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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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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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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왕창 왕관 왕상 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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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흠 왕랑 동소 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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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 위진 고유 정충
제9대 제10대 제11대
종회 하증 사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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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fff>
난릉성후(蘭陵成侯)
왕랑 | 王朗
시호 <colbgcolor=#FFFFFF,#191919> 성후(成侯)
작위 안릉정후(安陵亭侯) → 악평향후(樂平鄕侯)
→ 난릉후(蘭陵侯)
최종직위 사공(司空)
성씨 (王)
(朗) / 엄(嚴)
경흥(景興)
생몰기간 ? ~ 228년 11월[1]
고향 서주(徐州) 동해군(東海郡) 담현(淡縣)
재임기간 조위의 사공
220년 2월 16일 ~ 226년 12월
조위의 사도
226년 12월 ~ 228년 11월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
3.1. 왜 이런 취급을 받았나?
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1. 개요

후한 말의 지방관이자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관. 는 경흥(景興). 본명은 왕엄(王嚴).

2. 정사 삼국지

서주 동해군 담현 출신으로 경전에 통달하여 낭중과 치구의 장으로 임명받았다. 태위 양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양사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복상의 예를 취했으며, 후에 효렴으로 천거받고 공부로 초빙받았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 서주자사 도겸이 그를 무재로 천거했으나 장안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여 도겸의 치중으로 있었다. 이때 조욱과 함께 천자에게 왕명을 받들겠다는 표를 올리도록 권했고, 조욱을 통해 표를 올렸다. 도겸은 안동장군, 조욱은 광릉태수, 왕랑은 회계태수로 임명받았고,[2] 이때 사촌형의 모반으로 처형받을 위기에 처한 허정도 보호한다. 그렇게 해서 회계를 다스리던 도중 손책장강을 넘어 침입했다. 부친상을 당한 공조 우번이 상복을 벗어가면서까지 손책을 피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한 왕실의 관리이니 지켜야하기 때문에 고릉을 방비하며 손책군을 상대로 선전하였다. 그러나 손책이 손정의 계책에 따라 사독을 습격하자 주흔과 함께 그를 막으러 갔다 패배하였다. 이때 표류하여 동야까지 밀려갔다. 우번이 동부 후관의 장 상승을 설득해 겨우 성 안에 들어가나,[3] 그곳마저도 손책이 군대를 보내니 상승과 왕랑의 군대는 대패한다. 손책은 왕랑의 유학적 명성을 생각하여 그저 문책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그 뒤로 유랑하며 빈곤한 생활을 했고, 아침에 저녁먹을 것이 없어 걱정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친척과 친구를 포용하며 위로하고 모든 행동을 도의에 기초하여 하니 왕랑의 이름은 더욱 높아지고, 이에 조조는 그를 초빙한다. 하지만 곡아에서 출발한 왕랑은 또 표류하여 몇 년이나 고생한 끝에야 도착해 간의대부, 참사공순사로 임명받는다.

213년, 위나라가 서자 군좨주, 위군태수를 하고 소부태상대리로 승진한다. 나라의 일을 처리하는데 관용이 있었고 의문이 있는 죄질에는 가볍게 대하며 법을 합당하게 집행하고 옥을 잘 다스려 세인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조조가 육형 회복에 관한 논의를 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육형을 회복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이 말을 듣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왕랑이 맞다고 여겼으나, 위 무제는 아직 를 못 평정했으므로 다시 불문에 붙였다.
종요사형에 관한 조항을 가볍게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월형이 늘어나게 되니, 이는 불구자를 일으켜서 내시로 삼고, 시체를 살려서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로 오형은 과율에 기록된 것입니다. 사형을 감하는 것을 일등의 법으로 삼게 되면서 죽이지 않고 감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었습니다만, 도끼 모양을 한 형구로 육형을 가한 후에 죄에 따라서 처벌을 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전시대에 어진 사람은 육형의 참혹함을 차마 보지 못해 폐지하고 사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을 하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수 백 년이나 지났습니다. 지금 다시 시행을 하게 되면, 많은 백성들의 눈에 감형에 대한 조항이 오히려 제대로 인식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육형에 대한 소문은 이미 도적들에게나 널리 퍼져 있는 것이지, 옛날 사람들로부터 초래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종요가 사죄를 감해주고자 하는 것은 사형을 감하여 머리카락을 깎는 곤형이나 발을 바르는 월형으로 대신하자는 주장입니다. 죄를 감해주자는 의견을 싫어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범죄가 증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Vol. 13』

220년어사대부, 안릉정후로 임명받으며 조비에게 백성을 양육하고 형벌을 살필 것을 권유하였다. 얼마 뒤 조비에게 황제 하기를 권해 조비가 황제에 오르자 사공, 악평향후로 봉해졌다. 이때는 조비의 사냥이 너무 잦다며 상소를 올린다. 222년이릉대전이 일어나자 조비가 왕랑에게 지금 적을 공격해도 되냐고 묻자 그는 승패가 갈린 다음에 공격할 것을 권한다. 조비가 사다새가 영지지로 모여든 것을 계기로 인재추천을 받자 왕랑은 양표를 추천하고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고 하였지만 조비가 맡은 일을 계속 넘겼다. 손권이 아들 손등을 중앙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자 조비는 군사를 일으켰는데 왕랑은 이를 말렸지만 조비는 결국 장강 앞에서 그냥 돌아오고 만다. 223년, 당시 사공이던 왕랑은 사도 화흠, 상서령 진군, 태사령 허지, 알자복야 제갈장(諸葛璋)[4]과 함께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칭신하여 번국을 칭하라고 하였으나 제갈량은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고 그저 '정의(正議)'라는 글을 지었다.[5]

226년, 조비가 죽었을 때 조진, 진군과 함께 조예에게 장의를 전송할 때 더우니 나가지 말 것을 건의하나 조예는 듣지 않는다. 조예가 즉위하자 난릉후에 올랐으며 식읍은 1천2백 호였다. 또 모절을 갖고 옥책을 받들어 문소황후 견씨의 능에 제사지낸다. 이때 상소문을 올려 백성들을 굽어 살피기를 권하며 사도로 전임한다. 사도를 한 뒤 왕기를 초빙했으나 왕릉이 보내지 않자 편지를 써서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주를 탄핵한다. 228년 11월에 사망한다.

3. 삼국지연의

15회에서 손책의 쾌진격에 희생양으로 등장한다. 엄백호와 한데 묶여서 친구가 돼 버렸다. 거기다가 무력 보정까지 얻어서 왕랑이 직접 태사자와 칼을 휘두르며 일기토를 벌이는 장면까지 나온다.[6]

손책에게 패배한 뒤에는 한참 동안 등장하지 않다가[7] 조예가 즉위한 뒤 제갈량의 반간계에 넘어가 화흠과 함께 사마의를 파직당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이로써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한 제갈량이 북벌을 단행하자 대도독으로 조진을 천거함과 동시에 그의 군사를 자청하여 기산으로 출병한다.[8] 제갈량을 회유하러 몸소 나섰으나 93회에서 제갈량이 준엄하게 반박하자 열받은 나머지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덕분에 적은 비중인데도 불구하고 제갈량태사자라는 최상위권 실력자들을 상대로 일기토설전을 둘 다 해본 극히 적은 인물들 중 하나가 되었다.[9] 아이러니하게도 목숨이 위험한 일기토에서는 생존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안전한 설전에서 죽었다.

다음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 9권에 있는 제갈량과 왕랑의 설전 부분으로, 일부분을 약간 각색했다.
<nopad> 왕랑이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공명이 수레 위에서 손을 맞잡아 예를 갖추자 왕랑도 말 위에서 몸을 굽혀 답례한 후 입을 열었다.

"공의 크신 이름을 들은 지 오래로 만나뵙지 못하다가 이제야 뒤늦게나마 뵙게 되니 참으로 다행이외다. 공께서는 이미 하늘의 뜻을 알고 시무에 밝으신 몸이거늘, 어찌하여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키셨소?"

공명이 대답한다.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역적을 치려 함에 어찌하여 명분이 없다 하시오?"

"천수는 변하는 것이고 제위 또한 바뀌는 것이오. 덕 있는 사람에게 돌아감이 자연의 이치일지니 지난날 환제, 영제 이래로 황건적난을 일으켜 천하가 어지러워짐에, 초평, 건안 때에 이르러서는 동탁반역을 일삼고 이각곽사가 포악하게 굴었으며, 원술수춘 땅에서 황제를 참칭하기에 이르렀소.

또한 원소 땅에서 스스로를 영웅이라 하며, 유표형주를 점령하고, 여포서주를 집어 삼키는 등 그야말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간웅들이 활개치는 바람에 사직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소이다.

그때 우리 태조 무황제 폐하께서는 천하의 간사한 무리들을 소탕하시고 사해를 석권하시어, 만백성이 공경하고 천하 사람들이 그 덕을 우러러보니 이는 권세로써 취함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늘의 뜻에 따르신 것이오. 우리 세조 문황제께서는 문무에 통달하시어 대통을 이어받으셨으니 이는 하늘의 뜻에 따르고 사람의 마음에 합당한지라, 에게 제위를 물려준 옛법을 본받아 중원에 자리잡고 만방을 다스리니, 이야말로 천심에 응함이며 인의에 따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지금 귀공은 큰 재주와 큰 뜻을 품고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비하면서 어찌하여 천리를 거역하고 인정을 배반하는 일을 행하신단 말씀이오? 공께서는 '하늘에 순종하는 자는 창성하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 옛말을 들어보지 못하셨소? 지금 우리 대위는 갑옷 입은 병사가 1백만에 훌륭한 용장이 1천명에 달하외다.

그런데 어찌 썩은 풀더미 속의 한낱 반딧불로 감히 하늘의 밝은 달빛과 견주려 하시오? 귀공이 지금이라도 창을 거꾸로 잡고 갑옷을 벗어 항복한다면 제후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나라와 백성이 안락하리니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다 듣고 나서 공명이 한바탕 크게 웃고는 입을 연다.

"네놈이 한나라의 원로 대신이라 하여 무슨 고견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그 말이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구나. 이제 내가 말할 게 있으니, 모든 군사들은 조용히 들으라.

지난날 환제, 영제 때에 한실의 법통이 흐려지니 환관의 무리재앙을 일으켜 나라가 어지럽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천하가 소란하였다. 또한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동탁이각, 곽사 등이 연이어 일어나 황제를 핍박하고 백성들에게 잔악하게 굴었도다.

이는 조정에 썩은 나무토막 같은 관리들만 있고 조정에서는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 녹을 받아먹으며, 이리 같은 심사를 가지고 개 같은 행실을 하는 무리들이 뒤를 이어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정권을 잡은 탓에 사직은 폐허가 되고 억조창생이 도탄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내 너의 소행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너는 대대로 동해 가까이 살다가 효렴으로 벼슬길에 들었으니 마땅히 천자를 받들고 국사를 도와 한나라를 평안케 하여 유씨를 일으켜야 마땅하거늘, 너는 오히려 을 도와 찬탈을 도모했을 뿐이로다.

그 죄가 깊고 무거워 천지가 용납치 않으니, 천하 사람들이 네 고기를 씹어먹기를 원한다. 신하가 되었으면 그저 몸을 숨기고 머리를 숙여 구차히 목숨이나 이어갈 일이지 어찌 감히 황제의 군사 앞에 나타나 망령되이 천수를 논하는 것이냐?

다행히 하늘의 밝은 뜻으로 한실이 끊기지 않았으니 이는 소열황제께옵서 서천에서 한나라의 대통을 이었기 때문이다. 내 이제 새로운 황제폐하의 뜻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려하거늘, 이 머리 흰 아첨꾼 필부, 수염 푸른 늙은 도적놈아!

네놈도 머지않아 그 수명이 다할 것이거늘 무슨 낯짝으로 구천에 계신 스물네 분 천자를 뵙겠느냐? 늙은 도적은 속히 물러가고, 즉시 역적의 무리를 내보내 나와 승부를 겨루게 하라!"

공명의 말을 듣고 있던 왕랑은 그만 기가 치솟고 숨이 턱 막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3.1. 왜 이런 취급을 받았나?

연의의 대표적인 피해자 중 한 명. 정사에서 묘사된 대학자이자 정치가의 모습과 달리, 연의에서 왕랑은 제갈량과의 말싸움에서 영혼까지 털린 후 피를 토하며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위서 왕랑전과 명제기에 따르면, 왕랑은 태화 2년(228년) 11월에 멀쩡히 낙양에서 자연사했다. 심지어 왕랑이 제갈량과 만났다는 기록은 사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즉 제갈량과 왕랑의 설전은 나관중의 붓끝에서 탄생한 100% 문학적 창작이란 소리다. 그렇다면 나관중은 왜 하필 수많은 조위 신료 중에서 왕랑을 제물로 삼은 것일까?

우선 나관중이 설전의 뼈대로 삼은 223년의 사상전을 살펴봐야 한다. 223년은 이릉대전에서 촉한의 주력군이 궤멸하고 그 여파로 창업 군주인 유비가 붕어한, 촉한 최대의 위기였다. 이 기회를 조위가 놓칠 리 없었다. 당시 사공이던 왕랑을 비롯해 사도 화흠, 상서령 진군 등 위나라 최고위급 대신들은 제갈량 개인에게 “천명을 알면 위에 항복하라”는 서신을 동시다발로 보냈다. 제갈량은 이에 일절 답신하지 않고 대신 《정의(正議)》라는 공개 비판문을 발표하여 조위의 천명론을 조목조목 반박했다.[10] 여기서 제갈량은 화흠, 왕랑 등을 "기애(耆, 5~60대)의 나이에 이른 이들" [11]이라며 까내린 후, 이들을 왕망의 찬탈을 도운 간신 진숭(陳崇)과 장송(張竦)에 빗대어 맹비난했다.[12] 나관중은 이 사상전 기록을 고스란히 가져와 문학적 각색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변형이 일어났는데, 기애(耆艾)라는 점잖은 유교적 조롱은 "머리 허연 필부요 수염 푸른 늙은 도적”이라는 극단적인 언어폭력으로 진화했다. 또한 “진숭과 장송”이라는 비유는 조위의 찬탈을 도운 프레임으로 연결되어 왕랑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핵심 논리로 활용되었다. 연의는 이를 통해 제갈량의 세치 혀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키는 승리로 만들었다. 즉. 연의의 설전은 완전히 창작된 게 아니라 223년의 사상전을 나관중이 228년으로 인위 병합한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필연적 의문이 생긴다. 223년 당시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낸 조위의 핵심 관료는 왕랑 한 명이 아니라 화흠, 진군 등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수많은 대신들 중에서 왕랑 단 한 사람만이 기산으로 끌려나와 역적으로 매도당하고 피를 토하며 죽어야 했을까? 중국 문헌학계에서는 이를 크게 4가지 분류로 분석한다.

먼저, 제갈량의 1차 북벌과 왕랑의 죽음은 미묘하게 겹친다. 1차 북벌은 228년 봄에 시작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왕랑은 228년 말에 병사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은 초반의 기세가 무색하게 마속의 가정 전투 패배라는 트롤링으로 인해 허무하게 실패하는 우울한 에피소드이다. 나관중 입장에서는 이런 우울한 고구마 전개를 보여주기 전에 제갈량의 지적 우위를 증명하고 촉한정통론의 명분을 제시할 사이다 장면이 절실히 필요했다. 때마침 228년에 죽은 왕랑이 있었고, 나관중은 이 타이밍을 활용해서 223년의 사상전을 228년 기산으로 끌고 왔다. 기산은 제갈량의 북벌을 상징하는 장소이자, 촉한의 한실 부흥과 조위의 천명론이 부딪히는 이데올로기의 전장이 된 것이다. 이 시간대 조작으로 침대에서 편히 눈을 감았을 왕랑은 수만 대군 앞에서 말빨로 발리고 분사(憤死)한 꼰대로 완벽히 탈바꿈하였다.

둘째로, 왕랑은 그냥 고위급 대신이 아니라 경전에 통달한 당대 지식인의 거두였다. 그는 《주역(周易)》, 《춘추》, 《효경》 등 유교 핵심 경전에 주석을 달아 학파를 이룰 정도의 사상가였다. 연의에서 제갈량은 지혜의 끝판왕인 지절(智絶)로 평가되는데, 이를 돋보이려면 제갈량이 적국의 네임드급 지식인을 도덕과 학문의 영역에서 압도하는 서사가 필요했다. [13] 특히 제갈량은 한나라의 부흥을 부르짖는 충의의 화신이었기 때문에, 연의에선 첫 북벌에서 이데올로기 측면의 우위를 점하는 장면이 필요했다. 촉한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제갈량이, 위나라 조씨 정권의 찬탈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당대 최고의 사상가 왕랑을 논리로 박살낸다는 것은 단순한 일기토 승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과정에서 선양으로 대표되는 조위의 천명 사상이 촉한의 대의명분 앞에 완벽히 무너졌음을 알릴 제물이 필요했다. 그 제물로 왕랑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셋째로, 왕랑은 유교에서 가장 혐오하는 이신(貳臣, 두 왕조를 섬긴 신하)의 표본이었다. 왕랑은 본래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회계태수 등을 역임했고 손책이 침략하자 “한나라의 관리이므로 임지를 지킨다”며 끝까지 항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훗날 조조에게 사관한 후 조비의 찬탈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조위의 삼공 자리에까지 올랐다. 나관중이 살던 원말명초와 연의를 편집한 모종강이 살던 명말청초는 이민족의 침입과 왕조 교체기로 성리학적 명분론과 정명사상(正名思想)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당대 학자들에게 왕랑 같은 이신은 단순 악인이 아니라 지식인의 기절(氣節, 지조)을 배신한 가장 악질적인 존재로 취급받았다. 나관중은 제갈량의 입을 빌려 왕랑을 주군을 배신하고 지조를 잃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를 증명한다. 즉 왕랑과의 설전은 평생을 한실 부흥에 바친 충의 화신인 제갈량이 권력에 기대어 경전을 곡해하는 가짜 유학자인 왕랑을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장면이었던 셈이다.[14]

넷째로, 삼국지 팬덤 및 일부 비평계의 해석인데, 가장 억까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나관중의 사마씨 일가를 향한 고도의 복수극이라는 것이다. 왕랑은 훗날 촉한을 멸망시킨 사마씨와 사돈 관계였고 그의 후예들 역시 사마씨의 진나라 측근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다만, 단순히 사마씨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고 보면 안되는 것이 바로 왕랑의 장남인 왕숙(王肅)의 존재이다. 왕숙은 유학자로, 아버지 왕랑의 뒤를 이어 왕학(王學)을 집대성했다. 조위 정권은 당대 최고 유학자 정현의 학설인 정학(鄭學)을 국가 공식 학문으로 택했으나, 조상 일파를 숙청하고 실권을 잡은 사마씨는 정학을 밀어내고 왕학을 적극 후원했다. 정현의 예법은 천자와 제후의 등급을 엄격히 나누고 참위설이 섞여 있어 찬탈을 정당화하기에 껄끄러웠던 반면, 왕숙의 학설은 실권자가 황제로부터 권력을 넘겨받는 선양(禪讓)과 구석(九錫)의 예법을 정립하는 데 이론적으로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공자가어(孔子家語)》 등의 경전을 사마씨의 입맛대로 윤색했다는 의혹이 존재한다. 또한, 왕숙의 딸이자 왕랑의 손녀인 왕원희는 제갈량의 라이벌인 사마의의 차남인 사마소와 혼인했고, 조위를 찬탈한 진무제 사마염을 낳았다. 촉한정통론 입장에서 볼 때, 왕랑 일가는 단순히 조위의 신하 1이 아니라 감히 촉한을 멸망시킨 역적 사마씨 집안과 가장 든든한 사상적, 혈연적 관계를 맺은 물주였던 셈이다. 따라서 나관중이 소설에서나마 왕랑을 비참하게 죽이는 건 훗날 촉한을 멸망시키는 사마씨 일가를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단죄하는 대리 복수극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마지막 가설에 대해 학계에서는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는 반론이 우세하다. 《삼국지연의》가 나관중 1인이 완전히 창작한 소설도 아니고, 송 · 원대를 거치며 수백년 간 축적된 민간 전승과 잡극이 집대성된 결과물이니만큼, 나관중이나 민간 설화 창작자들이 왕랑의 족보까지 뒤져가며 앙심을 품었다는 증거는 없다. 또한, 모종강도 평론에서 주장하듯 설전 씬은 조씨 정권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장면이었다. 나관중은 철저히 조씨 정권과 이에 부역하는 왕랑 같은 이를 타겟으로 삼았지, 사마씨가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주요 주장이다. 이는 현대 독자들이 당대 사상사와 족보를 연결시켜서 만든 결과론적 해석에 가깝다.

정리하자면, 왕랑이 소설에서 이런 굴욕적인 취급을 받은 것은, 그가 권력에 기생한 늙은 꼰대이자 제갈량에게 먼저 문서로 어그로를 끈 당사자라는 완벽한 문학적 제물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당시 민중에게 왕랑의 설전 장면은 고상한 정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재수없는 위나라의 꼰대 지식인이 제갈승상의 입털기 한방에 혈압 올라 죽어버리는 통쾌한 블랙 코미디로 소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의 충신이었다가 당대 경학을 주도했던 대학자 왕랑이 700여 년 넘게 비열한 배신자로 낙인찍힌 사실은 소설이라는 매체가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압도적으로 왜곡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이다. 이 서사는 현대에도 여전히 강력히 작용하고 있는데, 일례로 중국에서는 1994년 드라마 삼국연의제갈량 vs 왕랑 장면이 필수 요소로 활용되고 있다. 진실이 어느 쪽이건, 왕랑은 촉한정통론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문학적 완성도를 위해 철저히 희생된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기타

  • 장소, 허정 등과 친했으며 조방의 대에 왕랑이 지은 역전을 관리 등용 수험 과목으로 결정한다.
  • 세설신어》에는 화흠을 추앙한 일화와 배를 탔을 때의 일화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nopad> 왕랑은 화흠을 추앙해 화흠이 1년 중 12월에 만물을 모아서 신을 찾아 배향하는 사제일에 자식과 조카를 모아놓고 연회를 열자 이를 따라했으며, 훗날 어떤 사람이 장화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자 왕랑이 따라한 것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니 그렇게 할수록 화흠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고 했다.
  • 그의 아들은 유학자로 유명했던 왕숙이며, 그의 손녀는 사마소의 부인인 왕원희다. 그리고 사마소와 왕원희 사이에서 태어난 사마염은 왕랑의 외증손자다. 아내로는 양씨.[15]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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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랑의 정확한 생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현재 일부 웹사이트에는 167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왕랑의 사망 연도(228년)에 아들 왕숙(王肅)의 향년(62세)을 잘못 대입하여 역산(228-62+1=167)한 오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서 왕랑전에 따르면, 왕랑은 낭중(郞中) 벼슬을 지내던 중 스승 양사(楊賜)가 사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3년상을 치렀다. 후한서 양사전에 따르면, 양사의 사망 연도는 185년이므로, 당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연령을 고려하면 왕랑은 최소 166년 이전 출생으로 추정해야 한다. 추가적으로, 아들 왕숙은 256년에 62세로 사망했음(부록인 왕숙전 및 주건평전)이 확인되므로, 이를 역산하면 왕숙은 195년생이 된다. 즉, 왕랑이 최소 166년 이전 출생이라면 30대 초반 무렵에 장남 왕숙을 낳은 것이 되므로 생물학적 나이와도 부합한다.[2] 이때 왕랑의 나이는 고작 20대였다.[3] 이때 우번은 노모를 모셔야한다며 회계로 돌려보낸다.[4] 알자복야는 황제의 측근에서 외교적 실무나 의전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제갈씨라는 점에서 남양 제갈씨의 방족으로 추측되지만 사료에서는 딱 이 부분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5] 의논(議)을 바로 잡는다(正)는 뜻으로 촉서 제갈량전 배송지주 제갈량집에 나오는 기록이다.[6] 그래서인지 한중합작 특촬물 레전드히어로 삼국전에서 레전드히어로로 등장한다. 그것도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레전드히어로들의 모티브 중 레전드히어로 우길, 레전드히어로 화타를 제외한 레전드히어로 전원이 무관이 모티브인 것을 감안한다면 무력보정을 제대로 받은 셈이다.[7] 공백기가 30년이나 넘는 탓에 독자들은 '손책에게 썰린 왕랑'과 '제갈량한테 말로 썰려 빡쳐서 죽어버린 왕랑'이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위나라로 들어간 탓에 존재감은 없어지고, 그냥 중신 1로 전락했다.[8] 이 때 왕랑의 나이가 76세라는 구절이 등장하므로 연의의 왕랑은 153년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정사에서 왕랑의 정확한 생년도는 불명이지만 스승 양사가 사망한 185년에 관직을 버리고 3년상을 치렀다는 기록을 통해 그 나이를 유추할 수 있다. 185년에 최소 관례를 치른 20세의 성인이었다고 가정하면 왕랑은 최소 166년 이전 출생이 되며, 사망한 228년에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고령이 된다. 실제로 진수종요, 화흠, 왕랑을 하나로 묶어 열전을 편찬했는데, 이들은 위나라 건국 초기부터 있던 조정의 최고령 원로들이었다. 즉, 설전 자체는 허구지만 나관중이 나이 고증은 잘한 셈.[9] 다만 연의에서 설전은 대부분 제갈량이 중심이기에 제갈량과 설전한 것은 특이한 것은 아니다.[10] 중국의 제갈량 연구자 단희중(段熙仲) 등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촉한을 동등한 주권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고도의 외교적 무시라 해석한다. 제갈량이 여기에 1대 1로 답신을 보낸다면 스스로 촉한이 지방 군벌이며 위의 산하에 들어가야 함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따라서 제갈량은 답신을 보내지 않고, 《정의》를 통해 위나라를 항우나 왕망 같은 “덕이 없는 찬탈자”로 규정함과 동시에 광무제의 곤양 전투에 빗대어 촉한을 “정도를 걷는 세력”으로 포장했다. 즉, 제갈량의 《정의》는 단순한 반박문이 아니라, 이릉대전 패배 직후 동요하던 촉한의 민심을 다잡고 항전 의지를 고취하기 위한 대내적 정치적 선전물이라는 것이다.[11] 단순히 늙었다는 뜻이 아니다. 예기 곡례 상편에 따르면 애(艾)는 50대로 관복을 입고 정무에 참여하며, 기(耆)는 60대로 남을 지시하고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즉 50~60대에 세상의 이치와 예법에 통달하고, 국가의 방향을 지시해야 할 국가 원로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다만 제갈량은 존경받는 원로씩이나 되는 자들이 찬탈자에 아부하여 목숨 부지한다고 까내리는 의도로 썼다.[12] 진숭은 당시 장안령(長安令)으로, 왕망을 주공에 빗대어 구석을 받을 명분을 제공한 인물이다.(한서 왕망전) 장송은 당대 최고의 학식을 지닌 지식인으로, 진숭 등과 함께 왕망이 만든 찬탈 명분을 유교적 수사로 다듬어 퍼뜨리는 프로파간다 역할을 했다.(한서 유협전) 제갈량은 이들이 명망 있는 학자층인 점을 들어 화흠과 왕랑을 공격한 것이다.[13] 실제로 연의 본문에서는 제갈량이 왕랑뿐 아니라 주유, 조진 등 상대국 네임드들을 격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14] 화흠, 가후 등 다른 이신들도 많은데 왜 하필 왕랑이 타겟이 되었느냐에 대해선 촉한의 정통성과 사상적 우위를 극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적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학자를 논리 ·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굴복시킬 타겟이 필요했고, 그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왕랑이었다고 해석된다.[15] 외증손자이기도 한 사마염이 왕원희 사후 양씨에게 식읍을 내렸다고 하는 걸 보아 왕랑의 가족들 중 가장 오래 살았던 모양이다. 참고로 왕원희는 왕랑이 죽은지 40년이 지난 후에 죽었으니 남편인 왕랑이 61세라는 저 시대 기준으로 단명하지 않은 나이임에도 40년이나 더 산 것이다. 남편보다 한참 어리게 치더라도 아들 왕숙이 195년생이기 때문에 무려 90대까지 살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