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6:51:39

완안영중

完顔永中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1. 개요

금나라의 황족. 완안윤공의 이복형.

본래 이름은 완안윤중(完顔允中)으로 여진식 이름은 실로자(實魯刺)로 일명 만승(萬僧)이라고도 한다.

장남이었지만 서장자였기에 황태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2. 생애

1161년에 허왕이 되었고 1165년에는 판대흥부의 판윤, 1167년에는 월왕, 1171년에는 조왕, 1173년에는 추밀사가 되었다.

소덕황후 오림답씨를 곤후릉으로 이장하면서 완안영중의 어머니인 장씨도 함께 묻기로 하는데, 11월 6일에 관을 실은 행렬이 반녕궁에서 출발해 완안영중은 장씨의 영구를 모시고 먼저 출발했다. 완안영중은 신하들에게 노란 양산을 들어 앞에서 인도하게 했으며, 황태자 완안윤공이 소덕황후의 영구를 모시고 맨발로 출발했다.

소부감 장근언이 앞서가는 노란 양산을 든 사람을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고, 장례가 끝나자 장근언이 이를 상주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윤공이 아뢰어 고치게 할 일이냐면서 양산을 들고 간 사람이 잘못한 것 뿐이라고 하자 장근언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중지했다.

1181년에 판대종정사로 임명되었고 완안영중이 좋지 않게 여기자 완안윤공이 정직한 자리는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가는 것이니, 친족 중 현명한 자의 자리이며, 황자의 귀중함을 관직으로 평가하겠냐고 하자 완안영중은 기뻐했다.

1184년에 세종이 상경으로 오자 완안윤공과 함께 남았으며, 완안윤공이 아들이자 황손인 완안경, 완안순을 보내 세종이 거처하는 것에 대해 묻고, 완안영중의 아들 완안석고내를 보내 문안하도록 하자 세종이 예국공주에게 형제가 우애롭다고 칭찬했다.

1185년 6월에 금세종이 천평산 호수천에서 피서를 하고 있을 때 완안윤공이 중도에서 죽자 완안영공을 통해 완안경을 불렀고, 완안영중은 완안경, 완안영공과 함께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졌다.

1186년에 추밀사가 되었고 1189년에 완안경이 장종으로 즉위하자 완안영중은 판서경유수, 한왕이 되었으며, 그의 형제들은 각종 물품을 하사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안영중은 관청의 수리비로 3백만 전을 하사받았다.

1191년 1월 12일에 효의황후가 죽었고 완안영중은 냉병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고, 완안영중을 비롯해 완안영성, 완안영승 등 여러 왕들이 장례 날짜를 놓쳤고, 장종이 사자를 보내 상갓날이 가까운데도 가지 않는다고 꾸짖자 2월 7일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2월 13일에 완안영중은 물품을 하사받고 떠났으며, 그들이 예절을 지켰지만 장종은 이 때부터 의심하는 마음이 생겼다. 4월에는 병왕, 1192년에는 판평양부사, 호왕이 되었다.
완안영중은 금세종의 맏아들인데다가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하고 생각이 둔하고 생각해 은퇴를 요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으며, 1193년에 완안영도가 모반으로 피살되자 조정에서 궁궐의 출입을 감시하고 노는 것을 제한하고 집안 식구들의 출입을 통제했는데, 파이해가 사적으로 완안영중을 알현했다가 곤장 백 대를 맞고 파면되었다. 배만가손에게 부탁해 아들 완안석고의 벼슬을 청했다.

외삼촌 장여필의 아내인 고타알이 대정 연간에 완안영중의 어머니 상을 그려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좌도의 무리를 찾아 완안영중의 복을 빌었는데, 1194년에 고타알이 저주 때문에 주살되자 장종은 완안영중이 범인이라 의심했지만 증거를 찾지 못했다.

마침 완안영중의 넷째 아들이 경비가 삼엄하다는 이유로 도의에 어긋나는 말을 했다는 보고가 있어서 장종이 조사하도록 했는데, 완안영중의 둘째 아들의 신도문에 쓴 사와 곡이 불순한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 일로 인해 완안영중은 자결을 명받고 주살되었다.

완안영중은 국공의 예로 매장되었고 그의 아내는 위주로 안치했으며, 1207년에 왕작을 회복하라는 조서를 내려 시호를 려(厲)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