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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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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군주
朝鮮侯 | 조선후
<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호칭 후(侯)
설립 기원전 1126년 / 불명
폐지 기원전 323년
초대 기자 / 불명
말대 조선왕 1세
국가 고조선
계승 부자세습

1. 개요2. 역사
2.1. 주나라의 제후2.2. 21세기 이후의 인식 변화
3. 역임자

[clearfix]

1. 개요

조선후(朝鮮侯)의 후(侯)자는 후작작위를 말한다. 조선 지방의 후작으로 단군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군주에 대한 칭호이다. 중국측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것인지 고조선에서 스스로 자칭했는지는 알 수 없다.

기원전 323년, 조선왕 1세가 왕(王, 천자)을 칭함으로써 고조선의 조선후 직책은 폐지되고 조선왕으로 군주 직책이 변경되었다.

이성계의 중세 조선 왕조 건국 이전에 고조선이 있었고,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 일대를 조선현으로 칭하는 등 조선은 지명으로 쓰였다. 조선후는 그 지방의 후작이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후에는 중국 황제로부터 조선 국왕(朝鮮國王)으로 책봉을 받았으니 조선후는 없다.

2. 역사

조선후의 목록을 시간 순서로 정렬한다.

2.1. 주나라의 제후

조선후는 중국의 주나라가 기자조선의 지배자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상나라의 왕족[1]인 기자 자서여가 주나라의 무왕에게 조선후로 책봉받아 조선후로 불리게 된다. 후에 아래의 조선후 때 제후의 호칭에서 왕을 칭하게 된다.

중국 역사서엔 그렇게 적혀 있지만 고고학적이나 실증적으론 별 근거가 없다. 그러나 기자가 조선후가 된 일화는 고려와 조선에서 국가 정체성의 레벨로 중시되었다. 자세한 건 기자조선 참조.

2.2. 21세기 이후의 인식 변화

고조선이 언제 후를 호칭으로 칭했는지는 불명이나 중국과의 교역이 있어야 하고, 후라는 호칭이 독립국의 군주호칭이어야 하며, 고조선 입장에서 중국문명이 강성함을 깨달아 그 호칭이 받아들일만한 것이라고 여겼어야 하므로 적어도 희미하게나마 조선의 정체가 알려진 기원전 7세기 이전까지 올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춘추시대~전국초기에 이르면 멸망 후 동천한 주나라의 권력과 권위가 약해지면서 각 제후국들이 슬슬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모습을 바꾸고 독립국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는데 기원전 7세기경 중국에 알려졌던 조선이라는 고대국가의 지배자도 중국과의 교역 관계를 통해 춘추~전국 초기의 각국 군주를 일컫는 호칭 중 하나인 후(侯)를 사용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 당시만 해도 황하 중심 중국 문명권과 거리가 있었던 초, 오, 월 등의 장강 유역 국가들을 제외하면 각국의 군주들은 공(公)이나 후를 칭했다.

이후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존왕이라는 대의마저 허울뿐인 것임이 명백해지자 여러 나라들이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조선도 받아들여 후에서 왕으로 호칭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위략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전국칠웅 국가인 연이 왕을 칭할 때인 역왕(易王) 무렵 조선도 왕을 칭했다고 되어 있다.

전국시대 국가 중 가장 동쪽에 있어 조선과 제일 활발히 교역하였을 연이 칠웅국 중 마지막으로 왕을 칭하자 그것이 조선에도 파급된 것이다. 당시 왕은 주나라 천자만을 일컬었던 호칭으로, 한나라 이후의 황제와 같은 의미이다. 즉 이 때 전국 칠웅국과 조선이 칭왕을 한것은 한나라 이후 베트남 군주들 및 일부 한국의 군주들이 내부적으로 황제를 칭한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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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임자

대수 군주 재위기간 세기 비고
? 조선후(朝鮮侯) ? ~ ? 기원전 7세기
세대 불명
말대 말대 조선후 ? ~ 기원전 323년 기원전 4세기 기원전 323년 후 직책을 폐지하고 국왕에 등극


[1] 제신의 서형(庶兄), 또는 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