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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추존 군주 太初祖 | 태초조 | ||
제3대 화하 군주 黃帝 | 황제 | ||
묘호 | 태초조(太初祖)[1] | |
시호 | 황제(黃帝) | |
성 | 공손(公孫), 희(姬) | |
휘 | 헌원(軒轅) | |
부친 | 소전(少典) | |
모후 | 유교씨(有蟜氏)[2] | |
생몰 |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 |
재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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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군주.소전의 아들로 중국 신화의 신이자 현효와 청양[3]의 아버지였으며, 요 임금과 우 임금의 고조부였다. 성은 공손(公孫) 또는 희(姬)[4]이었고, 이름은 '헌원'(軒轅)이었다. 그래서 공손헌원(公孫軒轅),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 헌원씨(軒轅氏)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유웅씨(有熊氏)라고도 하고 제홍씨(帝鴻氏)라고도 부른다.[5] 흔히 알려진 명칭인 황제(黃帝)라는 명칭은 재위 기간 중에 황룡이 나타나 토덕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린 오제(五帝)들의 첫 번째 군주이며, 사실상 신화로 여겨진 삼황과 다르게 황제를 필두로 한 이들 오제(五帝)들은 실존한 제왕들로 추앙되었다. 그중에서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 여겨졌다.
전한시대 중기의 대역사가인 사마천의 명저《사기》에서도 언급되었다.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오제의 필두였는데, 황보밀의 《제왕세기》에서는 삼황의 첫 번째로 언급되었다. 《전국책》, 《주역》, 《예기》, 《회남자》에서는 오제의 세 번째, 나머지 기록에서는 오제의 첫 번째였다. 사후 신나라를 세운 가황제 왕망이 태초조(太初祖)로 추존했다.
서양에 제우스가 있다면 동아시아엔 황제 헌원씨가 있다는 말 그대로 중국 신화의 주신이다. 한국의 단군처럼 중국의 한족들이 전설적인 시조로 가장 흔히 일컫는 존재이기도 하다. 황제에 염제 신농까지 포함해서 '염황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대만에서 사용하는 <중화민국 국기가>에서도 '염제와 황제의 후손'(炎黃世冑)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현대 중국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에 따르면, 황제 헌원씨는 기원전 2716년에 태어나 20세가 되는 기원전 2697년에 즉위했고, 119세가 되는 기원전 2598년 천제(天帝)가 보낸 용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황제 헌원씨의 즉위년을 원년으로 삼은 연호가 황제기원이다.
본래 황제 헌원씨는 고대 중국에서 받들던 신격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신격이 점차 신이한 힘이 있는 위대한 인간 군주로 격하되어 고서에 기록되었다.
2. 상세
황제는 화하(華夏)라는 실체를 구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상의 군주로, 사마천은 헌원을 오제의 처음으로 <본기>(本紀)에 기록하였다. 천상과 지상을 호령하는 위대한 신이자 군주였다고 한다. 끝없는 싸움과 투쟁의 결과로 지배자가 되었기에, 중국에서 황제 공손헌원을 묘사할 때는 한 손에 항상 헌원검이라고 하는 칼을 쥔 정복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으로 만든 검이라고 한다. 별거 아닐 수도 있으나, 당시 강한 철이라는 것은 농업과 전쟁에서 필수 요인이었기에 황제의 헌원검은 전쟁은 물론 농경에도 크나큰 영향력을 미쳤다라는 것을 암시한다.고대의 다른 전승에 나오는 황제 헌원씨는 인간이 아닌, 확실히 신(神)이다. 제(帝)[6]는 본래 인간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종교는 가문의 조상을 다른 종교의 신에 상당하는 대상으로 섬기는 구조(가부장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였는데, 이 조상신을 부르는 이름이 제(帝)였으며, 좀더 정확히는, 상나라의 가장 고귀한 가문인 자(子)성 왕실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帝)라고 불렀다. 《사기》의 <은 본기>에서도 상왕조의 태조 탕왕은 시조인 설의 14대손이고, 설의 아버지는 오제 중 제곡 고신씨였으며, 제곡의 증조부가 황제 헌원씨로 기록되어 그 흔적을 읽을 수 있다.[7] 따라서 노란(黃) 제(帝)라고 불리는 존재가 본래 인간이 아님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존재를 고대의 위대한 인간 군주로 보는 시각이 퍼진 이래로, 책세상에서 펴낸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에 나오듯이 헌원은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덧칠되었다. 《포박자》에 보면 황제가 동서남북 사방의 여러 나라의 신선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중에는 청구국(고대 한국)의 자부선인이란 신선도 있다. 참고로, 상나라를 엎고 개국한 주나라의 희(姬)성 왕실은 자신들의 조상신을 천(天)으로 칭하며 하늘에 대입하고, 이것으로 제(帝)를 대체하는 프로파간다를 행했다. '천자'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황제 공손헌원은 신화적으로 창조의 신이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만들어낸 발명의 신이기도 했으며,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글자를 배포한 것은 물론, 천문과 역산 등의 다양한 기술과 생활양식을 구성해내어 백성들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었다고 한다.[8] 신화상에서의 황제, 즉 신으로서의 황제 공손헌원은 얼굴이 4개가 있어 동서남북으로 자신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는 많은 동물들이 행렬을 뒤따랐다고 한다. 황제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군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수련하여 신선이 되었으며,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단순히 얼굴이 넷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에 누를 황(黃)자가 들어가는 신답게 노란 용, 즉 황룡의 모습으로도 묘사되곤 한다. 노란색은 황제가 흙의 기운을 지녔기 때문이었고, 용이기 때문에 모든 기상현상 그 자체를 마음대로 주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황제는 비와 바람 등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9] 황제는 전설 속 곤륜산에서 머무는데, 천계와 곤륜산을 오가며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행 중에 토(土)를 관장했으며, 그 자체로 전쟁의 신이었다고도 한다.
황제는 모든 신 위에 군림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귀신과 요괴들을 지배했다. 천하를 순시하다가 동해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백택이라고 하는 짐승으로부터 11,520종의 귀신과 요괴들의 모습을 배웠기에 이후로 귀신과 요괴들은 전처럼 마음대로 날뛸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인 후토는 유명(幽冥)세계의 통치자이자 귀신나라의 왕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황제는 신도와 울루에게 명령해 세계를 떠도는 귀신들을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염제 신농의 뒤를 이어 차지한 중앙의 상제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신들 중 중앙의 자리에서 사방을 관리하는 신이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황제는 백성들의 질 높은 삶을 구축해낸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신들로부터 인정받은 덕망이 높았던 군주였다고 한다.
《사기》의 기록은 신이었던 황제를 위대한 인간 황제 공손헌원으로 역사화했다.《사기》에 따르면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했으며, 남들이 걸음마도 떼지 못했을 때 이미 뛰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적이 근근히 쳐들어오면 막고, 먹을 것이 나면 섭취하며, 안 나면 굶는 느슨한 공동체 생활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창, 방패, 수레(바퀴)[10], 옷, 글자, 거울, 60갑자, 팔괘 등을 만들어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즉 안 만든 것이 없다는 만능의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의 스승들과 함께 한의학을 정리한 것이 《황제내경》이었다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훨씬 뒤에 황제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거기다가 내용도 상당 부분이 신하이자 스승이었던 기백천사에게 공송헌원이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는 구조이다.
《사기》에 따르면 황제 공손헌원에게는 아들 25명이 있었는데, 그중 14명이 부왕 공손헌원의 성을 이어받아 수천 년 후 황하 평원을 가득 채울 부족이 되었고, 중국 역대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역시 삼황오제이자 황제의 뒤를 이어 신들을 지배하게 된 전욱 고양씨, 동해의 신 우호와 북해의 신 우경, 대홍수를 다스린 곤과 우 부자 등 이름난 신들과 영웅들을 비롯하여 중원의 한족과 변방의 일부 종족들이 바로 이 황제의 후예로, 이때문에 황제 공손헌원은 중국인의 시조가 된다고 한다.
황제가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중국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세력은 농업의 아버지인 염제 신농(神農)이었고, 노쇠한 신농의 나라를 북동쪽에서 내려온 치우(蚩尤)의 세력이 늘 노리고 있었다. 황제는 신농과의 주도권 싸움을 세 차례 벌여 세 번 다 승리하고, 거대한 연맹체를 구성한 후, 치우와 일대 결전을 벌여 결국 탁록 땅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 뒤 황제는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이 죽을 날을 선택하고 용을 타며 승천했다고 한다. 그때 신하들이 같이 올라가려고 하여, 용을 붙잡고 수염이 뽑혀서 떨어지는 등의 추태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내는 총 4명이 있었다. 그중 조강지처이자 본부인이며 첫 번째 부인은 서릉씨(西陵氏) 누조(嫘祖)였는데, 비단과 양잠을 발명했고, 황제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두었다고 한다. 네 번째 부인은 모모(嫫母)라고 하는 여인이었는데 외모는 추했으나 거울을 발명했다고 한다. 수시로 바람도 피우고 다니며 결혼 생활을 개막장으로 해서 아내인 헤라의 속을 어지간히 썩였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는 달리, 황제는 바람도 피우지 않았고 건전한 결혼 생활을 했다.
황제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설령 황제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첨삭이 있었을 것이다. 단, 그의 존재가 후세에도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받았다는 것을 볼 때 그런 인물이 실제 있었다기보다는 그런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황제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워낙 대단한 인물로 묘사되고, 동아시아에서는 학술적 내용의 연원을 고대에서 찾는 경향이 있어 각종 학파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황제는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도 소유했다. 그중에 현주(玄珠)라는 검붉은 구슬이 있었는데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신통한 것이었으나 황제가 분실했다고 한다. 한 신통한 여인이 이 구슬을 얻자 황제가 되찾으려고 군사를 보냈으나, 여인은 이 구슬을 삼키고 바다에 몸을 던져 곧 말의 머리를 한 해룡이 되었다고 한다.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은 황제가 집필한 서적이라고 전하는데, 모호한 말로 쓰여서 혹자는 병법서, 도사들은 도가의 경전, 문인들은 유가의 말을 적은 책이라 여겼다고 한다.
3. 황제릉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옌안 시에는 황제의 무덤이 실존하고 있다. 물론 전설에서 황제는 승천했다고 전해지므로 이 무덤은 의관총이다. 이곳은 중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전국 중점 문물 단위로 지정되었다. 분류상 고묘장(古墓葬)의 1호로 천하제일릉이라고도 부른다.
허난성 링보현에도 황제릉이 존재하는데, 2020년 현재 바이두 백과에 황제릉을 검색하면 이쪽이 나온다.
4. 황제기원
자세한 내용은 황제기원 문서 참고하십시오.황제가 처음 즉위했다고 하는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하는 황제기원이 청나라 말기에 사용되기도 했고, 중국에서 더러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황제기원'은 일본의 '황기'를 보고 자극받은 중국 지식인들이 창안한 것이었다. 일본 제국 당시 일본은 천황 즉위에 따른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진무 덴노가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하는 '진무덴노즉위기원'(神武天皇即位紀元), 통칭 '황기'(皇紀)도 병용했는데, 일본제국에 유학을 온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를 보고 '황제기원'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처음 '황제기원'을 주장했을 때는 원년을 어느 해로 정할지 사람에 따라 수백 년씩 널뛰기를 했으나[11] 1905년부터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하는 것이 널리 퍼졌다. 기원전 2697년은 최초의 '상원갑자'(上元甲子)라고도 전하기 때문에, 옛 중국인들이 상당히 인위적으로 정한 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요와 우가 실존했다면 훗날 헌원씨로 불리게 되는 요와 우의 고조부는 황제기원보다 훨씬 수백년 뒤에 살았을 것이다.
5. 정체 논란
황제 헌원씨는 천자(天子)로서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의 시작이었다. 또한 중국 한(漢)족의 전신인 화하족의 시조로도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기록들도 존재하는데, 《사기》의 삼가(三家) 주석인 《사기집해》에는 응소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헌원의 직책에 대해 운사라는 기록이 있다.昔者黃帝氏以雲紀 故爲雲師而雲名
옛적에 황제씨는 구름으로써 관명을 기록했다. 고로 백관과 사장을 모두 운 자로 이름지었다.
《춘추좌전》 '소공 17년'
옛적에 황제씨는 구름으로써 관명을 기록했다. 고로 백관과 사장을 모두 운 자로 이름지었다.
《춘추좌전》 '소공 17년'
《사기》 <오제본기>에도 헌원의 직책이 운사라고 나온다. 또한 상고시대의 기록인 《금문》을 보면 헌원이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없다. 중국 고대 왕의 계보는 신농으로부터 시작하며, 신농 열산씨-소호 금천씨-전욱 고양씨-제곡 고신씨-제지 청양씨-제요 도당씨-제순 유우씨-우-백익으로 나온다. 또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나 한나라의 태조인 유방이 전쟁 전에 헌원이 아닌 치우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들도 나온다.# [12] 그래서 헌원과 치우에 대해서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한편, 청나라 말기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에서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 자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 정도로 판정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 이치무라 신지로, 이이지마 타다오 등이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저술했다.
이런 황제가 다시 역사적 실존 인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은, 1990년대 이후 공산 정부의 개입하에 시행되고 있는 한족 민족주의 정책의 영향으로 중국 역사학계가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하게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한 영향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다만, 민족신화에 있어서 실존과 허구 논란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황제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황제내경》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워 권위를 얻으려 했을 뿐, 실제 저작은 한나라 시기로 추측되며, 《황로백서》라고도 불리는 《황제사경》을 비롯한 다른 황제 저작의 서적들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6. 기타
- 사자자리의 레굴루스를 중국에서는 '헌원대성'이라고 부른다.
-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한나라의 건국을 도운 최초의 셀러스티얼 '황제'가 존재하며, 황제가 쓴 병법서가 있다고 한다. 황제 헌원씨에서 모티브를 딴 듯 하다. 어쩌면 셀러스티얼 황제가 황제 헌원씨일지도 모른다.
- <여신전생 시리즈>에서는 황제라는 이름으로 영걸 혹은 영웅 종족의 악마로 등장한다.
- 《전생검신》 - 해당 항목으로.
7. 대중문화 속의 황제
- 공손헌원 - 소설 《치우천왕기》
-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 - <용의 이야기>에서 중국 문명의 고전 시대 하위 신으로 등장한다.
- 《천국의 신화》 - 2부에서 치우의 라이벌로 나온다. 서왕모의 아들로서 반고[13]의 손에 자란다. 서왕모의 아들답게 선천적으로 동물과 소통할 줄 알고, 무예에 매우 능통하다. 치우와 7년간 대립한 결과 거의 파멸할 뻔하지만 치우가 흑화로 인해 가신들에게 살해당한 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서 평화로운 시대를 이끈다고 에필로그에 언급된다. 순수한 선인도 악인도 없는 해당 작품답게, 헌원은 악인임에도 의외로 인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황토인의 군주로 추대되자마자 자신에게 극진한 예를 다하는 반고에게 '우리 친구인데 왜 그러냐'며 끝까지 반고를 신하라기보단 오랜 친구로 대했고,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며 정조를 지키는 히로인을 죽일 수 있음에도, 차마 죽이거나 매몰차게 대하지 못했다. 또, 대전쟁이 끝난 후 내분의 씨앗을 없애고자 반고를 죽일 때,[14] 반고의 마지막 부탁을 약속하고, 그가 죽자 매우 슬퍼하며, 냉혈하면서도 타인과의 약속을 중요시여기고,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허물없이 대하는, 잔인한 악인이면서도 자신의 백성들 앞엔 모범적인 군주이다.
- 《풍운》 - 능운굴(凌雲窟)의 비밀 공간에 황제의 유해가 있다. 황제는 반인반룡으로 묘사되어 꼬리가 있는데, 동영 세력은 용맥이라 불리는 꼬리뼈를 탈취하기 위해 낙산대불까지 찾아와 능운굴로 들어간다.
- 《헌원대제: 대륙의 시작》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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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漢書卷·九十九下》:九廟:一曰黃帝太初祖廟,二曰帝虞始祖昭廟,三曰陳胡王統祖穆廟,四曰齊敬王世祖昭廟,五曰濟北愍王王祖穆廟,凡五廟不墮云;六曰濟南伯王尊禰昭廟,七曰元城孺王尊禰穆廟,八曰陽平頃王戚禰昭廟,九曰新都顯王戚禰穆廟。[2] 염제 신농씨의 친모라고도 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황제 헌원씨와 염제 신농씨는 형제이다. 유교씨는 어느 날 큰 번개가 북두칠성 중의 천추성(天樞星)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감응을 받아 임신하여 황제 헌원씨를 낳았다.[3] 후대에 황제 헌원씨의 아들 소호 금천씨 현효와 제곡 고신씨의 아들 제지 청양씨가 동일인으로 간주되었다.[4] 주나라의 국성이기도 하다[5] 여기서 씨(氏)는 중국 상고시대 인물들에게 상투적으로 붙이는 호칭이다. 그래서 황제와 맞서 싸웠다는 치우를 '치우씨'(蚩尤氏)라고도 부른다.[6] 일반적으로 중국 종교(혹은 신화)에서 최고신 혹은 신성한 통치자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제국의 권력과 신성한 권위를 의미하고 하늘과 우주에 대한 통치 명령과 연관성이 있었고 도교의 우주론에선 하늘과 땅의 통치자로서 도교 만신전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고 천상의 관료를 감독하고 인간과 영혼의 행위를 심판하는 옥황상제를 가리킬 수도 있었고 전반적으로 신적 권위와 황권의 최고 형태와 같았다. 하늘, 통치, 우주 질서의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하늘과 땅의 통치자를 상징하는 가장 높고 하늘, 땅, 지하 세계를 포함한 우주에 대한 궁극적인 신성한 권위로 표현되었고 이를 통해 우주의 질서와 균형, 인간과 영의 행동과 운명을 다스렸고 우주 혹은 우주의 중요한 측면의 창조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고(문명, 농업, 예술, 과학, 육성력의 발전을 촉진했다) 우주의 통일과 인간과 신의 영역의 조화로운 통합을 상징했고 우주 질서와 통치 및 도덕 문제에 있어 심오한 지혜와 지식을 지녔고 우주 내 질서(요소의 형성, 천체의 주기,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도덕적 및 윤리적 원칙도 포함)를 확립했다.[7]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삼국시대의 명장 관우다. 즉《삼국지연의》의 그 관우다. 후에 신으로 봉해진 관우의 별칭은 관제 및 관성대제 등으로 '제'의 호칭을 땄다. 황족도 아닌데 '제'라는 호칭이 붙을 수 있는 한 가지 사례이다.[8] 이때문에, 황제는 중국의 발전에 큰 힘을 실은 인물로 평가되면서도, 중국인들은 그를 민족의 시조이자 최초의 황제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9] 어떤 문헌에서는 본래 황제가 천둥과 번개도 관장하고 있었으며, 물을 다스리는 신이었다고 한다.[10] 이름인 헌원(軒轅)의 한자에 '수레 거'(車)가 들어간 것이 이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11] 기원전 제4천년기가 되기도 한다. 민족주의적 감성이 듬뿍 들어간 '단군기원'과 비슷한 양상이다. 애초에 한•중•일 삼국 중에선 그래도 가장 짧은 편인 일본의 진무 덴노 기원부터가 역사학자들에겐 그 진실성을 의심받는 판국이니 말 다했다.[12] 물론 애초에 헌원은 싸움 잘한 덕에 이긴 것이 아니며, 관우처럼 결과적으론 패배한 장군인데도 불구하고 후대에 추앙받은 케이스가 있는걸 보면 딱히 과할 정도로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서의 아레스도 트로이 전쟁에서 아테나에게 패배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리스인들에게 잘만 섬겨졌다.[13] 인간의 삶과 사람의 몸을 갈망하던 고대 푸른늑대의 후손으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의 중간단계인 늑대인간의 외형을 가졌다. 매우 영특하고 냉정하여 헌원을 강대한 군주로 가르쳤다.[14] 헌원의 스승이자 충신이며, 친구인 반고는 정치적으론 헌원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될만한 측근이었다. 때문에 헌원은 반고가 가르쳐 준 대로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뿌리부터 뽑아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