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6투멘 지도 |
2. 역사
15세기 후반 다얀 칸은 다이온타슨다이 칸 사후 혼란스웠던 몽골을 다시 안정시키고, 투멘[1]을 새로 조직한다. 이 때 만들어진 것이 6투멘으로 차하르 투멘도 이 때 만들어졌다.차하르 투멘은 칸의 부족인 차하르족이 다스렸다. 그 아래로 8개의 오톡[2]이 있었다. 8개의 오톡은 케식텐, 하구치드, 아오한, 나이만, 수니트, 우줌친, 알락치구드, 헴치구드였다. 초기엔 선부[3] 근처에서 유목생활을 했다. 이후, 튀메드의 알탄 칸의 세력이 성장하자, 이를 피해 시라무렌강 유역으로 이동하고, 요동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자삭투 칸은 명나라 요동을 자주 공격했기 때문에 요동 사람들은 모두 그를 무서워했다. 명사(明史)에서도 토만(土蠻)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명나라에도 인물이 있어서 자삭투 칸의 공격을 곧잘 막아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성량이었다. 이성량은 곧바로 중국의 스타가 되었고, 사실상 요동에서 왕처럼 군림하게 된다. 부얀 세첸 칸에 이르러 명나라 요동지역에 대한 공격은 줄어들게 된다.
링단 칸 시기에 이르러 차하르는 짧게나마 다시한번 전성기를 맞게 된다. 누르하치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명나라는 링단 칸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누르하치에 대한 견제를 유도했다. 하지만 링단 칸은 누르하치를 공격하지 않고, 몽골을 재통합하는데 집중한다. 그 결과, 할하를 제외한 모든 몽골족이 링단 칸 아래로 통합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 정복에 동원할 사람 하나하나가 소중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몽골에 대한 공격을 매우 꺼렸다. 하지만 차하르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1632년 링단 칸이 할하 원정을 떠난 사이에 홍타이지가 후흐호트를 빈집털이했고, 명나라가 링단 칸에게 보낸 은도 훔쳐가고 만다. 할하 정복에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링단 칸은 후흐호트도 털리고, 은도 털리자, 후흐노르[4]로 이동해 재기를 노린다.[5] 하지만 당시 몽골족 내에서 천연두가 크게 유행했고, 링단 칸도 이를 피하지 못해 사망하고 만다. 그의 사후 몽골족들은 너도나도 청나라에 투항해버렸고, 링단 칸의 뒤를 이은 에제이 칸도 결국 청나라에 투항했다.
1675년 에제이 칸의 조카 보르니가 삼번의 난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2달도 안되 허무하게 진압되었다. 이로 인해 보르니와 연관있는 차하르 왕족, 귀족들은 전부 처형되었고, 차하르족의 유목지도 요동 의주[6]에서 허베이성, 산시성 이북으로 옮겨졌다. 건륭제의 준가르 정복 이후 몇몇은 청나라 조정에 의해 신장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3. 기타
흔히 내몽골을 차하르와 동일시하는데, 둘은 다르다. 내몽골은 청나라 홍타이지 시기에 먼저 항복했던 몽골족의 땅으로, 후에 강희제 시기에 투항한 몽골과 구별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임의로 만든 용어다. 홍타이지 시기에 항복한 몽골 부족은 차하르족, 융셰부족, 오르도스족, 튀메드족 등으로, 내몽골을 차하르족과 동일시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1] 칭기즈칸 시기 사람 수를 단위로 만들었던 행정조직. 한국, 중국에서는 만호라고 불렀다.[2] 투멘 밑의 조직단위였다. 다얀 칸 시절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밍간(천호)를 대체했다.[3] 오늘날의 장자커우시[4] 몽골에서 청해를 부르던 이름이다.[5] 링단 칸이 후흐노르로 간 것은 튀멩켄 촉투 홍타이지의 요청 때문이었다. 촉투는 티베트를 차지하고자 했는데, 그 명분은 티베트가 카르마파가 아닌 겔룩파를 믿는다는 것이었다. 촉투는 티베트 정복을 위해 같은 카르마파인 링단 칸에게 티베트로 가는 길목인 후흐토르로 올 것을 요청했다.[6] 오늘날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