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03:22:12

제갈량의 남중 정벌



파일:Zhuge Liang's Southern Campaign.png

1. 개요2. 배경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4. 연의

1. 개요

제갈량의 남중 정벌은 제갈량유비 사후 익주 남부의 반란을 평정한 사건을 말한다.

2. 배경

손권은 자신에게 복종한 교주사섭을 사주하여 익주 남부의 호족옹개 등을 포섭하게 했다. 이에 옹개는 장예를 포박해 오나라로 보내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월수군의 이민족고정도 초황을 살해한 후 옹개에게 동조했고, 장가 태수 주포도 종사 상방을 죽인 뒤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남만의 부족장 맹획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회가 계책으로 옹개를 대파한 뒤 반란군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고정이 부하를 시켜 옹개를 살해하였고, 주포 역시 마충에게 토벌되어 죽은 후, 제갈량은 맹획을 감화시켜 마침내 남중을 평정하였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가을, 마침내 4군을 평정했다. 익주군을 고쳐 건녕군(建寧)으로 삼고, 이회를 태수로 하였고, 안한장군(安漢將軍)을 더하고, 교주자사(領交州刺史)를 맡도록 했으며, 치소를 미현(味)으로 옮겼다. 건녕군, 월수군(越巂)을 나누어 운남군(云南郡)을 설치하고, 여개(呂凱)를 태수로 삼았다.

또 건녕, 장가군을 나누어 흥고군(興古郡)을 설치했다. 마충을 장가태수(牂柯太守)로 삼았다.

남중의 경졸(勁卒=강병), 청강 만여 가를 촉으로 옮겨 5부로 삼으니, 그 앞에 당할 자가 없었고, (이를) 비군(飛軍)이라 불렀다.

또 그 연약한 자들을 대호족 초(焦), 옹(雍), 누(婁), 찬(爨), 맹(孟), 양(量), 모(毛), 이(李)씨에게 나누어주어 부곡으로 삼고, 오부도위(五部都尉)를 설치하였으며, (이를) 오자(五子)라 하였으므로, 남쪽 사람들은 말하길 '사성오자(四姓五子)'라 하였다.

이(夷)족엔 강한한 자들이 많아서, 대호족과 부호를 따르지 않았기에, 이에 금과 비단을 내어 성질나쁜 이족을 초빙해 가문의 부곡으로 삼도록 권하고, (부곡을) 많이 얻은 자는 칭찬하고 관직을 세습시켜 주었다.

이에 이인들이 재화를 탐하게 되어, 점점 한에 복속하게 되었고, 이족과 한족이 부곡을 이루었다.

제갈량은 남중의 준걸 건녕(建寧)의 찬습(爨習), 주제(朱提)의 맹염(孟琰) 및 맹획(孟獲)을 거두어 관속으로 삼았는데, 찬습은 관직이 영군(領軍)에 이르렀고, 맹염은 보관장군(輔官將軍), 맹획은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남중의 금, 은, 단, 칠, 밭가는 소, 전마가 군국(軍國)의 비용으로 생산되었다.

(내항)도독은 항상 신중한 사람을 기용하였다.
화양국지』 「남중지」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통해 청강 1만여 가(家)를 으로 이주시켜 무당비군(無當飛軍)으로 편성했고, 남중의 , 등 자원을 얻어 북벌의 군수물자로 사용하는 등의 단기적 성과를 얻었다. 또한 찬습, 맹염, 맹획 등 현지 인사들도 중앙에 기용했다.

남중 지역의 통치에 대해선 현지 유력가들을 기용하는 한편으로, 기존 남중 4군[1]과 유비가 신설한 주제군을 7군[2]으로 재편하고 내항도독이 통솔하도록 하여 남중을 군현 체계에 더 확고히 편입시키려 했다.

3.2. 부정적 평가

여개를 운남태수(雲南太守)로 임명하고 양천정후(陽遷亭侯)로 봉했다. 마침 여개는 반란을 일으킨 만족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아들 여상(呂祥)이 후사를 잇게 되었다.
『삼국지』 「여개전」
이후에 군대가 돌아오자, 남방의 만족은 또 반란을 일으키고 수비하던 대장을 살해했다. 이회는 직접 토벌에 나서 흉악한 행동을 한 무리들을 근절시키고, 그곳의 유력자들을 성도로 이주시키고, 수(叟)와 복(濮)땅에서 밭가는 소, 군마, 금은, 무소 가죽을 공물로 납입하도록 하여 지속적으로 군용 물자를 충당했으므로 당시 비용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삼국지』 「이회전」
이전에 월수군(越嶲郡)에서는 승상 제갈량이 고정(高定)을 토벌한 뒤 수이(叟夷)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태수 공록(龔祿)과 초황(焦璜)을 죽였다. 이때부터 태수는 감히 군으로 가지 못하고 군으로부터 800여 리(320km) 떨어진 안상현(安上縣)에 머물렀으므로 그 군은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삼국지』 「장억전」
남방은 먼 곳의 만족이 거주하는 땅으로 평상시 조정을 위해 세금을 바친 일이 없고, 오히려 여러 번 모반을 하였는데, 승상 제갈량이 남정하여 군대의 위력으로 그들을 핍박하자, 그들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귀순했습니다. 이 이후로 그들은 조정에 세금을 납부하였고, 그것을 취해 군사비용으로 제공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원수가 되어 국가를 해롭게 하는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지금 조정이 곤경에 처해 급박한 상황이므로 그곳으로 가서 의지하려고 하는데, 아마 반드시 또 모반할 것입니다.
『삼국지』 「초주전」

전통적인 숭촉 촉한정통론식 연구의 시대가 끝나고 현대적인 실증사학의 시대가 오자 제갈량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작성된 양양기 등의 서술과는 달리, 실제로는 제갈량이 남중에서 군대가 회군하자 다시 반란이 빈번히 발생했고, 촉에서 파견한 지방관 다수가 살해당하며 통제력이 저하된 부작용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들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익주 출신 지방관들인 이회 → 장익 → 마충으로 이어지는 내항도독 라인의 지속적인 토벌이 있었으며, 233년 유주의 대규모 반란을 마충, 장억 등이 진압하고, 장억이 240년에 월수군을 새롭게 정복하는 등의 장기적인 노력 끝에야 남중 지방은 안정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실제 역사 상 남중에 대한 촉의 지배와 이를 통한 행정 구역을 그나마 어느 정도 확립한 것은 이회, 마충, 장억 이 세 사람의 공로이지 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의 공로는 아니다.

오히려 제갈량은 단순히 현지인과 마찰을 빚기 싫다는 이유만으로[3] 아직 현지의 안정과 행정구역화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닌데도 군대를 바로 철수시키는 바람에 현지 협력자 여개가 제갈량군의 철수 직후 살해당하고 남중과 촉을 잇는 지역인 월수군이 다시 촉에서 이탈하는 등, 단순히 남중의 반란을 진압하고 공물만 받았을뿐 제대로 된 남중 정벌을 했다고 보기엔 힘든 감이 있다.

동시기 오에서 계속 이반하려는 교주 등의 지방세력에 계속 군사력을 투입하여 통치를 이어나가려던 것처럼 애초에 외지 세력인 촉이 남중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결국 '적의 마음을 얻는다' 류의 애매한 명분보다는 군사적 거점을 세우고 일관적인 행정적 지배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야 하는 것인데 제갈량은 이후의 익주 호족 출신 남중 내항도독들과 달리 어떠한 일련의 이런 노력을 스스로 기울인 바가 없었다. 그의 이 지역에 대한 정책적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사업인 북벌을 위한 물자수탈에만 치중하고 있었으며 세부적인 남중에 대한 통치는 오로지 익주 호족 출신 지방관들인 내항도독들과 화양국지에도 나오듯이 현지 유력자들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남중의 제대로 된 행정구역화는 제갈량의 죽음으로 촉의 북벌 정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이후 북벌 정책을 중지하고 익주 내부로 눈을 돌린 그의 후임들인 장완, 비의 시절에야 비로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촉의 덕정이 펼쳐진것처럼 표현되는 일부 설화나 연의의 묘사와 달리 초주전에서 초주의 술회를 보면 남중 민심이 수탈로 인해 촉 중앙에 적대적 여론은 촉 멸망 당시까지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촉은 제대로 된 개발과 내정 정책을 펼치지 않고 오로지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하는 정책에만 집중한 국가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촉은 직백오수라는 당백전 악화를 정권 존속기간 내내 발행해 시뇨리지로 백성을 수탈하여 재정을 확충했으며 제갈량 본인조차 촉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준 이릉대전 이후 익주가 몹시 피폐하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런 피폐한 촉 상황에서 남중을 수탈함으로서 제갈량이 수행한 대규모 전쟁에 필요한 군국의 물자가 충당되었다고 할 정도면 수탈의 강도는 상당히 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대로 된 지역 개발과 환원이 남중에 없었던 만큼 남중의 불만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현재의 운남성 지역은 현대 중국에서도 한족 외의 소수민족들이 많은 지역으로 꼽히고 명청시대까지도 현지 토사들에게 통치를 위임하던 지역이라 이 당시 촉이 운남을 완전히 영토화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지역이었다. 동시기 오가 산월을 완전히 국가에 편입해 산월을 비롯한 월족계 이민족이 오늘날 남중국인에 완전히 동화된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제갈량의 남중 정벌이 완전히 잘못된 정책이라는 얘기는 비단 현대 역사가들만의 연구결과만은 아니다. 이미 숭촉 기조가 확연하던 조선의 실학자인 이익조차 제갈량의 남중 정벌은 계획부터 실행, 후속조치가 완전히 잘못된 원정이라고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비판한 바가 있다.
제갈량이 남방(南方)을 정벌할 때 왜 그렇게 불같이 빨리 서두르고 다른 곳보다 먼저 계획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중원도 회복하지 못하고 대의(大義)도 밝히지 못했는데, 어찌 이런 일은 버려 두고 먼데 것을 구할 수 있겠으며, 더구나 5월 한여름에 열대 지방으로 깊이 쳐들어 갈 수 있겠는가?

장가(牂牁)ㆍ월수(越雟)ㆍ고애뢰(古哀牢)는 지대는 험조하고 동떨어진 먼 곳이다. 이보다 먼저는 남쪽 지방 도적이 침략해 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이후에도 맹획(孟獲) 같은 이가 정벌을 도와 공을 세운 일은 없었다. 일곱 번이나 적을 놓아 주었다가 다시 사로잡아 군사를 괴롭히고 위엄을 손상시켰으니, 그가 병에 걸려 죽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었다. 나는 이것은 제갈량의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처음 생각으로는 반드시 남쪽 지방을 정복하고 천하를 크게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옹개를 이미 목베어 죽인 후에는 맹획이 또 배반했으니 이는 한갓 원망만 맺은 셈이다. 그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하고 다만 원망을 맺어 도적을 불러 들이는 것은 또한 지혜가 밝은 자로서는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다.

이러므로 그의 정벌은 조금 물려서 여러 가지 일이 대강 안정된 후에 조용히 했어야 할 것인데 이렇게 불같이 바삐 한 것은 부득이해서였다지만, 가령 금은과 우마(牛馬)를 취해서 군용(軍用)을 넉넉히 만들 수 있었다 할지라도 만약 이런 계획을 갖고 정벌을 일으켰다면, 이것이 바로 잘못된 계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개 마속의,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 는 말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9년 만에 제갈량이 죽었고 또 6년을 지난 후에는 장억으로 태수를 삼았다. 그 밑에 "이전에 월수가 자주 배반하여 태수를 죽였다." 하였으니 이 '이전에'라는 말로 미루어 본다면 (불과) 수년 동안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즉 남쪽 사람이 다시는 배반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군법(軍法)이란, 우선 소문부터 낸 다음에 실행하는 것도 있고, 또는 스스로 다스리면서 시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천촉(川蜀)은 지대가 중국과 아주 동떨어져 있으니, 그 지세로 본다면 한구석에 있으면서 제대로 영웅 노릇을 할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남쪽으로 오랑캐에게 군림하게 되면 적에게도 위엄을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적에게 위엄을 보이기도 하고 은혜를 베풀어서 오도록 하여 그들이 두려워하여 다스려 주기를 희망하도록 한 다음에 한 번 군사를 일으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양책(良策)일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도 역시 사람이니 어찌 백 번 꾀해서 백 번 다 잘못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성호사설』제20권 「경사문(經史門 )」제갈 남정(諸葛南征)출처

4. 연의

연의에서는 이 남중 정벌이 남만 전역에 대한 정벌로 확대되고, 맹획을 7번 잡았다 풀어주는 것을 반복하는 칠종칠금을 통해 맹획을 굴복시킨다.
[1] 월수, 장가, 익주, 영창[2] 월수, 장가, 건녕, 영창, 주제, 운남, 흥고[3] 당시 제갈량이 남중을 정벌한 목적은 신속한 정벌을 토대로 본인의 위상을 빠른 시일내에 높이고 본인의 숙원인 북벌을 곧바로 진행하기 위한 식민지로 남중을 사용하려는 목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 정벌을 전후하여 유비의 또 다른 탁고대신 이엄이 가지고 있던 촉의 군권을 자신이 가져와 남정과 북벌에 사용했으며, 이엄이 군량을 자신에게 제대로 보급해주지 못하자 자신에게 칭왕구석을 권유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숙청을 위해 공개하여 그를 실각시켰다. 또 이 정벌 성공의 공로로 제갈량은 구석의 일부인 부월과 호분(무장한 호위병)을 특전으로 수여받았는데 후대의 기록인 진서 환온전의 기록에 따르면 환온은 제갈량이 자신에게 속한 무장한 병사를 조정에 들였던 일화를 인용해 자신 역시 무장병을 조정에 들이는데 사용할 정도였다. 또한 제갈량은 남정 2년 후에는 남중에서 수탈한 물자를 토대로 본격적인 북벌에 착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