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01 23:50:47

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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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직위 위위(衛尉)
성씨(馬)
(騰)
수성(壽成)
아버지 마평(馬平)
생몰기간 ?년 ~ 212년
고향 사례 우부풍 무릉현(茂陵縣)
1. 개요2. 정사
2.1. 출생2.2. 양주의 반란자2.3. 사면, 군벌화2.4. 군웅할거 시대의 행보2.5. 말년
3. 연의4. 평가5. 가족 관계6. 미디어 믹스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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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이며 는 수성(壽成)으로 사례 우부풍 무릉현 사람. 마원의 후손이다.

2. 정사

2.1. 출생

마등은 남만을 정벌한 한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다.[1] 마등의 아버지 마평(馬平)[2]은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 못했다가 강족 출신의 여자를 만나 마등을 낳게 된다.

강족과 혼혈인 마등은 신장 8척 남짓에 신체가 장대하며 피부가 하얗고 얼굴과 코가 뛰어났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 서부 일대에 코카소이드나 코카소이드 혼혈 유입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로 황백혼혈이었을 수도 있다. 소하공주누란의 미녀 문서 참조.

마등은 어려서 가난해 가산이 없었으므로 늘 창산(彰山)에서 나무를 베어 짊어지고 성시(城市)로 가서 팔아 스스로 생계를 이었다.

2.2. 양주의 반란자

184년 한수, 왕국 등이 강족, 저족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자 군(행정단위의 군)의 모병에 지원했다. 마등은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성격이 좋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에서는 마등을 남다르게 여겨 장교로 배치했으며 거듭 공을 세워 군사마를 거쳐 편장군까지 승진했고 양주자사 경비(耿鄙)의 부장이 되었다. 마초전과 전략에 따르면 마등은 처음엔 오히려 반란군을 막기 위해 중앙군의 종사가 되어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경비는 실정으로 인해 애당초 반란의 씨앗을 만든 장본인인 데다 반란을 막다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었고, 이로인해 반란군의 기세가 매우 강해진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마등은 한수에게 붙잡히는 지경까지 갔다. 이런 형국인지라 마등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반란에 가담하며 왕국을 지도자로 받들고 반란군의 주요 인물로 활약했다.

정부군의 진압 책임자였던 동탁은 고전을 거듭했는데, 이에 조정에서는 황보숭을 투입했고 황보숭이 왕국을 격파한 데 이어 반란의 발기자인 한수가 왕국을 죽이자 지도자를 잃은 반란군은 와해되었다. 하지만 조정 또한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므로 양주에서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온전히 미치지 못했고, 마등은 한수 등의 다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리를 이끌고 지역에서 할거했다.

2.3. 사면, 군벌화

이후 동탁이 정권을 잡고 황제를 갈아 치우는 등 권력을 휘두르자 관동 지역의 관리들은 일제히 반발해 서로 연합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키는 등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에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하고 마등과 한수를 사면했다. 왕국의 사망 이후 지리멸렬한 상태였지만 아직 세력을 갖추고 군벌을 유지하고 있던 마등과 한수를 회유하여 자신의 지역적 기반인 양주에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지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192년, 동탁은 마등과 한수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관동 군벌들을 제압하는 데 참가시키려 했으나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왕윤에게 암살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윤도 이각, 곽사에게 패하여 다시 정권이 바뀌었고, 이때서야 장안에 도착한 마등은 이들에게 정서장군의 관직을 받고 다시 양주로 돌아가 사례 부풍군 견현, 양주 천수군 농현 사이에 상시 주둔했다. 마등은 얼마 전까진 반란군 수괴의 하나였지만 이각, 곽사가 정권을 잡은 이후 관직의 인플레가 극심했기에 이런 이례적인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다.

초평 연간(初平:190-193) 중, 마등은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임명되었다. 서주(西州)에 곡식이 부족하자 마등은 스스로 표(表)를 올려 군중 사람들에게 곡식이 많이 모자라 지양(池陽-풍익군 지양현)에서 곡식을 구하려 한다 하고는 장평(長平) 기슭으로 둔(屯)을 옮겼다. 그러자 장수 왕승(王承) 등은 마등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니 이에 마등의 영(營)을 공격했다. 이때 마등은 가까이 외출하고 대비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패주하여 서쪽으로 갔다.

2.4. 군웅할거 시대의 행보

194년, 마등은 자신의 군대를 먹일 군량이 모자라자 이각에게 원조를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크게 노한 마등이 장안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자 시중(侍中) 마우 등의 관료들 또한 이각, 곽사를 몰아내기 위해 내부의 호응을 빌미로 마등을 부추겼다. 이에 마등은 장안에서 50리 떨어진 장평관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유언과도 연합했으나 내응 계획이 들통나 내응하던 마우 등은 모두 목이 날아갔고, 마등 또한 이각, 곽사의 공격에 참패한다. 이에 한수가 나서 마등과 이각의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지만 결국 마등에게 가세했고, 마등은 재차 이각, 곽사 등과 싸우지만 깨강정이 되도록 털리고 다시 양주로 도망친다.

이각은 마등, 한수와 내통한 관리들을 모조리 주살했고, 이를 핑계삼아 번조를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했지만, 다시 마등, 한수를 사면하고 한수를 안항장군(安降將軍), 마등을 안적장군(安狄將軍)으로 임명한다.

이후 196년, 마등은 본디 한수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지만 사이가 틀어졌으며 마등은 한수를 공격하고 한수는 마등의 처자식을 죽이는 등 크게 싸웠다. 이 무렵 이각, 곽사 또한 서로 내전을 벌이다가 패망했고, 마침 황제를 옹립한 조조종요를 시켜 이들을 화해시키고 마등은 전장군, 괴리후로 임명되었다. 북쪽으로 북방 민족의 침범을 방비하고 동쪽으로 백기(白騎)[3]를 방비하며, 선비를 대우하고 어진 이를 천거하며 백성의 목숨을 가엾이 여겨 구제하니 삼보[4]가 매우 편안해지고 그를 공경했다.

하지만 한수와의 화해는 일시적인 것으로, 이후에도 계속 대립과 화해를 반복했다. 양주는 마등, 한수 이외에도 여러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5] 이들의 이해 관계는 제각각이었고 결정적인 주도권을 잡은 자도 없었기에 중원이 원소와 조조의 이강 구도로 굳어졌을 때도 서로 눈치만 보며 중립을 지킨다.

2.5. 말년

202년, 원소가 병으로 죽자 조조는 황하를 건너 기주를 공격한다. 원소의 후계자가 된 삼남 원상은 직접 조조를 맞아 싸우면서 별도로 상장인 곽원을 파견해 조조의 측면인 관서 일대를 공격했고, 병주목 고간흉노선우 호주천에게 이를 지원하게 했고, 곽원은 파죽지세로 인근의 군현을 공략해 간다.

이때 마등 또한 원상과 연합하고 있었으나, 종요가 마등을 회유하자 원상을 배신하고 아들인 마초를 시켜 도하 중인 곽원군을 공격해 궤멸시킴으로써 조조의 측면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 뒤 208년, 나이가 많아 연로해지자 한수 등 다른 군벌들과의 분쟁이 계속되는 것에 질려 버렸는지 자신의 세력을 장남인 마초에게 물려주고 일가족 전원과 함께 업으로 가서 위위가 되는 등 군벌로서 은퇴하나, 211년에 마초가 한수와 함께 관중십장을 전부 규합하며 조조와 대판 붙었다가 개박살이 난 이후 212년에 조조가 마초의 삼족을 멸하면서 죽임을 당한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서량태수로 나오지만 서량은 양주의 별칭이므로 군이 아니며 서량태수란 관직은 있을 수 없다.

후한에 반기를 든 반란군 출신인 데다 군벌로서 특별히 강대한 세력을 일군 것도 아니며, 대단한 전과도 없고 전체적으로 기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군벌이었지만 '오호대장군 마초의 아버지'라는 설정 때문인지 연의에서는 의 충신, 열사로 미화되었다.

《삼국지연의》에 한수의 난 자체가 안 나오긴 하지만 마등이 이 반란에 가담한 사실은 전혀 묘사되지 않으며, 이각, 곽사와의 싸움도 단지 한왕실에 대한 우국충정으로 묘사된다. 이후 정권을 농단하는 조조에게 분개하며 유비와 함께 동승의 조조 암살을 위한 연판장에 이름을 올리지만, 계획이 발각되자 서량으로 몸을 뺐고, 조조는 마등에게 이를 갈면서도 그 군사력을 두려워해 치지 못한다. 적벽대전에서도 방통의 책략을 간파한 서서가 마등이 배후를 노리니 자신이 이를 견제하겠다는 핑계로 몸을 빼는 등[6] 그 조조마저도 섣불리 건들지 못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등 드러나지 않는 실력자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 뒤 조조가 손권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라는 핑계로 마등을 허창으로 불러들이자 이참에 조조를 암살할 생각으로 이에 응하나 계획이 발각되어 두 아들 마철, 마휴와 함께 처형된다. 조조의 악랄함을 강조하고 마등을 충의지사로 묘사하기 위해 작가가 수정을 가한 듯하다. 초기 판본에는 일종의 설정 오류인지 마초에게 조조 측 장수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욕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나중에는 삭제된다.

이런 탓인지 삼국지 갤러리에서 騰神이라고 깐다. 실제 역사에서는 기회주의적 역적인데, 연의 말 그대로 신처럼 고결한 인품으로 미화 받았다면서 이를 비꼬는 별칭이다.

4. 평가

분명 반란자에 불과하고 연의에서 미화받았다며 까이는 인물이긴 하나 의형제 한수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반란을 목적으로 활동했다고 보긴 어렵다. 군 커리어의 시작부터가 원래 조정의 공식관원으로서 반란군을 토벌하는 입장에 있었다가 조정관리의 실책 이후 반란군으로 돌아선 인물이기도 하고, 성격 자체도 정사 인증으로 반란자에 대한 묘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본래 성정이 어질고 온후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공경했다고 한다.

또 건안 무렵 전장군에 임명되었을 때는 흉노 같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백기 같은 도적떼를 막았으며 선비를 공경하고 어진 이를 등용하고 백성들을 구제하여 이각, 곽사 이후 난장판이던 관중을 안정시켰다고 한다. 반란자이긴 하지만 이런 인물이 단지 연의에서 마초의 아버지라고 엄청 띄워줬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인품이 지나치게 폄하받는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정사랑 연의랑 다르다며 무작정 깔 만한 인물은 아니다.

외모에 대해서도 기골이 크고 보기 좋았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고, 사람 끄는 매력이 있는 성격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고, 일개 병졸로 시작해서 자기의 세력을 규합했던 것만으로 봐도 여러모로 사람 끄는 카리스마 자체는 분명히 있었던 인물.

다만 말년에는 조조에 순응해 업으로 일족과 이주하면서 마초만 양주에 남겨 자신의 본거지를 관리하게 하는데 이것은 마등의 실수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마등은 업에 이주함으로써 조조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양주에 남겨둔 자신의 기반을 포기하지 않으려 햇는데 결국 조조가 언젠가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 들 테고 관중제장들이 이에 반발할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관중제장 중 하나인 마초도 어쩔 수 없이 주변 제장들에게 공격받지 않으려면 조조와 싸우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즉 마초만 양주에 남겨둔 건 사실상 조조와 싸우도록 놔둔 셈이 되어 마초의 인생이 꼬이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본인 일족의 명을 재촉한 셈이 되었다. 업에 이주할 거면 깔끔하게 양주의 본거지를 포기하고 확실히 장남 마초까지 이주를 시켜서 장로처럼 한 자리를 얻게하거나 아니면 계속 양주에 있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5. 가족 관계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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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후한서》 <마원전>에 의하면 마원조사의 후손이라고 한다. 조사가 마복군이란 호를 받아 후손이 마씨를 칭했다고 한다.[2] 자는 자석(子碩). 삼국지연의에서는 자는 그대로 나오나 이름은 마숙으로 나온다.[3] 후한서 권71 황보숭 주준열전에 의하면 황건적 이후 봉기한 도적들 중 장백기[7]가 언급되며, 방덕전에 따르면 홍농에서 장백기가 모반하자 방덕이 마등을 수행해 이를 토벌했다고 한다.[4] 三輔, 관중이다.[5] 마등과 한수를 포함해 10여 명의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이들을 관중십장이라고 불렀다.[6] 적벽대전이 일어나면 서서도 조조의 배에 동승할 터, 그렇게 되면 서서도 위험해지기 때문에 몸을 뺄 계책을 방통이 전해주었다는 설도 있다.


[7] 張白騎-백마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백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