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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80><colcolor=#ece5b6> 후초 초대 황제 의제 | 義帝 | |||
출생 | 미상 | ||
진(秦)? | |||
사망 | BC 206년 | ||
후초(後楚) | |||
능묘 | 의제릉(義帝陵) | ||
재위 | 후초의 회왕 | ||
BC 208년 ~ BC 206년 (2년) | |||
후초의 황제 | |||
BC 206년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008000> 성 | 미(芈) | |
씨 | 웅(熊) | ||
휘 | 심(心)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존호 | 의황제(義皇帝) | ||
왕호 | 회왕(懷王) | ||
국적 | 초(楚) → 진(秦) → 후초(後楚)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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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의 진나라 말기와 초한쟁패기의 인물. 초나라의 유일한 황제.[1][2] 성은 미(芈), 씨는 웅(熊), 이름은 심(心)이다. 의제가 군주로서 존재하던 초나라는 후초(後楚)라고도 부른다.당시 사람들이 정통성 있다고 널리 인정할 만큼 직계에 가까운 초나라 왕족 혈통인 건 확실하지만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가계에 대해선 초회왕의 손자 혹은 현손이라는 설과 초나라 마지막 왕 웅부추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실질적인 권력은 항씨 가문이 가지고 있었고 웅심은 반(反) 진(秦) 전쟁의 상징적인 맹주였다.
역사학자들이 선대의 초회왕과 구분하기 위해서 그의 제호인 초 의제(楚 義帝)로 칭하거나, 초후회왕(楚後懷王), 초회왕 심(楚懷王 心)으로 부르기도 한다.
2. 생애
시황제에 의해서 초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와 진나라 조정의 눈을 피해서 웅심은 양치기로 숨어 살고 있었다.초 의제 원년(기원전 208년), 진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중국 대륙 전역에서 옛 6국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초나라의 방계 왕족이자, 귀족 출신인 경구(景駒)가 초왕(楚王)이 되어 팽성(彭城)에서 웅거하자, 회계(會稽)에서 세력을 키운 항량(項梁)과 송의(宋義)는 왕실 직계로 정통성이 경구보다 훨씬 앞서는 웅심을 찾아내어 초나라의 회왕(懷王)으로 추대했다. 초회왕은 전국시대 시절 초나라의 왕으로 말년 진나라에 속아 억류되어 고초를 겪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망해 초나라 사람들에게서는 '진나라 압제의 희생자'라는 아이콘으로 남았는데, 웅심을 회왕으로 추대하여 초나라 유민들을 끌어모으는 효과를 가질 수 있었다.
경구의 세력을 쓸어버리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항량이 죽자 송의가 항량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얘기에 송의를 상장군으로, 항량의 조카 항우를 차장으로 봉하면서 항씨를 토사구팽[3]하려 했으며, 또한 거친 항우의 대체재로 유방(劉邦)을 중용했으나 송의는 항우에게 피살되고, 유방도 관중에서 항우의 공격에 굴복하고 만다.
초 의제 3년(기원전 206년) 정월, 항우는 웅심을 명목 상 초나라 천자 의제(義帝)로 높여주었다. 같은 해 2월, 항우가 18국의 제후를 분봉할 때에는 초 의제의 오른팔이 되어줄 만한 유방을 한왕(漢王)[4]으로 임명해 서로 떨어뜨려놓아, 항우에게 실권을 빼앗겨서 이름만 황제였다. 결국은 항우가 자신이 만든 제후국인 서초(西楚)의 도읍을 팽성(彭城)으로 정하였고, 그로 인해서 원래 초나라 도읍인 팽성에서 쫓겨났다. 결국은 항우에 의해서 새로운 도읍인 침성(郴城)[5][6]으로 쫓겨나는데, 항우는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임강왕(臨江王) 공오(共敖)를 시켜서 강을 건너던 초 의제 일행을 습격했고, 초 의제는 피살되기 전에 스스로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다행히 강 건너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 이를 보고는 밤중 몰래 초 의제의 시신을 건져내서 장례를 치렀다.
3. 초 의제의 시해와 그 여파 평가
역사가들은 초 의제 시해[7] 사건을 항우의 결정적 몰락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8] 항우는 신하가 황제를 시해한 역모를 저지른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 이후로 그 어떤 제후들에게서도 믿음을 얻지 못했다. 진심어린 충성을 얻지 못하게 되자 제후들이 항우에게 등을 돌리는 경우[9][10]가 많았으며, 도움을 받으려해도 지원하는 시늉만해서 골치를 썩여야 했다. 이런 악영향은 항우에겐 어마어마한 타격이었다. 특히 초 의제가 이세황제처럼 답이 없는 암군 내지는 폭군이 아닌 멀쩡한 황제였음에도 자기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명분도 없이 벽지로 쫓아내고 부하들을 보내 시해한 것이다. 당연히 당대 사람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대역죄가 벌어졌으니 중국 대륙 전체가 큰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당장 진나라의 간신, 역신이자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시해자 조고가 자기가 모시던 이세황제를 시해한 사건이 아직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항우가 조고처럼 자기가 모시던 의제를 죽이면서 항우는 더 이상 초를 중흥시키고 천하를 구한 영웅이 아니라 조고와 똑같은 역적, 황제시해자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항우의 저러한 황제 시해 행위는 천하에 대놓고 "나는 천하를 망친 진나라의 간신, 역적, 황제시해자 조고와 다를 게 없는 놈이니 나를 어서 토벌해라."라고 천하에 선언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만행이었다. 자기들이 조고의 폭정 때문에 진나라에 반기를 든 것인데 조고와 똑같은 짓을 했으니 이때부터 항우는 조고처럼 토벌되어야 하는 극악무도한 역적이 되었고 제후들에게는 황제를 시해한 천하의 역적 항우를 죽여도 된다는 매우 좋은 명분을 준 셈이다.
그래봐야 초나라 안에서 벌어진 일인데 왜 다른 나라 제후들이 남의 나라 일을 신경쓰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초 의제는 말그대로 초나라를 대표하는 군주이고 다른 나라에 주는 소속감은 미미했다. 이후 한나라만 해도 의제 살해범인 오예, 영포가 평범하게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한나라가 외국이기 때문이고 항우는 그 초나라에서, 초나라를 일으키겠다고 일어난 사람이며, 아무리 항우가 실질적으로 천하를 제패한 제1인자 권신이고 의제가 명목상 데려다 앉혀놓은 황제라 해도 일단은 섬겨야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였다. 그 나라의 황제를 그 나라의 신하가 죽였으니 다른 나라 사람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항우는 이전에도 초 의제를 죽이기 전에 이미 항복한 진왕 영자영을 의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죽였다.
일단 항우의 기존 부하들은 대부분이 항우가 그런 인간인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거나 그의 용맹함 및 패왕 항우의 휘하에서 얻을 이익을 보고 모여든 자들이라, 의제 시해를 이유로 당장 실망하고 바로 항우를 통수치는 부하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하들에게도 아무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사례로는 영포가 있는데, 의제 시해 전까지만 해도 신안대학살 등의 악행을 일선에서 수행했던 영포는 이때부터 항우와 유방 사이에서 간을 보기 시작한다.[11] 그러던 중에 유방이 파견한 수하가 "한나라가 져서 망한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초나라가 잘 돌아갈 리 없지 않습니까. 항우는 의제를 시해한 역적이오. 천하가 항우를 순순히 따르며 두고볼 것 같소?"라고 지적하자 반박하지 못했고, 이후 한나라로 오면 구강 땅의 통치권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 있다고 제안하자 한군으로 귀순하고 항우를 공격했다. 영포뿐만이 아니라 서초패왕의 부하 장수 중에서 한왕 유방이 쳐들어오자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투항한 경우도 있다. 죄없는 황제를 시해한 흉악한 역적 서초패왕이 무서워서 억지로 섬기고 있었거나 사실은 항우가 아니라 유방에게 귀부하고 싶지만 그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한 정의로운 군대를 이끄는 아주 매력적인 대의명분을 갖춘 유방이 오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12]
이렇게 명분이 떨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영토 분봉이라도 후하게 해주었다면 세력을 강하게 유지하는 것은 가능했을 터였다.[13] 하지만 항우는 그런 유리한 면마저 스스로 버린다. 항우의 난폭한 성품과 무능한 정치력, 졸렬함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항우는 결국 실리도 명분도 잃고 임금을 시해한 역적으로 전락하여 천하에 고립되어 싸우다가 패망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사실 이 부분은 항우의 유년기와 이때까지의 행적을 보면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 항량에게 길러질 때 이것저것 배우긴 했지만 전부 곧 흥미가 떨어져 깊이 배우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 이런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식견은 없었다는 것으로[14] 이렇게 학문이나 정치에 담을 쌓은 인물이 전란 와중에 요직에 오른 것은 비극의 시작인 셈이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의 초 의제
정확한 생년월일은 불명이나 항우에게 휘둘린 나약함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많은 매체에서 어린 나이에 시해당하는 소년군주로 나온다.문정후 초한지에선 초의제는 자신에게 인사를 올리는 항우를 속으로 무섭다고 느끼고 있으며 반대로 패공 유방의 인품은 얼마나 온화하냐고 생각하며 항우보다는 유방이 황제가 되는 게 천하 백성들을 위해 옳은 일이라고 여긴다. 이후 항우와 유방에게 둘 중 먼저 관중에 입성하는 자는 관중왕에 봉할 것이고 늦게 들어간 사람은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공표한다. 항우와 유방은 이에 동의했으나, 의제의 바람과는 달리 유방이 먼저 관중에 도착했음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결국 항우는 기어이 유방을 파촉으로 쫒아낸 후 관중왕에 올라 결국 유방에게 제위를 넘기려는 의제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후 의제는 침주로 쫒겨나는데, 사실 그건 항우의 계략이었고 항우의 명을 받은 영포 등이 의제를 습격하여 의제를 해하려 한다. 궁지에 몰린 의제는 항우에게 저주를 남기며 물로 뛰어들어 자살. 그는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그나마 훗날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죽고 유방이 자신의 뒤를 잇는 천하의 황제가 되면서 유방에게 제위를 넘기려고 했던 의제의 꿈이 이루어졌다.
드라마 초한전기에선 배우 희신목이 담당했는데 여기선 의제의 충신으로 나오는 송의를 통해 항우를 견제하려 시도한다. 그의 바람대로 송의는 일부러 의제에게 군사를 동쪽과 서쪽으로 양분하여 진나라를 칠 것을 제안하고 당연히 항우는 반대하나 결국 송의의 제안이 먹혀들어가고 한쪽은 유방이, 한쪽은 송의가 이끄는 항우군이 진격하는데, 가뜩이나 병사들을 재촉해도 모자랄 판에 일부러 군대를 진격시키지 않고 추위를 피할 곳도 먹을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술판이나 벌이며 군대를 지연시키지만 정작 송의는 제나라와 내통한 죄로 항우에게 끔살당하고 항우가 순식간에 권력을 장악하는 바람에 의제는 고립되고 만다. 이후 유방도 파촉으로 반강제로 쫒겨나자 이번엔 장이, 진여를 시켜 항우에게 맞서려 했으나 오히려 진여는 항우에게 붙고 장이는 달아났으며 모든 일을 의제가 꾸몄다고 자백한 의제의 부하의 혀를 항우가 잘라버리는 한편 그 부하를 직접 죽이라고 검을 쥐어주자 마지못해 그의 심장에 칼을 밀어넣어 죽이고선 곧바로 기절한다.
최후 또한 원 역사에 맞먹을 만큼 비참한데 결국 항우에게 쫒겨나 피난을 가게 되면서 비록 항씨 일족에게 옹립된 황제라고는 해도 한때 황제였던 인물이 추위에 떨면서 옆에 음식이 가득한데도 상한 음식이나 먹으라는 소리나 들으며 그의 호종 군사들에게 물이나 음식 좀 달라고 구걸하고 병사들은 그를 모욕하는 참으로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이때 웬 군사들이 갑자기 달려와서는 그들을 모두 활로 쏴 죽이자 의제는 마차 밑으로 숨는데 이들은 종리매가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종리매는 자신이 너무 늦어서 의제가 욕을 봤으니 그 죄가 크다고 하고 의제는 그를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자 의인이라고 치켜세운다. 의제는 일단 배가 너무 고프니 의제를 호의하던 군사들이 먹던 닭고기부터 먹고 말하자며 허겁지겁 닭고기를 먹고 종리매는 다 먹으면 떠나야 하니 천천히 드시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의제는 종리매를 자신을 보위하러 온 충신이라고 생각했기에 떠나야 한다는 말이 항우 곁에서 멀리 도망쳐야 한다 내지는 의제를 지켜줄 수 있는 유방에게 가야한다는 말인줄 알고 닭 좀 먹고 가자던지 여기에 술만 있으면 금상첨화 같은 태평한 소리나 늘어놓았으나 사실 종리매는 의제를 보위하러 온게 아니라 항우의 명령을 받고 의제를 죽이러 온 것으로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던 종리매가 마차밑에 숨어있던 그를 곧장 죽이는 대신 그를 죽이기 전 마지막으로 황제 대접을 해줌과 동시에 마지막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으며 닭을 한창 먹고 있을 때 부하를 시켜 뒤에서 활시위로 그를 교살한다. 이때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입에서 닭을 우물거리다 비참하게 사망한다.
이후 유방측이 의제가 살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유방과 소하 등은 의제의 죽음을 명분으로 전쟁을 결의하는 한편 제사를 지내긴 하는데 정작 의제의 죽음은 구실일 뿐이며 그를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없다시피하다.
비슷한 괴뢰군주 처지인 후한의 헌제가 어쨌거나 명색이 400여 년은 간 중화제국 통일왕조의 군주였기에 삼국지연의나 2차 창작에서 후한말의 정치에 영향을 끼친 그의 행적이나 권위, 조비의 손에 강제로 선양당하여 후한이 멸망하고 위나라가 건국된 후 비참하게 끔살당했다는 소리를 들은[16] 유비나 촉한 및 천하의 사람들이 크게 통곡하며 그의 넋을 기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타 초한지를 다루는 창작물에서도 의제의 행적이나 죽음은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다.[17]
[1] 이전의 초나라 임금은 국군, 왕을 칭했고 의제 이후의 초패왕 항우도 왕이었으므로 제(帝)를 칭한 건 그 뿐이다.[2] 중국 역사로 치자면 시황제, 이세황제에 이어 세 번째 황제.[3] 양치기로 살던 그를 명목상으로나마 왕으로 옹립해 준 항씨에 대한 이 시도는 결국 그와 항우의 사이에 결정적인 골을 파고 만다.[4] 촉(蜀) 지역과 한중(漢中) 지역의 제후왕.[5] 후대의 한나라 형주의 계양군 부근이자 현재의 천저우시. 말이 옛 초나라 영토지 그 당시 기준 촉(蜀)을 능가하는 저개발지역이었다. 당장 당대 한족의 중심지이던 하남성 낙양시나 섬서성 서안시와의 거리만 고려해 봐도 얼마나 벽지인지 알 수 있다. 아무리 초나라가 묘족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랜시간 동안 중원권 국가의 영향을 받던지라 중화문명권에는 포함되어있었는데 그 초나라 기준으로도 깡촌에 가까웠다. 광둥성 바로 북쪽에 위치해있었는데 당시 광둥성은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는 종족들(남월(南越)이라고 부르는 국가였다)이 살던 땅이었다.[6] 참고로 항우의 심복인 임강왕 공오의 영지 안에있는 지역이었다.[7] 항우가 천자를 죽이는 데에 동원된 왕이 세 명씩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모략에 의한 단순 암살이 아니라 실제로 대규모 전투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8] 그 외에도 신안의 갱으로 대표되는 지나친 잔혹성과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으로 대표되는 끔찍한 인사능력 등이 있다.[9] 심지어 의제 시해에 가담했던 구강왕 영포마저 유방에게 투항한다.[10] 다만 영포는 이후 유방에게도 반기를 든 만큼 원래 이런 놈이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11] 정확히는 의제 시해 사건이 있기 전, 영토 분봉 때부터 항우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가 항우의 직속 부하들 중 유일하게 왕작에 오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12] 이러한 명분의 차이를 극대화 하기 위해, 한고제는 출병 전 의제를 추모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13] 영토 분봉은 당시 제후들이 얻을 수 있는 실리 그 자체였다. 장량도 유방에게 지적하기를 "사람들이 지금 따르는 것은 순전히 땅을 얻기 위해서인데, 그걸 미리 줘버리면 모조리 항우에게 붙을 것입니다."라고 했으며, 젓가락 설교를 통해 역이기의 육국 부활을 저지했다. 왕릉 역시 나중에 비슷한 말을 한다. 당시에 유방 쪽 세력은 의제의 복수를 위해 항우에게 저항할 것을 부르짖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명분이며, 영토 분봉 문제가 실리 중의 실리였다.[14] 이에 반해 라이벌인 유방도 한량이었지만 말단 관리라도 해본 인물이라 항우보다는 나았다.[15] 다만 엄밀히 말하면 조의제문 자체만으로 화를 입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조정에서 선비가 쓴 글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조의제문이 문제가 된 것은 김종직의 못난 제자놈이 이 글을 실록에 올려놨기 때문이었다.[16] 끔살당했다는건 연의 한정으로 실제로는 선양후 산양공에 봉해진후 조비보다도 오래살다가 234년에 죽었다.[17] 그도 그럴것이 헌제는 명색이 황족인걸 온천하가 다 아는 진류왕인 상태에서 옹립당했지만, 의제는 가계도조차 현재까지 불분명한, 적어도 당대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양치기' 출신이니 정당성이 있느냐 그냥 상징적인 바지냐도 의견이 분분했을 것이다. 적어도 당대 반응은 초한 양측 모두 후자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점에서는 옹립되었어도 분명히 전전대 황제의 아들인 헌제와는 비중이 다를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