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0:52:49

선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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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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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 위소왕 선종 애종 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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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7><colcolor=#ece5b6>
금 제8대 황제
선종 | 宣宗
출생 1163년 4월 18일
중도 대흥부
(現 베이징시)
사망 1224년 1월 14일 (향년 62세)
남경 개봉부 황궁 영덕전
(現 허난성 카이펑시)
능묘 덕릉(德陵)
재위기간 제8대 황제
1213년 9월 22일 ~ 1224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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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82647><colcolor=#ece5b6> 성씨 완안(完顔)
중국식 : 순(珣) → 종가(從嘉)
여진식 : 오도보(吾睹補)
부모 부황 현종
모후 소성황후
형제자매 7남 8녀 중 장남
배우자 인성황후, 명혜황후
자녀 4남 1녀
작호 온국공(溫國公) → 풍왕(豊王)
→ 익왕(翼王) → 승왕(升王)
묘호 선종(宣宗)
시호 계천흥통술도근인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英武聖孝皇帝)
연호 정우(貞祐, 1213년 ~ 1217년)
흥정(興定, 1217년 ~ 1222년)
원광(元光, 1222년 ~ 1223년)
절일 장춘절(長春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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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대외관계
3.1. 남송과의 관계3.2. 서하와의 관계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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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나라의 제8대 황제.

현종으로 추존된 선효태자 윤공(允恭)의 장남으로 제6대 장종의 이복 형이자, 폐주 위소왕조카였다.

2. 생애

장종의 이복 형이었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원래는 황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의 침공으로 인해 화북이 황폐화되고, 수도인 중도 대흥부[1]가 포위되는 막장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 분란이 일어나 위소왕이 승상 흘석렬호사호(紇石烈胡沙虎)에 의해 목숨을 잃고, 호사호는 위소왕의 조카인 나이 50세의 오도보를 제위에 옹립했다. 이때 몽골은 금 조정으로부터 암바가이 칸의 유물과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

선종은 황제에 오른 직후, 호사호의 목숨을 빼앗은 뒤 1214년 5월, 수도를 중도 대흥부에서 옛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으로 천도했다(정우의 남천). 이 사안을 놓고 조정에서 큰 소란이 있었지만[2] 선종은 천도를 단행했으며, 옛 수도가 된 중도 대흥부에는 완안복흥과 태자 완안수충을 남겨 그곳을 지키도록 했다.

선종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수도를 카이펑으로 이전한 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들 때문이었다.
  • 기존 수도인 중도 대흥부는 몽골 방면의 적에 대항할 군대가 있어야 방어가 가능하지, 그렇지 않으면 바람 앞의 촛불 신세나 다름 없었다. 이미 위소왕때 중도 대흥부가 포위되면서 선종 자신이 직접 이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던 전과가 있었다.[3]
  • 천도의 필요성은 높았지만, 카이펑같이 방어력이 높으면서도 자체 생산력도 좋은 지역을 요동이나 화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산서 지역의 대동 같은 경우, 방어력만 높지 경제력이 바닥인 데다가 역시 포위당하면 답이 없었다. 그리고 북쪽으로 수도를 옮기면 이번에는 황하 이남 금나라 영토의 지배력을 잃게 되었다. 이미 화북의 황폐화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금나라에서 해당 영토를 추가로 빼앗기게 된다면 세수 부족 등으로 바로 망해버릴 것이었다.[4]
  • 카이펑에서 북송군이 방어에 실패한 것은 정강의 변만 봐도 나오듯이 그들 스스로의 삽질이 큰 원인이었다. 지형만으로 본다면 황하와 대운하가 서로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그물망 같은 수로망으로 방어가 쉬울 뿐더러, 주변 농경지도 많아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용이했다. 게다가 그나마 허술하다고 볼 수 있는 남쪽 방면의 방어망은, 이걸 실제로 쓰려면 남송의 영토를 지나야 했으므로 몽골군이 쉽사리 이 길을 고르기는 힘들었다.
  • 당시 남송은 약체화가 진행 중이었므로, 기회를 봐서 남쪽을 침공하면 남송의 풍부한 경제력까지 확보해서 다시 한 번 몽골군에 대항할 동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단점도 있었기에 조정에서 난리가 났다. 심지어 겁에 질려서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으니...
  • 국가를 창건한 요동과 옛 수도인 중도 대흥부 및 화북의 상당수를 사실상 방치했다. 이 때문에 금나라의 일부 신료들은 개봉이 너무 남쪽에 있으니 굳이 수도를 이전하려면 요동이나 산동으로 이전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냐고 아뢰기도 했다. 이는 실제 현실로 나타났는데, 선종의 천도 사실을 안 몽골이 재차 침공하는 바람에 중도 대흥부를 지키던 황태자는 도망치고, 대흥부가 불바다로 변했으며, 요동 지역은 본국과의 연락이 끊어져 쉽게 몽골이 빼앗았다.
  • 몽골의 전력을 정면에서 상대할 만한 기병 전력을 더 확보하기 힘들었다. 과거 중국의 제국들도 북부와 서부의 변경 지대를 잃으면 말을 구할 수 없어서 기병 전력을 크게 축소하고 보병 위주의 전력으로 재편했는데, 이러면 수비 능력은 보유하겠지만 적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거나 공세로 돌입하기 힘들었다. 특히 화북 지역의 많은 평야 탓에 기병의 위력은 느는 반면, 보병의 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당장 북송도 이 문제로 인해 군대 꼴이 말이 아닐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강남이 없는 상태의 북송 꼴인 셈이다.
  • 카이펑과 하남이 당장 방어는 쉬웠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몽골과 남송 사이에 끼어 있었다. 만일 두 국가가 연합한다면 일시에 양면공격을 받고, 도망칠 길도 없었다. 이는 1234년 금나라의 멸망때 실제로 나타났다.
  • 남송의 약체화가 진행되는 중이라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 적어도 방어전에서는 양양성, 장강 등의 방어선 덕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남송을 먹어치우려면 장기전을 각오해야 했으며, 그러려면 그걸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이 필요했는데 금나라에게는 그럴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일단, 선종의 천도는 금나라가 당장 붕괴하는 것을 막고, 10년 이상 버티면서 조금씩 실지를 회복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이 사안에 대해서는 둘 다 나쁜 선택지에서 그나마 좋은 선택지를 고른 경우였다고 보면 된다.

다만, 남쪽으로 천도하면서도 일단 남송과 화평해 남쪽에 배치한 군대를 북쪽으로 상당수 돌려 실지 회복을 하지는 않고, 기회만 있으면 남송을 먹어버리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것은 다음 황제인 애종의 치세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돌아왔다. 금나라군의 지속적인 남정만이 아니라, 남송은 예전의 큰 원한도 있어서 선종의 다음 대인 애종 시절에 몽골군의 남송 영토 통과를 허락하고 말았다. 이는 개봉이 함락되어 1234년 금나라가 멸망하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때 남송 조정에서는 과거의 원한과 금선종의 찝적거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몽골을 도왔다가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키면 다음에는 우리 나라 차례가 아니겠냐? 차라리 금나라가 멸망하지 않게 도와주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기에 선종이 남송과의 화친에 신경을 많이 썼다면 정말 애종 대에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 점은 선종의 완벽한 잘못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선종은 금나라의 멸망은 물론, 남송의 멸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셈이었으며, 이 때문에 현대 중국에서는 만주족이든 한족이든 간에 선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상술된 수도 이전의 단점으로 지적된 사항들은 현대의 평가일 뿐만 아니라, 당대 사람들도 이미 걱정했던 사항이다. 선종이 천도를 논할 때 부터 명신 도단일[5] 등이 위에서 말한 단점들을 대부분 지적하며 천도를 반대했다.[6] 즉 위에서 말한 단점은 당대부터 충분히 예측할 수 있던 것이라 정 남쪽으로 가려면 이에 대한 대비도 반드시 해야 했음에도 하지 않았고, 그 대가는 금나라의 멸망으로 돌아왔다.

실제로 선종이 천도를 강행하자 칭기즈 칸은 그것을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7] 전쟁을 재개하여 중도 대흥부를 함락시킨 뒤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칭기즈 칸은 중국 전선을 부장인 잘라이르 무칼리에게 맡겼는데 당시 금나라의 영토는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몽골군에 의해 하북의 군현이 차례차례 함락되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구나 변경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빈번하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금나라는 와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몽골군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호라즘 왕조의 영토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금나라는 잠시나마 중도 대흥부를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선종과 완안씨 황족들, 그리고 귀족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몽골군에게 깨졌다는 소식이 들려 올 때는 한숨을 쉬거나 곡을 하다가도 조금 지나면 잊어 버리고 연회를 벌였으며, 국토가 피폐해졌는데도 나라에 바친 양들이 살찌지 않았다고 책망했다. 또한 격구에 쓸 채를 만들기 위해 흰 암소 가죽을 찾으러 다니는 일을 벌이는 등 일반 백성들이 볼 때는 보기가 영 좋지 않은 일들을 서슴없이 행했다. 《금사》에서는 선종을 가리켜 노력은 했으나 성공한 것은 없었다고 혹평했다. 결국 선종은 위소왕보다 더한 암군에 불과했다.

선종은 늦은 나이에 즉위하여 오랜 기간을 재위하진 못했고, 간신히 금나라가 생명 연장을 하면서 망국의 군주가 되지는 않았다.

3. 대외관계

3.1. 남송과의 관계

금선종이 변경(개봉, 즉 카이펑)으로 천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남송 측에서도 몽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남송의 신하들 중 교행간을 비롯한 일파는 금나라와 몽골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진덕수를 비롯한 일파는 금나라가 쇠퇴하는 걸 틈타 세폐를 중단할 것을 권했고, 송영종은 진덕수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금선종은 남송의 세폐 중단에 대해 분개했고, 술호고기는 선종에게 남송이 세폐를 중단한 걸 구실로 삼아 남벌을 단행하라고 간언했다. 이렇게 하면 북쪽의 손실을 남쪽에서 보충할 수 있으며, 남쪽에서 강역도 넓힐 수 있다고 했다. 상의 끝에 금나라의 적지 않은 장수들도 금나라군의 실력이 몽골군보다는 부족하지만 남송군보다는 넉넉하다고 여겼다. 이에 금선종이 남송을 침공했다. 이에 송영종은 경호제치사, 사천제치사, 양회제치사 등에게 명령하여 금나라의 침공을 방어하라고 했다.

금송전쟁이 시작되자 완안새불이 이끄는 금나라군이 광산, 나산, 흥주 등 여러 도시를 연파하고 남송군을 거의 20,000명이나 참살했다. 동시에 금나라군은 여러 갈래로 내려가 번성·조양·광화군·대산관·서화·계주·성주 등지에서 남송군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의 형세가 금나라군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했고, 많은 성들이 득실복실하여 남송군은 곳곳에서 격렬한 반격을 개시했다. 이때 전쟁의 진행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순탄하지 않자 금 조정 내부에서 남송과 화해를 하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당시 금나라는 몽골 대군의 압박으로 국력이 궁핍해졌고, 진정한 통치 지역은 하남 및 섬서 일대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산동에서는 한족 무장세력으로 구성된 홍오군의 기세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이 외에도 금나라의 통치가 비교적 확고했던 요동 지방에서 야율유가[8]포선만노[9]가 반란을 일으켜 각자 나라를 세우는 등 대외적으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

흥정 2년(1218년) 말, 남송군에 작은 우위를 점한 금선종은 남송에 화친을 요구했으나 남송은 금나라의 사신을 입국시키지 않을 정도로 단호하게 대처했다. 요충지인 태원이 몽골군에게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화가 난 금선종은 금나라 흥정 3년(1219년) 봄 남송에 공격을 감행하여, 서로는 섬서, 중로는 경호, 동로는 강회로 진격했다.[10] 이에 금나라 출신이었던 이전(李全)이 홍오군을 이끌고 사방에서 금나라군을 공격하여 사살했다. 그 결과 금나라군의 주력은 화호피 전투에서 이전에게 대패했고, 퇴각할 때 또다시 추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서쪽으로 진격한 금나라군도 처음에는 대산관을 무너뜨리며 승리했지만, 끝내 양주(섬서성 일대)에서 장위(張威)에게 요격을 당해 수천 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중로의 경우, 대장 완안와가가 수만 명의 금나라군을 이끌고 조양을 포위 공격했는데, 2개월 동안 공성전을 벌이다가 남송의 장군 맹종정에게 격퇴되었다. 이때 금나라의 중로군이 지치자 조방이 조양성 밖에서 금나라군을 향해 돌발적인 공격을 퍼부었고, 맹종정이 다시 개성으로 출격하여 협공하자 금나라군은 이 전투에서 30,000명 이상을 상실하고, 완안와가는 혼자 도주했다.

3.2. 서하와의 관계

금선종 시기부터는 서북의 서하가 몽골과 연합한 뒤, 국경 지대에서 끊임없이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11] 이후 서하가 남송에 금나라를 공격할 것을 권유하자 남송도 이를 수락했다. 이에 서하군이 공주성을 공격하자 남송군도 공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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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金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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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 · 후지 · 파호로 · 사안석 완안소란 · 진규 · 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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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운익 · 조병문 · 한옥 · 풍벽 · 이헌보 · 뇌연 · 정진 고리갑석륜 · 완안와가 · 살합련 · 강신 · 오림답호토 · 완안사열 · 흘석렬아오탑
112권 「완안합달등전(完顏合達等傳)」 113권 「완안새불등전(完顏賽不等傳)」 114권 「백화등전(白華等傳)」
완안합달 · 이랄포가 완안새불 · 완안백살 · 적잔합희 백화 · 사묘애실 · 석말세적
115권 「완안노신등전(完顏奴申等傳)」 116권 「도단올전등전(徒單兀典等傳)」 117권 「도단익도등전(徒單益都等傳)」
완안노신 · 최립 · 이기 · 섭대기 · 적잔위흔 도단올전 · 석잔여로환 · 포찰관노 · 완안승립 도단익도 · 점가형산 · 왕빈 · 국용안 · 시청
118권 「묘도윤등전(苗道潤等傳)」
묘도윤 · 왕복 · 이랄중가노 · 무선 · 장보 · 장진 · 정안민 · 곽문진 · 호천작 · 장개 · 연령
119권 「점갈노신등전(粘葛奴申等傳)」
점갈노신 · 유천기 · 완안대루실 · 완안중루실 · 완안소루실 · 오고론호 · 장천강 · 완안중덕
120권 「세척전(世戚傳)」
석가노 · 배만달 · 홀도 · 단도공 · 오고론포로호 · 당괄덕온 · 오고론점몰갈 · 포찰아호질 · 오림답휘 · 포찰정수 · 도단사충 · 도단역 · 오림답복
오고론원충 · 당괄공 · 오림답림 · 단도공필 · 단도명 · 단도사희
121·122·123·124권 「충의전(忠義傳)」
호사보 · 특호 · 복홀득 · 점할한노 · 조규 · 온체한포도 · 와리야 · 납란작적 · 위전 · 완안선양 · 협곡수중 · 석말원의 · 백덕매화상 · 오고손올둔 · 고수약 · 화속가안례 · 왕유한 · 이랄고여열 · 송의 · 오고론영조 · 오고론중온 · 구주 · 이연 · 이덕기 · 왕의 · 왕회 · 제응양 · 출갑법심 · 고석 · 오승가 · 오고론덕승 · 장순 · 마양 · 백덕와가 · 오둔추화상 · 종탄 · 패출로복수 · 오방걸 · 납합포랄도 · 여해열알출 · 시무선 · 온체한로아 · 양지승 · 가방헌 · 이랄아리합 · 완안육근 · 흘석렬학수 · 포찰누실 · 여해열자록 · 조익 · 후소숙 · 왕좌 · 황괵구주 · 오림답걸주 · 타만사열 · 이방고포로호 · 올안외가 · 올안외출호 · 점할정 · 도단항 · 완안진화상 · 양옥연 · 오고론흑한 · 타만호토문 · 희여작 · 애신 · 우현 · 장방헌 · 유전 · 마경상 · 상형 · 출갑탈로회 · 양달부 · 풍연등 · 오고손중단 · 오고손노신 · 포찰기 · 채팔아 · 온돈창손 · 완안강산 · 필자륜 · 곽하마
125·126권 「문예전(文藝傳)」
한방 · 채송년 · 오격 · 마정국 · 임순 · 조가 · 곽장천 · 소영기 · 호려 · 왕경 · 양백인 · 정자담 · 당회영 · 조풍 · 주앙 · 왕정균 · 유앙
이경 · 유종익 · 여중부 · 이순보 · 왕욱 · 송구가 · 방주 · 이헌능 · 왕약처 · 왕원절 · 손국강 · 마구주 · 이분 · 원덕명 ,子 호문,
127권 「효우·은일전(孝友隱逸傳)」
온체한알로보 · 진안 · 유유 · 맹흥 · 왕진 · 유정 · 저승량 · 왕거비 · 조질 · 두시승 · 학천정 · 설계원 · 고중진 · 장잠 · 왕여매 · 송가 · 신원 · 왕여가
128권 「순리전(循吏傳)」
노극충 · 우덕창 · 범승길 · 왕정 · 장혁 · 이첨 · 유민행 · 부신징 · 유환 · 고창복 · 손덕연 · 조감 · 포찰정류 · 여해열수우 · 석말원 · 장구
조중복 · 무도 · 흘석렬덕 · 장특립 · 왕호
129권 「혹리·영행전(酷吏佞幸傳)」
고염산 · 포찰합주 · 소이 · 장중가 · 이통 · 마흠 · 고회정 · 소유 · 서지국
130권 「열녀전(列女傳)」
사리질 · 강주주 · 완안아로진 · 풍묘진 · 포찰명수 · 섭순영 · 장봉노
131권 「환관·방기전(宦官方技傳)」
양충 · 송규 · 반수항 · 유완소 · 장종정 · 이경사 · 기천석 · 장원소 · 마귀중 · 무정 · 이무 · 호덕신
132권 「역신전(逆臣傳)」
병덕 · 당괄변 · 오대 · 대흥국 · 도단아리출호 · 복산사공 · 도단정 · 이노승 · 완안원의 · 흘석렬집중
133권 「반신전(叛臣傳)」
장각 · 야율여도 · 이랄와간
134·135권 「외국열전(外國列傳)」
서하 · 고려 ,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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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국지(大金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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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2] 특히 태학생들의 반대가 심했다.[3] 특히 위소왕때 이미 금나라 병력이 수십만 명이나 갈려나간 상황이었다.[4] 사실 금나라는 건국 이후부터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화북이 난장판이 되었으니 세수가 더 부족해지는건 당연했는데, 그나마 남은 황하 이남까지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될 지는...[5] 위소왕~선종 시기 금나라 최고의 명신 중 한 명이다. 위소왕 때 대몽 전쟁에서 올바른 전략을 제시했으나 위소왕이 이를 듣지 않다가 크게 패했고, 이에 위소왕이 '재상(도단일)의 말을 듣지 않아 이런 낭패를 겪으니 부끄럽다!' 라고 한탄했다. 위소왕이 시해당한 후에도 황제를 시해한 호사호를 제압하고 선종을 황제 자리에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6] 도단일은 몽고와 평화 협상을 맺었으니 한동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므로 최대한 식량과 병사를 모아 중도 대흥부를 지키는 게 최선이며, 차선책은 요동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선종이 수도를 버리고 남하하는 순간, 북쪽 영토의 통제력은 완전히 상실될 것이며 개봉은 남쪽에도 적(남송)이 있어 자칫 포위당할 위험이 무척 높다는 이유였다. 설령 수도를 옮기더라도 요동으로 가야 북쪽 영토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요동은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 유리하므로 이를 차선책으로 보았다.[7] 몽골과의 화의가 1214년 3월에 이루어졌는데 천도를 그 해 5월에 단행했다. 당연히 칭기즈 칸은 이를 화의를 맺는 척하면서 수도를 옮겨 계속 항전할 의사에서 나온 행동으로 간주했다.[8] 요동 지역에서 후요를 세웠으나, 이후 칭기즈칸에게 투항했다.[9] 야율유가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실패하자 동진을 세웠다.[10] 금나라군을 회동에서 격파했던 가섭이 산동의 충의군과 연계하여, 고토 수복을 노렸다.[11] 이전 위소왕 시절 서하가 금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금나라는 이를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