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07:46:15

우번

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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虞翻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2.1. 왕랑 시절2.2. 손책 시절2.3.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2.4. 형주 공방전에서의 활약2.5. 모두까기 인형2.6. 손권과의 술자리 일화
3. 평가4. 우번의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5. 가족 관계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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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이며 는 중상(仲翔). 양주 회계군 여요현 출신으로, 한때 후한 말의 관원인 왕랑의 부하였고, 훗날 오나라에서 일했다. 그는 《주역》에 주를 달고 공융에게 칭찬 받을 정도로 뛰어난 유학자였으며, 또한 다른 사람을 말로 설득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설득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강직했기에 미움을 받기도 했다.

2. 생애

2.1. 왕랑 시절

원래는 회계태수 왕랑의 밑에서 공조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부친상을 치르고 있던 198년 8월에 손책의 군세가 왕랑을 공격하자, 우번은 부친상을 치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문 앞까지 왔다. 우번은 상복을 벗고 왕랑을 만나 손책과 싸워서 이길 수 없으니 일단 손책을 피하라고 왕랑에게 충고하였다. 하지만 왕랑은 한나라의 관리로서 그럴 수는 없다며 맞서 싸웠지만, 싸움에서 졌고, 동야까지 표류하였다.

우번은 왕랑을 쫓아가 왕랑을 후관까지 모셨다. 그 다음 그는 문을 닫고 그들을 문전박대하던 후관의 장 상승을 설득하여 왕랑을 후관에 모시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왕랑이 말하기를,
그대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소.
왕랑은 우번이 상중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던지라, 우번이 아버지의 부친상을 치르던 중에 왕랑을 돕기 위해 달려왔는데, 그가 그의 어머니마저 버리고 온 것을 염려하여 타이른 것이다. 우번은 곧 회계로 돌아갔다. 그의 명성을 들어 익히 알고 있던 손책은 직접 그를 찾아가 그를 친구로 삼아버렸고 그를 공조에 임명했다.

2.2. 손책 시절

우번이 손책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우번은 손책이 사냥을 즐겨 하는 것을 보고 손책에게 말하기를,
명부께서는 까마귀 떼같은 병졸들을 사용하고, 흩어졌다가 모인 병사들을 달리게 하여, 모두 그들의 사력을 얻고 있으니, 비록 한고제라고 할지라도 명부의 능력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부께서 가볍게 무장하고 외출하여 은밀히 행동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명부를 따라 수행하는 관리들이 경비할 틈도 없으니, 관리나 병졸들은 이 때문에 항상 고심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군주가 된 자는 장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백룡이 물고기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면 예차의 화살을 눈에 맞아 곤란하게 되고, 백제의 아들인 뱀이 스스로 방종하였으므로, 유계(한고조)가 그를 죽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다소나마 유의하십시오.
이를 쉽게 풀이하면, 당신이 그렇게 "사냥을 자주 나가면 부득이 당신을 지켜줄 수 없는 때가 있을 수 있으니, 그러다가 당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손책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우번의 말은 섬뜩하지만, 손책은 아래와 같이 답변하였다 한다.
그대의 말이 맞소. 그렇지만 나는 때때로 생각하는 것이 있어 단정히 앉아 번뇌하오. 춘추시대 정나라 대부인 비심처럼, 들녘에서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에 사냥을 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오.

이는 곧 손책이 우번의 충고를 수긍하였으나, 결국에는 듣지 않았다는 셈이다. 우번은 그후 부춘현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호삼성은 《자치통감》의 이대목에 주를 달아 이러한 손책의 활발하고 외향적인 성격이 그를 죽음에 이끌었다고 평했다.

199년에 손책이 예장을 공격하고자 할 때, 손책은 먼저 숙구에 주둔하였다. 손책이 우번에게 말하기를,
화자어는 스스로 이름이 나 있지만, 그러나 나의 적수는 아니오. 만약 화흠이 스스로 문을 열고 예장을 나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금고가 한 번 울릴 것이고, 곧 부상을 입지 않은 화흠의 군사가 없을 것이오. 경은 화흠의 앞으로 나아가 그의 앞에서 그에게 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리시오.
한 마디로 화흠을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내라는 명령이다. 명을 받든 우번은 화흠에게 가서 그를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가만히 듣건대 명부[1]와 비군[2]인 옛 왕부군(왕랑)은 중주에서 이름 나 있어서 나라 안에서 으뜸으로 여겼으며, 비록 동쪽 변방에 있지만 신은 항상 우러러보았습니다.
이 말에 화흠은
이 화흠은 회계의 왕부군에 비할바가 못되오. 라며 겸손하게 답변하였다.
우번은 곧 이어
예장군의 물자의 양, 무기 그리고 기계를 살펴보지 않았지만, 병사와 백성들이 용감하고 날쌔기에서 비군과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화흠은 다시
비교할 바가 못되오.
우번은 마지막으로
밝으신 부군께서 회계의 왕부군와 같지 못하다고 말하시니 겸손한 답변일 뿐입니다. 날쌘 병사가 회계의 군사만 못하다고 하셨는데, 사실 높은 분이 가르쳐주신 그대로입니다. 손 토역(손책)의 지혜와 책략이 세상 사람들을 뛰어 넘고, 병사를 부리는 것이 귀신과 같으니, 앞서 유 양주(유요)가 도망한 것을 그대는 잘알고 계실 것입니다. 더불어, 손토역께서 남쪽의 비군을 평정하였던 사실도 그대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명공은 지금 외로운 성을 지키고자 하시나, 성안의 물자의 양을 헤아려보아 충분하지 못한 것을 이미 알고계실테니, 계획을 일찍 세우지 못한 것을 후회해도 요구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지금 손책의 대군이 이미 숙구에 머무르고 있기에 저는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내일 낮에 손책을 환영하는 격문이 숙구에 도착하지 않으면 나는 명공과 헤어져야 하겠소.

오래도록 버티지 못할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화흠이 답변하기를,
나는 오랫동안 양자강 밖에 있었으니 항시 북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손토역께서 오셨으니 나는 곧북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라며 우번의 설득에 따라 항복하였고, 손책은 화흠에게 상빈을 대하는 예를 갖추었다.

2.3. 손책의 뒤를 이은 손권

그러고나서 200년에 손책이 죽자 다른 많은 관리들이 임지를 떠나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려고 하였다. 그때 우번은
인근현의 산월백성들이 변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멀리 성곽을 떠나는 것은 틀림없이 의외의 일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라며 상복을 입고 손책을 위해 복상하였다. 여러 현에서는 우번을 모방하여 전부 안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주에서는 우번을 무재로 추천하였다. 더불어 한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불러 시어사로 임명했고, 더 나아가 조조는 그를 사공연으로 임명했지만, 우번은 그 어느 곳에도 취임하지 않았다. 손권은 그런 우번을 기도위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주 손권의 성질을 건드리는 간언을 하는 데다가, 그는 천성적으로 습속과 타협하지 못해 매우 많은 비방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단양군 경현의 장으로 좌천되었다. 이를 두고 특이한 해석이 있다. 당시 단양군에 반란이 있었던 것이 그 이유인데, 손오는 우번을 좌천시키는 모양새로 단양으로 보냈지만 그 실질은 단양지역의 위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양을 성공적으로 다스리고 나서 형주공략전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2.4. 형주 공방전에서의 활약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를 공격할 때 여몽은 우번이 의술에 뛰어나다는 핑계로 우번을 데리고 갈 것을 청해 우번은 좌천되어 맡았던 임지를 박차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여몽의 군세가 공안과 남군을 공격할 때, 우번은 여몽의 명을 받들어 공안을 지키는 사인을 항복시키는 역할을 맡았는데, 사인은 공안을 지키면서 우번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우번은 편지를 써서 사인에게 보냈다.
현명한 자는 화가 싹트기 전에 방비하고, 지혜로운 자는 장차 닥치려 할 때에 미리 근심거리를 헤아리는 법이니, 득실(得失)을 알면 가히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고, 존망(存亡)을 알면 족히 길흉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대군이 행군하였으나 척후가 행해지지 않고 봉화가 오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천명(天命)이 아니라면 필시 내응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장군은 미리 때(時)를 보지 못하고, 또한 때가 이른 뒤에도 이에 응하지 않고 홀로 험요한 성을 지키며 항복하지 않으니, 죽도록 싸워봤자 종족을 훼멸하고 제사를 끊기게 하여 장군은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여호위가 곧장 남군으로 향해 육로를 끊고자 하니 살아날 길이 하나같이 막혔고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장군이 기설 위에 있는 격이니, 장군께서 달아나도 화를 면할 수 없고 만약 항복한다면 의(義)를 잃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건대 장군이 불안할 것이나 숙고해보기를 바랍니다.
사인은 이 편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와서 항복했다. 우번은 이에 이어
이는 휼병[3]이니 응당 사인을 데리고 가야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방은 오록 기록에 따르면 애시당초 손권이랑 내통하고 있었기에 항복해 버린 사인을 보자마자 별 미련없이 따라서 쇠고기와 술까지 준비해서 항복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만 항복한것이고 다른 남군 사람들에게 항복은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에 연회를 열고 있는 여몽에게 우번은 경고를 했다.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뿐입니다. 성안의 사람들을 어찌 전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습니까?
우번 덕택에 여몽은 성안의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주역에 능통한 우번에게 점을 쳐보라고 하였는데, 우번은 아래가 태이고 위가 감이고 오호가 변하여 임쾌가 되는 점괘를 얻었다. 이를 보고 우번이 말하기를,
관우는 반드시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
과연 점괘대로 관우가 처형되자 손권은,
그대는 복희에게 미치지 못해도 동방삭에는 견줄 만 하오.
라며 엄청난 칭찬을 한다.

2.5. 모두까기 인형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그는 성격이 상당히 강직하였던 데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오나라가 형주를 얻은 뒤 손권이 시찰차 강릉에 왔다. 손권은 관우에 의해 강릉에 구금되어 있던 우금을 만나게 되었는데, 우번은 손권과 우금이 말을 나란히 한채 나아가는 것을 보고 우금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투항한 포로이거늘 어찌 감히 우리 주군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느냐!
라고 외치면서 채찍을 들고 잡아서 우금을 채찍질하려 들어었다. 놀란 손권이 우번을 질책하여 말렸다. 그리고 누선에서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열 때, 우금은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우번이 우금에게 질문하기를,
당신은 거짓으로 사면을 구하려 하시오?
손권은 우번이 자신의 뜻과 같지 않아, 끝내 그를 원망하고 그에 대하여 불평했다. 그런데, 오서에 따르면 그런 우번을 우금은 에 돌아가서 오히려 칭찬했다고 한다.

한번은 우번이 배를 타고 가다가 오나라에 항복한 미방과 서로 만나게 됐다. 사람이 많이 타고 있던 미방의 배는 우번의 배에게 비키라며 소리를 질렀는데, 우번은 거기서 사나운 소리로 외쳤다.
충성과 신의를 잃고 어떻게 군주를 섬기시오? 사람들의 두성을 기울게 하고도 오히려 장군으로 칭하는 것이 옳은 것이오?
이 말에 민망해진 미방은 창문을 닫아 응하지 않았고, 황급히 우번을 피해갔다. 하지만 미방의 회피도 잠시 우번은 나중에 미방의 진영 앞을 통과 하게 되었다. 우번이 두려운 미방의 관리들은 문을 닫아 우번의 수레는 통과하지 못하게 했는데, 우번은 다시금 분노하였다.
마땅히 닫아야 할 문은 오히려 열어놓고 응당 열어야 할 문은 오히려 닫으니, 어찌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라고 하였고, 미방은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위의 사례들을 보면 투항분자들에게 가차없는 편이었는데, 정작 본인도 투항분자 출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투항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투항분자들에 가차없는 게 아니라 미방의 경우 최선을 다해 저항하다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났거나 싸운 결과 져서 항복한 것도 아니고 같은 편을 배신을 했기 때문이고 우금의 경우 손권을 삼기고자 진심으로 항복한 것도 아니고 손권과 말머리를 함께 했다는 것은 손권의 위엄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 지적사항이다.

우번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따지고 들며 싫은 일은 죽어도 안하는 인물이었기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한번은 연회에서 손권이 여럿에게 술을 따라 주는데, 우번은 취한 척해서 받지 않고 몇 번 넘어갔다. 우번은 손권이 떠날 즈음에 일어났다가, 술에 취하면 야만적인 손권에게 칼맞아 죽을 뻔했다. 그때 아무도 말리지 않았으나, 오직 유기만이 나서서 손권을 끌어안고 간언을 하여 손권을 말렸다. 자세한 내용은 유기 참조.

다만, 여기서 이해가 안되는 점은 우번은 왜 손권이 떠난 다음이 아니고 떠날 때쯤 일어났냐이다. 호삼성은 이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다.
우번의 이러한 행동은 간언을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해석했다.

우번은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손권과 장소가 신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데,[4] 우번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말하기를, "죽은 사람들이 여기 있구만!"[5]이라고 비웃다가 분노한 손권은 그를 교주로 쫓아내버렸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손권의 미움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미묘한 부분이 있다. 남양주를 시작으로 형주 북 - 남부, 교주로 갈 때마다 항상 우번은 큰 싸움이 일어날 곳, 혹은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곳의 중심지로 보내어졌다. 실제로 그가 교주로 발령받았을 무렵은 사섭이 85세라서 노환으로 병사할 상황이었다. 당시 상황이 남만을 움직인 과 밑의 사씨 일족이 오나라의 간섭을 벗어나 독립하려고 할 만큼 미묘하였기 때문에, 그가 미움받아 쫓겨났다고 하기보다는 현지 파견관으로 본국에서 직접 보고하게 하는 감찰의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 실제로 우번 파견 이후 남만의 교주에 대한 개입을 방지하여 오나라의 교주 통치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겸사겸사 쫓아낸 것도 맞는 거 같다.

손권이 공손연에게 보낸 주하 등의 사절단이 전예의 예견대로 태풍으로 표류해 공손연에게 붙잡혀 참수당하였다. 손권은 우번의 말을 생각해 일호지액의 고사를 들어 우번을 불렀으나 우번은 이미 죽은 뒤라 그의 영구만 돌아왔다.[6]

2.6. 손권과의 술자리 일화

손권의 술버릇은 고약하기로 유명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다른 사람에게 술을 강권하기였다. 그래서 어느 날 연회에서 우번은 취한 척 하여 손권에게 술을 받는 걸 면하려고 했으나 들통나자 열받은 손권이 그 자리에서 죽이려고 들었다. 이에 유기라는 사람이 뜯어말리자 손권은 "예전에 조조는 자기에게 직언한 공융도 죽인 판국인데 나라고 열 받는데 누구 좀 죽이지 말라는 법 있냐."고 화를 냈다. 그러자 유기는 "옛 성현을 받들겠다고 하셨으면서 조조의 병크나 따라하시면 어쩌십니까."라고 대답하여 손권은 할 말이 없어져 대신 "내가 술에 취해서 사람을 죽이라고 명해도 들으면 안 된다."고 명했다.

3. 평가

손등은 죽기 전에 남긴 문서에서
우번(虞翻)의 뜻과 절개는 분명합니다.

라고 말했고 진수는 우번에 대해 육적전에서 방통과 함께 우번을 언급하며
우번은 옛날 부터 명성이 있었다.

라고 했으며 맨 마지막의 평에서는
우번(虞翻)은 고대의 지나치게 정직했던 무리로서 진실로 말세에는 화를 면하기 어려웠지만, 손권(權)이 그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마음이 넓지 않았던 것이다.

라고 평했다.

손성은 우번이 화흠을 항복시킨 것에 대해 평하길
화흠은 원래 백이사호의 감추어진 뛰어난 기풍도 없었고, 또한 왕과 신하 사이의 충성을 다하는 지조도 잃었으며, 사악한 선비(우번)의 유세에 마음을 굽히고 방자한 무리(손책)와 서로 어깨를 같이하며 지위를 빼앗기고 절조를 타락시켰으니, 허물이 어느 것이 크겠는가?

라며 우번은 사악한 선비라고 평했다.

우번은 자신이 직접 《주역》에 주를 단 주역주를 공융에게 보냈는데, 공융은 그것을 읽어 보고는 그에게 답변하였다.
춘추시대 오나라 연릉의 계찰이 음악에 정통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주역에 대한 연구를 읽어보고서 비로소 동남쪽 지역의 아름다운 것이 비단 회계의 대나무화살 뿐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구름을 통해 천상을 관찰하고 기온을 통해 운행을 살펴 그 안의 화복의 근원을 소급하면 음양변화에 규율과 완전히 부합하므로, 당신의 연구는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고 만물을 연구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며 아낌 없는 찬사를 보냈다. 또 장굉은 공융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우중상은 이전에 자못 평론가들에게 악평을 들었지만 우수한 품덕과 재능을 자질로 삼아 더욱더 연마해 광채를 더하였으므로 그러한 비난이 그를 손상시키기에는 부족합니다.

라며 우번에게 칭찬을 한다.

이런 우번의 점이 관우의 최후에 대해 맞추자 손권은
그대는 복희에게 미치지 못해도, 동방삭에는 견줄 만 하오.

라고 칭찬을 한다.

4. 우번의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

그는 비판과 칭찬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감택에 대해서
감씨는 사람들을 뛰어넘을 만큼 우수한데, 촉의 양웅과 같다.

고 하고서는 이어서
감씨는 유학과 덕행에 모두 우수하여 현대의 동중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라고 평했다.

우번이 유배당했을 때 제갈근만이 우번을 위해서 변설해 주었는데, 우번은 제갈근이 자신을 두둔해준 것을 듣고는 친한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제갈근은 돈독하고 인자하니, 곧 하늘이 만물을 살리는 것이요, 우매한 자를 다스리는 데도 청론(淸論)을 하니, 그는 분수를 지킵니다. 저는 죄악이 깊이 쌓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꺼려지기에 비록 기로(祁老)의 구원이 있다 해도 저는 양설(羊舌)의 덕은 없으니, 풀어지기를 도움받기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5. 가족 관계

아들이 무려 11명이 있었는데 그의 자식들 중 넷째아들 우사의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우사를 남해 유배 시절에 낳았다고 했고, 우번은 유배지에서 죽었으니 그 뒤의 일곱 아들도 거기서 낳은 것인데, 유배갈 때 나이가 대략 50대 중반일 것으로 추측되니 늙어서 유배되고 뒤늦게 정력을 자랑한 것이다.

그의 후손으로는 동진에서 위장군을 지낸 손자 우담이 있다.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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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대를 높이는 말이다.[2] 자신의 고향을 낮춰서 말하는 말이다.[3] 한 마디로 기만일수도 있다는 뜻이다.[4] 당시 도교가 어느 정도 성행한 것도 있기 때문에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도 도교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그때 당시에는 장각과 우길 등 많은 도사들이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지배층 입장에서는 좋든 싫든 도교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5] 뜻을 말하자면 세상에 신선 같은 건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저 세상 속에서나 존재하는데, 그걸 말하는 너희들은 얼른 죽고 싶은가 보구나라고 하고 비방하는 것이다.[6] 그런데 교주에서 태어난 아들 우사의 나이가 16세일 때 우번이 죽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에 따르자면 우번의 교주 유배가 대략 223~224년 즈음인데, 여기에 맞춰보면 우번이 적어도 238년 이후에 사망한 것이 된다. 공손연이 토벌될 때, 손권 측에서 움직임을 보이려는 시도를 했었는 것으로 볼 때, 이때 간언하려다 사망한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