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1 09:53:36

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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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역사4. 역대 심왕 목록5. 심왕 관련 학술연구


瀋王

1. 개요

원 간섭기 당시 랴오닝성 선양시(瀋陽, 한국식으로 읽으면 '심양') 일대에 고려의 전쟁 포로, 이주민 등의 집단이 있다고 하여 관련된 명목상의 봉작이 만들어졌는데, 후술할 내용같이 사실상 실권은 없었고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했다. 원나라는 이 자리를 주로 동방 3왕가를 견제하고 고려 내의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이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원사》에 있는 제후왕들의 서열에서 고려 국왕을 39위에 두었고, 심양왕을 37위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왕족이 임명되었는데, 고려 국왕이자 심왕이었던 충선왕(제26대) 이외에는 모두 독립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고려 국왕을 노렸다. 원나라가 고려에 대해 주도권을 쥐고 군림하기 위해 때때로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도 이용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심양왕(瀋陽王)이라는 명칭으로도 유명하지만 실제 심양왕은 초기의 작호이고, 급이 높아진 심왕으로 불린 기간이 길다. 드라마 <기황후>에서도 심양왕으로 등장한다.[1][2]

2. 배경

윤은숙 교수(강원대학교)가 저술한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에 따르면 고려 국왕이 심왕에 임명된 데에는 꽤나 복잡한 당대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13∼14세기 동북 만주 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도의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경 왕씨 부마(쿠르겐)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했다.

여기서 우선 옷치긴 왕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 옷치긴(Otchigin) 즉 테무게 옷치긴(1168∼1246)은 태조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인데,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칭기즈 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현재의 아무르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었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막내동생인 옷치긴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커서 자신이 서방원정(1219∼1225)을 떠날 때 신생 제국의 국정 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이 깊었으며, 그 덕분에 옷치긴 왕가는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서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옷치긴 사후 제2대 왕은 타가차르(塔察兒)였다. 타가차르는 세조 쿠빌라이 칸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리크부카(阿里孛哥)를 툴루이 내전에서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제5대 카안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쿠빌라이 칸(원 세조)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내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항상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國事)를 논의하였으며 매우 존경을 받았다.(《집사》)”
그래서 타가차르는 원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도 파견하고, 민호도 소집하기도 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점에서 옷치긴 울루스는 원 세조(쿠빌라이 칸)에게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윤은숙 교수는 심왕 제도도 옷치긴 울루스의 남하(南下)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 ―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서 심왕위를 요동에 설치해 양자가 서로 충돌하여 옷치긴 울루스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 세조가 우려했던 일이 훗날에 터지는데 1287년 옷치긴 왕가의 제4대 제왕인 나얀(乃顔 : 타가차르의 손자)이 원 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다른 제왕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원 세조는 고령(73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1287년 나얀을 처형했다.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의 제25대 충렬왕은 장인이었던 원 세조에게 즉각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 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카다안의 침입).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이 진압되어 고려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요약하면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동방 3왕가들은 만주의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원나라대칸들은 원 간섭기 당시 고려 부마을 분봉왕으로 내세워 옷치긴 왕가 등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기 위해 명예직으로서 심왕 작위를 신설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고려 왕실에 대한 심왕 임명 또한 당대의 원나라 중앙과 동방 3왕가간의 파워게임의 연장선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원나라는 이 자리를 주로 동방 3왕가를 견제하기 위한 자리로 이용하기보다는 고려 내의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주로 이용하였다.

참고로 고려심왕의 경우, 심왕은 작위로서의 왕일 뿐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작위가 아니었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이를 동군연합이라 볼 수는 없으며, 참고로 제26대 충선왕 이후에는 고려 국왕과 심왕의 작위가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따로 따로 주어졌으므로 이를 함께 겸한 것도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 역사

원래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摠官)과 같은 비슷한 역할의 직위가 있긴 했지만 '심양왕'이란 봉작이 창설된다. 창설되고 처음으로 봉해진 건 충선왕이었다. 충선왕은 제위 계승 분쟁에서 무종 카이산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훗날의 인종)를 지지한 대가로써 이 직위를 얻었다. 그래서 충선왕은 고려 국왕과 심양왕 양쪽의 직위를 가지게 된다. 충선왕이 고려 국왕으로 복위한지 1년 후인 1310년, 1자왕인 '심왕'(瀋王)으로 격상되어 개칭되었다.

그리고 충선왕은 원 인종으로부터 우승상직을 제안받기도 했으나 너무 잘나가면 견제를 받아 몰락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양해야 할 정도로 잘나간 적이 있었다. 때문에 심양왕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하나 더 받게 됐고, 얼마 뒤에는 1자왕인 심왕으로 격상되었다. 충선왕이 고려 국왕과 심왕을 겸하던 시절에는 그의 두 왕작을 한데 합쳐서 고려심왕(高麗瀋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 왕만이 아니라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3] 를 양자로 삼았다가 그에게 심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는 충선왕의 정책 때문에 고려 내에서의 권력을 잃은 이들이 고려 왕이 심왕을 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압력을 황실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충선왕 때부터 부원배들의 입성책동이 시작되었다.

이 탓인지 왕고가 심왕이 된 후로 더욱 실권은 없어졌고,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원나라는 이 자리를 고려 내의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 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했던 고려인들이 사실상 본국을 괴롭히게 만듦으로써 고려가 끝까지 원나라의 입김을 받게 만든 직위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심왕 왕고는 고려 왕위에도 욕심을 내어 사촌인 충숙왕을 참소하며 괴롭혔고, 할머니의 복수[4] 왕고 사후 심왕위는 왕고의 손자인 왕토크토아부카(王篤朶不花)에게 이어졌다. 왕토크토아부카도 고려 왕위를 노려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376년 고려와의 국경 지역에서 주둔하던 왕토크토아부카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고, 왕토크토아부카와 밀통했던 고려의 승려 소영은 처형당했다.

일각에서는 이 심왕 작위를 고려왕이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하나, 실제로는 가능성 없는 이야기다. 심왕은 고사하고 고려왕조차 원 황제의 의중에 따라 폐위는 물론 복위까지 맘대로 할 수 있었던 상황인데, 만일 고려왕이 정말로 심왕 작위를 내놓지 않은 채 뻗대고 있으면 당연히 원 중앙조정은 가차없이 폐위로 대응할 것이다. 반대로 심왕이 고려왕 자리를 끝까지 차지하지 못한 것도 양측의 견제를 통해 원이 보다 쉽게 개입하기 위한 것이니 충선왕 이후 고려심왕 체제가 유지될 가능성은 없었다.

4. 역대 심왕 목록

순서 휘(이름) 재위 기간 생몰년도 비고
01 왕장(王璋) /
왕이지르부카(王益知禮普花)
1307년 혹은 1308년 ~ 1316년 1275년 ~ 1325년 고려 제26대 충선왕
02 왕고(王暠) /
왕올제이투(王完澤禿)
1316년 ~ 1345년 ? ~ 1345년 고려 제25대 충렬왕의 손자
03 왕토크토아부카(王篤朶不花 / 王脫脫不花) 1354년 ~ 1376년 ? ~ 1376년 제2대 심왕이었던 연안군 왕고의 손자
이외에 《고려사》 <예지>에서 충렬왕을 심왕으로 호칭하고, 《원사》 <공주 열표>에서 충숙왕을 심왕으로 호칭했으나 오류로 추정된다.

5. 심왕 관련 학술연구

고려 충선왕의 심양왕 피봉과 재원 정치활동, 이승한, 역사학연구 2권, 1988
14 세기 전반 고려 , 원관계와 정치세력 동향 - 충숙왕대의 심왕옹립운동을 중심으로 -, 이익주, 한국중세사연구, 2000
고려후기 對元관계 --입성책동과 상인-, 이정신, 만주연구 3권, 2005
忠宣王의 요동회복 의지와 高麗王·瀋王의 분리 임명, 한국인물사연구 21호, 2014
몽골제국의 동방 경영과 요동 고려인 세력, 오기승, 중앙사론 43권, 2016
왕고(王暠)와 고려 정치 -심왕옹립운동에 관한 검토-, 박수현, 윤미소, 김영서, 경북사학, 2020


[1] <기황후>에 등장하는 '심왕'에 대한 오류로 당시엔 이미 '심왕'으로 격상되었을 때였고, 경칭도 '전하'가 아닌 '저하'로 나왔었다. 중국엔 '저하'라는 호칭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2] 중국에서는 통상 한 글자를 쓰는 '1자왕호'가 두 글자를 쓰는 '2자왕호'보다 격이 높다. 한 글자는 '국'(國), 두 글자는 '군'(郡)이 영지로 하사되기 때문이다.[3] 충선왕의 이복형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의 차남[4] 제27대 충숙왕은 왕고의 할머니인 정화궁주 왕씨를 괴롭힌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의 손자이다. 둘 다 제25대 충렬왕의 왕비이며, 따라서 왕고와 충숙왕도 같이 충렬왕의 손자이다. 장자상속제에 따르면 원래는 충렬왕의 장남 왕자(王滋)의 아들인 왕고가 차남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보다 계승 순위에서 앞섰지만, 황금씨족에 속한 몽골인의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