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4:25

유파(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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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巴

?년[1] ~ 222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유비 휘하2.3. 직백전 발행 주도2.4. 촉한의 기틀을 세우는 데 기여2.5. 장비와의 갈등2.6. 유비의 한나라 황제 즉위 반대2.7. 처세와 말년
3. 평가
3.1. 반 유비파의 우산?3.2. 과연 무조건 유비를 적대한 인물인가?
4. 대중 매체에서의 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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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조조, 유장 휘하,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며 는 자초(子初)로 유상(劉祥)의 아들. 형주 영릉군 증양현 사람.

유비가 싫어서 피해다녔지만 끝끝내 유비의 신하가 된 흥미로운 행적을 가지고 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본래 유표의 객으로서[2] 유선(劉先)이 신동으로 유명한 조카 주불의의 스승으로 초빙하려 했으나 거절했다.

이후 유비가 유표 사후 남하할 때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이 뒤를 따랐으나 그는 가지 않고 대신 조조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후 조조에게 형주 남부 4군을 복속시키라는 명을 받았다.[3] 유파는 "가다가 유비 만나면 어쩌겠습니까. 가지 않겠습니다."[4]라고 하자 조조는 "그럼 내가 군대[5] 보내 보호해주겠다."해서 겨우 남하했다.

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형주 4군을 공략하여 점령하였고, 이때 유파는 영릉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유비가 초빙하려 하자 그대로 교주 땅으로 피신해서 성씨를 장(張)씨로 고쳤다. 하지만 교지태수 사섭을 떠나 으로 망명 하였다.

촉으로 들어가서도 목숨의 위기를 겪으나 촉의 관리가 그를 예사롭지 않게 보아 추천해 유장의 막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때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인재 보는 눈이 있는 유비가 이럴 정도면 상당한 능력은 가지고 있던 것 같다.

2.2. 유비 휘하

이후 유장 휘하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나, 유비가 익주침공을 감행하여 점령하였을 때 다시 도망치려 했으나 붙잡혔고, 제갈량이 "이제 도망칠 곳도 없으니 그냥 따르시지요?"라고 설득하자 별 수 없이 유비에게 사과하면서 굽히고 들어갔고 유비도 매우 기뻐하며 받아들여 그야말로 삼고초려에 필적하는 쫓고 쫓기기 끝에 유비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2.3. 직백전 발행 주도

이후 유비가 익주 함락 후 국고가 부실한 것을 걱정하자 "이 일은 쉽습니다. 다만 100전 짜리 돈을 주조한다면 여러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으니, 관리들로 하여금 관청(또는 관시, 官市)에서 교환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조언을 하여, 화폐개혁 정책으로 단 몇 개월만에 부고를 충실하게 하여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이 부분에서 《촉서》 〈선주전〉과 〈유파전〉 주석 《영릉선현전》은 일견 세세한 부분에서 서로 충돌하는 듯 보이나, 양립가능하다. 《영릉선현전》에는 유비가 "나는 성도의 부고(府庫)를 안 건들겠다.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6]"라고 선언했지만, 〈선주전〉 서술로는 유비가 성도의 항복을 받아내고 직접 촉성의 금은을 취해 제장들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군졸들에게 크게 베풀었다고 되어 있다. 사실 〈장비전〉이나 《화양국지》에 유비가 제갈량, 관우, 장비, 법정을 비롯한 제장들에게 물품을 하사했다는 직접적인 기록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부고를 연 주체는 익주의 행정을 장악하고 논공행상을 시행했을 유비일 가능성이 더 높다. 또 《영릉선현전》은 군용물자가 부족하다고 되어 있는데 〈선주전〉에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정사 본전인 〈선주전〉에 따르면 익주의 창고가 무조건 고갈되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군용창고는 확실히 고갈되었다.

물론 《자치통감》에도 있는 에피소드고 중국어 위키백과에선 '유비가 촉에 들어오자, 파촉지역은 재정이 혼란에 빠졌고, 유파는 직백전을 주조하고 물가를 균형 있게 하여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중 오수전은 직백전과 함께 건위군에서 주조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며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라는 책에선 '익주 평정후 직백전(直百錢)을 주조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개월 만에 국고를 충실케 했는데, 전시의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화폐의 작용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라고 쓰여 있고 바이두 백과 직백오수(直百五銖)문서에는 '연이은 정벌로 재정이 불안해졌는데 큰 값을 가지는 화폐로 간신히 유지시켰고 직백전 발행은 촉한의 경제 발전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서 부고가 충실해졌다.'라는 기술이 있는 등 직백오수를 발행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후한 말 무렵 중국의 화폐경제 상황의 맥락을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한영제 말기인 186년에 이른바 사출오수라는 돈이 발행된다. 중량이 3.6-4그램 정도 되었다, 이게 동탁이 나타나면서 기존의 오수전들을 다 부숴다가 조잡한 소전으로 바꾸었다. 이때 동탁의 소전은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5푼짜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고 이걸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0.5-1그램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한마디로 돈의 가치가 순식간에 5~7배 이상 폭락한 것이고 그나마도 불순물이 섞이고 돈으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어놔서 돈의 가치를 상실한 물건들이 대다수였다. 그 결과 발생한것이 후한말의 초인플레이션 및 화폐경제의 붕괴로 기존의 수천배에서 수만배의 물가 상승과 돈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된 소전의 유통으로 인해 화폐경제가 붕괴되었다.[7][8]

이런 상황의 맥락에서 유비가 입촉 후 발행한 직백오수전은 단순히 기존의 화폐에서 가치만 올린 화폐가 아닌것으로, 기사의 설명에 따르면 유비가 처음 만든 직백오수전은 8~9.5그램의 중량급 화폐였다. 금속의 무게를 기준으로 이전 사출오수전에 비해서도 2~3배, 동탁의 소전에 비하면 최대 20배 가까운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나, 기존 통화의 백 배의 액면가를 가지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악화나 다름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 경제법칙으므로, 유비과 강제로 관시를 열자 직백오수전은 빠르게 통용되었다. 유파는 흥선대원군의 당백전과 같이 악화를 발행하고 이를 통한 시뇨리지를 얻어 부고를 채운 것이다.

또한 유파전, 선주전, 조운전을 종합하면 유비의 입촉 이후 임시적으로 시행되었던 경제정책을 알 수 있는데, 당장 작살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악화가 다량으로 발행되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익주의 부고를 채우려는 수탈적, 폭압적 조치였던 것이다. 그를 증명하는 것이 유파전으로, 아무리 국가가 민간 상업활동에 참여해 물품을 구매하자는 정책이더라도, 당장 물자가 없어 부고가 텅텅 비었다는데 무슨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조세를 거둬 부고가 금세 풍족해진다는 것인가?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대장정 당시 마오쩌둥이 있다. 대장정 당시 들른 마을들에서 마오쩌둥은 임시로 화폐를 발행해 물자를 '보충'하고 지역을 '안정'시켰다고 <화폐전쟁>에서 묘사되나, 이를 액면 그대로 신뢰할 수 있는가? 총칼로 강제로 시장을 열고 종잇장에 가까운 화폐를 '지불'하였고, 그로 인해 마오쩌둥과 공산당의 물자는 빠르게 수급되었으며, 악화가 통용된 것이 현실이다. 유파의 동전 발행 이후의 촉한 사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조운은 옥사, 원지, 상전을 백성들에게 분배하여 부역과 조를 거둬들이자고 한 것이나 이마저도 과연 무상이었을지. 그리고 유비는 두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선주전'에서 '(백성들에게)곡식과 비단을 돌려보냈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직백오수와 직백전은 이후 촉한이 망할때까지 50여년간 발행되는데 촉한 정부는 계속해서 청동함량을 지속적으로 깎아내 평가절하 된 악화를 발행하면서 시세차익을 챙긴 것으로 보인다. 말기에 들어서면 직백오수전은 2~3g 수준으로 가벼워져, 사실상 무게상으로도 후한 오수전보다 악화가 되었다. 이렇듯 촉한 정부는 같은 시기 오나라에서 10여년만 잠시 고액전을 발매하여 임시수단으로 사용하고 그나마도 나중에 문제가 되자 회수한 것과 달리 재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시적으로 악화인 직백전을 운용한 것인데 동탁이 불과 2년 정도만 소전을 발행했던 것을 생각해봤을때 동탁 이상으로 악질적인 시장 교란 방식을 사용해 재정을 채웠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시기 로마 제국에서 데나리우스 은 함량을 지속적으로 낮춰 재정을 확보하던 시도와 일치한다. 해당 행위로 인해 로마 제국에 만성적으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과 같이, 촉한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평가절하되는 악화 발매로 인해, 다른 곳보다 촉에서 훨씬 더 심하게 백성들은 착취당하고, 다른 중국대륙 지역보다 촉에서 인플레이션이 더욱 악화되었을 가능성 역시 매우 다분하다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불과 1~2년 사이의 당백전 유통으로 조선 경제에 혼란을 준 것을 감안해 봤을때, 촉한인들이 이로 인해 겪었을 혼란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직백오수와 직백전은 50여년 내내 발행되었기 때문에 은근히 숫자가 많아서 촉한과 교류하던 위나라와 오나라의 영역에서도 통용되었는데[9], 촉한 정부가 강제적으로 지정한 액면금액을 위와 오에서 준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냥 청동 조각이나 다름이 없어, 순수하게 청동의 금속가치를 무게로 재어서 통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수서 식화지에 따르면 구리가 부족해 전황을 겪어 철전을 운용하던 양나라 때도 직백오수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연히 옛 촉한 정부가 지정한 액면가 액수를 준수할 이유가 양나라인들에게 없었으므로 이 때도 역시 이런식으로 사용되었을 공산이 크다.

2.4. 촉한의 기틀을 세우는 데 기여

유비의 황제 즉위를 명분없는 즉위로 비꼬았으면서도 촉한의 건국 후 공문서는 그가 전담하다시피 했고, 국호연호도 그가 만들었으나, 여러 사료 등을 살펴보면 그가 여전히 유비에게는 충심으로 사관한 게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 이적, 법정, 이엄과 함께 촉한의 법률인 촉과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유비에게 비우호적인 그에게 법 제정을 맡긴 이유는 단지 그가 뛰어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촉나라 내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들을 수용해 편파적인 법 제정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의견도 있다. 이 관점에서 살펴 보면, 제갈량은 신야 시절부터 유비에게 종사한 핵심 공신 세력을 대표한다 볼 수 있으며, 이적은 유종조조에게 투항한 이후 합류한 인물로서 유표계 인사들을 대표, 법정은 입촉 직전에 합류한 인물로서 기존 촉(유언, 유장) 세력 중 이탈파(친유비파)에 해당, 이엄은 입촉 후에 유비군에 가담한 인물로서 기존 유언, 유장 휘하에 있던 일반적인 인사들을, 유파는 반유비파로서 어쩔 수 없이 유비 휘하에 속하게 된 망명객이나 호족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5. 장비와의 갈등

《영릉선현전》에 따르면 유파가 유비에게 투항하자 장비는 유파의 숙소로 찾아갔다. 그런데 유파는 장비가 일개 무인에 불과하므로 같이 이야기를 나눌 바가 못된다고 여겨 무시하였고 이는 장비를 격노시켰다. 이 일화는 당시 중국 내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 손오에게까지 전해져 손권장소가 이 일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10] 정황을 알게 된 제갈량은 유파에게 글을 보내서 평소 장비는 무인이나 그대를 경모했으며 통일대업을 중히 여겨 단결해야 함을 강조하고 그대는 천성이 고아하나 굽히려는 뜻이 없다 했으나 유파는 "대장부가 온 세상의 영웅들과 교제해야지, 이런 일개 무부 따위랑 교제한다고?"로 오히려 제갈량의 말을 무시했다. 이에 참다 못한 유비가 "유자초는 대체 우리랑 같이 일하겠다는 거냐? 혼자 북쪽으로 튀겠다는 거냐? 나라서 걔를 잘 써먹지 다른 사람이면 택도 없다!"라고 하기도 했다.[11]

또 <양의전>에 따르면 상서 양의와도 사이가 영 좋지 못했다.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던 게 둘 다 능력은 좋았지만 유파는 유비에게 충성심이 없는 인물이었고, 양의는 제갈량 사후에 드러나듯 굉장한 성격파탄자라서 그런 유파를 참고 넘길 도량이 없었다. 어떻게든 유파를 안고가려 했던 유비는 양의를 좌천시키면서까지 유파를 계속 중용했다.

2.6. 유비의 한나라 황제 즉위 반대

한 술 더 떠서, (《영릉선현전》의 말을 신뢰하자면) 유파는 유비의 한나라 황제 즉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상소 내용도 '크지 못함을 드러내는 꼴'이라며 신랄한 촌평. 그러나 유비는 유파의 재능을 아껴 같이 상소를 올린 옹무만 처형하고 따로 상소를 올린 비시는 좌천 보낸다.

2.7. 처세와 말년

건안 24년(219년),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자 유파는 상서가 되었고, 뒷날 법정을 대신하여 상서령이 되었다. 그는 몸소 청렴하고 질박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재산을 증식시키지 않았다. 또 자신이 유비를 따르는 것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었으므로 의심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공손하며 말없이 조용한 태도로 견지했으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사사로이 사귀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유비가 마충을 만나보고는 유파에게 "비록 황권을 잃었지만, 호독을 얻었으니 세상에 현인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로 볼 때 유파는 이릉대전 뒤에도 살아 있었던 것 같다.

이릉대전 무렵 장무 2년(222년)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양희의 《계한보신찬》의 '유자초를 찬함(贊劉子初)'이라는 글에선 "상서(尚書, 유파)는 청결하고 고상하고, 언행을 단정하게 하고 몸을 닦았다. 뜻은 높고 도의를 갖추었으며, 고전 문장을 음미했고, 그 고아한 풍모에 기댔으며, 옛 사람과 견주기를 좋아했다"라고 했다.

3.1. 반 유비파의 우산?

유파가 촉한 내부에서 반 유비파의 우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에 관련된 존재가 내민의 존재인데, 실제로 제갈량의 교에 따르면 내민[12]은 익주 평정 직후 모반의 조짐이 있어 사람들이 그를 경계했으나, 유비는 더 큰 혼란을 두려워 해 그를 제거하지는 않았고 다만 임용하지 않는 선에서 정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내민을 굳이 임용한 장본인이 바로 유파다. 실제로 유비는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자신이 그토록 추켜 세워준 유파의 결정인지라 제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비 입장에서는 기껏 봐주고 넘어간 자들에게 난데없이 통수를 맞은 꼴.

《영릉선현전》에 따르면 손권은 '유파가 이제와서 세사에 영합해 유비를 받아들이면 그와 교류하는 자들이 그를 높은 선비로 대하겠는가?'라며 그의 태도에 대해 살짝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그런데 애시당초 유파는 지금까지 두번 세번 이주(=소속 변경)을 반복하며 최근에야 익주로 흘러들어온 인물이다. 그것도 과거에는 형주가 조조에게 항복했을 때 아무 거리낌 없이 조조를 섬겼던 전례도 있고. 그런 그가 오래 모시지도 않았던 유장에게 무슨 충의가 있다고 익주의 새 주인인 유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절개지사로 칭송 받고 경애 받아 사람들이 모였을까.(더군다나 벼슬살이를 거절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손권의 논평은 절개니 뭐니 하는 것을 떠나 정치적인 이유로 유파와 유비가 화합하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이 그의 주변에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즉, 불평불만을 일삼던 (내민과 같은) 세력들이, 그 유비 본인으로부터 직접 신변불가침을 인정받은 유파를 자신들의 '간판' 내지는 '우산'으로 삼으며 그 그늘 밑에 모여들고, 유파 또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형성된 자신의 포지션을 지키기 위해 내민 등을 기용하며 유비의 속을 긁었으며, 유비는 유비대로 이를 갈면서도 국가 통합을 위해 더더욱 그런 유파를 포용할 필요성을 느껴 유파의 온갖 도발적인 짓거리들을 억지 웃음 지어가며 봐줬다는 것. 그리고 유비의 유파에 대한 경고가 바로 제위 반대 사건. 당시 유비는 독자적으로 표를 올려 반대한 비시[13]는 좌천에서 그쳤지만 정작 유파와 함께 간언한 주부 옹무를 상대로는 다른 죄를 씌워 기어이 사형시켰다. 어쩌면 이 사건은 유파라는 우산을 남발한 자들에게 '유파 밑에 숨는다고 항상 안전한 건 아니다'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3.2. 과연 무조건 유비를 적대한 인물인가?

사서의 기록을 보면 유파는 아주 유비를 싫어하여 생애에 걸쳐서 유비를 피해다니고 적대하다 못해서 극혐하는 걸 대놓고 표현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비의 촉한에서 복무하며 유비의 비위를 맞추어 절개 없이 하라는 대로 한 굉장히 모순적인 행적의 인물이다. 단 유파전 주석 영릉선현전대로라면 말이다. 정사 삼국지 유파전은 그 내용 상당수가 배송지의 영릉선현전 주석에 기반하고 있는데 유파전 본전과 다른 본전에서의 유파를 보면 유파는 유비가 싫었지만 결국 유비 휘하에서 그가 용서하고 기용하였으므로 유비한테 밉보이지 않으려고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다른 이들과 촉한의 법률을 만들고 황제의 존호를 칭했을 때 그러한 문장이나 임명서를 지은 것 등 유비 정권에 그 재능을 빌려준 인물로 되어 있다.

물론 본전에서도 제갈량이나 진군이 그 능력을 칭찬하고 천거하거나 멀리서도 편지를 보내 유파의 소식을 물었을 정도고 유파와 양의가 대립하자 유비가 바로 양의를 좌천했을 정도로 아꼈던 인물이니 그 능력이나 명성은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영릉선현전에서 보면 본전에서 혹시라도 의심을 받을까 봐 몸가짐을 조심하고 사적인 사귐 없이 공적인 인물만 상대했다는 인물치곤 지나치게 유비한테 개기고 유비가 능력 있는 인재를 위해 억지로 그걸 참아주는 기이한 상황이 나오는 게 사실이다.[14]

촉한 지방의 명사를 따지면 허정과 유파가 있을 것인데, 헌데 말이 허정과 유파지 이 둘의 경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허정은 영제 시절부터 인물 비평으로 명성을 날렸고 동탁 정권에서는 인사권을 틀어쥔 핵심 인물이었으며, 훗날 조위 조정의 중추를 이루는 화흠, 왕랑, 진군 등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기도 했다. 거물들만 이 정도니 그의 후학이나 그가 추천한 인물들 상당수가 위나라 내에 남아있었을 터, 사실 당시 후한에서 허정 이상의 원로급 신하라면 양표 정도 제외하고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에 반해 유파는 영릉 벽촌 출신으로 평생 한수 이북을 넘어가 본 적이 없다. 그가 조조 정권에서 함께한 시간도, 고작해야 형주의 항복 후 적벽대전까지 몇달 남짓한 기간이다. 도대체 그의 이름이 조조의 신하들 사이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니 그가 명사였다는 것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물론 유파전 영릉선현전 내용 상당수는 자치통감에도 인용된 물건이니 무조건 그 신빙성을 의심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실제로 자치통감에선 유파가 도망가는 조조의 명을 받아 형남 3군을 통솔하러 간 일, 임증에서 제갈량이 보낸 편지를 무시한 일, 교지에서 촉까지의 여정, 유장에게 유비는 영웅의 그릇이라며 들이는 것을 반대하다 실패하니 두문불출한 것, 유비가 유파를 죽이는 자는 삼족을 주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 유비가 한을 품었음에도 그를 용서하고 서조연으로 임명한 것은 나오지만 그 이후 이것 이상으로 유비와 제갈량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화들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자치통감이 일일이 자세한 기록을 다 적을 순 없으니 생략한 부분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자치통감은 비시의 유비 황제 즉위 반대 상소 후 좌천이나 조운의 '국적은 위나라오나라를 치면 안 된다'는 의견 무시, 진밀의 손오 정벌 반대 후 가두었다 풀었다는 기사도 올렸지만 위에서같이 유비 황제 즉위에 반대한 옹무나 유파의 행적 같은 것은 아예 적질 않았다. 영릉선현전에 대해서도 후세의 학자들이 신빙성이 부족하지 않느냐고 한 사람들이 있다. 한 마디로 손권의 말까지 빌어가면서 '유비한테 굴하지 않는 고고한 선비' 이미지를 부여하려다가 오히려 유비 정권에서 유비에게 대적하는 완전 모순적 인물을 만든 게 아니냐는 게 그 요지고 주불의처럼 좀 가려서 볼 여지도 있다는 것.

4. 대중 매체에서의 유파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kongming.net/499-Liu-Ba.jpg
삼국지 11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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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14

내정 요원으로 나온다. 초기작에서는 유비에게 비판적이었기에 네임벨류가 부족해서 능력치가 영 좋지 않았지만, 후기작으로 갈수록 내정능력이 뛰어난 것을 반영해서 조금씩 능력치가 올라가고는 있다. 친애/혐오무장 시스템이 있는 작품일 때 유비가 추가될 법도 한데 혐오무장에 유비를 추가해 버린다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유비 세력에서 유파를 등용할 수 없는 데다가 혹시 등용한다 해도 충성도가 뚝뚝 떨어져 쓰기 힘들어질 것이기에 실제 역사처럼 유비를 싫어하면서도 유비 세력에 종군해 잘만 그 재능을 펼쳐 보였던 역사를 구현하는 게 영 어려워 혐오무장에 유비를 추가하지 않은 것 같다.

삼국지 3에서는 육전지휘 53/수전지휘 25/무력 54/지력 70/ 정치력 62/매력 49로 등장한다. 상업투자를 통한 좋은 금 공급원이다. 에디트로 손질해서 지력과 정치력을 맞바꿔 놓으면 그야말로 최고의 금 공급원. 특이하게도 수명이 길어서 시나리오 6에서도 66세의 나이로 등장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9/무력 20/지력 72/정치력 80. 조영, 혼란, 매도가 있긴 하지만 내정 위주로 굴리는 게 낫다. 굳이 중용되는 때가 있다면 적벽대전 시나리오에서 형남4군 군주로 할 경우. 이 지역을 배회하는 재야장수가 유파뿐인데 이 지역의 지력 70을 넘기는[15] 무장 역시 유파 한 명뿐이라서 형남4군 어느 세력을 하든 최우선 등용 장수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가끔 재수 좋게도 장완이 익주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벌어지면 이마저도 빛이 바랜다.

삼국지 10에서는 통솔력 13/무력 22/지력 74/정치력 78/매력 58의 능력치로 등장. 명사 특기가 있는 걸 제외하면 변변치 않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상업, 기술, 반목, 혼란, 반박, 논파, 명사. 총 7개다.

삼국지 11에선 정사의 기록과 달리 유비와 혐오무장 관계가 아니다. 어쨌든 유비 밑에서 벼슬은 했으니까. 다만 장비, 양의하고는 혐오무장 관계다. 능력치는 통솔력 14/무력 22/지력 74/정치력 81/매력 57이며 병종적성이 전부 C이고 특기가 없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상태로 왼손으로는 병서를 든 채 오른손으로는 붓을 치켜올리고 있다.

삼국지 13에선 통솔력 29/무력 22/지력 75/정치력 81의 능력치를 갖고 있다. 시리즈가 갈수록 능력치가 상승하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 병과는 모두 C에 특기로 상업 5, 문화 2, 설파 3을 갖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촉한의 화폐 개혁을 주도한 점을 감안했는지 상업이 5레벨인 것은 고무적이지만, 상업 5레벨 정도는 이름 좀 있는 문관이다 싶으면 다 보유하고 있거나 그 이상을 보유하고 있으며, 심지어 천생 무관인 관우도 상업 5를 달고 있다. 이쪽은 재물의 신으로 추앙 받은 것을 감안한 것 같긴 하지만 전수 특기 또한 상업이며, 삼국지 13에서 흔치 않은 중신 특성도 상업중시 특성을 달고 있다. 전법은 오리지널에서도 쓸만 했던 전법이지만 PK 들어선 값어치가 상당히 오른 가성비 최강 전법 고무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3, 무력 22, 지력 74, 정치 81, 매력 57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16,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조달, 법률, 능리, 소욕, 주의는 명리, 정책은 지역진흥 Lv 3, 진형은 학익, 정란, 전법은 혼란, 매성, 친애무장은 없고 혐오무장은 양의, 장비다.

4.2. 삼국전투기

마루코는 아홉살의 등장인물인 마루오 스에오(아몬)으로 등장했다.

가맹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했다. 제갈량과 동화를 법정과 황권이 보좌하고, 유파와 이적, 팽양 등이 그 밑에서 지지하는 형태를 이뤘다고 언급됐다. 등장한 컷에서 왠지 우리 등장씬은 거의 없을 것 같다며 푸념했고, 실제로 같은 컷에서 나온 이적과 더불어 해당 에피소드 이후로 다시는 등장하지 못했다.


[1] 유표가 형주에 온게 190년인데 영릉선현전에 따르면 유표시절에 18세의 나이로 주부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유파의 출생연도는 173~190년 사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2] 본전에서는 '형주 유표가 유파를 여러 차례 초빙하려 했고, 무재로 추천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라고 되어 있는데 《영릉선현전》에선 '유표가 평소에 유파의 아버지 유상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구실을 만들어 유파를 잡아들여 죽이고자 하여 유상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을 유파에게 몇번 보내, 거짓 정보를 주게 했고 유파는 번번이 이를 거절했으며 일이 있으면 매사를 유표에게 보고한 후 처리했으므로 유표는 곧바로 유파를 죽이지 못했다. 18세 호조사주기주부(戶曹史主記主簿)가 되었다.'라고 정반대의 서술을 하고 있다. 애초에 유상의 죽음이 유표와 무관하지 않으므로 《영릉선현전》의 기술이 사실에 가까운듯 하다.[3] 이 임무는 원래 환계가 맡을 예정이었는데, 환계가 사양을 하고 형주에서 제일 명망이 있을 유파에게 임무로 떠넘겼다고 한다.[4] 이는 당연한 소리다. 《영릉선현전》에 따르면 유파가 파견된 시점은 적벽대전 이후, 즉 조조가 한창 형주에서 발을 빼는 틈을 타 형주의 민심을 장악한 유비가 다시 형주에 들어올 게 뻔한데 아무 생각 없이 형주로 가겠는가?[5] 원문은 육군, 즉 천자가 이끄는 군대를 친히 보내준다고 되어 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린 것일 뿐이다. 이미 적벽대전에서 크나큰 병력을 잃었는데 또다시 군대를 보낼 여유가 있을 리가 희박하다.[6] 여기서 부고(府庫)란 공공의 관청창고를 말한다. 유비는 민간이 아닌 공공창고의 약탈을 허용한 것이다.[7] 특히 익주지방은 관중을 비롯한 각지에서 유이민이 몰려오던 지역이다. 따라서 유이민들이 지닌 동탁의 소전 화폐가 익주에 대량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크다.[8] 당장 215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자마자 발생한 익양대치 당시 오로 넘어간 지역인 형주 장사군만 해도 간독 자료에 따르면 230년대 중반에 쌀 44곡 3두에 8억전이나 든다고 나오는 상황이다. 그만큼 이 인플레이션이 일으킨 여파는 광범위하고 지속적이었다.[9] 북쪽에서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영역에서도 다량 발견된 적이 있고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오나라의 핵심 영역인 삼오 지역에서도 통용되었다고 한다.[10] 장소는 유파에 대해 (유파의 성질이) 성급하고 좁다며 장비를 거부한 것이 부당하다며 너무 심하다고 하니, 손권이 "만약 자초가 이제 와서 세상에 영합해 현덕을 받아들이면 그와 교류하는 자들이 그를 높은 선비로 대하겠는가?"라고 유파를 옹호한다.[11] 제갈량이 또 여기서 유파의 재능을 띄우면서 마땅히 저 사람을 써야 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건 본전에서도 그렇다.[12] 다만 내민은 익주토착민이 아니라 유장의 친인척으로서 외지에서 들어온 형주사람이다.[13] 정작 비시는 익주 토착민 출신이다.[14] 배송지도 영릉선현전을 주석으로 달았지만 유장의 부친 유언이 과거 유파의 부친 유상에 의해 효렴으로 천거되어, 유장은 유파를 보고 놀라고 기뻐했으며, 중대한 일은 항상 그와 상의했다는 대목에선 "유언은 영제 시대에 이미 태상이었고 익주목으로 나갔으며 유상은 손견이 장사태수이던 시절 강하태수였는데 유상이 유언을 효렴으로 천거할 수 없었을 것 같은데?"라고 그 과장성을 비판했다.[15] 군사를 일단 할 수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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