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7:13:03

요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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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3. 하위 행정구역4. 고구려와의 관계5. 의의


요동군
遼東郡 / 辽东郡

1. 개요

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 시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군현.

2. 연혁

연나라의 장수 진개고조선을 몰아내고 어양, 상곡, 우북평, 요서군과 함께 설치하였으며, 설치 시기는 대략적으로 기원전 3세기 초 무렵의 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이 시기 요동군은 요동반도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고 대략 천산산맥 서쪽 지역만 요동군의 범위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실제 요동군이 요동반도 전체를 제대로 관할하게 된 것은 전한 때라고 보고 있다.

진대에는 군사적 기능을 중점으로 두고 운용되었으나 진한교체기에 들어서는 요동군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요동국으로 잠시 중원지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항우는 연왕 한광을 요동왕으로 이봉시키고 장도를 새로이 연왕으로 분봉하였으나, 한광은 이에 따르지 않고 무종현[1]에 머무르며 요동국으로 가지 않았던 일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에 요동국이 중원에 예속되지 않았다는 점의 근거 중 하나로 평가된다.

새로운 연왕 장도가 한광을 죽이고 실질적인 유일한 연왕이 되었고, 한대에 들어서 군국의 하나로써 이성제후국이 되었다. 하지만 장도가 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끝내 제압되고 새로운 연왕으로 노관이 봉해졌다. 노관이 통수를 치고 흉노로 망명하면서 다시금 연국은 한에 의해서 제압되는데, 이에 대한 기록에서 "상곡, 우북평, 요서, 요동, 어양을 다시 평정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점에서 노관의 망명 이후에 연국이 해체되고 해당지역에 대한 한의 지배가 회복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의 직할지로 두지 않고 연국을 재건해서 한나라 황족을 왕으로 삼고 한의 산하에 두었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진대에 설치되었으며 유주자사부에 속하였고 양평[2], 신창, 무려, 망평, 방, 후성, 요대, 요양, 험독, 거취, 고현, 안시, 무차, 평곽, 서안평, 문, 번한, 답씨의 18개 현을 관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 전한대에는 잠시 청주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유주의 관할로 바꾼 뒤로는 계속 유주에 속해 있었다.

요서, 요동, 낙랑군처럼 중원지역[4]에서 벗어나 설치된 소위 "외군(外郡)"들은 변경지역의 재지집단 및 국가의 통제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의 중국 동북지역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중국의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동연이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을 거점으로하여 위나라로부터 독립하였다. 공손강공손연이 동연의 수장이었던 시점에 진서 지리 上에서는 "(동연이) 동이의 아홉 종족을 복속시켰다고 되어 있으며, 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고 양평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5] 동이의 정복이 의미하는 것은 말그대로 정복은 아니겠으나 동이와의 교류, 상호 영향 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정도로 보면 될 듯 하다.[6]

일례로 수차례에 걸쳐 군치를 옮긴 현도군요동에 있었던 무렵에는 부여가 현도군의 관할 아래에 놓이자 부여가 직접 요동군으로 바꾸어달라고 요청한 기록도 있다.[7]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동연이 있었던 무렵에도 어느 정도 요동군의 본래 기능인 지방 재지토착 민족의 관리 기능은 약간의 명칭을 달리하여[8]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동연이 조위의 사마의에 의해서 정리되고 중원 국가에 예속된 요동군으로서 군현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서진대에 들어서는 잠시 요동국으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하였으나 5세기 무렵에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따라서 지금의 랴오양을 치소로 두었던 요동군은 실질적으로 폐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잠시 수나라대에 들어서 군치를 옮긴 요동군이 존재하였으나 기능 및 관할 범위는 이전에 비해서 줄어들었고 얼마 가지않아 폐군된다.

3. 하위 행정구역

  • 양평현(襄平縣) - 요동군 군치. 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시(遼陽市) 일대[9]로 평남 순천시에 소재하는 요동성총의 벽화를 통해서 요동성의 모습을 알 수 있다.
  • 신창현(新昌縣)
  • 무려현(無慮縣)
  • 망평현(望平縣)
  • 방현(房縣)
  • 후성현(候城縣)
  • 요수현(遼隧縣)
  • 요양현(遼陽縣)
  • 험독현(險瀆縣)
  • 거취현(居就縣)
  • 고현현(高顯縣)
  • 안시현(安市縣) - 지금의 랴오닝성 잉커우시(營口) 일대. 나중에 고구려의 안시성이 된다.
  • 무차현(武次縣)
  • 평곽현(平郭縣) - 지금의 랴오닝성 가이저우시(蓋州市) 일대. 건안성에 대한 기록에서 과거 한나라 평곽현이라고 전하고 있다.
  • 서안평현(西安平縣) - 단둥시(丹東市) 애하첨고성[10]
  • 문현(汶縣)
  • 번한현(番汗縣)
  • 답씨현(沓氏縣)
  • 낙취현(樂就縣)
  • 역성현(力城縣)

4. 고구려와의 관계

한국 역사에서는 초기 고구려와 가장 먼저 충돌한 한군현 세력으로 알려져 있으며 건국 초 고구려는 요동군과의 정면대결보다는 행인국, 개마국, 갈사국, 옥저 등, 고구려 동남부의 소국부터 정리하는 길을 택했다.[11] 그러나 고구려의 확장방향으로 보아 한군현 세력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태조왕 즈음에는 자신감이 붙었는지 종종 요동 변경을 공격하기도 했다.

결국 서기 121년, 후한 유주자사 풍환(馮煥)은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과 함께 요동군을 이끌고 대대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태조왕은 아우 고수성에게 우회해서 요동과 현도를 습격하게 하고, 이후 자신은 요동군 신창현(新昌縣)을 공격해 요동태수 채풍을 사살했다.

이후로도 고구려와 요동군의 충돌은 계속되었으며, 184년 고국천왕 대에는 요동군이 고구려를, 242년에는 동천왕이 요동군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했으며 318년 모용선비가 요동을 차지한 이후로도 충돌은 계속되었다. 결국 요동반도 전체가 고구려로 편입된 4세기 말~5세기 초가 되어서야 충돌이 멈췄다.

5. 의의

낙랑군과 함께 기능적으로 한나라의 변경지역을 통치하는 역할이 부여된 외군에 해당하는 군현으로 5~6세기에 이르러서도 요동, 동북, 한반도 일대에는 중국의 군현이 남아 있지는 않았음에도 해당지역을 설명하는 개념적인 용어로 남게 된다. 특히 고구려가 중국에 견사 후 받는 작위들에는 요동이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장수왕도 "(전략)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의 작호를 받은 바 있으며,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도 요동군왕이라는 작호를 받은 바 있다.

역사적으로 요동반도를 포함하는 중국의 동북삼성 일대는 "만주"라는 이름의 역사지리적인 구분이 되기도 하는데, 논자에 따라서는 만주라는 중근세에 들어서 생긴 표현보다도 "요동"이라는 표현이 동북삼성에 대한 역사지리적인 구분 명칭으로서 더 정확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요동사를 저술한 김한규 교수가 대표적이다.[12]

[1] 지금의 톈진 근방[2] 요동군의 치소[3] 이 중 최소 14개 현은 천산산맥 북쪽에 있던 것으로 비정된다. 그래서 요동반도 남부는 요동군의 영향이 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요동군 18개 현 대부분은 위치 비정에 논란이 없으나 유독 번한현 하나만 논란이 있다. 학자에 따라 번한현을 혼하 북쪽에 비정하기도 하고, 북한의 박천강 일대에 비정하기도 한다.[4] 협의의 중원지역[5] 이는 평주(平州)조의 기록인데, 평주에 대해서 요동, 창려, 현도, 낙랑, 대방의 5개 군이 평주였고, 유주와 경계를 두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6] 산상왕고발기 간의 왕위쟁탈전에서 군사를 빌려주거나, 부여고구려와의 혼인 동맹 등의 사건들이 중국 사서에 복속시켰다 정도로 기록된 듯 하다.[7] 참고로 후한고구려현도군 소속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부여의 정체는 고국천왕 사후 벌어진 왕위 쟁탈전에서 고발기를 지지한 소노부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8] 동이교위 설치 이전에는 동부교위[9] 산다오하오 전한 취락유적에서 창평(昌平)명 토기편이 확인된 바 있고, 그 인근에 소재하는 태강기년묘에서 양평(襄平) 각자가 확인된 바 있다.[10] 안평락미앙(安平樂未央)명 와당과 안평성(安平城)명 토기편이 확인된 바 있다. 애하첨고성의 배후 산지에는 고구려 산성인 호산산성(虎山山城)이 축조되어 있다. 박작성으로 비정되는 산성이며, 최근(2022년) 만리장성 동단과 관련된 논란이 있다.[11] 가령 서기 28년(대무신왕 11년)에 있었던 요동태수의 침공은 재상 을두지의 계책으로 요동군을 물러나게 하고, 이후 한나라에 조공을 바쳤다.[12] 요동사라는 관점뿐만 아니라 한국사와의 관계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살펴본 연구로서 많은 큰 의의를 갖고 높게 평가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각이라는 견해와 동시에 실체적이지 않다는 점 및 지나친 지역사적 관점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