백제의 왕이고 선비족은 북중국에서 놀았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도 양자간 굵직한 접촉은 없기 때문에 등장하지 않을 것 같지만 대륙진출 떡밥 덕분에 등장했다.[17]
- <바람의 나라(게임)>: 2차 이상의 몹으로 선비족 맵에서 등장. 위치는 12지신 유적에서 갈수 있는 압록강과 대방성 사이에 있다. 다만 등장하는 몹들의 묘사가 제대로 재현되지 않았다. 당장에 옷차림이 청나라 무술가, 도가 차림에 무기를 들고 있다. 실제 선비족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게다가 후연은 고구려의 성 중 하나로 있는 것도 오류.
- 《삼국전투기》: 아메리카 원주민 계열 캐릭터로 등장한다.[18]
- 일반 선비족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가비능 - 울프 호크필드
- 독발수기능 - 릭 스트라우드
- <삼국지 7>: 배드 엔딩 중 하나가 선비족의 침략으로 플레이어가 조종한 캐릭터의 후손들이 몰살당하는 엔딩이다.
- 《천룡팔부》: 김용의 무협소설. 연나라 모용선비 황실의 후예인 모용박, 모용복 부자가 무림의 고수로 등장한다.
[1] 참조[2] -흉노(匈奴)- (《실크로드 사전》, 2013. 10. 31.정수일)[3] 백스터-사가르(Baxter-Sagart) 음운체계에 따른 추정음.[4] 선비족의 탁발부가 세운 북위(北魏)가 북중국을 통일했으며, 북위에서 갈라져 나온 북제와 북주(北周)가 훗날 수나라와 당나라로 이어져 위진남북조시대의 혼란기를 정리하고 중국을 통일했다.[5] 단부와 우문부는 오환에 가까웠는데, 남은 오환들은 선비에 흡수되었다.[6] 한화정책을 실시한 북위를 정복왕조인 요·금·원·청과 달리 대표적인 침투왕조로 규정하는 것이 통설이다.[7] 그래서 튀르크계 돌궐이 당나라를 '타브가치'라고 불렀다.[8] 시신 및 포로들은 후에 고구려로 돌아오게 된다.[9] 이후 후연은 내부 분열로 인해 모용희가 목숨을 잃게 되었고, 고구려의 지파인 고운이 제위에 올라 북연을 건국했다.[10] 예를 들자면 서차구 고분군, 훙륭산 고분군, 완공 고분, 찰뢰락이 고분군(내몽고에 있어서 음차된 표현이다.) 등이 있다.[11] 이것이 나중에 또 신라와도 관련이 생긴다. 신라 금관의 장식들이 대표적.[12] 전성기 당시의 흉노 연맹은 유목 제국들이 흔히 그렇듯이 서쪽으로는 토하라계 부족들 그리고 동쪽으로는 동호계 부족들을 아우르는 여러 유목 부족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했다.[13] 이는 신라-왜국(일본) 관계도 비슷하다. 물론 이러한 교류가 민족간 정체성과 이질성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다.[14] 선비라고 묶어서 치기에는 모용, 탁발, 단 등의 여러 지파로 나뉘어있을뿐더러 그나마 연맹왕국의 형태라도 부족들이 함께 움직인 부여와는 달리 정말로 남남이거나 아예 남만도 못한 원수지간인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선비 지파 중 일부는 고구려나 부여에 흡수되기도 했지만 강성 독립세력의 경우는 고구려나 부여에 위협이 되기도 한 것이다.[15] 선비어라 싸잡아서 표기하긴 했지만 더 세밀하게 들어가자면 특히 모용부가 고구려 및 부여와 긴밀했는데 먼저 요서에 자리잡고 계속 고구려 및 부여와 투닥거려 왔으며 종국에는 부여를 아예 멸망시키고 왕족을 비롯한 많은 유민들을 끌고갔던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끌려가서 활약한 대표적인 왕족이 여울이다. 이 때문에 모용어의 경우 고구려어보단 부여어의 영향이 훨씬 컸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탁발부의 탁발어의 경우 교류가 있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한국어족 국가들과 인적자원을 크게 교환했을 만한 사건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국어족과 그렇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거란어의 경우 모용어와는 반대로 일부 거란족이 아예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였던 적도 있기 때문에 부여어보다는 고구려어의 영향이 지대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16] 모용외는 꽤 한 성질하기는 했어도 나름 유학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의 소설에서는 본능에 의존하는 야만인 우두머리 정도로 묘사된다. 제법 비범하고 카리스마적인 마초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실제 모용외와는 매우 다르다. 모용황은 한술 더떠서 모용외가 천민 여자를 범하여 얻은 사생아이자 싸이코패스적인 성격의 폭군으로 그려진다. 실제 모용황은 모용외가 단부의 공주와 혼인하여 얻은 적자 출신으로, 그 때문에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며 아버지 못잖은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다.[17] 물론 정말 요서경략설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연관이 있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이 아니다. 다만 진출설과는 별도로 외교는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드라마와는 달리 크게 접점이 없을 확률이 높은게 근초고왕이 본격적으로 고구려와의 분쟁이 있었을 시기에는 모용부의 전연은 이미 전진에게 망하게 된다.[18] 주로 아메리카 원주민 계열 캐릭터로 등장하는 건 맞지만 연재 후기 중국의 삼국시대 당시 한반도 역사 소개에서는 갓을 무기로 투척할 줄 아는 선비로 패러디되어 고구려 군주가 경악하는 개그샷을 작가가 연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