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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조선과 전한의 관계에 대해 다루는 문서2. 상세
2.1. 한나라와 관계를 맺다
위만조선은 전한과 외신(外臣)의 약조(約)를 맺고, 중국으로부터 철제 농기구 및 무기, 가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적인 유물은 나오지 않아 철기가 아주 널리 쓰이거나 직접 제작되지는 못한 듯하다. 당시 한나라의 집권자였던 여후의 시대는 흉노에 시달려 외부 확장을 자제하는 분위기였으므로 위만조선은 안전을 보장받고, 우호관계를 맺었다.이러한 한나라 방면의 안정과 선진문화의 전수를 바탕으로 위만은 진번, 임둔까지 주변 소국들을 정복했고, 손자 대인 우거왕 대에는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진국, 중국으로 표현)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막고,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였다.
會孝惠 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 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이때는 효혜제와 여후의 때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어, 요동 태수가 곧 (위)만과 외신의 약조를 맺어 요새 밖의 오랑캐를 지켜 국경을 도둑질하지 않게 하고, 여러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듣고 허락하였다. 약조를 통해 만이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고, 그 방면의 소읍을 침략해 항복시켜, 진번·임둔이 모두 복속하여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을 지나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인 것이 많았고,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 방향의 여러 나라가 상서를 올려 천자를 뵈려고 해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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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 열전>}}} 이때는 효혜제와 여후의 때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어, 요동 태수가 곧 (위)만과 외신의 약조를 맺어 요새 밖의 오랑캐를 지켜 국경을 도둑질하지 않게 하고, 여러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듣고 허락하였다. 약조를 통해 만이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고, 그 방면의 소읍을 침략해 항복시켜, 진번·임둔이 모두 복속하여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을 지나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인 것이 많았고,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 방향의 여러 나라가 상서를 올려 천자를 뵈려고 해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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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한 무제의 즉위, 변화하는 관계
그 뒤, 한무제 유철이 제위에 오르면서 한나라의 주변국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흉노 제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으로 시작하여 남월이 원정 대상이 되었고, 조선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2.3. 전쟁의 시작 및 멸망
한나라와의 전쟁의 계기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 대해 불만을 제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섭하가 교섭에 실패하자 조선의 비왕(裨王)을 살해하고 도망간 사건이었다.그런데 한나라는 처벌은 커녕 도리어 섭하를 요동 도위에 부임시켜 공을 치하했다. 이는 조선과의 전쟁을 유인하는 미끼 작전으로 평가되는데, 과연 고조선이 군사를 파견해 섭하를 살해하면서 전한과 고조선 사이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수군과 육군의 양동 작전이 이루어졌으나, 수군이 지지부진했고, 고조선은 장기 항전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지연되자 한군의 장군 측에서 평화 관계를 제안해왔으나, 한나라가 고조선의 태자에게 호위 무장 없이 국경선인 패수를 넘으라고 요구한 것을 고조선이 거부하여 전쟁이 다시 개시되었다.
이후 고조선은 1년간의 항전에 나섰으나, 장기화된 전쟁으로 조선의 상(相) 세력이 이반하여 니계상 삼 혹은 참(參)에 의해 우거왕이 시해되었다. 이후 성기에 의해 항전 세력이 수습되었으나, 끝내 한군에 의해 고조선은 멸망했다(기원전 1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