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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 비정통 황제 사마륜 | 司馬倫 | |||
출생 | 232년 ~ 240년 후반 | ||
미상 | |||
사망 | 301년 3월 13일(향년 50대~70대 추정) | ||
서진 금용성 | |||
능묘 | 미상 | ||
재위 | 서진의 황제 | ||
301년 1월 10일 ~ 301년 3월 6일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성 | 사마(司馬) | |
휘 | 륜(倫) | ||
자 | 자이(子彝) | ||
부모 | 부황 고조 선황제 모친 백부인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작위 | 낭야왕(琅邪王) → 조왕(趙王) | ||
연호 | 건시(建始, 3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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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황족. 자는 자이(子彝). 사마의의 아홉째 아들(막내 아들)로 첩인 백부인 소생이었으며, 사마사, 사마소의 배다른 아우이며, 사마주과 사마준과도 배다른 형제이다. 사마염의 계부(季父)[1]로, 사마충의 종조부(從祖父)[2]다. 처음에 낭야왕(琅邪王)으로 봉해지고 뒤에 조왕(趙王)으로 개봉(改封)된다.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232년 이후[3] ~ 240년대 후반 사이 출생하였을 것이다. 즉 사망 당시의 나이는 적어도 50세, 많으면 70세가 된다.[4] 만에 하나 종회처럼 사마의가 80세가 다 된 나이에도 가진 아들이라 유복자였다고 가정하더라도 252년생이 되니 쉰 살에 훙서(薨逝)한 게 된다.
사실상 팔왕의 난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인물이며, 가남풍을 죽이고 혜제를 내쫓아 칭제했으나 2개월도 못 된 재위기간[5] 끝에 도로 폐위당해 몰락했다. 그나마도 손수라는 모사꾼 부하에게 휘둘려서, 잘 보면 이게 사마륜 문서인지 손수 문서인지 모를 지경이다. 이름이 윤리의 륜(倫)이고 자도 이름에 맞춰서 떳떳할 이(彛)를 넣었으니 이름과 자하고 반대로 살았다.
2. 생애
265년에 조카 사마염이 즉위하여 서진을 개창하자 낭야왕이 되었다가 277년에 조왕이 되어 독업성수사가 되어 업을 지키는 일을 감독했다.296년에 서쪽에서 저족과 강족이 일어나자 사마륜의 총신인 손수와 옹주 자사 해계가 군사적인 문제로 다투면서 구양견이 사마륜의 죄악을 표문에 올렸다. 그러자 조정에서 사마륜이 관우 지역을 소란스럽게 한다고 여겨 소환, 거기장군이 되었다.
이때 바로 위 이복형(8남) 사마융이 빈자리가 된 정서 대장군에 대신 임명되어 도독옹량이주제군사가 되었다. 이에 해계, 해결 등이 손수를 죽여 저족과 강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한다라고 청했고, 장화가 이를 보고하면서 시행 여부를 묻자 사마융이 이를 허락했다. 사실상 손수의 목숨은 죽은 목숨이 되었지만, 신염이 저족과 강족이 스스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손수의 죄가 아니라고 설득해 손수를 죽이는 것을 거뒀다.
이렇게 손수가 위기를 면하자 그의 계책에 따라 곽씨, 가씨 등과 깊이 교제했으며, 혜제의 황후 가남풍의 신임을 받게 되자 녹상서사와 상서령의 직책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장화, 배외 등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손수와 함께 그들을 원망했다.
300년에 우장군을 지내면서 병권을 잡고 가남풍의 무고로 태자 사마휼이 폐위될 때 우위독 사마, 상장독 허초, 전중중랑 사의 등이 사마휼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마륜의 힘을 빌리려고 했는데, 손수의 의견에 따라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이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사마휼이 살해되자 군사를 동원해 가남풍을 몰아냈다. 상서 화욱을 시켜 가남풍을 금용성에 유폐하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면서 스스로 사지절, 도독중외제군사, 상국[6], 시중이 되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리면서 병권을 장악했다.
4월 9일에 조서를 고쳐 상서 유홍을 파견해 금설주[7]를 가지고 가남풍을 금용성에서 죽게 했으며, 이때 제왕 사마경 등의 황족과 손을 잡았다. 또한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던 장화, 배외, 해계, 해결 등을 주살했다.
사마륜은 용렬하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손수의 통제를 받았고, 부족한 인망을 얻기 위해 명성과 덕망이 있는 자들을 뽑았으며, 5월 9일에 행태손태부가 되었다.
이때 회남왕 사마윤이 몰래 자신을 토벌하려는 것을 알고 꺼려 가을 8월에 명예직인 태위로 임명해 실권인 지방력과 병권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사마윤이 알고 칭병하며 조서를 거부하자 이를 계기로 역모로 몰아 죽이려다가 결국 사마윤이 지휘하는 군사의 공격을 받게 된다. 사마윤에게 낙양 상국부를 포위당하면서 여러 번 싸웠지만 패배하자 궁노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주서사마 휴비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며, 여음왕 사마건의 설득에 넘어간 친위대의 사마복호 복윤이 혜제의 조서로 속여 사마윤을 살해하고 그 군사를 격파하자 살아남았다. 팔왕의 난 최초이자 유일의 방어전 성공 사례.
사마윤의 동생인 오왕 사마안을 죽이려고 했지만 광록대부 부지가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치라고 간언하자 죽이지 않는 대신 작위를 깎아 빈도현왕으로 삼았으며, 손수가 혜제에게 구석을 더해줄 것을 논의하자 사마륜은 구석을 받았다.
301년 정월에 산기상시인 의양왕 사마위, 상서령 만분 등을 시켜 선양할 준비를 마련했다가 9일에 황제로 즉위해[8][9] 연호를 건시(建始)라고 고쳤으며, 혜제를 폐위해 금용성에 살게 했다가 10일에 사마충을 태상황으로 높이면서 금용성을 영창궁으로 고쳤다. 황태손을 폐위해 복양왕으로 삼고 아들 사마과를 태자로 삼으면서 다른 아들이나 친척들을 왕으로 임명했으며, 그 밖의 부하들도 관직을 승진시켰다. 이때의 만행은 구미속초라는 고사성어로 비유된다.
17일에 손수와 사이가 나빴던 위장군 장림이 태자 사마과에게 손수가 권력을 전횡하니 그를 죽여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서 사마과가 이를 사마륜에게 보여줬는데, 사마륜이 다시 손수에게 보여주어 장림과 그 삼족을 죽게 만들었다.
3월에 제왕 사마경이 여러 왕들에게 격문을 돌려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신야군왕 사마흠 등과 연합해 공격하자 패했으며, 결국 혜제 사마충이 2개월 만에 황제로 복귀했다. 3월 7일에 금용성에 유폐되었다가 9일에 양왕 사마융이 사마륜 부자는 역적이라 죽여야 한다는 표문을 올리자 13일에 아들들과 함께 주살되었다. 죽기 전 사마륜은 부끄러움에 얼굴에 천을 덮고 "손수가 나를 망쳤다, 손수가 나를 망쳤다!"라고 말했다. 묘호와 시호는 없다.
3. 평가
가남풍이 사마휼을 죽이는 걸 동조하면서, 서진을 망조의 길로 이끈 인물. 총명했던 혜제의 후계자 사마휼을 비롯해 회남왕 사마윤, 장화 등 능력있는 황족과 신하들을 제거했다.그리고 기껏 가남풍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했음에도 모사꾼 손수한테 휘둘렸으며, 지적장애가 있던걸로 추정되지만 사마염의 후계자라는 정통성을 가진 혜제를 손수의 말만 듣고 무리하게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면서 사마경을 포함해 함께 거병했던 황족들은 의양왕 사마위를 빼면 반대파로 돌아섰다.
결국 2달도 채 지나지 않나 사마륜은 폐위되었고, 최후에는 손수를 원망하는 발언을 하면서 후회했던 것 같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시작할 때 좋은 일화 하나 정도는 써주는 열전에서도, 사마륜 열전만큼은 칭찬은 커녕 죽을 죄를 지었는데 사마염이 용서해줘 겨우 살아남았다는 추문이 맨 첫장에 적혀있다.
4. 미디어 믹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2019년 6월 업데이트에서 추가되었다. 계보 마왕재림의 패에 소속된 장수로 병과는 경전차. 능력치는 무력 61, 지력 63, 통솔 60, 민첩 80, 행운 84이고 성격은 경솔이다. 성우는 홍후백.
토탈 워: 삼국 팔왕의 난 DLC에서 플레이 가능 군주로 등장한다. 타입은 지휘관. 트레일러에서는 사마경, 사마영과 엮이는데 직접 싸우지는 않고, 사마륜의 군대와 사마경-사마영이 이끄는 군대가 교전을 벌인다. 시작 지역은 기주 위군(업).
키워보면 알겠지만 터무니없을 정도로 스탯이 높다. 특히 지휘관 주제에 책략 스탯이 웬만한 유니크 책사를 씹어먹을 정도. 실제 역사와 비교해보면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4.1. 대군사 사마의
역사상 모습을 반영한 건지 어린 나이인데도 전체적으로 음흉하고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첫 등장이 좀 웃긴데, 낙향했던 사마의가 낙양으로 돌아오자 집에 웬 아이가 있어서 봤더니, 낙향하기 전날 백령균과 딱 한 번 거사를 치렀는데 그 때 생긴 아이였다.2부 초중반부에서 조예가 곽조를 죽이는 일을 위해 관병을 동원해 사마 가문의 저택을 포위하자 개구멍을 통해 빠져나가 장안에 있는 사마의에게 가서 관병이 사마 가문의 저택을 포위한 사실을 알린다.
이렇게 2부 초반 등장은 그냥 좀 똑똑한 아이였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어두운 본성이 드러난다. 본인은 첩의 자식인데다 본처의 자식인 사마사, 사마소의 존재 때문에 빛을 발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사마소[10]에게 협력해 장남인 사마사를 견제하게 된다.
조방 즉위 후 사마사, 사마소가 관직을 받자 자신도 받고 싶어했지만 어머니인 백령균으로부터 조급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우선 길러야 한다는 충고를 듣는다. 사마소가 낙곡대전에서 돌아오자 아버지 사마의가 낙양의 북망산에서 몰래 사병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후휘가 사마사의 지도를 훔쳐보고 실제로 사병을 기르는 것을 확인하지만 뒤를 밟은 사마륜이 돌로 머리를 내려쳐 기절시키고 납치한다. 이 일로 외출한 것으로 인해 백령균이 어디 갔다 왔냐고 추궁하자 어머니가 아들을 의심하냐고 대꾸했으며, 사마소가 하후휘를 죽일 때 사마사의 옥패를 하후휘의 손에 놓아 사마사를 하후휘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추궁받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조상에 대한 사마의의 반감을 증폭시키기 위해 맏형이자 장래의 정적인 사마사의 목숨을 이용한 것이다. 이후 사마소와 사마륜의 역사적 행적을 본다면 소름끼칠 정도의 장면. 이 일로 사마의는 맏며느리와 본처인 장춘화를 잃은데다 최후의 보루인 옹주와 양주의 지휘권을 조상에게 헌납해야 했고, 결국에는 역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중풍+치매를 연기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백령균이 죽은 후에는 사마소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는 말을 해서 소원을 살해하게 충동질한다.
[1] 막내 삼촌이다.[2] 할아버지의 형제다.[3] 바로 위의 형이자 이복형인 사마융 역시 출생년도는 미상이고 그 다음 위의 이복형 사마간이 232년생이기 때문에 사마간보다 동생인 사마륜은 그보다 더 늦게 태어나야 한다.[4] 이는 친아버지 사마의가 179년생인 것을 감안할 때 사마의가 거의 60이 다 되어서 사마륜을 낳은 것이다. 물론 종요, 종회 부자보다는 덜하지만. 사마의의 손자들이자 사마륜의 조카들 중 최연장자인 진무제 사마염과 비슷한 또래였을 것이다.[5] 굳이 재위를 따지면 301년 음력 1월 9일 ~ 음력 3월 6일이다.[6] 동탁 다음으로 삼공의 위에 있는 벼슬을 억지로 받아낸 꼴인데 이것 때문에 상국은 별칭으로만 쓰일 뿐 아예 봉쇄되었고 위진남북조 시대의 강신(强臣)들이 상국이 아니라 승상을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 태위·어사대부와 더불어 승상이 나란히 삼공이 되는 체제는 다시는 살아나지 못 했다.[7] 황금 가루를 술에 탄 독주다.[8] 이 찬탈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이냐면 동아시아 대륙은 계승을 종법(宗法)에 따르는데 종법에서 계승자는 아들이거나 아우여야 한다. 적어도 항렬을 역주행하는 건 절대 금지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를 받은 게 이래서 엄청난 국기문란(國紀紊亂)인 것이다. 그런데 무려 종조부가 종손자(從孫子)에게 선양을 받으니 더욱 황당한 일이다.[9] 우스운 건, 사마륜도 옛 적에 죽을 죄를 지었으나 사마염이 용서해 풀려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10] 본인도 잘나가는 형에 대한 열등감과 그런 형만 챙겨주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형을 이기고 싶어하는 욕구가 컸다. 사마륜 뿐만 아니라 종회나 하안 같은 인물들도 이를 부추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