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03 12:12:31

제갈각

의 군권 1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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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吳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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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사우
제갈각 장휴 고담 진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huge_Ke_Qing_illustration.jpg
청나라 시대에 그려진 제갈각의 삽화

諸葛恪
(203 ~ 253)
英才卓越推元遜(영재탁월추원손) : 재기가 탁월한 이라고 제갈 원손을 받드는데,
羊道箴言最可思(양도잠언최가사) : 양도의 경계하는 말 몹시 마음에 새길만하구나.
早識保家非令子(조식보가비령자) : 가문 보존은 자식이 아닌 것을 일찍이 알았거늘,
至今遺恨石城知(지금유한석성지) : 이금에 남아 있는 한은 석성만이 알고 있구나.

1. 개요2. 생애3. 평가4. 야사의 기록들5. 엉클콤?
5.1. 숙부와의 비교?
6. 미디어 믹스

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는 원손(元遜).[1]삼국지연의』로 유명한 제갈근의 장남이자, 제갈량의 조카. 동생으로 제갈량에게 입양된 제갈교와 입양되지 않고 오나라에 남은 제갈융이 있다.

잠시 대권을 주도한 오나라의 권신으로 순수한 능력만을 비교한다면 삼국시대 네임드의 2세들 중 손꼽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제갈근과 숙부 제갈량이 크게 경계했던 그의 오만한 성품은 제갈각의 성공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여전했던 탓에 권력을 잡은지 1년도 안되서 손준에게 암살당하고 가문을 박살내는데 일조한다. 만약에 성품이 그나마 평범했으면 어땠을까 간혹 상상하게 만드는 인물. 능력적인 부분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조차 인정했지만 안하무인의 성격은 대차게 깠다.[2]

다만 죽었을 무렵 이미 51세였던 인물로, 숙부 제갈량이 단 54세에 죽었음을 상기하면 유망주 기믹에 안하무인한 2세 이미지로 인해 창작물에서 지나치게 어리게 묘사되는 감이 있다. 죽었을 무렵 제갈각은 막장스러운 오나라의 정치판을 헤치고 나간 원숙한 기량을 자랑하는 정치인이었으며, 비슷한 시기 수차례 대결했던 위나라의 사마사에 비해 넘사벽으로 오랫동안 군사적 경험을 쌓은 지휘관이었다.[3] 어려서는 여러 일화를 낳고, 젊어서부터 미친듯한 활약의 향연을 선보였으며 대권을 잡은 이후에는 동흥제 전투에서 유망주급 기대를 부흥하다 못해 훨씬 뛰어넘는 미친듯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년도 안되서 대군을 일으켰다가 합비에 꼴아박고 반성없이 폭주해서 주살당한다. 이로써 제갈각은 본인의 평가는 물론 오의 미래 또한 크게 망쳤다. 이런 결말로 인해 호부견자중 한명으로 취급당하지만 능력만큼은 한없이 뛰어났음에도 성품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다는 점에서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한다.

즉 성품 때문에 큰 뜻을 펴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기보다는 성품 때문에 본인이 쌓아 온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며, 총평하자면 그릇에 비해 과분한 재능을 가졌던 인물로 볼 수 있다.

2. 생애

제갈각/생애 참조.

3. 평가

제갈각의 재능과 기질, 재간과 모략은 나라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만했지만 교만하고 인색하였다. 주공(周公)이었을지라도 이룬 것이 없었을 텐데 하물며 제갈각에 있어서랴? 제갈각은 자신을 과장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능멸했으니 실패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가 육손이나 동생 제갈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술한 것을 직접 실행했다면 회한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더욱이 재앙이 있었겠는가?
-『오서』 「제갈각전」 말미에 기술된 진수의 평가.
손권은 오왕이 되자 처음으로 절도라는 관직을 두어 군량미를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한왕조의 제도에는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시중이며 편장군이였단 서상(徐詳)을 이 직책에 임용했었고, 서상이 죽자 제갈각을 대신 임명했다. 제갈량은 제갈각이 서상의 뒤를 잇는다고 전해 듣게 되자,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형(제갈근)은 연로하고, 그의 아들인 제갈각은 거친 성격을 갖고 있는데, 오늘 그에게 식량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식량은 군사적인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먼 곳에 있지만, 사사로이 불안을 느낍니다. 당신이 특별히 폐하께 알려 그의 임무를 바꾸도록 하십시오.' 육손이 손권에게 아뢰자, 즉시 제갈각에게 병사를 지휘하는 관직으로 바꾸도록 했다.
-『강표전』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恪)은 비록 일이 잘못되어 적신(賊臣)에게 살해를 당했으나, 그 역시 나라를 위한 마음은 제갈첨(諸葛瞻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의 부자와 더불어 거센 물결 속에 꿋꿋이 서 있는 지주(砥柱) 같았다. 어찌 집안에서 이런 충성과 절개가 이처럼 한꺼번에 났을까? 추측컨대, 그 부조(父祖)들의 교양에 따라 그렇게 되었던 것인 듯하다. 탄복할 만하고 공경할 만하다.
-이익의 『경사문』
제갈근의 아들 각(恪)은 자가 원손(元遜)인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고, 임기응변하는 변론이 있었으므로 그와 더불어 상대할 자가 없었다. 손권이 그를 기특히 여겨, "'남전(藍田)에서 옥이 난다.'는 말은 참으로 빈말이 아니다." 하였다. 손권이 일을 가지고 각을 시험해 보려고 절도(節度)를 지키고 양곡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자 제갈량이 육손(陸遜)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가형(家兄)은 연로하고 각은 성질이 소활하거늘 지금 양곡을 주관하였는데 양곡은 군사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 나는 불안하기 그지 없으니, 지존(至尊)에게 아뢰어 전직시켜 주시오" 하였는데, 육손은 손권에게 사뢰어 즉시 전직시켰다. 제갈량은 평생 근신하고 제갈각은 재주는 많으나 소활하기 때문에 이처럼 염려하였던 것이다.

제갈각은 재기(才氣)가 남보다 뛰어났다. 식도(識度)와 아량(雅量)은 비록 제갈량만 못했으나 무슨 일이든 제갈공명을 사모하고 본받았다. 제갈공명이 유조(遺詔)를 받았는데 제갈각도 유조를 받았고, 제갈공명이 위 나라를 쳤는데 제갈각도 위 나라를 쳤고, 제갈공명이 마속을 베었은즉 제갈각도 호항과 손홍을 베었고, 제갈공명이 이엄을 꾸짖었은즉 제갈각도 주이와 손묵을 꾸짖었다. 자취만 따라서 본받는 것은 족히 화를 취하는 길이 될 뿐이다.

제갈각이 산월(山越)을 평정한 일은 제갈공명이 맹획(孟獲)을 사로잡은 일에 밑돌지 않고, 그 회남(淮南)의 승전은 기산(祈山)의 승첩보다 빛났다. 그리고 뒤에 군사를 정돈하고 성을 굳게 지키다가 역질(疫疾) 때문에 후퇴하였는데, 비록 손실은 있었으나 역시 제갈공명이 겪은 사곡(斜谷)의 패배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명(功名)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몸이 화를 면치 못한 것이 제갈량과 더불어 천양지차가 있었던 것은, 제갈량은 신밀(愼密)[4]하고 제갈각은 우소(迂疏)[5]하였으며, 제갈량은 침정(沈靜)하고[6] 제갈각은 조동(躁動)[7]하였으며, 제갈량은 겸손하고 제갈각은 거만하였으며, 제갈량은 엄격함과 용서를 병행하였는데 제갈각은 엄격과 각박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안정복의 『상헌수필』
사마대장군은 두 번 패한 것을 끌어다가 자신의 허물로 여겨서 허물은 소멸되고 업적은 융성하게 되었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에 실패를 꺼리고 허물을 밀어내며 많은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고 항상 공로만을 쥐고 실패한 것을 감추려 했다면 윗사람이 아랫 사람의 마음이 흐트러지고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니 아주 잘못 되었을 것이다. 군주가 된 사람이 만약 이 이치를 장악하여 국가를 다스린다면 실수를 행하였으나 이름을 드날릴 것이며 군사에서는 좌절하였다고 하나 싸워서는 이길 것이니 비록 백번 패해도 괜찮은데 하물며 두번인 경우에야 어떻겠는가!
-습착치의 『한진춘추』[8]
고금을 막론하고 제갈각에 대한 평은 상당히 일관적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교만하고 인격이 바르지 못한데다가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끝내 패망한 인물. 그래서인지 2차 매체에서는 제갈각의 객기를 젊은 혈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앞서 언급했듯이 제갈각은 51세에 죽었다. 숙부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렸을 무렵 겨우(?) 47세였음에도 당시 노신으로 대부분 묘사하는 것을 고려하면 삼국지 시리즈도 그렇고 제갈각을 너무 어리게 묘사하는 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갈각이 말년에 부린 객기는 초년기의 "혈기"보다는 장년기의 "꼰대짓"으로 보는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년의 실패로 인해 제갈각의 활약 또한 평가절하되는 감이 있다. 제갈각의 첫번째 활약으로 평가받는 단양 평정만 해도 호기롭게 적을 쳐부수기보다는 상당히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적의 항복을 받아내는 고단수를 사용해서 얻은 성공이다. 본인의 오만함과 교만함을 뽐내는 여러 서신들이 열전에 첨부되어 있는 덕분에 언제나 이빨까고 나대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승상 육손을 비롯한 수많은 오의 쟁쟁한 인사들을 몰락시킨 이궁의 변 시기에 제갈각은 손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살아남는 냉철한 모습을 보여줬다. 제갈각이 손화의 처 장비(張妃)의 외삼촌으로 손화파에서 제갈각만큼 혈연적 관계가 깊은 인물도 많지 않은데 살아남은 것을 보면 베테랑 정치가로의 기량을 선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탁고대신으로 처음 기획한 군사작전인 동흥제 재축조는 제갈각이 그간 쌓은 군사적/정치적 경험을 단번에 방출한 활약이었다. 기록되지도 않을 정도의 소규모 피해에 불구하고 위군의 수만명을 그대로 죽인 성과는 숙부 제갈량조차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만약에 동흥제 전투에서 돌아온 이후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더라면 제갈각은 삽질을 거듭하는 말년을 회피하고 뛰어난 전공을 거듭한 인생 전반부가 부각됨으로 만약에 제갈각이 살아있었다면...같은 IF들이 논의되었을 여지가 상당히 높다. 뭔가 위안스카이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제갈각의 삽질로 평가받는 합비신성 전투만 해도 전략수립 단계에서는 쉽게 까기가 뭐하다. 제갈각은 그냥 본인의 패기를 방출하고 싶은 그러한 욕구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1. 수십년 이내에 위나라는 촉오를 아득히 초월할 수 있다
2. 현재 위나라의 지휘관들이 세대교체 덕에 유능하지 못하다
3. 동흥제 전투의 승리를 등업어서 공격할 필요가 있다
4. 사마사의 권력은 아직 불안정하다
같은 전략적인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실제로 제갈각이 20만의 대군으로 북벌을 일으키고 강유 또한 수만을 이끌고 양주를 침공하자 위나라는 말그대로 혼비백산하여 조정에서는 제갈각의 침공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서주침공이나 대비하려고 했다. 열세의 국력에 불구하고 이같은 판을 획책해서 위나라를 위협한 인물에게 지나친 폄하를 가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당시 오나라는 촉이나 위랑 비교해 봤을 때 중앙집권력이 약했고, 군사체제는 호족들 집안에 세습되는 사병 군대를 모아서 중앙군을 편성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는 수성전에서는 호족들의 단결로 큰 힘을 발휘했지만, 나아가는 공략전에서는 누구 하나 먼저 나서려는 호족이 없을 때 '내 병사들만 손해볼 수야 없지'라는 꿍꿍이들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물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고 업적, 인기, 권모술수까지 뛰어났던 제갈각의 존재가 이런 분산력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카드이기도 했다. 오나라의 더 심각한 문제는 대국적인 비전의 부재였다. 오나라의 개국공신인 주유노숙의 시대에서는 '중원을 통일하거나, 촉한과 반반 갈라 먹는다'는 대국적인 비전이 존재했던 반면, 노숙의 죽음 이후론 그 비전이 상실된 채로 '장강 이남에서 지방 정권으로 살면 그만이지' 하는 다분히 자위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중앙집권력도 없고 대국적인 비전도 없으면 조직의 기조는 현실 변혁이 아닌 현상 유지로 흐르게 된다. 물론 이런 기조를 갖고 있다고 해서 천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위나라가 넘어가 주는 것은 아니었고, 야심만만하고 패기가 넘치는 제갈각이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동흥 전투에서 대승하고 돌아온 제갈각은 곧바로 다음 전쟁을 기획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설파한다. 이 입장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자치통감에 수록되어 있는데, 그 첫머리가 하늘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오와 위는 양립할 수 없으니 하나가 반드시 다른 하나를 병탄해야만 하다는 명료한 대국적 인식이다. 장강 이남에서 '현상 유지'하면서 지방 정권으로 살겠다는 건 두 나라의 건국 이념으로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니깐, 오나라가 위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위나라에게 먹힐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는 주유와 노숙 이후로 '거시적인 비전 없이' 오나라 국정을 이끌었던 지도층들의 무사안일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의 패기로 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제갈각은 본인이 능력이 있고, 이번에 큰 승리를 거뒀으니 여세를 몰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뛰어난 활약의 향연은 말년의 크고 원대한 삽질을 커버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제갈각의 합비신성 전역은 결국 20만 대병을 동원했음에도 대패한 패전으로 패배 원인조차 전적으로 제갈각의 실책에서 비롯한 바였다. 제갈각은 위나라에서 우려한 바와 달리 곧바로 회남으로 침공하기 보다는 합비신성을 포위/함락한 뒤, 위군의 전력이 합비신성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서 회전으로 승리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러나 오나라는 물론, 삼국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20만의 공성전을 시행하고도 그는 위군의 본대를 제때 끌어내긴 커녕 합비신성조차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여름에 출병해 20만의 대군이 피로와 질병에 죽어나가는 피해를 맛보고 퇴각마저도 너무 늦어 「경제기」에 의하면 문흠에게 만명의 수급이 베이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를 제하더라도 10만 이상의 군대가 질병에 걸렸고, 전사자들은 땅을 뒤덮었다. 똑같은 패전일지언정 222년의 조비나 234년의 손권은 군대에 질병이 돌자 즉각 퇴각하여 피해를 최소화했으나, 제갈각은 아집으로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는 더욱 가관으로, 실패의 원인을 남에게 떠넘김은 물론, 올바른 간언을 올린 하급관원들마저 질타한 것도 모자라, 친한 사람들은 공직에 넣는 부정부패를 벌이며 또 다른 원정을 계획하는, 그전까지의 공훈이 없었더라면 가히 난신적자라 불러도 무색치 않을 무리수를 거듭했다. 때문에 이전의 화려한 활약은 사실상 물건너가고 손휴에게 복권된 이후에도 합비신성에서의 실패와 그 직후의 모습 때문에 공훈을 기리는 비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들어야했다. 말 그대로 판은 잘 짰으나 본인의 무능함으로 망친 셈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제갈각은 국제정세를 살펴보고, 정책을 취해 국익을 돕고, 전략을 도모해 적군을 격파하는 등 보좌하는 역할에 뛰어났지만 인격적 결함으로 인한 리더쉽 결여는 그를 무능한 사령관으로 만들었다. 손권이 죽기 전에 제갈각이 "스스로 멋대로 할 것"이라 생각해서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제갈각의 한계를 매우 정확히 본 것이다.[9] 제갈각은 고삐를 붙잡아줄 사람이 제갈근손권 사후에는 사실상 없었고 덕분에 제갈각의 폭주는 동흥제 전투라는 잭팟을 터트렸지만 반대로 합비신성 전투의 실패와 말년의 실책의 향연을 유발했다.

합비신성 전투는 대패로 끝났고, 제갈각은 주변 세력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몰락한다. 정치는 언제나 지지세력으로 하는 것이다. 제갈각은 문화, 사상, 담론, 경제적 구조 변동이라는 밑바닥 층위에서부터 세력을 형성해 갔어야 했는데, 몇 번의 전쟁 승리와 퍼포먼스, 요행수 같은 걸로 그걸 실현해낼 줄 알았던듯하다. 그가 유능했기 때문에 몇 번의 번뜩이는 효과는 있었을 줄 모르나, 그런 번뜩임은 지속가능하게 재생산되지 않고, 후대와 타인으로 대물림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몇 번의 표면적인 승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위태로운 구도 속에서,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만다. 결국에는 제갈각의 인화력은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제갈각 지지층 결집도 뚜렷하지 않기도 했고. 결국 자기 지지층을 만들려면 본인 스타일과 이미지 관리에 좀 더 신경쓸 필요가 있었겠지만 제갈각은 거기에 실패했다.

이에 포함되지 않는 오나라 후기 인물이 몇이나 되겠냐만은 만약에 손등이 황제로 즉위했다면 제갈각은 단점이 부각될 일 없이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숙부와 아버지 못지 않은 걸물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손등은 말똥드립으로 볼 수 있듯이 제갈각과 거의 격 없는 사이인데다가 어린 손량과 달리 정통성도 그렇고 나이도 그렇고 제갈각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그런 거 없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제갈각의 주살은 오나라의 역사가 겉잡을 수 없는 막장으로 흘러나가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유비, 조비, 조예가 죽어서 황제계승을 맛본 촉위와 달리 오나라는 처음으로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게다가 오나라는 특유의 사병제도 덕분에 군주와 장군들간의 주종관계가 중요했고 이궁의 변으로 조정이 손화파와 손패파로 갈리는 혼란을 맛본데다가 어린 손량이 즉위한만큼 그를 보좌해야하는 제갈각의 책임이 막중했다. 오나라는 말그대로 흥망의 갈림길에 있었던 셈이고 제갈각을 대신한 손준, 손침의 집권은 오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제갈각은 군사적 승리로 중앙정부의 위상을 상승시키려 했다는 평가도 존재하지만[10] 합비신성 전투 이후 제갈각의 행동은 득없이 무모할 뿐이라 뭐라 해석하기조차 어렵다.

어쨌든 합비신성 전투 이후에 충분히 재기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르친 일련의 과오와 이른 죽음이 오나라의 쇠망에 일조했다는 점 하나만큼은 명백하다. 뛰어난 기량에 나름대로의 목표의식에 불구하고 일년도 안되는 세월에 행한 뻘짓 덕에 이전의 공로와 활약이 부정당하고 호부견자로 평가받는 것은 어찌보면 가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충분히 기회가 있었고 그걸 알아차릴 능력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가혹하게 평해야할지도 모른다. 아버지인 제갈근이 정치면에서도 나름의 족적을 남기고, 병사들의 목숨을 아끼는 전법을 병행하며, 나라의 건실함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권신급 권력을 가졌음에도 찬탈을 탐하지 않고 오의 천하통일만에 집중한 것은 뭐라 평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11][12] 겨우 2년 남짓한 세월 동안 집권한거라...

한줄로 평하자면 인격이 한없이 뛰어난 능력을 감당 못한다면 벌어지는 참사라 할 수 있겠다.

4. 야사의 기록들

4.1.삼국지연의

야사는 아니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위의 신동일화 중 몇개를 서술함으로 총명한 듯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하지만 합비신성에서의 굴욕은 여전해서 제 성질을 못이겨 마구 군사들을 몰아대다가 장특에게 얼굴에 화살까지 맞는다. 안습.

4.2.수신기

중국의 괴담 모음집이라 할 수 있는 『수신기』에서는 제갈각에 대한 일화 두개를 전한다.

그중 하나는 제갈각이 단양태수로 있었을 때의 일화다. 제갈각은 어느 날 사냥을 나섰다. 어느 계곡을 지나던 중 어린 아이같이 생긴 짐승 하나가 손을 뻗어 제갈각을 당기려 했다. 제갈각이 오히려 손을 뻗어 끌어당기자, 그 짐승은 바로 죽어 버렸다. 사람들이 신기한 재주라며 칭찬하고 부하들이 감탄하자 제갈각은 이 짐승은 계낭으로 요괴 백과사전인 『백택도』에 나와 있으며, 단지 당신들이 그 책을 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또 다른 일화는 「제갈각전」에 배송지가 기재한 내용이다.

제갈각이 연회장에서 주살당했을 무렵, 제갈각의 부인은 집에서 노비들과 같이 있었다. 부인이 말했다.
"왜 너한테서 피냄새가 나느냐?"
여자 노비가 답했다.
"안 나는데요?"
잠시 후, 냄새가 더욱 심해졌다. 부인은 다시 물었다.
"너 눈동자 좀 치켜떠 보아라 어찌 평상시와 다른가?"
그러자 여자 노비가 펄쩍 뛰어올라, 머리가 기둥에 찧으며, 팔을 걷어부치고 이를 갈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제갈공께서 손준에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제서야 모든 식구가 제갈각이 죽은 것을 알게 되었다. 뒤이어 관리와 병사들이 들이닥쳤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위에서 읽을 수 있듯이 제갈각의 아들 두명은 상당히 멀리 도망친 바여서 위의 기록과 상충된다. 다만 상당히 섬뜩한 것은 사실.

4.3.세설신어

세설신어』에서도 제갈각이 등장하는데 역시 성격 더러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오히려 말빨에서 밀려서 털린다(...). 출처[13]

제갈근이 예주자사로 있었을 무렵의 일화로 제갈근이 별가를 상서성으로 신부름을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그곳에 있을텐데 남과 얘기 하기를 좋아한다."
별가는 그후로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을 몇번 찾아갔으나 제갈각은 요상하게도 별가와 대화를 나누려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제갈각과 별가는 장보오의 집 모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제갈각을 만나게된 별가는 이렇게 소리쳤다.
"대단한 낭군님!"
그러자 제갈각은 오히려 비웃으며 별가를 비꼬며 말했다.
"예주가 어지러운데, 무슨 대단한 것이 있다고?"
별가가 이렇게 대꾸했다.
"윗사람이 현명하고 신하가 어진데, 그곳이 어지러워졌다는 소리는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제갈각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옛날 당요같은 성현의 아래에도, 네 명의 흉악한 놈들이 있었소."
별가는 참을 수 없어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래요. 어찌 넷 뿐이오? 또한 요의 아들 단주같은 녀석도 있었는데!"
이에 그 자리에 앉았던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실제 역사였더라면 아주 흠씬 개털었을텐데

5. 엉클콤?

"이것은 적과 우리가 끝까지 오랫동안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한 것일 뿐이다. 나는 언제나 형한이 공손술에게 출병하여 천하를 취하는 계책을 설명한 것을 보고 있으며 근래에는 집안의 숙부가 표를 올려 적과 천하를 다투는 계책에 관해 진술한 것을 보았는데 일찍이 탄식하지 않았을 때가 없었다. 나는 밤이 되면 몸을 뒤척이며 이런 것을 생각한다."[14]
-『오서』 「제갈각전」에 기재된 제갈각의 '논하는 글'中
"제갈량은 제갈각이 서상의 뒤를 잇는다고 전해 듣게 되자,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형(제갈근)은 연로하고, 그의 아들인 제갈각은 거친 성격을 갖고 있는데, 오늘 그에게 식량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식량은 군사적인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먼 곳에 있지만, 사사로이 불안을 느낍니다. 당신이 특별히 폐하께 알려 그의 임무를 바꾸도록 하십시오. 육손이 손권에게 아뢰자, 즉시 제갈각에게 병사를 지휘하는 관직으로 바꾸도록 했다."
-『오서』 「제갈각전」에 기재된 『강표전』中
요상하게도 제갈각은 '논하는 글'에서 숙부 제갈량을 언급하는데 덕분에 아예 '엉클콤(...)', 즉 숙부인 제갈량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던 것 아니었냐는 의혹이 존재한다. 물론 유비 패왕설과 비슷한 개그설이긴 하지만 하지만 소위 낚시에 가까운 유비 패왕설과 달리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
1. 앞서 언급한대로 '논하는 글'을 통해서 후출사표를 언급했다.
2. 손량의 즉위와 함께 채택된 연호가 제갈량이 집권했을 때 사용했던 연호인 건흥이다.

그리고 제갈각의 '논하는 글'은 여러 사람들이 거의 총대매고 반대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쓴 장문의 글인데 숙부님의 "후출사표"를 명분쌓기 및 권위빌리기용으로 활용한 것을 보면 제갈량의 권위가 충분히 이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거의 유아독존의 성격을 가진 제갈각의 성향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데 종종 제갈각이 아예 북벌에 몰두한 이유가 숙부를 상당히 의식했기에 그랬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다른 면으로 '논하는 글'에서 후출사표를 언급하는 구절 때문에 장엄이 제갈각과 친했다는 점과 맞물려서[15] 제갈각이 명분쌓기용으로 숙부의 출사표를 활용하려던 게 아니냐는 논리로 후출사표 위작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위작설과 그에 대한 반박에 대해선 출사표 문서 참고.

여담으로, 주변에서도 제갈각의 숙부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그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모로 의식했던 듯 하다. 손권이 '네 아버지숙부 중 누가 더 똑똑하냐'라는 질문을 던진 적도 있었고, 촉한의 사신들과 엮인 이야기도 유독 많다. 정작 제갈각이 숙부에게서 받은 평가는 위에 기술한 대로 내 조카는 성격이 더럽다이지만(...).

5.1. 숙부와의 비교?

간혹 제갈각은 숙부 제갈량과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둘은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 같은 제갈씨 가문의 인재.
2. 군주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또는 공식적으로) 전권을 갖고 통치함.
3. 각각 단양 평정과 남만정벌을 벌이고 성공함.
4. 북벌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이 때문에 제갈량을 비난하기 위해서 제갈각과 함께 북벌을 하다가 망했다는 투로 둘을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위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해석이라 해도 무방하다. 제갈각은 결국 지도자로서 대실패한 반면 제갈량은 국가를 다스리는 재상으로 생전은 물론 낙곡대전을 비롯해 사후 촉한이 30년이나 버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제갈량은 총 5번의 북벌을 추진했음에도 가정 전투 외에는 패배했다고 볼만한 전투가 없었으며, 제갈각의 20만 대군이 제대로 후퇴하지도 못한 채로 말 그대로 붕괴한 것과 달리 제갈량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매번 후퇴에 성공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심지어 퇴각하는 과정에서 왕쌍, 장합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5차 북벌에서 제갈량 사후 퇴각 명령에 반기를 들고 위연이 내분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이 역시 시기적절한 조치가 취해지면서 북벌군이 위군의 추격에 전멸하는 일만은 방지했다.

특히 제갈량과 제갈각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부분은 각자 북벌 이후 행한 대처법이다. 1차 북벌의 실패가 제갈각의 합비신성 전투의 실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미한데다가 마속을 채택한 인선 외에는 실수라 할만한 부분이 없었음에도 제갈량은 몸소 관직을 깎고 본인의 실패를 난타하는 글을 올려서 가장 큰 책임은 본인이 진다는 점을 확실시하고 총애하던 마속을 베어 군의 규율을 바로잡았다. 지도자로서 한 집단에 대한 책임을 몸소 보인 셈인데 제갈각은 그러한 인덕이 부족해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 탓으로 몰고 오히려 또 다른 외정을 즉시 준비하는 등 모두의 공분을 샀다. 지략가로서 제갈각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지도자로서의 제갈각은 영 아닌 셈이었다.

제갈량의 북벌이 촉을 망하게 만든 계기라는 해석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제갈량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득이 되었으면 모를까 해가 된 적은 없다. 하다 못해 관중, 농서를 손에 넣는다는 일차적인 목표가 실패했고 촉한의 국력에 해가 되었다고 쳐도, 제갈량은 북벌에서 소모한 이상의 국력을 축적한 명재상이었다. 그에 비해서, 제갈각은 패전 한번으로 나라가 엉망진창(...). 즉 내실에서부터 숙부 제갈량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건국군주 유비와 함께 건국공신으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제갈량과는 다르게,[16] 제갈각은 이궁의 변으로 묵사발나고 분단된 조정을 비교적 약한 권위와 함께 물려받았다. 게다가 오나라는 처음으로 황위계승을 겪고 있었으며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은 주종개념을 손권에서부터 손량으로 옮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게다가 토착호족들의 세력이 강한 오나라 특성상 국론통합이 어려웠다. 즉, 제갈각은 오나라의 활로를 뚫겠다는 의미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본받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제갈각의 '논하는 글'에서 처음 언급하는 천하통일의 명분, 즉 한 하늘에 해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제갈각 나름대로 북벌의 명분을 세우고 일종의 국가목표를 천하통일로 두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제갈각은 제갈량과 달리 실패시의 피해를 최소화하지도 못하고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했으며 본인의 실패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남의 공분을 살 짓을 골라서 했다. 여러번 언급한 부분이지만 제갈각은 지도자로서의 그릇없이, 오나라의 미래의 갈림길을 앞두고 있는 중요한 상황에서 여러번 과오를 저지르며 사실상 자신이 주살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런 의미에서 제갈각과 제갈량 간의 차이는 넘사벽이라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제갈각 자신은 숙부만큼 잘난 인물이 되고 싶었고 어느정도 능력도 있었지만 정작 행보와 업적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6. 미디어 믹스

제갈각/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 아이러니하게도 자(字)에 들어간 손(遜)은 겸손하다는 뜻이다. 굉장히 오만한 제갈각의 성격과 딱 반대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만한 아들이 겸손해지길 바라는 뜻에서 지었는가보다[2] 진수는 유능해도 성격적 결함이 있으면 반드시 깠다. 관우, 장비, 반장, 위연처럼 유능하지만 성격적으로 두드러진 단점이 있는 인물들도 "유능한 건 맞는데 성격이 영 아니야."라는 평을 남긴 건 유명하다. 반면에 유비제갈량, 황충, 조운 같이 능력과 인품 모두 갖춘 인물은 후하게 평가해줬다.[3] 사마사는 오히려 군사적 업적은 그 절륜한 정치력에 비해 훨씬 초라하다.[4] 신중(愼重)하고 면밀(綿密)함.[5] 세상(世上) 물정(物情)에 어둡고 민첩(敏捷)하지 못함.[6] 성정이 차분히 가라앉고 조용함[7] 경거망동함.[8] 내용 자체는 사마사의 현명한 모습을 찬하는 글이다. 그럼으로 해당 평에서 제갈각에 대한 부분은 1% 조차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동흥제 전투의 패배에 대한 사마사의 대처가 합비신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제갈각의 대처와 정반대인데다가 습착치가 사마사가 삼갔기에 성공한 행동들을 묘사하는데 묘하게 제갈각의 행보에 딱 들어맞는만큼 기재한다.[9] 그러나 손권의 이궁의 변으로 인해 조정에 인재가 사그러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제갈각을 섭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제갈각의 권신화는 전적으로 손권의 책임이라 볼 수 있다.[10] 가와카쓰 요시오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11] 덕분에 이익은 제갈각을 제갈량 부자 못지 않은 충신으로 평했다.[12] 하지만 제갈각의 오만한 성격을 고려할 때 만약 동흥제 전투에 이어서 합비신성 전투까지 성공했으면 사마사, 사마소와 달리 찬탈의 길을 걷지 않았을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13] 다만 이 번역에서는 제갈으로 오역되었다. 안습.[14] 사실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게 "밤이 되면 뒤척인다"는 것은 숙부를 생각하느라(...) 그런다는게 아니라 앞서 논의한 전략적 문제를 논의하면서 잠을 못잔다는 것이다.[15] 다만 제갈각과 장엄간의 관계는 현재 번역된 『정사 삼국지』의 한계상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장엄은 열전없이 기록된 부분도 매우 짧은데 제갈각과 함께 등장하는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는다.[16] 다만 이릉대전을 보면 알겠지만 이 대전에서 촉군의 수많은 인재와 병사들이 죽어 인재가 부족하고 유비가 사망하고나서 뒤를 이은 유선은 아직 어렸다. 제갈량이라고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