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7:35:09

야율유가


금 할거정권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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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耶律留哥, 1165~1220
금나라의 장수이자, 동요의 건국자. 이후 칭기즈칸에게 투항한다.

2. 생애

1165년 출생으로, 그는 요나라 종실의 후손이었고, 그의 조상은 요 멸망 시 금에 투항했다고 한다. 금나라에서 북변천호의 관직을 지냈다.

1211년 야호령 전투에서 금군이 몽골군에게 패하자[1], 금은 거란인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결국 그 이듬해 야율유가는 요동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잦은 부역에 시달렸던 거란인들[2]과 북부 여진족들의 호응을 받았다.

이에 호사호가 60만 대군을 이끌고 난을 진압하러 출전하자, 아직 자기들이 중과부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몽골에 지원을 요청하여[3] 호사호 휘하의 금군을 격파했다. 그 뒤 동요의 건국을 선포했다.

이를 들은 선종이 격노해 포선만노로 하여금 반란을 진압하게 하나 이를 격퇴한다.[4] 그 뒤 이랄도가 이끄는 금군을 격파한다.

1215년 요양 점령 뒤 부하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하나 이를 거절하고, 칭기즈칸에게 신하를 자처한 뒤, 요왕에 봉해지고 후요를 멸망시킨다.

1220년 사망했다.

3. 기타

1215년 야율유가가 칭기즈칸에 의해 요왕에 봉해진 뒤, 야율유가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중 야율시불[5]후요 정권을 세우나, 3년 만에 소멸되고 만다. 여기서 칭기즈칸에게 패하였던 후요 사람들 대다수가 고려를 침공한다.

[1] 그 이전 칭기즈칸은 거란인들을 준동하여 난을 일으키게 했으나 모두 금군에게 진압당했다.[2] 세종 때, 몽골을 막기 위하여, 대규모로 거란인을 동원하여 계호를 쌓은 뒤 장종때는 다시 수만의 거란인들로 하여금 계호와 변보를 쌓게 하는 등 거란족들은 금의 압제에 시달렸다.[3] 거란족들은 몽골족들과 같은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다.[4] 포선만노는 이후 간도 지역에 동진국을 건국[5] 야율유가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