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23:03:08

초평왕


초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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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초(楚)나라 12대 왕[1]
경평왕
景平王
[2]
미(羋)
웅(熊)
기질(棄疾), 거(居)
아버지 초공왕(楚共王) 웅심(熊審)
아내 맹영(孟嬴)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16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1. 개요2. 생애
2.1. 왕위에 오르기 전2.2. 왕위에 오른 뒤2.3. 오자서와의 악연2.4. 중원의 일에 개입2.5. 오나라의 침략2.6. 사후
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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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28대 군주, 12대 .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이름이 '기질'(棄疾)이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는 '거'(居)로 개명한다. 왕이 되기 전에는 진공(陳公)과 채공(蔡公)을 역임했다.초공왕의 막내아들이며 초강왕, 초영왕, 자오, 공자 흑굉의 동생이다.

2. 생애

2.1.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초 공왕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영왕이 채나라진(陳)나라를 합병하고 그를 진(陳)공과 채공으로 임명했다. 동쪽의 오나라를 쳤을 때 제나라권신이었던 경봉(慶封)을 죽이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후에 영왕이 반란으로 자결하자 영왕의 아우인 웅비가 자오로 즉위했으나 기질이 속임수를 써서 영윤인 공자 흑굉과 자오를 자결하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

2.2. 왕위에 오른 뒤

초 평왕 원년(기원전 528년), 평왕은 즉위한 뒤, 형인 영왕과는 달리 대외적으로 팽창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陳)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진애공의 아들인 진 도태자 언사의 아들 공손 오를 군주로 세우니, 그가 진혜공이다. 채(蔡)나라도 역시 다시 일으켜 세웠는데 채경후의 아들이자, 채영후의 아우인 공손 려를 세우니, 그가 바로 채평후다. 평왕 덕에 이 두 나라는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평왕은 처음에는 영왕의 대외 원정으로 인해 피폐해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벌써부터 맛이 가기 시작했는지 간신배인 비무기(費無忌)[3]를 총애하였다.

2.3. 오자서와의 악연

초 평왕 2년(기원전 527년), 평왕은 진(秦)나라와의 우호를 위해 사돈을 맺으려고 했다. 그때 사신으로 간 비무기가 일단 태자비가 될 진 공실의 공주 맹영을 보았는데,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평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녀를 평왕과 연결했고 평왕은 그런 그녀가 매우 아름다웠는지 덥썩 차지해버렸다. 그리고는 태자에게 잉첩 중 가장 예쁜 여자를 골라서 태자비로 주었다. 한편 비무기는 나중에 일이 들킬 것을 우려해 태자를 음해하였다. 그 음해에 넘어간 평왕은 태자 웅건(熊建)을 국방 수비 명목으로 변방에 보내버렸다. 비무기는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자 않아 태자를 계속 음해하여, 반란을 도모한다고 모함했다.

초 평왕 6년(기원전 524년), 비무기는 결국 태자 건의 스승인 오사를 잡아 감금하였다. 그 이유는 태자를 잘못 가르쳤다는 명목에서였다. 그리고 비무기는 화근을 없애기 위해 그 아들인 오상과 오운마저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오상만 오고, 오운(오자서)은 거부하고 정나라로 달아났다. 태자 건도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정나라로 도주했다. 결국 비무기는 닭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결국 오사와 오상만 참수했다. 그후 오자서는 정나라에서 태자 건이 엉뚱한 생각을 하는 바람에 정정공에게 죽자 정나라를 탈출했다. 이때 태자 웅건의 아들이자 평왕의 손자인 공자 웅승을 데리고 오나라로 가야했는데, 오로 가려면 반드시 초나라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신포서의 조력을 받아 오나라로 갔고, 그는 거기서 새 둥지를 틀며, 초 평왕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 결국 후술하듯 그는 성공했다.[4][5]

2.4. 중원의 일에 개입

초 평왕 10년(기원전 520년), 송원공은 화씨 가문의 당주 화해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나라, 진(晉)나라, 위(衛)나라, 오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초 평왕은 오나라와 진(晉)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화씨를 도왔다.

초 평왕 11년(기원전 519년), 송 원공은 제나라, 진(晉)나라, 위나라, 오나라의 힘을 빌려 화씨 가문을 축출하는데 성공하고 화씨는 초나라로 망명한다.

2.5. 오나라의 침략

초 평왕 12년(기원전 518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쳤다. 대장은 공자 광, 즉 훗날의 합려였고, 부장은 오자서였다. 초 평왕은 영윤 자하와 사마 위월을 보냈으나 자하는 병으로 도중에 죽고 말았다. 계보 땅에 이르러 초나라와 오나라가 싸웠는데, 오나라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초 평왕 13년(기원전 517년), 이때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오나라는 변경 비량에서, 초나라는 변경인 종리에서 일어났다. 그 내막이 뭔고 하니 오나라 처녀와 초나라 처녀가 누에를 치려고 뽕나무 잎을 뜯는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해 그것이 마을 싸움으로 번져서 오나라 비량의 사람들이 몰살되자 분노한 오왕이 공자 광을 보내 초나라를 치게 한다.

초 평왕 14년(기원전 516년), 평왕이 죽었다. 그 뒤를 그와 진(秦)나라 공주 맹영 사이의 자식인 웅진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초소왕이다.

2.6. 사후

초 평왕은 죽은 다음에 편히 쉬지 못했다. 오군이 초나라를 박살낸 뒤 오자서는 초 평왕의 무덤을 찾아가 그곳에서 시신을 파냈는데, 그 시신이 썩지 않아서 기뻐하였고, 구리 채찍으로 수백대를 쳐서 박살냈다. 그 일로 인해 숨어있던 신포서가 경악하고 그에게 쓴소리를 들었으나 그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6] 이때가 주 경왕 14년(기원전 506년)이었다. 결국 신포서는 소왕의 외가인 진(秦)나라로 가 구원을 청해 오군을 쫓아내고 소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초나라는 전국시대가 될 때까지 천하에 대한 영향력을 적지 않이 상실했다.[7]

3. 평가

초나라가 멸망할 뻔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두 개의 큰 실책을 저질렀는데, 하나는 초나라의 우방인 진(秦)나라와 관계를 악화시킨 것이었다. 원래 며느리로 삼으려고 했던 진(秦)나라의 맹영을 본인의 후궁으로 취한 것인데, 문제는 맹영이 당시 진나라 국군인 애공이 아끼던 여동생으로, 아끼는 누이가 태자비 즉 미래의 왕후로 된다고 해서 보냈더니 태자와 결혼시키는 게 아니라 본인이 차지해버리고 그것도 왕후도 아닌 후궁으로 취한 것이다. 이 일로 애공은 상당히 화난 것으로 보이는데 얼마나 열받았는지 초나라가 오왕 합려의 침공으로 수도가 점령당해 원군을 요청하자 당시 초나라의 왕이 맹영의 아들인 소왕으로 본인의 외조카임에도 초나라는 신의를 버린 나라라고 비난하며[8] 원군을 파견하기를 거부한다. 그나마 원군을 청하러 간 신포서가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통곡하며 청원하자 감동하여 "이런 신하를 둔 나라라면 살리지 않을 수 없다" 고 원군을 보냈고 초나라는 기사회생한다.

두 번째 실책은 간신 비무극을 중용한 것이다. 위에 나온 며느리 강탈 사건을 기획한 자가 바로 비무극으로, 훗날 태자가 즉위하면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비무극은 태자와 태자의 스승인 오사를 모함한다. 평왕은 비무극의 참소를 듣고 충신인 오사를 죽이려 하는데 비무극은 한 술 더 떠서 오사의 두 아들이 능력이 있다며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그 말을 따른 평왕은 오사로 하여금 두 아들을 부르라 명령한다. 오사는 장남 오상은 올 것이지만 차남 오운은 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두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오상은 아버지의 부름에 달려와 같이 죽었으나 오운은 오나라로 도망가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 초의 수도 영을 점령해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간다. 오운의 자는 자서(子胥)로 그가 그 유명한 오자서이다.

춘추시대에 예비 며느리를 본인이 취한 군주가 평왕뿐만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으로 끝났지만 초나라는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갔다. 본인의 서자인 공자 신, 공자 결과 자신이 죽인 투성연의 아들들이 목숨을 바쳐 소왕을 보필하지 않았으면 멸망했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여러 활약을 했지만 왕이 된 이후의 행보는 암군 그 자체였다.

4. 여담

1973년, 호북성 당양의 초나라 성터에 있는 무덤에서 청동 용종이 발견되었는데, '秦王卑命, 競(景)平王之定救秦戎'이라는 12자가 세겨져 있었다. 중국의 학자 이령(李靈 : 중국 이름 리링) 등의 여러 명의 학자들이 고증하기를 '경평왕'(競坪王)은 '경평왕'(景平王) 즉 초 평왕을 나타낸다고 해석하였다. '경평'은 초 평왕의 2글자 시호인 셈이다. 일단은 문헌이나 유물상에서 두 글자 시호를 최초로 사용한 초나라의 군주인 것이다.

또 전국시대 초나라에서 강력한 세 가문인 굴(屈), 소(昭), 경(景) 중에서 경씨는 평왕의 서장자인 자서(子西)의 후손이다. 경평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경을 씨로 사용한 것이다. 비슷하게 소씨는 소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소를 씨로 사용했다.
[1] 사서에 따라 28대 왕이라고도 표기하는데 이는 선대 16인의 국군을 포함한 것이다.[2] 달리 競坪王라고도 한다. 흔히 알려진 평왕은 약칭이다.[3]춘추좌씨전》에는 이름이 비무극(費無極)으로 나온다.[4] 하지만 사실 오운이 오나라에 가서 출세했을 때는 이미 초 평왕은 사망했던 뒤라 직접 원수를 갚지는 못하고 그저 구리 채찍으로 초 평왕의 시체를 치는 걸로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공이라기엔 매우 미묘한 경우.[5] 이 사건 이후 붕어한 왕의 시체를 훼손하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는 법이 제정되었고, 120여년 뒤 초나라 귀족들의 권한을 뺏으면서 왕권을 강화시킨 오기를 죽이기 위해 초나라의 귀족과 왕족들이 손을 잡고 초도왕이 죽자 거사를 단행해 죽기 일보직전까지 간 오기는 일부러 물귀신 작전을 쓰면서 도왕의 시체에 가서 자신을 인정해준 왕을 끌어안고 그들의 가문의 표시가 적힌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가 된 상태로 죽었다. 그런데 시체를 훼손한 자는 멸족시킨다는 법에 의해 그당시 오기를 죽이는데 가담한 귀족들과 왕족들은 그들이 쏜 화살이 당연히 도왕의 시체를 고슴도치로 만드는 바람에 그들 역시 남녀노소할 것 없이 죄다 멸족당하게 된다.[6] 여기서 일모도원이 유래했다.[7] 그래도 전국시대에는 오나라의 옛 영토와 월나라를 흡수할 정도로 위용을 되찾긴 했다.[8]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선 초나라는 망해도 싼 나라라며 아들의 아내를 빼앗아 갔던 나라라며 대놓고 비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