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서(蜀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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霍弋 곽익 | ||||
작위 | 열후(列侯)[1] | |||
최종직위[2] | 촉한 | 안남장군(安南將軍) | ||
조위 | 남중제독(南中都督) | |||
성씨 | 곽(霍) | |||
휘 | 익(弋) | |||
자 | 소선(紹先) | |||
아버지 | 곽준(霍峻) | |||
생년 | 216년 이전[3] | |||
몰년 | 268년 이후 ~ 271년 이전[4]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0px; margin-top:-6px; margin-bottom:-16px" | 촉한 | 태자사인(太子舍人)→알자(謁者)→기실(記室)→황문시랑(黃門侍郞)→중서자(中庶子)[5]→참군(參軍)·내강둔부이도독(庲降屯部貳都督)→참군(參軍)·내강둔부이도독(庲降屯部貳都督)·호군(護軍) →영창태수(永昌太守)→감군(監軍)·익군장군(翊軍將軍)·건녕태수(建寧太守)→안남장군(安南將軍) | ||
조위 | 남중제독(南中都督) | |||
서진 | 불명[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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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촉한과 서진의 무장이며 자는 소선(紹先)으로 곽준의 아들.2. 정사 삼국지
곽익은 유비 말년에 태자사인으로 임명되었다가, 223년에 유선이 즉위하자 알자로 임명되었다. 제갈량이 한중에 있을 때 곽익을 불러 기실로 삼아 자신의 아들 제갈교[7]와 교류하게 했다.234년에 제갈량이 죽자 곽익은 황문시랑이 되었다. 유선이 태자로 세워질 때 그는 중서자가 되었는데, 태자 유선(劉璿)이 말타고 활쏘기를 즐기자 곽익은 고대의 도의를 근거로 간언하였고 황문시랑으로서의 책임을 지극히 다했다.
후에 곽익은 참군으로서 내강둔부이도독이 되었다가 이에 겸하여 호군으로서 일을 맡았다. 영창군의 요족이 험준한 산세에 의지하여 복종하지 않고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유선은 곽익을 영창태수에 임명하여 군을 이끌고 요족을 토벌토록 하였다. 그는 요족 우두머리의 목을 베고 촌락을 파괴해 영창군을 평안케 했다. 이 공으로 감군과 익군장군으로 승진해 건녕태수를 겸임했으며, 중앙정계로 돌아왔을때는 남군의 사무를 총괄했다.
263년에 그에게 안남장군의 봉호가 더해졌지만, 위나라 군대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도로 가서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유선은 적에 대한 방비가 이미 되어 있으므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8]
곽익의 촉 멸망 이전이나 이후 행적을 보면 곽익은 군사적인 실적을 꽤 많이 쌓은 장수였다. 이런 장수와 그가 이끄는 군대가 있었다면 성도 방어에 보탬이 되었으면 되었지 방해는 안 되었을 텐데 유선이 무시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아무리 위군이 안 온다고 방심했다기로서니 상대는 근 20만에 가까운 대군을 동원한 상태인데 마땅히 나라의 총병력을 동원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어야 함에도 곽익의 성도 증원군을 적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다면서 무시한것은 유선이 당시 상황을 얼마나 안일하게 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곽익은 촉한이 멸망할 때 나헌과 함께 한 지방을 지키다가 성도가 함락된 것을 알게 되자, 소복을 입고 곡을 하며 3일간 크게 울었다고 한다. 많은 장군들이 빨리 항복해야 한다고 하자 곽익은 유선의 안위를 걱정해 항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만약에 (후주가) 위태롭게 되어 욕을 보았다면, 나는 장차 죽기살기로 싸울 것이라고 하는 등 연의에서 묘사되는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결국 유선이 동쪽으로 옮겨갔다는 말을 듣고 6명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항복했으며, 자신은 오로지 주군의 목숨을 구하려 했으며 주군이 항복한 이상 위나라로 귀부하지만 배반할 마음은 애시당초 없었다고 했다. 사마소가 이를 의롭게 여겨 그를 남중제독으로 제수하고, 원래의 일을 계속하게 했다.
나중에 곽익은 오나라의 교지태수 손서를 죽이고 위나라에 귀부한 여흥(呂興)을 도와 교지, 일남, 구진 3군을 평정하고, 열후에 봉해졌다.
여흥이 공조 이통에게 죽임을 당하자 사마염은 여흥의 후임으로 익주 건녕군 사람 찬곡(爨穀)을 태수로 삼았으나 죽었고, 다시 익주 파서군 사람 마융(馬融)으로 태수를 삼았으나 또 병사했다. 268년에 곽익은 익주 건위군 사람 양직(楊稷)으로 마융을 대신케 하고, 장군 모경(毛炅), 구진태수 동원(董元) 등을 보내, 교지를 치러 온 오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오나라의 교주자사 유준(劉俊)과 전부독 수칙(脩則)을 죽였다.[9] 271년에 우사와 도황이 교지를 무너뜨릴 때에는 곽익이 이미 죽고 없어 구원할 수 없었다.
《화양국지》에 따르면 곽익이 죽고 그의 아들인 곽습(霍襲)이 군사를 이어받아 여러 민족을 교화했다. 손자인 곽표(藿彪)는 진에 이어 이후 익주에 들어선 파저족의 성한 정권 하에서 촉한의 내항도독 격인 영주자사로서 남중을 통치했다.
3. 삼국지연의
촉이 멸망했을 때, 유선의 안위가 확인될 때까지 항복하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하다가, 유선이 안락공에 봉해졌다는 것이 확인되자 항복하는 촉한의 충신으로 그려진다. 서진 휘하에 있을 때 교지에서의 활약은 나오지 않는다.4. 미디어 믹스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14 |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아버지 곽준과 비슷하게 모든 능력치가 70 전후인 낮은 만능형 장수다. 무장 수가 적고 무장의 질이 떨어지는 후기 시나리오에 등장한다는걸 감안하면 효용도로는 오히려 아버지보다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3/무력 70/지력 72/정치력 73. 병법으로는 분전, 연사, 정란, 조영을 가지고 있어 야전과 공성전에서 모두 활용할 수 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병법 소유가 똑같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1/무력 67/지력 70/정치력 71/매력 74의 만능형. 특기로 보수, 치안, 화시, 유인, 회복. 총 5개를 가지고 있다. 초기 시나리오 장수였다면 특색없는 평범한 장수였겠지만 등장하는 시나리오가 워낙 뒤여서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3/무력 69/지력 69/정치력 74/매력 74의 균형잡힌 포지션. 특기는 침착이며, 교란에 걸리지 않아 유용한 편이다. 그리고 유선 시대의 촉의 인재라는 특성상 이 정도의 능력치를 가진 장수는 중용된다.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3/무력 69/지력 69/정치력 74이며 특기는 화계. 그렇지만 마충과 마찬가지로 화계의 효과를 보기에는 지력이 애매하다. 그래도 병종이 수성전에 특화된 아버지 곽준과 같이 궁병이라 쓸만하다. 일러스트는 홀이라는 막대를 두 손으로 들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고 특기는 농업 2, 순찰 1. 전수특기는 농업이며 전법은 적의 사기를 낮추는 소침공작.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2, 무력 69, 지력 69, 정치 72, 매력 74으로 전작과 달리 통솔력이 2, 정치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불굴, 숲전, 친만, PK에서는 간파 개성이 추가되었고 주의는 아버지인 곽준과 같은 왕도, 정책은 묵수연구 Lv 3, 진형은 안행, 방원, 장사, 투석, 전법은 연노, 철벽, 저지, 투석, 친애무장은 제갈교, 혐오무장은 없다.
4.2. 삼국전투기
영안 전투 (1)에서 나헌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짤막하게 1컷 등장한다. 디자인은 아버지 곽준의 젊은 모습이다. 본작에서는 곽익과 나헌이 서로를 미래의 대장군감이라며 고평가해 주는 장면에서 나름 자질이 있는 인물이었음이 암시된다.[1] 정확히 어디를 식읍으로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2] 서진에서의 정확한 관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촉한 멸망 1년만에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권력의 주체는 똑같이 사마씨였으니, 그대로 남중도독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말년에는 교주를 두고 오나라와 다투며 보냈다.[3] 아버지 곽준이 216년에 사망하였다.[4] 나이를 정말 최소로 잡았을 때, 216년에 태어났다고 해도 268년까지 52년 이상을 산 것이다. 곽준이 180년생인것을 감안하면 대략 200년 ~ 210년 출생일 확률이 높다.[5] 태자중서자[6] 어차피 촉한 멸망 1년만에 정권이 교체되었으며, 권력의 주체는 똑같이 사마씨였으니, 그대로 남중도독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말년에는 교주를 두고 오나라와 다투며 보냈다.[7] 제갈근의 친아들로 당시까지만 해도 아들이 없던 제갈량의 요청에 따라 손권의 허락을 받고 양자가 되었다.[8] 이 얘기가 나온 시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촉한멸망전 초기라 가정하면 강유가 검각까지 후퇴할 때 등애군에게 쫓기듯 패하며 움직였고 양안관구도 장서의 배신으로 함락되었으니 신빙성이 없고, 후반부에는 제갈첨이 군사 경험이 전무했던 인물들과 급조된 병력으로 등애군과 용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긴급상황이었으므로 역시 신빙성이 없으니 유선이 적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면 검각에서 종회군이 강유군에게 막혀 고전할 때와 등애가 음평을 넘어와서 강유관이 항복할 때 사이일 것이다. 만약 유선이 곽익의 지원을 허락했다면 군사적 경험과 능력이 상당했던 곽익이 등애군을 제압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했을 것이다.[9] 곽익은 파견하면서 “성이 포위된 지 100일 내에 항복하면 너희의 가속이 주살될 것이다. 그러나 100일을 넘겼는데도 구원하지 않으면, 내가 죄를 받겠다.”라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