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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十二臺營子중국의 랴오닝성 차오양시 서남 지역에서 발견된 무덤의 이름이자 넒은 뜻으로는 기원전 9세기 당시 해당 지역과 요서 지역에서 형성된 문화를 이르는 단어이다. 고조선 역시 십이대영자 문화가 전파된 권역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추정되기에 한국사와도 연관되는 문화이다.
2. 구성 및 특징
1958년 발굴 당시 3기의 무덤을 발견했으나 2기는 파손되었다는 이유로 1기만 발굴했다. 여기서 비파형 동검, 잔무늬거울 등 청동기 시대와의 연관을 유추하게 하는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비파형 동검은 십이대영자 유적 뿐만이 아닌 한반도 전역에 걸쳐 발굴되며 한국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기에, 고조선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했다는[1] 주장의 고고학적 근거가 될 수 있다.이와 더불어 1980년대 이전만 해도 기원전 10세기 경 혹은 이전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에서 탄생한 하가점 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2]의 하위로 보는 관점, 춘추전국시대 당시 반도로 이주한 동호족이 전파했다는 두 관점이 힘을 얻었지만, 21세기 들어 십이대영자 문화는 예맥족이 공급했다는 설이 많아지고 있다.[3]
한편, 세분화 하면 기원전 9세기 전반의 십이대영자 문화를 "왕팔개자 단계", 기원전 8~7세기는 "십이대영자 단계", 기원전 6~4세기는 "남동구-정가와자 단계"로 나누기도 한다. 학계에선 이중 요서에서 요동으로 넘어와 요동의 산성자유형을 동화 혹은 정복시켜 성립된 정가와자 유형을 고조선 국가가 성립된 직접적 기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이전 단계에 이미 고조선이 국가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조선/역사 항목도 참조. 여하튼 요동으로 이동 후 십이대영자 유형이 있던 자리에는 남동구 유형(주가촌 유형)이 들어섰다.
3. 기타
고고학적으로 보면 십이대영자는 문헌상 전하는 기자조선설에서 기자가 조선후로 책봉된 기원전 11세기보다 2~3세기 이후에 성립된 문화이다. 즉, 아직 고고학적으로 고조선으로 추정되는 문화는 단군조선은커녕 기자조선대까지도 기원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문헌상 기록들과는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청주 한씨 족보에 따르면 당시 고조선 군주는 의양왕(誼襄王)이라고 하나 족보는 후대의 창작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라 21세기 현재 정사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4. 관련 문서
5. 참고 항목
[1] 물론 주변국과 교류는 당연히 있었다.[2] 청동기 시대 문화 중 하나로, 주변 여러 문화권과 교류하면서 요서 지역에서 제법 번영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기후변화 등에 따른 이주가 주요 원인으로 보이는데, 한 DNA 분석 결과에 따르면 북아시아와 중원 고대인의 DNA를 가진 이들은 이후 황하쪽으로 대거 이주하는데, 이들이 상나라 세력이 된거 아니냐는 설이 있다. 물론 고고학적 차이점도 상당해서 이들에 더해 기존 세력 등 여러 문화권 세력이 합쳐져 상나라를 건국했다고 여겨진다. 또는 산둥 반도쪽 '산둥 룽산문화'에서 상나라 세력이 발원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3] 한편으론, 십이대영자 문화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위영자문화는 요서 지방에 남은 하가점상층문화 일부 세력과 요동 지역의 고대산문화, 북쪽의 유목문화가 합쳐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