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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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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멸망 이후
전한 현한
국명신(新)
위치중국 대륙
수도상안 (A.D 8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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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제군주제
국성(王)
국가원수황제
주요 황제왕망 (8 ~ 23)
언어상고 중국어
문자한자
종족한족, 산월
종교유교, 도교, 중국 토속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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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역대 황제4.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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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역사상 통일 제국 중 최단명 제국이자 독자적인 시대로 구분되지 못하는 유일한 제국이다. 거기에 고작 1대(왕망) 15년이라는 매우 짧은 역사를 자랑하는데, 10년도 가지 못했던 서초항우조차 사마천에 의해 정통한 천하 종주의 계보인 <본기>에 기록되고, 초한쟁패기 자체가 하나의 시대로서 인정받는 것과는 크게 상반되는 부분이다.[2] 진나라의 통일전쟁과 초한전쟁으로 황폐화가 된 중원을 원상복구시키고 발전한 전한의 황금기를 끝내고 다시 군웅할거 모드로 전환시켜 결국 세조 광무제에 의해 내전이 끝날 때까지 경제와 산업 상태를 최악으로 만든 제국이었다.

2. 역사

전한후한 사이에서 잠깐 존재했던 단명 제국으로 일반적인 역사 구분에서는 역대 제국에 포함되지 않지만[3], 전한과 후한 사이에 공백이 있기 때문에 서술한다. 전한의 외척이었던 왕망선양, 즉 역성혁명을 통해서 건국했다. 당시의 문제였던 호족 지배를 타파하고자 급진적인 토지 제도와 정책을 시행했으며, 동흉노 제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추진하기도 했다.

황제가 된 왕망은 허나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 때문에 각계각층의 반란을 불러왔다. 이를테면 왕망은 신나라를 건국하면서, 모든 관료의 봉급을 없애고 순수 명예직으로 만들어버렸다. 왕망은 모름지기 관리란 국민에게 봉사할 마음으로 해야지 돈 벌 목적으로 해먹으면 한나라 꼴 난다고 생각하여 관료제를 개편했다. 왕망의 역성혁명을 지지하면서 그래도 개국공신인데 좀 챙겨주겠지 설레발치던 신나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관료 계층은 문자 그대로 멘탈에 금이 가서 뇌물에 의존하게 되었고[4] 이는 신나라를 말아먹는 직격탄이 되었다.

관료계층 뿐만 아니라 평민은 평민대로 죽어나갔다. 왕망은 유교 제당, 유학소 등의 몇몇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유재산을 대부분 인정하지 않고, 시대의 정전제(井田制)를 강제로 시행하게 했다. 그나마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시행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초스피드로 국가 정치체제를 완전히 혁명해버려서 호족, 평민 할 것 없이 엄청난 혼돈에 빠지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왕망이 추구했던 정책은 사유 재산 폐지, 집단 농장 등 공산주의 그 자체에 가까웠다. 전한 말기의 여러 병폐들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해보기 위해 의도는 좋았다지만, 훨씬 뒤이은 시기에 어느 정도 자본주의를 겪고 시작된 19세기 유럽공산주의도 문제점이 많았는데 잘 될 리가 없었다.

중화사상에 입각해 동흉노선비, 고구려와 같은 주변 군사 강국의 군주의 칭호를 제멋대로 격하했다. 흉노 선우는 처음에는 하사하는 인장만 ''에서 ''으로 낮추더니 나중에는 항노복우()[5]로 고쳤고, 고구려 왕은 '하구려후'()[6]로 부르게 해 흉노 제국의 오주류약제 선우나 고구려유리명왕, 대무신왕과 격렬하게 충돌했으며, 이는 이민족들의 반발과 외교 관계 악화로 이어져 왕망이 친히 이민족을 정복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외 원정을 위한 대규모 전쟁 물자 공출까지 더해지자, 관료들의 엄청난 수탈 + 사유재산 불허 + 호족의 군사 반발 등 모든 국가 막장 테크의 징조가 더해져 각지에서 적미군과 같은 대반란이 속출했으며 여기에 지방관들은 황제인 왕망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병하여 반기를 들었다. 이후 대란이 계속되던 와중 나중에 후한의 초대 황제 세조 광무제가 되는 유수(劉秀)의 군대에게 곤양대전에서 대참패를 당하며, 결국 왕망은 경시제군대에 의해서 붙잡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고 신나라도 비참하게 멸망하게 되었다. 특히 왕망의 최후는 대단히 끔찍해서 그야말로 '천참만륙'을 당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수도 상안(= 장안)이 함락될 당시에 군인들이 먼저 왕망을 발견했고, 경시제가 왕망을 죽이는 자에게는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했기에 공적을 탐한 군인은 왕망의 몸뚱이는 물론이고 다른 인간의 팔다리까지 잘라서 바쳤다고 한다. 서초 패왕 항우도 비슷한 이유로 산산조각 나긴 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대규모 전쟁들을 일으키고, 유랑민을 속출하게 만들고 난 뒤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왕망은 훗날 망탁조의의 수석으로써 역적대명사가 되었다. 심지어 1,800여 년이 지난 청나라 시대까지도 비판받았다. 그래도 국정을 등한시한 폭군은 아니었고 호족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문제 의식과 시도만큼은 좋았기에 이 부분만 현대에 와서 어느 정도 역사가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나라부터 후한으로 이어지는 군웅할거의 주범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신나라를 무너트리고 세워진 후한은 전란 후유증에 시달려서 전란 복구를 위해 입김이 세진 호족들과 연합을 해야 했고, 후한은 호족들의 협조 속에 연합 정권에 가까워서 외척의 힘이 강화되었으며 그럼에도 꽤 오래 가긴 했지만 결국 그런 점 때문에 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당시 전한 말기의 상태가 상당히 혼란스러웠음을 감안하면 왕망은 대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제위에 올랐다. 결국 혼란한 시대를 보며 혁명을 단행했으니 "건국개혁의도는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실현해내는 능력은 턱없이 부족한 인물이 세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신나라가 남긴 것은 전한 시절에 좋아진 중국의 민생을 처참한 상태로 추락하게 하고 말도 안되는 정책으로 황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며 삼국시대위진남북조시대같은 지방관들이 군웅할거 상태로 만들면서 전란으로 유랑민을 대규모로 속출하게 만드는 등 전란의 폐해가 확연히 드러나게 저지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역대 황제


신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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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 전안(田安) 왕조(王祖) 제북민왕(濟北愍王) - - -
1 왕망(王莽) - - 시건국(始建國) 9 ~ 13
천봉(天鳳) 14 ~ 19
지황(地皇) 20 ~ 23
A.D 8 ~ 23 -

4. 같이보기


[1] 전한 멸망시 5959만명.[2] 물론 사마천은 정통성보다는 현실에 좀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시로 제2대 혜제 ~ 제4대 후소제 기간을 사마천은 <여후 본기>로 묶었지만 《한서》는 각각의 <본기>로 나누었다.[3] 역사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삼국지》가 삼국시대가 시작되기 36년 전인 황건적의 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신나라 전체 역사는 전한 말의 왕망의 찬탈 과정부터 후한의 건국 과정 사이에 집어넣어도 무방하다.[4] 이는 현대 행정학의 인사론에서도 가르치는 부분인데, 개인에게 바랄 수 있는 공명심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공무원에게 적정 수준의 봉급과 노후보장을 제공하지 않으면 공무원은 필연적으로 뇌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5] 제후의 칭호에 항, 복 글자가 들어가 있다.[6] '높을 고'() 대신 '낮을 하'(下)를 사용했다. 게다가 '후'는 작위로 보면 '공'보다도 아래이다.[7] 삼황오제.[8] 삼황오제.[9] 전제(田齊) 군주 재위기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