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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1년 4월 2일 | ||
| 후한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 즉위 | 189년 9월 28일 | ||
| 후한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 |||
| 사망 | 234년 4월 21일[1] (향년 53세) | ||
| 조위 산양군 (現 허난성 자오쭤시) | |||
| 능묘 | 선릉(禪陵) | ||
| 재위기간 | 후한의 황제 | ||
| 189년 9월 28일~220년 11월 25일 | |||
| 조위의 산양공 | |||
| 220년 11월 26일~234년 4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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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 협(協) | ||
| 부모 | 부황 효령황제 모후 영회황후 | ||
| 형제자매 | 2남 1녀 중 차남 | ||
| 배우자 | 정실 효헌황후, 헌목황후 후궁 동귀인 | ||
| 자녀 | 7남 3녀 | ||
| 자 | 백화(伯和) | ||
| 작호 | 발해왕(渤海王) → 진류왕(陳留王) → 산양공(山陽公) | ||
| 시호 | 조위: 효헌황제(孝獻皇帝)[2] | ||
| 촉한: 효민황제(孝愍皇帝)[3] | |||
| 연호 | }}}}}}}}} | ||
1. 개요
후한의 제14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로 휘는 협(劉協), 자는 백화(伯和).2. 생애
2.1. 황제 등극
영제의 후궁인 미인[8] 왕영(왕미인)의 아들이다. 태어나자마자 이를 시기한 하태후에게 어머니 왕미인이 짐독으로 살해당하자 할머니인 동태후의 손에 양육되어 동후(董侯)라 불렸다.[9] 황자 시절의 작위는 발해왕[10]이었다가, 하태후 소생의 이복형 소제가 등극하고 진류왕(陳留王)으로 전봉되었다.[11]십상시의 난 당시 정권을 무력으로 장악한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8살의 헌제를 보위에 올렸다. 헌제는 후에 어머니 왕영을 영회황후로 추존했다.
《삼국지연의》에서 소제와 헌제가 동탁을 만났을 때 소제는 겁에 질린 반면, 헌제는 동탁에게 천자를 겁박하러 온 것인지 호위하러 온 것인지 따져 물으며 예를 갖추라고 명령한다. 그 덕에 동탁의 눈에 헌제가 똘똘해 보여서 헌제를 천자 자리에 앉히기로 마음먹고 소제는 살해당한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동탁이 천자를 헌제로 교체한 이유는 헌제가 나이도 어린 데다가 서자였고 어머니도 이미 죽고 없었기에 허수아비 황제로 삼기에 적격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야욕의 명분이 될 허수아비가 필요했던 동탁 입장에서 굳이 똘똘한 황제가 필요할 이유가 없다. 정말 소제가 유약한 왕이었다면 오히려 소제가 더 다루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소제에게는 정당하게 섭정을 할 수 있는 어머니 하태후와 하진의 잔여 세력이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동탁이 권력을 쥐고 흔들기가 쉽지 않다. 반면 그런 뒷배경이 없는 헌제는 잘만하면 쥐고 흔들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차남인 데다 서자이며 이복형을 죽인 동탁의 손에 황제로 옹립되었다는 약점은 헌제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할 여지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 원소는 헌제를 괴뢰 황제로 규정해서 한때 유우[12]를 대립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유언과 원술은 황제를 참칭했고 유표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도 헌제는 중원에서 대체로 지지받았던 편이라[13] 원소와 원술 외에는 특별히 전국적인 도전을 받지는 않았다.[14] 그래서 조조와 손책은 헌제를 옹립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결과 전-후한 교체기처럼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2.2. 삼보의 난과 낙양 천도
황제였지만 그저 어린 나이로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탁은 천자가 된 헌제를 협박해서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직책을 부여받았다. 헌제는 아무것도 못하고 동탁의 폭정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다가 192년에 동탁이 왕윤과 여포에게 살해당해서 헌제는 자유의 몸이 되는 듯했다.그러나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과 곽사 등이 가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장안을 함락시키니 여포는 퇴각했고, 왕윤은 이각과 곽사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헌제는 다시 허수아비 신세가 됐다. 이복형 소제를 독살하는 데 관여한 이유의 죄를 물으려 했으나 이각에게 저지당했다. 정권을 잡은 이각과 곽사는 장안을 완전히 개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많던 장안 주민들이 거의 죽거나 도망쳐 몇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 처했고 장안 주민들은 동탁보다 더한 새끼라며 이각과 곽사를 비난했다. 문무백관들도 이각과 곽사 무리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도망쳐서 헌제 밑에 있는 사람들이라곤 동승을 포함해 5~6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사건이 바로 삼보의 난으로 이 일로 안 그래도 동탁 때문에 피폐해진 관중이 완전히 끝장나 버리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헌제는 자신의 명마를 팔아서 쌀을 사다가 직접 죽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선정을 보였는데, 이각과 곽사는 죽을 나눠주고 있는 헌제 앞에 난입해서 모조리 몰수해 버렸다.
이각과 곽사가 패권을 잡기 위해 분열하면서 서로 정쟁을 벌이게 되자 헌제는 이를 기회로 삼아 세는 나이로 15세가 된 195년에 장안에서 탈출했다. 이곽과 곽사를 피해서 후한 황제로서는 이례적으로 몽진을 가게 되었는데, 측근인 동승 등과 함께 1년여간 극도의 궁핍과 기아, 그리고 이각과 곽사에게 다시 붙잡힐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양봉과 산적 출신인 한섬 등이 군을 이끌고 오자 그들과 함께 낙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양봉과 한섬 등은 권력을 노려 동승을 공격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다. 헌제 일행이 낙양에 도착했을 때 조조가 군을 이끌고 맞이했다. 조조는 힘이 커지자 한섬과 양봉을 속이고 헌제를 허현으로 데리고 갔다. 이에 양봉과 한섬이 조조를 공격했지만 패해서 세가 흩어저버렸다.
2.3. 조조의 꼭두각시
기껏 이각, 곽사 등의 억압자로부터 자유를 찾아 고생하며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낙양에 도착한 뒤 헌제는 조조에게 사실상 옹립되면서 당시 그저 그런 일반적인 군웅 수준의 세력을 가지고 있던 조조[15]에게 황실의 보호자라는 강력한 정통성을 인정받는 명분적 무기를 제공했고, 이는 조조의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는 데 일조했다.[16] 헌제와 조조의 관계는 처음엔 윈윈 관계였으나[17] 조조의 권세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결국 일방적인 관계로 변질되게 된다. 조조는 빈털터리로 온 헌제를 대신해 사재를 털어 조정의 문무백관들에게 급여를 주는 등 헌제의 기반을 다져주는 것 같아 보였으나 조조의 마음 속에는 야심이 있었다.헌제는 조조의 본거지인 허현[18]으로 이사가게 됐다. 연의에서는 헌제가 낙양이 폐허가 되었고 내가 있는 허현이 아주 좋으니 그쪽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조조의 말에 이각과 곽사 때와 같은 꼴이 난다며 불안감을 드러내지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천도가 진행돼서 허현으로 가게 된 것으로 묘사되었고, 정사에서도 진동장군(鎭東將軍) 조조(曹操)가 스스로 영(領) 사례교위(司隸校尉),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고 후에 헌제를 허현(許縣)으로 천도케하며 스스로 사공(司空)이 된 것으로 나온다. 허현은 이후 허도로 불리며 후한이 망할 때까지 도읍으로 남았다.[19]
조조의 손에 허도로 봉대된 이후 헌제는 모든 권력을 상실했다. 국가의 대소사는 사실상 조조가 모두 처리했고 당시 헌제가 하는 일이라곤 오직 조조가 가져온 문서에 인을 찍는 것뿐이었다. 관직 임명부터 각 제후들에 보내는 황명까지 모두 조조의 손을 거쳤으며 실제 당시 다른 군웅들 역시 헌제가 보낸 칙서는 곧 조조의 뜻으로 여기곤 했다. 연의에서는 사냥터에서 조조에게 활을 빌려주었다가 조조가 헌제의 활로 사슴을 쏘아 죽이자 백관들이 헌제가 맞춘 줄 알고 칭송하지만 조조가 "아, 그거 제가 맞힌 건데요?" 라고 말해 굴욕을 당하는 장면과 칼을 찬 조조가 헌제 자리에 앉으며 황제의 권위를 대놓고 무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구석 특전을 받은 이후의 일이므로 매우 과장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헌제는 실권을 장악한 조조를 경계했고, 만 20세가 되는 200년에 조조를 암살하려고 계획하지만[20][21] 일이 누설되어 실패했다. 이 일로 인해 헌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모신 동승을 포함한 대부분의 조신들은 삼족에 걸쳐 파리처럼 죽어나갔으며[22] 임신하고 있던 동귀인[23]까지 헌제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다. 헌제 자신도 목숨이 위험한 판국이라 눈물만을 흘릴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24][25]
유비도 이 거사에 가담했는데, 원소의 대군과 연대하고 자기 본거지인 서주의 군대 등을 동원해 조조를 토벌하려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조조의 친정군에 서주를 뺏기고 부하들을 잃고 원소에게 의탁했다. 그리하여 의대조 사건은 관도대전의 발발 요인 중 하나가 됐다. 진수의《정사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한중왕 즉위와 관련하여 헌제에게 올린 표문에서 "의대조 사건"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26]
관도대전에서 승리한 조조는 원가를 멸망시키며 중원에서 가장 강한 제후가 되었고,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뒤에도 이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헌제를 협박해 위공의 위를 받고 헌제를 구석에 박아놓은 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복 황후와 그 외척 세력이 황제 복권을 위해 조조 암살 계획을 세우다 들키자 조조는 황궁에 군사 500을 보내 궁벽을 무너뜨렸다. 복 황후는 벽을 부수고 쳐들어온 조조군에게 산발이 된 채 머리를 잡혀 끌려나와 매맞아 죽었고 조신 200여 명이 살해당했으며, 헌제의 두 아들도 독살당했다. 이때 헌제는 앉아 떨고 울면서 살려달라는 복 황후에게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거늘." 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죽은 복 황후를 대신해 조조의 딸 조절(헌목황후)을 강제로 황후로 맞아들였고 조절의 자매들인 조헌과 조화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27]
다만 조조가 헌제의 목숨만큼은 확실히 보호해 준 건 맞다. 후한 황제들은 비정상적으로 요절한 사람들이 많은데 대부분 외척 혹은 환관 세력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꼭두각시를 황위에 앉히기 위해 멀쩡한 적장자를 계승에서 배제시키는 경우도 허다했다. 헌제는 동탁이 황위에 올린 꼭두각시 황제라서 원소에게 정통성을 부정당했고 10대 초~중반의 나이에 온갖 고초를 겪으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는데, 조조가 정권을 잡자 선대 후한 황제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조조가 자기가 후한의 충신이라며 자부한 것은 자기 딴에는 헌제가 자기 덕분에 선대 황제들보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있으니 가식이나 위선 수준을 넘어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론 헌제의 입장에서는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준 건 좋은데 자기 처첩과 자식들을 죽이고 제위를 빼앗으려 드니 병 주고 약 주고다.[28]
2.4. 선양과 한나라 멸망
216년 위왕 작위를 받은 조조가 220년 정월에 죽고 조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왕 작위를 세습 받는다. 같은 해 10월, 헌제는 조비의 협박으로 그에게 선양하게 되었다. 이때 헌목왕후[29]가 옥새를 집어던지고 통곡하면서 "하늘이 절대로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 는 저주를 내렸다고 한다. 이로써 조비는 황제로 즉위하면서 400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한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였다.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이후에 헌제는 산양공(山陽公)으로 봉해졌다. 다만 한때는 황제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의식을 이전과 같이 하고 위 황제에게 신하로서 예를 갖추지 않도록 허가하는 다소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조비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에게 있어선 최대한의 예우로 헌제를 대한 것이다.[30] 해당 지방의 민간 전설에 따르면 산양공으로 봉해진 헌제는 봉지에서 백성들을 매우 어질게 대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어릴 때부터 황자 시절에는 하황후의 정략에 목숨이 위험했고 그 이후에는 제위에 올라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면서 바람 잘 날 없이 보낸 헌제에게는 조비에게 선양하고 산양공으로 보내던 말년이 헌제 일생에서 가장 평화롭던 때가 아니었냐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2.5. 사망
흔히 조비에게 제위를 빼앗겨 후한이 멸망하고 위나라가 건국된 이후에 쫓겨나 얼마 안 가 조비한테 살해당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226년에 먼저 숨진 조비보다도 더 오래 살다가 234년에 53세의 나이로 자연사했다.[31] 위나라 황제 조예가 직접 상복을 입고 애도를 표하였으며, 부절을 가진 사자를 보내어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산양공의 시호를 추증하여 효헌황제(孝獻皇帝)라고 했으며 한나라 황제의 예로 선릉에 안장했다.그런데 유비 세력에서는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해서 후한이 멸망하고 위나라가 건국된 이후에 조비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근거로 220년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고, 221년 유비는 한나라의 계보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촉한을 건국했다. 그렇기에 위나라 입장에서는 헌제가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32]
하지만 정말로 유비가 헌제가 사망했다고 착각했는지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220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자 촉한에서는 유비 또한 위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중신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자 유비는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황제로 즉위하면서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까지 한나라라고 했다. 헌제가 엄연히 살아 있는 상태에서 유비가 칭제를 선언하는 것은 건국의 명분을 자기 스스로 짓밟는 것과 다름없었고 더 나아가 한나라에 대한 반역이었다. 따라서 촉한 측에서 헌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헌제가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내고 유비가 황제에 자리에 올랐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33]
어쨌든 헌제가 사망했다는 소문은 유비가 황제에 오를 명분을 가져다 주었으며, "반드시 헌제의 원수를 갚겠다!"라며 익주민들을 동원하는 데에도 좋은 구실이 되었다. 당시 위나라에서도 소칙과 조식이 헌제가 죽었다고 여기고 곡을 했으며, 이릉대전 당시 유비에게 보내는 제갈근의 편지에서도 "폐하께서는 관우와의 친분과 돌아가신 황제[34]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헌제를 고인 취급하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선양한 지 1~2년 동안엔 위촉오에 헌제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어느 정도는 퍼져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224년 제갈량이 쓴 편지에 따르면 그 시점까지도 촉 사람들은 아직도 이미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고 믿고 있었다.
아무리 헌제가 허수아비였다지만 엄연히 한의 황제였던 인물인 데다가 선양한 뒤 봉토를 갖는 제후의 신분이었다. 조비가 헌제의 신병을 비밀리에 구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주요 인물의 행방을 4년 동안이나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정보 전달이 느렸던 전근대 사회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35] 게다가 촉한에선 위나라 항장 출신 강유가 재상직까지 꿰차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착각이 촉한의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것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상술한 224년에 제갈량이 썼다는 편지는 관리를 등용하기 위해 쓴 것이다.
2.6. 사후
손자 유강(劉康)이 산양공 작위를 이어[36] 51년이나 더 살며 위나라가 멸망하는 것까지 보고 태강 6년(285년)에 사망했다. 다음으로 유강의 아들 유근(劉瑾)이 태강 10년(289년)에 사망할 때까지 4년을 이었으며, 유근의 아들 유추(劉秋)에게 이어져 다시 20년을 갔는데 영가 3년(309년) 영가의 난에 말려 유추가 죽고 일족이 흩어져 공국은 소멸했다.| |
| 한헌제 선릉 |
헌제의 능인 선릉은 허난성 자오쭤시 슈우 현에 소재해 있다.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관리하는 중이라 다른 후한 황제릉들에 비해서 그나마 관리 상태가 낫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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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헌제/평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가족 관계
- 아들
5. 기타
- 촉한의 시조 유비와는 엄청나게 먼 친척인데, 촌수로 따지면 사실상 남이나 다를 바 없다.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 헌제는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인데 저 둘은 한경제의 아들이다. 하지만 전한 시대부터 갈라져 나온 셈이니 성씨와 혈통만 같은 다른 계보와 같은 머나먼 친척이었다.[43] 연의에선 유비가 조조의 부하 시절에 헌제는 그 먼 촌수를 따져서 결국 유비가 자신의 숙부에 해당된다는 것까지 파악해 유황숙이라 부르며 친애했으나 정사에선 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딱히 나온 바가 없다.[44] 다만 동승의 의대조 사건 당시 동승이 유비를 끌어들인 사실을 봐도 그렇고 유비가 반조조 세력에 가깝다는 것은 일찌감치 파악했을 가능성은 있다. 유비 측에서도 헌제와 반조조로 결탁하였으나 유비를 중심으로 하는 한의 중흥, 즉 촉한 건국과 조위 타도를 위하여 역시 헌제의 정통성을 이용하기도 했다.[45]
- 시호가 2개다. 위나라에서 올린 정식 시호는 효헌황제(孝獻皇帝)인데 대개 줄여서 헌제(獻帝)라고 부른다. 그리고 선양했을 때 촉한에서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고 착각해서 선양 소식을 접한 직후에 올린 시호는 효민황제(孝愍皇帝)로, 줄여서 민제(愍帝)라고 부른다. 촉한 정통론에 아주 철저한 사람들은 유협을 효헌황제나 헌제라고 부르지 않고 촉한에서 올린 효민황제, 약칭 민제를 썼고, 위진 정통론자들은 당연히 효민황제 또는 민제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헌(獻)이 시법에서는 좋은 의미로 쓰는 시호지만 한자의 의미가 바칠 헌 자라서 뭔가 좀 그렇다. 그리고 실제 재위한 황제 중 이 글자를 시호로 쓰는 황제는 헌제가 유일하다.[46] 일반적으로 군주의 묘호나 시호에 쓰이는 헌은 '법 헌(憲)'이고, 조선 헌종의 경우에도 이 글자를 사용한다. 다만 고려 헌종은 獻을 쓰고 뜻도 헌제의 "헌"의 뜻과 다를 바가 없는 게 고려 헌종 역시 고려판 단종으로 숙부 숙종에게 찬탈당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여하간 민이든 헌이든 보통 마지막 군주에게 붙여주는 시호란 것이다.
- 인생 자체는 굉장히 험난했지만 유일한 행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내복이었다. 복황후는 헌제의 애첩인 동귀인이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47] 살려달라고 간언을 한 대인배이고, 복황후 사후에 맞아들인 조황후도 다른 조씨 일족과 달리 헌제를 진심으로 위하고 지키고자 했다.[48]
- 의외로 후한의 황제 중에서는 2번째로 장수했고 재위 기간도 31년으로 2번째로 길었다.[49] 그러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이각과 곽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뒤 조조의 손에 권력을 잃을 때까지 극히 일부 기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기간은 이미 군웅할거 상태였기에 전국에 그의 황명이 전달된 적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다. 오죽하니 일개 잡적 나부랭이에 불과한 백파적에게 구조를 요청해야만 하는 처지에 몰렸을 정도로 헌제는 권력이 매우 허약했고 위상도 상당히 낮았다.
- 헌제는 초대 황제 유방부터 따지면 29번째 황제이며, 유변을 포함한 소제 4명과 창읍왕, 정안공을 빼면 23번째가 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디스전으로 왕랑을 분사시킬 때 "저승에서 무슨 면목으로 한실의 스물네 분 황제를 뵈려 하느냐?" 는 말을 하는데, 이는 유비를 포함한 것이다. 다만 이 말을 할 때 헌제는 엄연히 아직도 이 세상 사람이었다는 게 개그 포인트다. 심지어 그 말을 꺼낸 제갈량 자신과 생몰년이 완전히 일치한다.[50]
6.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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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헌제/기타 창작물#|]] 부분을}}} 참고하십시오.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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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 유분자 왕창 · 유영 · 방맹 · 장보 · 왕굉 · 이헌 · 팽총 · 노방 13권 「외효공손술열전(隗囂公孫述列傳)」 14권 「종실사왕삼후열전(宗室四王三侯列傳)」 외효 · 공손술 유연 · 유량 · 유지 · 유흡 · 유사 · 유순 · 유가 15권 「이왕등내열전(李王鄧來列傳)」 16권 「등구열전(鄧寇列傳)」 17권 「풍잠가열전(馮岑賈列傳)」 이통 · 왕상 · 등신 · 내흡 등우 · 구순 풍이 · 잠팽 · 가복 18권 「오갑진장전(吳蓋陳臧列傳)」 19권 「경엄열전(耿弇列傳)」 20권 「요기왕패채준열전(銚期王霸祭遵列傳)」 오한 · 갑연 · 진준 · 장궁 경엄 요기 · 왕패 · 채준 21권 「임이만비유경열전(任李萬邳劉耿列傳)」 22권 「주경왕두마유부견마열전(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 임광 · 이충 · 만수 · 비동 · 유식 · 경순 주우 · 경단 · 왕량 · 두무 · 마성 · 유륭 · 부준 · 견담 · 마무 23권 「두융열전(竇融列傳)」 24권 「마원열전(馬援列傳)」 25권 「탁노위유열전(卓魯魏劉列傳傳)」 두융 ,두헌, 마원 탁무 · 노공 · 위패 · 유관 26권 「복후송채풍조모위열전(伏侯宋蔡馮趙牟韋列傳)」 27권 「선장이왕두곽오승정조열전(宣張二王杜郭吳承鄭趙列傳)」 복담 · 후패 · 송홍,송유, · 채무 · 풍근 · 조희 · 모융 · 위표 선병 · 장담 · 왕담 · 왕량 · 두림 · 곽단 · 오량 · 승궁 · 정균 · 조전,조계, 28권 「환담풍연열전(桓譚馮衍列傳)」 29권 「신도강포영질운열전(申屠剛鮑永郅惲列傳)」 30권 「소경양후낭의양해열전(蘇竟楊厚郞顗襄楷列傳)」 환담 · 풍연 신도강 · 포영,포욱, · 질운 소경 · 양후 · 낭의 · 양해 31권 「곽두공장염왕소양가육열전(郭杜孔張廉王蘇羊賈陸列傳)」 32권 「번굉음식열전(樊宏陰識列傳)」 곽급 · 두시 · 공분 · 장감 · 염범 · 왕당 · 소장 · 양속 · 가종 · 육강 범굉 · 음식 33권 「주풍우정주열전(朱馮虞鄭周列傳)」 34권 「양통열전(梁統列傳)」 35권 「장조정열전(張曹鄭列傳)」 주부 · 풍방,풍석, ,유희, · 우연 · 정홍 · 주장 양통 장순 · 조포 · 정현 36권 「정범진가장열전(鄭范陳賈張列傳)」 37권 「환영정홍열전(桓榮丁鴻列傳)」 38권 「장법등풍탁양열전(張法滕馮度楊列傳)」 정흥 · 범승 · 진원 · 가규 · 장패 환영,환언, ,주총, · 정홍 장종 · 법웅 · 등무 · 풍곤 · 도상 · 양선 39권 「유조순우강유주조열전(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 40권 「반표열전(班彪列傳)」 유평 · 조효 · 순우공 · 강혁 · 유반,유개, · 주반 · 조자 반표 41권 「제오종리송한열전(第五鍾離宋寒列傳)」 42권 「광무십왕열전(光武十王列傳)」 제오륜 · 종리의 · 송균 · 한랑 유강 · 유보 · 유강 · 유연 · 유언 · 유영 · 유창 · 유형 · 유형 · 유경 43권 「주악하열전(朱樂何列傳)」 44권 「등장서장호열전(鄧張徐張胡列傳)」 45권 「원장한주열전(袁張韓周列傳)」 주휘 · 악회 · 하창 등표 · 장우 · 서방 · 장민 · 호광 원안 · 장포 · 한릉 · 주영 46권 「곽진열전(郭陳列傳)」 47권 「반양열전(班梁列傳)」 곽궁 · 진총 반초 · 양근 48권 「양이적응곽원서열전(楊李翟應霍爰徐列傳)」 49권 「왕충왕부중장통열전(王充王符仲長統列傳)」 양종 · 이법 · 적포 · 응봉 · 곽서 · 원연 · 서구 왕충 · 왕부 · 중장통 50권 「명제팔왕열전(明帝八王列傳)」 51권 「이진방진교열전(李陳龐陳橋列傳)」 유건 · 유선 · 유공 · 유당 · 유연 · 유창 · 유병 · 유장 이순 · 진선 · 방참,시연, · 진귀 · 교현 52권 「최인전(崔駰傳)」 53권 「주황서강신도열전(周黃徐姜申屠列傳)」 54권 「양진열전(楊震列傳)」 최인 주섭 · 황헌 · 서섭 · 강굉 · 신도반 양진,사마포, ,마영, 55권 「장제팔왕열전(章帝八王列傳)」 유항 · 유전 · 유경 · 유수 · 유개(劉開) · 유숙 · 유만세 · 유승 56권 「장왕충진열전(張王种陳列傳)」 57권 「두난유이유사열전(杜欒劉李劉謝列傳)」 58권 「우부갑장열전(虞傅蓋臧列傳)」 장호 · 왕공 · 충고 · 진구 두근 · 난파 · 유도 · 이운 · 유유 · 사필 우후 · 부섭 · 갑훈 · 장홍 59권 「장형열전(張衡列傳)」 60권 「마융채옹열전(馬融蔡邕列傳)」 61권 「좌주황열전(左周黃傳)」 장형 마융 · 채옹 좌웅 · 주거 · 황경 62권 「순한종진열전(荀韓鍾陳列傳)」 63권 「이두열전(李杜列傳)」 64권 「오연사노조열전(吳延史盧趙列傳)」 순숙 · 한소 · 종호 · 진식 이고,이섭, ,조준, · 두교 오우 · 연독 · 사필 · 노식 · 조기 65권 「황보장단열전(皇甫張段列)」 66권 「진왕열전(陳王列傳)」 황보규 · 장환 · 단경 진번 · 왕윤 67권 「당고열전(黨錮列傳)」 유숙 · 이응,이수, · 두밀 · 유우 · 위영 · 하복 · 종자 · 파숙 · 범방 · 윤훈,윤목, · 채연 · 양척 · 장검 · 진상 · 공욱 · 원강 · 유유 · 가표 · 하옹 68권 「곽부허열전(郭符許列傳)」 69권 「두하열전(竇何列傳)」 70권 「정공순열전(鄭孔荀列傳)」 곽태 · 부융 · 허소 두무 · 하진 정태 · 공융 · 순욱 71권 「황보숭주준열전(皇甫嵩朱儁列傳)」 72권 「동탁열전(董卓列傳)」 73권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 황보숭 · 주준 동탁 유우 · 공손찬 · 도겸 74권 「원소유표열전(袁紹劉表列傳)」 75권 「유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원소 ,원담 · 원상, · 유표 유언 · 원술 · 여포 76권 「순리열전(循吏列傳)」 위립 · 임연 · 왕경 · 진원 · 왕환 · 허형 · 맹상 · 제오방 · 유구,유광, · 유총 · 구람 · 동회 77권 「혹리열전(酷吏列傳)」 동선 · 번엽 · 이장 · 주우 · 황창 · 양구 · 왕길 78권 「환자열전(宦者列傳)」 정중 · 채륜 · 손정 · 조등 · 선초 · 서황 · 구원 · 좌관 · 당형 · 후람 · 조절 · 여강 · 장양 · 조충 79권 「유림열전(儒林列傳)」 유곤 · 규단 · 임안 · 양정 · 장흥 · 대빙 · 손기 · 구양흡 · 모장 · 송등 · 장순 · 윤민 · 주방 · 공희 · 양륜 · 고후 · 포함 · 위응 · 복공 · 임말 · 경란 · 설한 · 두무 · 소순 · 양인 · 조엽 · 위굉 · 동균 · 정공 · 주택 · 손감 · 종흥 · 견우 · 누망 · 정증 · 장현 · 이육 · 하휴 · 복건 · 영용 · 사해 · 허신 · 채현 80권 「문원열전(文苑列傳)」 두독 · 왕륭 · 하공 · 부의 · 황향 · 유의 · 이우 · 소순 · 유진 · 갈공 · 왕일 · 최기 · 변소 · 장승 · 조일 · 유량 · 변양 · 역염 · 후근 · 고표 · 장초 · 예형 81권 「독행열전(獨行列傳)」 초현 · 이업 · 유무 · 온서 · 팽수 · 삭로방 · 주가 · 범식 · 이선 · 왕돈 · 장무 · 육속 · 대봉 · 이충 · 무융 · 진중 · 뇌의 · 범염 · 대취 · 조포 · 상허 · 양보 · 유익 · 왕열 82권 「방술열전(方術列傳)」 임문공 · 곽헌 · 허양 · 고획 · 왕교 · 사이오 · 양유 · 이남 · 이합 · 단예 · 요부 · 절상 · 번영 · 당단 · 공사목 · 허만 · 조언 · 번지장 · 선양 · 한열 · 동부 · 곽옥 · 화타 · 서등 · 비장방 · 소자훈 · 유근 · 좌자 · 허자훈 · 해노고 · 장초 · 왕진 · 학맹절 · 유화평 83권 「일민열전(逸民列傳)」 상장 · 봉맹 · 주당 · 왕패 · 엄광 · 정단 · 양홍 · 고봉 · 대동 · 한강 · 교신 · 대량 · 법진 · 한음노보 · 진류노보 · 방공 84권 「열녀전(列女傳)」 환소군 · 조아(趙阿) · 반소 · 이목강 · 조아(曹娥) · 여영 · 마륜 · 조아(趙娥) · 순채 · 조원강 · 숙선웅 · 채염 85권 「동이열전(東夷列傳)」 86권 「남만서남이열전(南蠻西南夷列傳)」 87권 「서강전(西羌傳)」 부여국 · 읍루 · 고구려 · 북옥저 · 한 · 왜 남만 · 서남이 서강 88권 「서역전(西域傳)」 구미국 · 우전국 · 서야국 · 자합국 · 덕약국 · 안식국 · 대진국 · 대월지국 · 고부국 · 천축국 · 동리국 · 율과국 · 엄국 · 엄채국 · 사거국 · 소륵국 · 언기국 · 포류국 · 이지국 · 동저미국 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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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갈량과 생몰년이 동일하다. 지금 기준은 물론 당시 기준으로 봐도 헌제는 크게 오래 살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후한의 역대 황제 중 50대를 넘긴 인물은 광무제와 헌제가 유이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단명했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평균 수명이 짧은 시대 중 하나였던 후한의 황제 치곤 그 나름대로 장수한 셈. 당장 헌제의 아버지인 영제도 손견보다 1년 뒤에 태어났는데, 손견보다 3년 더 일찍 사망했다. 손견이 전투 중 사망해서 자연사가 아닌 걸 감안하면 영제는 단명한 셈이다.[2] 위나라가 올린 시호. 황제에서 물러난 뒤에는 위나라로부터 산양공(山陽公)의 작위를 받았고, 사후에는 한나라 황제로 대우한 것. 헌제(獻帝)는 이 시호의 약칭이다.[3] 촉한에선 헌제의 양위 소식을 들었을 때 헌제가 살해당했다고 오해해 시호를 올렸다. 민제(愍帝)는 이 시호의 약칭이다. 그러나 민제는 헌제가 살아있을 때 올렸으므로 정식 시호는 아니다.[4] 폐위된 소제의 연호 광희(光熹)·소녕(昭寧)과 헌제의 첫 연호인 영한은 동탁 시절의 연호였다. 그래서 세 연호는 칙명에 따라 삭제되고 이 기간은 다음 연호인 중평이 쓰인 것으로 취급했다. 다음 주석도 참고할 것.[5] 앞 주석에서 설명했듯이 광희·소녕·영한의 연호가 삭제되고 그 기간은 중평의 연호로 표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9년은 중평 원년이 아니라 중평 6년으로 취급된다.[6] 촉한에서는 다음 연호인 연강을 인정하지 않아 221년까지 건안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유는 다음 주석을 참고할 것.[7] 조조가 죽자 이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연호를 바꿨다. 연호를 정하고 바꾸는 것은 천자의 소관인데, 일개 신하인 조조의 죽음을 이유로 연호를 바꿨으니 조조가 실질적으로는 황제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 때문에 촉한에서는 이 연호를 인정하지 않고 건안을 221년까지 사용했고, 이후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촉한을 건국한 유비가 장무(章武)로 개원했다.[8] 한대 후궁의 직급 중 하나로 귀인 바로 다음이다.[9] 이와 마찬가지로 소제도 영제 소생의 황자가 자주 요절하자 민간 신앙에 따라 도인(道人) 사자묘의 집에서 양육되어 사후(史侯)라 불렸다.[10] 이전에도 두 명의 발해왕이 있었기에, 후한 시대에는 잠깐씩이나마 발해국이 존재했다. 한자는 주로 勃海國으로 쓰지만 勃海와 渤海는 같이 쓰이기 때문에 渤海國으로 써도 되는데 이러면 한국인이 흔히 아는 한국사의 발해와 같은 표기다. 이걸 가지고 발해는 한나라 때부터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낚시질도 할 수 있다. 지금의 지명으로 하면 창저우시는 일찍부터 중국이었다는 소리에 불과하니 놀라지 말자(현재 산둥반도와 요동반도에 둘러싸인 바다 이름이기도 하고).[11]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하다. 자치통감에는 (中平元年)春正月,立皇子辯爲太子,封協爲陳留王。라고 나와 있다.[12] 유우는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 유강의 5대손이라 정통성이 높았다.[13]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동탁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데다가, 정통성이 강한 유우가 황제에 오르길 거부했고 다른 후보들은 정통성이 너무 많이 밀렸기에 헌제의 정통성에 도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14] 그런데 하필 원소와 원술이 당시 중국의 양대 세력이었고 여기에 유표와 유언까지 더하면 이들에게 필적할 만한 군벌은 공손찬, 조조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15] 헌제를 얻기 이전까지의 조조는 거대한 원소의 하북 세력에 붙어 있던 여러 군웅 중 하나에 불과했다.[16] 그 당시의 여러 군웅들 중에 헌제를 옹립해야 자신이 살아남는다고 생각한 군웅은 조조와 손책, 이 둘뿐이었다. 그래서 손책은 한 황실 조정을 습격해서 헌제를 조조로부터 구출해서 자신이 옹립하는 프로젝트를 수립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죽었다. 원소는 동탁 따위가 옹립한 놈은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며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고, 만약 유우가 승낙했다면 조조보다 훨씬 더 우수한 명분과 권위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우는 원소의 제의를 고사하고 그냥 자신의 관할지인 유주에 계속 남았고 이후 공손찬에게 살해당했다. 그래서 원소 입장에선 말을 바꾸고 헌제를 옹립하려고 하면 명분이 완전히 꼬여버리기 때문에 헌제를 옹립할 수 없게 됐다.[17] 헌제는 동탁이 소제를 살해하고 앉힌 황제라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다른 제후들이 괜히 헌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다른 황족을 천자로 내세운 게 아니다. 동탁 사후 이각과 곽사의 난으로 근위 세력도 거의 소멸해서 실권과 명분 둘 다 땅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다른 제후들이 내세우는 황족에게 권위가 완전히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조조의 군사력을 의지하여 자신의 권위를 어느 정도 회복시킬 수 있었다.[18] 허창이란 지명은 훗날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이후에 변경된 지명이다.[19]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국가들에서 진짜 절실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천도를 괜히 꺼린 게 아니다. 헌제와 조조의 사례와 같이 이런 식의 뜬금없는 천도가 강행될 때는 항상 그 이면에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대표적으로 6년 전 동탁의 장안 천도도 그랬다.[20] 《삼국지연의》의 의대조 사건이다.[21] 《정사》에서도 거의 비슷한 표현이다. 《선주전》에 따르면 동승이 유비에게 이르길, "황제(= 헌제)의 의대(衣帶)를 받으니 그 속에 조조를 주살하라는 밀조(密詔)가 있었다." 고 했다.[22] 연의에서는 암살 모의를 누설한 노비 진경동은 이후 등장하지 않아 어떻게 되는지 나오지 않는데, 대부분의 2차 창작물에서는 조조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 노비를 죽인 이유는 한마디로 "주인을 무는 개는 살려둘 수 없다." 라는 것이다.[23] 삼국지연의에서 동귀비로 나오는 인물. 정사 삼국지에선 동귀인으로 나온다.[24] 물론 이 시점의 조조는 헌제를 폐위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임박한 원소와의 일전을 앞두고 상대 진영에 초대형 명분을 제공하는 일을 감히 단행하기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25] 다만 후대에 내부 혼란으로 망조가 든 나라의 꼭두각시 황제가 권신 암살에 성공한, 어찌 보면 의대조와 매우 비슷한 역사적인 사건이 어떤 결말이 났는지를 보면 헌제가 의대조를 성공시켜 조조를 죽였더라도 조조의 부하들과 가족들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그것도 매우 분노한 상태로) 온전히 실권을 되찾고 황제 행세를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26] 자세한 내용은 한중왕표 문서로.[27] 조헌과 조화는 이후 어떻게 됐는지 전혀 안 나왔지만 조절은 계속해서 헌제의 아내로서 그를 따랐다.[28] 이 시대 중국에는 무슨 마가 끼이기라도 했는지, 조비가 건국한 조위도 후한과 똑같은 황제 요절 잔혹사를 찍으며 30년 만에 사마씨에게 실권을 잃고 45년 만에 멸망했다. 서진도 창업군주이며 초대황제 사마염이 죽자마자 제위계승문제로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을 찍으면서 52년 만에 망하고 오호십육국시대 및 육조시대의 포문을 여는 등 후한 왕조의 잔혹사를 더 큰 스케일로 재현했다.[29] 아버지와 오빠와는 달리 헌제에게 충성하며 마지막까지 조조-조비한테 저항해 봤지만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30] 참고로 후일 조위도 망한 뒤 조위의 마지막 황제도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31] 앞에서 말했듯 제갈량과 생몰년이 동일하다.[32] 헌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 있기만 해도 촉한의 명분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관중이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헌제를 곧바로 퇴장시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33] 설령 유비가 헌제 복위를 주장하며 황제 자리에 오르지 않았어도 조위가 후환의 여지를 없앨려고 헌제를 정말로 죽였을 수도 있었으니 무작정 복위만이 능사인 상황도 아니었다.[34] 한 헌제 유협을 말한다. 강남에서도 조비가 유협을 살해했으리라는 인식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35] 당대에 머나먼 변두리로 망명하거나 잠적한 명사들의 행적을 기어코 찾아내서 어서 귀순하라고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니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간 유명인사의 행적을 찾아낼 여지는 많았다.[36] 헌제의 장남 유풍은 한나라가 멀쩡할 때 이미 사망한 뒤였다. 유강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37] 헌제의 장남이며 200년에 요절. 따라서 헌제 사후 산양공의 작위는 헌제의 손자 유강이이었다.[38] 국내의 일부 자료에서는 유풍을 헌목황후 소생으로 서술하기도 하지만, 유풍은 헌목황후가 입궁하기도 한참 전에 죽었으니 절대로 헌목황후 소생일 수 없다.[39] 216년 조조에게 살해당한 낭야왕 유희와 이름자가 일치하지만, 동명이인으로 별개의 인물이다. 헌제의 아들인 유희는 212년 제음왕으로 봉해졌지만, 낭야왕 유희는 11년간 재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낭야왕 유희는 황실 종친인 듯하다.[40] 국내 일부 자료에서 유의를 헌목황후 소생으로 서술하는 것은 오류이다. 유의는 212년 산양왕으로 봉해졌기에 214년 귀인이 된 헌목황후 소생일 가능성이 없다.[41] 조비의 후궁이 된 헌제의 두 딸은 조절(헌목황후)의 소생일 가능성이 상당히 희박하다. 조절의 입궁 시기(214년 입궁, 215년 황후 책봉)와 조비의 재위 기간(220~226)을 고려할 때, 조절의 딸이 조비가 재위하는 동안 그의 후궁이 되었다고 생각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리다(조절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귀인으로 봉해지고 나서도 입궁을 1년간 미뤘었다). 애초에 나이를 따지기 이전에 3촌 근친혼이다. 따라서 조비의 후궁이 된 헌제의 두 딸은 조절의 소생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편이 합리적이다.[42] 유만의 경우에는 헌목황후 소생일 가능성이 그렇게까지 희박하진 않다. 물론 짐작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으니 그저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43] 참고로 유우와 유엽은 광무제의 후손으로 유우는 광무제의 장남 동해공왕 유강, 유엽은 광무제의 7남 부풍질왕 유연의 후손이다. 더불어 헌제는 광무제의 4남 명제의 후손이라 유우와 유엽은 유비보다 9대 정도 더 황실의 직계 후손으로 정통에 가까웠다.[44] 유승 이후 유비까지 계보가 어떻게 되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둘 사이의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 건 불가능하지만, 헌제의 경우 광무제 유수의 7대손이고 광무제는 유발의 5대손이니 헌제는 유발의 12대손이란 얘기가 된다. 한경제로부터 따지면 13대손. 형제지간이었던 유발과 유승의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고 유발계와 유승계의 항렬 진행 속도가 비슷하다고 가정해 헌제의 아버지뻘인 유비가 한 항렬 위라고 친다면 둘은 25촌 관계가 된다. 같은 항렬이면 26촌으로, 관계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성만 같은 생판 남이다. 여담으로 위에 언급된 유우는 헌제와 13촌 사이이고 한 항렬 높은데, 연의에서 나온 '혈연이라고 힘들 정도로 먼 친척이지만 한 항렬 높은 숙부뻘'인 유황숙이라는 설정은 유우라면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물론 유비건 유우건 유황숙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은 없다.[45] 유황숙 설정이 연의의 창작이긴 하지만 개연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헌제 입장에선 반조조 성향이면서도 널리 인정받는 실력자 한 명 한 명이 굉장히 아쉬운 상황이다. 따라서 사실상 혈연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라도 공통조상이 있다는 게 확실한 유비에게 "우리 숙부님"이라고 띄워주며 포섭하는 게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현실에서도 동향 출신, 같은 학교 출신임을 들먹여 연줄을 만드는 일이 흔하다. 유비 입장에서도 자신의 세력이 몰락한 상황에서 비록 실권은 없어도 황제라는 배경이 있는 그와 연줄을 만들어두는 게 이득이고, 둘은 조조를 견제한다는 목적이 같으므로 명목 뿐은 혈연을 배경으로 의기투합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긴 하다. 실제로 혈서 서명이나 황숙 칭호 같은 드라마틱한 일은 없었어도 역사상으로 둘은 의대조 사건을 통해 사실상 같은 편에 서기도 했다.[46] 추존황제까지 범위를 넓혀보면 명나라의 추존 황제인 명예종 주우원도 獻을 시호로 쓰지만, 이 경우는 추존 이전에 친왕으로서 이 시호를 받은 것을 황제 추존 후에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약칭 시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쁜 의도로 내린 시호도 아니고, 시호를 내린 선제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이루어진 결정으로 생각된다.[47] 동승을 위시한 동귀인의 외가가 조조를 처리할 계획을 꾸미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관련자였던 동귀인도 함께 죽게 된 것. 참고로 동귀인은 이때 임신 상태였는데, 조조는 그 당시에도 웬만해선 죄인일지라도 죽이지 않았던 임산부(동귀인)를 죽이는 냉혹한 처사를 보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웬만한 죄인 처벌 상황에서도 임산부의 경우 최소 아이를 출산하게 해주고 죽이거나 살려주던 식으로 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48] 조비의 사자들이 옥새를 요구하자 끝까지 내놓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강요에 못 이겨 옥새를 내던지며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라 저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조조의 딸이기보다 후한의 황후이기를 택했던 사람. 그래서 후한 멸망과 위나라 건국으로부터 40년, 헌제 사망으로부터 26년이나 뒤인 260년에 죽었지만 장례도 후한의 예법에 따라 치렀다고 한다. 여담으로 조 황후가 죽을 때인 260년은 조모가 사마소에게 시해당하는 등 조위의 망조가 본격적으로 가속화되었던 해였다. 아버지와 오빠가 남편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가 생전에 벌써 망조가 드는 것을 보고 조 황후는 본인이 사망하기 전까지 한심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49] 둘 다 1위는 광무제다.[50] 묘사가 이렇게 된 이유는 유비가 멀쩡히 살아 있는 헌제를 헛소문만 믿고 시호를 올린 뒤 칭제해 본의 아니게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헌제의 생존을 인정할 경우 촉한의 집권 정통성을 당시 촉한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던 제갈량이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리니 이쪽이 더 앞뒤가 안 맞는 묘사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