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9:03:51

진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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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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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제2대 국왕
무왕 | 武王
생몰 <colbgcolor=#fff,#191919>기원전 329년 ~ 기원전 307년
재위 기원전 310년 ~ 기원전 307년
영(嬴)
조(趙)
탕(蕩)[1]
신체 184cm, 8위(허리 둘레)
부모 부왕 혜문왕, 모후 혜문후
형제 이복동생 소양왕
왕후 도무왕후
자녀 없음

1. 개요2. 장의와의 관계3.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4. 허망한 죽음5. 평가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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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의 제27대 군주이자 제2대 왕.

혜문왕의 아들이자 소양왕의 이복형으로 진나라의 전성기를 이어간 명군이었으나, 후세에는 구정으로 차력쇼 벌이다가 사고사한 왕으로 더 유명하다. 유일한 진나라의 한 글자 시호 왕이다.[2] 하지만 두 글자 시호인 '도무왕'(悼武王)[3], '무열왕'(武烈王)[4], '원무왕'(元武王)[5]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아마도 '무왕'이라는 시호는 약칭 시호인 듯하다.

2. 장의와의 관계

혜문왕이 승하하자 장남인 그가 뒤를 이으니 무왕이다. 무왕은 키가 8척[6]이고 허리 둘레는 8위 정도로 키가 크고 건장했으며 힘도 셌다고 한다.# 그래서 무왕은 힘센 장사를 좋아하여, 임비(任鄙)와 오획(烏獲)을 총애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문사인 장의(張儀)는 찬밥 대우를 받게 되었다.

3.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진 무왕 원년(기원전 310년), 무왕의 속마음을 알아챈 장의가 말했다.
"제나라 왕이 신을 미워합니다. 신이 위나라로 가서 제나라위나라가 서로 싸우게 하지요. 그 틈을 노려 한나라를 치시고 삼천 땅을 통과해 주 왕실을 도모해보시지요."
아무리 장의를 싫어하는 무왕이었지만 그 말은 그럴 듯 하다고 여겨 장의를 위나라로 보냈다.[7] 과연 제 민왕이 위나라를 쳤으나 장의가 풍희를 보내 설득해 민왕은 위나라를 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후 장의는 위나라로 망명한 지 1년만에 죽었다. 그리고 촉의 상국 진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주살했다.

진 무왕 2년(기원전 309년), 처음으로 좌•우 승상을 두었는데, 우승상에는 숙부인 저리질을[8], 좌승상에는 감무(甘茂)를 임명했다.

진 무왕 3년(기원전 308년), 무왕이 중원 진출을 위해 한나라의 의양을 치려할 때 숙부인 저리질이 위나라와 조나라가 도울 거라며 반대했으나 감무가 상수와 함께 위나라에 지원 요청을 하러 나섰다. 감무가 위나라에 지원을 청한 것이 성사되어 같이 한나라를 치게 되었다. 하지만 감무가 의양 공략을 반대하며 도중에 되돌아오니 무왕이 의심스러워 왜 의양을 치면 안 되는지 물었다. 그러자 한나라가 생각보다 수비가 탄탄해서 그랬다고 해명하자 무왕이 그 말에 따랐다. 그리고 과연 감무가 한나라군 100,000명이 수비하는 의양을 공략하면서 5개월 동안 함락시키지 못해 참소의 조짐이 일어나자 감무의 말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50,000명의 원병과 장수 오획 등을 보내니 사기가 충천했다.

진 무왕 4년(기원전 307년), 감무가 이끄는 진니라군이 한나라의 의양을 함락시키고 60,000명의 수급을 얻으며, 황하를 건너 무수(武遂)에 성을 쌓았다. 한 양왕은 공중을 파견해 진나라에 사죄했다. 무왕은 그것을 받아주었다.

4. 허망한 죽음

동년 8월에 주나라의 도읍인 낙양을 찾았다가 유명한 역사들인 맹열(孟說)과 임비(任鄙), 오획(烏獲)과 함께 구정들기 내기를 했다.[9] 오획과 임비는 젊고 혈기왕성한 무왕의 지기 싫어하는 성깔을 잘 알았기에
"저희는 힘이 약해 감히 솥을 들 엄두가 안납니다"
라며 뒤로 뺐다. 그런데 맹열은
"저들은 못 드는 것을 제가 들어보겠습니다"
라며 눈치없게 나서서 솥을 들어버렸고, 이에 발끈한 무왕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정을 들 뿐만 아니라 걸어 보이겠다며 나섰다. 무왕은 구정을 들기는 들었으되 어찌나 힘을 썼는지 눈에서 피가 나왔고,[10] 한 걸음을 떼자마자 힘이 빠져서 오른쪽 발 바로 위에 구정을 떨어트렸다(!). 정강이가 잘려나간 무왕은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향년 23세.

그래서 연나라에 인질로 간 아우 영직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양왕이다. 결국 맹열은 사지가 찢겨 죽고 삼족이 멸족당했으며, 무왕을 뜯어말린 임비는 한중태수에 제수되었다.오획은 말리진 않았던 모양이다.[11]

5. 평가

비록 객기를 부리다가 어이없이 사망하긴 했으나 아버지인 혜문왕과 이복동생인 소양왕 못지 않은 안목은 있는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승상 제도를 도입한 인물이었고, 감무를 중용해 한나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확장시키는 등 진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6. 기타

한 설에 따르면[12], 먼 훗날 진나라를 멸망시킨 서초패왕 항우가 진무왕도 들지 못한 구정을 한 손으로(...) 들고, 팽성에 가져갔다고 한다.


[1] 《사기색은》(史記索隱) <진본기>(秦本紀)에 기록된 이름.[2] 칭왕하기 전에는 한 글자 시호만 썼다. 진여공공만 빼고.[3] 《사기》 <진시황 본기>[4] 《세본》(世本)[5]월절서》(越絕書)[6] 당시 척인 23cm로 계산하면 184cm가 나온다.[7] 다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안 그래도 장의를 숙청하려고 했는데, 장의가 선수를 치자 그대로 들어준 걸로 봐도 무방하다.[8] 樗里疾, 진 혜문왕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영질이었다. 저리질의 모친은 한나라 여인이었다. 그는 기지가 뛰어나고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꾀주머니 즉 지낭(智囊)이라고 불렀다.[9] 여담으로 구정은 주나라 천자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런 구정을 그저 힘자랑 내기용으로 취급했으니 얼마나 주나라의 권위가 추락했는지 보여준다.[10] 보통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 때 자동적으로 숨을 꾹 참아 폐에 공기가 들어간 상태에서 들곤 하는데, 이 경우 체내의 압력 불균형으로 눈과 코 등에서 피가 나오거나, 심한 경우 탈장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현대에서야 발살바 호흡 등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체내 압력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했으나 고대에 그런 호흡법이 알려져 있을리 만무했다.[11] 소설《열국지》에서는 이 에피소드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오획은 이 자리가 있기 전에 주나라로 가는 통로를 개척하기 위한 한나라 의양성 외정 도중의 공성 과정에서 의양성의 성벽을 기어오르다가 무너지는 성의 잔해에 깔려 전사하여 이미 고인이 되었고, 진무왕을 수행하는 현장에는 임비와 맹분만 등장한다. 무왕은 호기롭게 당시 진(秦)나라를 상징하는 옹주가 새겨진 솥을 갖고 귀국하겠다고 선언하며 솥을 들어보자고 한다. 임비는 무왕을 오래 모셔서 왕의 승부욕을 잘 알았기에 본인이 들어올릴 수 있는 무게의 10배는 족히 되어보여 힘이 모자라 못 들어올리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빠졌지만 제나라에서 온 맹분은 무왕과 지낸 세월이 짧아 왕의 승부욕을 몰랐기 때문에 기를 써서 들어올렸다. 이에 임비는 무왕에게 재차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귀한 몸이시니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라고 최선을 다해 말렸지만 왕으로부터 '힘도 없는 주제에 구정을 들어올릴 힘있는 사람들을 향해 질투까지 한다'는 비아냥까지 듣게 되어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이어서 무왕은 본인이 맹분보다 더 힘이 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가마솥을 들어올릴 수 있는데 그치지 않고, 솥을 들고 걸을 수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한 발짝 걸으려다가 발이 솥에 깔려 다리가 끊어지면서 과다출혈로 참변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12] 구정 항목에도 있지만 항우 시대 이전에 이미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어찌됐든 초한쟁패기 이후로는 확실히 실전된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