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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習鑿齒
(?~384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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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동진의 역사가로 자는 언위(彦威), 양양(襄陽) 사람이다. 《양양기》(襄陽記)와 《한진춘추》(漢晉春秋)[1]의 저자로 유명하다.2. 생애
대대로 양양 지역에 세거하던 호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조상으로는 촉한을 섬겼던 습정이 있다.[2] 습착치는 젊은 시절 뜻을 가지고 많이 배워 학식을 가졌으며 문필로 유명했다. 형주자사 환온이 그를 등용하여 종사로 삼았고 강하상 원교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환온에게 추천하여 서조주부에 임명되었으며 별가로 승진했다. 환온이 출정 할 때 그를 대신하여 지키기로 임하여 종군하기도 하였고 책임 있게 맡길 수 있었던 자리를 모두 견뎠다. 요직을 맡아 실적이 있었고 논의에 뛰어나 환온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후대하였다.그러나 수도 건강에 갔을 때 회계왕 사마욱[3]의 환대를 받은 뒤 환온이 '회계왕은 누구를 닮은 인물인가?'라고 습착치에게 물었는데 '아직도 그와 같은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환온은 화내었고 습착치는 호조참군으로 좌천되었으며 형양태수를 역임했다. 환온이 그 당시에 찬탈을 꿈꾸고 있었고, 그 명분을 주지 않는 습착치에게 원한을 품은 것이다. 이때 습착치는 한진춘추 54권을 저술하였다.
습착치는 그 후 병을 앓아 고향 양양에 돌아갔지만 양양이 저족 부견의 공격을 받아 전진의 영토가 되었다. 부견은 그의 이름을 듣고 습착치를 그의 친구인 승려 도안과 초빙하여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아 후대하였다. 습착치는 다릿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부견은 '진(晉)이 오(呉)를 평정했을 때에는 육씨 형제를 얻었지만[4] 지금 우리들이 한나라 남쪽을 차지하여 얻은 인물은 한 명으로 반분되었소'라고 말했다. 그 후 습착치는 양양에 돌아갔는데 얼마 후 동진이 양양을 탈환하자 조정은 습착치에게 국사 편찬을 담당하여 시작하려고 했지만 그 무렵 사망했다. 죽기 전에 조위를 찬탈자로 보는 자신의 이론을 비난하던 반론에 반박했다. 그의 아들 습벽강(習辟強)은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고 아버지와 같은 풍격이 있어 관직이 표기장군, 종사중랑에 이르렀다고 한다.
3. 한진춘추
습착치의 대표 저작인 한진춘추는 후한 광무제로부터 서진 민제 시대까지 서술한 역사서이다. 습착치는 한진춘추에서 조위는 후한 헌제를 협박하여 거짓 선양을 받은 역신 조비가 세운 나라이므로 사마염이 조위로부터 선양받아 진나라를 세운 것 역시 정통성에서 유효하지 못하다고 평하였다. 또한 사마소가 촉한을 평정함에 따라 한이 멸망하여 진나라가 흥했다고 평가하여 하늘의 뜻은 세력이 있고 권위를 강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일명 촉한정통론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습착치가 살았던 때는 사마씨가 강남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습착치가 촉을 정통으로 삼은 것은, 중국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던 동진을 삼국 시대 촉한에 투영한 것이었다. 즉 습착치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정치 체제인 동진과 그 주인 사마씨를 위해 복무했던 것이다.[5] 때문에 습착치는 진나라와 사마씨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서술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사마사가 제갈각에게 패했을때 사과하자 한 찬양이나 사마소가 제갈탄을 물리칠 때 찬양을 들 수 있다.[6] 한진춘추가 촉한을 정통으로 세운 것은 남조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쳐, 유송 이후의 사가들도 습착치가 옳고 진수는 그르다고 주장하고는 하였다. 고국항 등 근현대의 사학자들은 이러한 봉건적인 전통관념의 한진춘추보다는 진수의 삼국지가 실제 역사에 부합한다고 하여 정사 삼국지를 재조명한 바 있다.
한진춘추는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삼국지의 배송지 주석에 내용이 다수 인용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