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0 03:30:24

사마표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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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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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추존] [12]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3] 친부는 회남충장왕[14] 여기까지 서진[15] 친부는 오효왕[16]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7]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8] 친부는 사마유(동래왕)[19]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0]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1]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2]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3] 친부는 진무제[24] 친부는 제헌왕[25]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6] 친부는 제헌왕[27]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8]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29] 여기부터 동진[30] 친부는 진문제[31] 윤통(閏統)[32]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3]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4]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5]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36]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37] 친부는 남궁현왕[38]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39]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0]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1]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몰?루[추존] [43]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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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司馬彪
(? ~ 306?)

서진의 인물. 자는 소통(紹統). 사마목의 장남.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2. 생애

어려서 학문에 충실하면서 지칠 줄 몰랐고 출가해서 사마목의 후사를 이었지만 실상은 여색을 좋아하고 경박하게 행동해 사마목에게 책망을 당해 후사가 될 수 없어 쫓겨나고 사마민의 후사를 계승했으며, 사람 사귀는 일은 하지 않고 오로지 학습에만 전념해 여러 서적을 널리 읽으면서 저술에 힘썼다.

처음에는 기도위가 되었다가 태시 연간[1]에 비서랑이 되어 승으로 전임되었으며, 『장자』에 주석을 달고 구주춘추를 저술했으며, 사마표는 여러 서적을 토론하고 들은 바를 엮어 광무제부터 헌제까지 2백 년을 엮고 12대를 기록해서 위 아래를 관통하면서 종합하고 여러 일을 횡으로 지나면서 기, 지, 전 등 80편을 지으니 이를 속한서라 했다.[2]

태시 초에 사마염이 친히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자 사마표가 상소해서 의논하고 정했으며, 후에 산기시랑에 임명되었다가 혜제 말년에 사망하니 향년 60여세였다.


[1] 265 ~ 274년이다.[2] 본기, 열전은 현전하지 않으나, 지의 경우 범엽의 후한서에 붙어 현전하고 있다. 후한서는 편찬자인 범엽이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되는 바람에 미완성인 채로 있다가 남조 양나라 때 유소가 지 부분만 사마표의 속한서를 가져오고 주석을 붙여서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