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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甘茂
생몰년도 미상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
진(秦)나라의 승상을 지내면서 서쪽 변경의 진나라가 중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인 의양(宜陽)을 점령한다. 손자 감라는 불과 12살 때 외교적으로 공을 세워 재상급 고위직 상경(上卿)이 되었다는 전설같은 실제 이야기가 있다.
원래 장의의 천거를 받아 진혜문왕을 섬겼는데, 혜문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장의는 실각하고 저리질과 감무가 권력을 잡았다. 흔히 말하는 승상이 바로 기원전 309년 무왕 때 처음 만든 관직이며, 저리질이 우승상, 감무가 좌승상을 맡았다.[1]
무왕은 중앙 진출을 위해 주나라 삼천(三川)[2]까지 길을 닦을 작정이었는데, 도중에 한(韓)나라의 의양(宜陽) 땅을 공략해야 하는 걸림돌이 있었다. 저리질은 '한나라를 공격할 경우 위나라와 조나라가 원군을 보낸다'고 반대했지만, 감무는 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칠 계획을 올린다. 감무는 위나라를 방문해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뜻밖에도 사람을 보내 '공격 중지'를 요청했다. 무왕이 식양(息壌) 땅까치 행차해 감무를 만나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증삼(曾參)[3]과 이름이 같은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는데, 그 소문을 듣고 오해한 사람이 증삼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살인했다!'고 고했다. 어머니는 태연히 '아들이 그럴 사람이 아니다'며 길쌈을 했다. 뒤이어 한 사람이 와서 같은 말을 해도 꼼짝달싹도 안했... 으나 또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하자 그만 담을 넘어 도망갔다(...). 이처럼 천하의 증자를 아들로 둔 어머니도 거짓말 세 번에 흔들렸는데, 의양 공략이 길어지면 왕도 저리질이나 공손연의 참언을 듣고 마음이 바뀌어 결국 감무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무왕은 참언을 듣지 않겠노라 맹세까지 했고, 비로소 감무는 의양을 공략했으나 다섯 달이 넘도록 지지부진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왕은 저리질이나 공손연의 말을 듣고 공격을 중지하라 명했다. 그러자 감무가 '우리가 맹서한 식양 땅이 없어졌습니까?'라고 되물으니 무왕은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대로 있소'하고는 총공격을 감행해 마침내 의양을 함락시켰다.
이 일화에서 '식양의 맹세'(息壤之誓)란 말이 생겼다.
그러나 진 무왕이 주나라에 길을 닦고 병사[4]한 뒤에는 저리질과의 권력다툼에서 져서 정계에서 물러났다.
2. 고려시대의 지방관리직
監務고려시대 군현에 파견되었던 지방관.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예종 때 속군현이나 향·소·부곡·장·처 등에 현령보다 한층 낮은 지방관을 처음 파견한 것이 감무의 시초라 보고 있다.
예종 시기에 처음 파견되었을 때는 지방 조직의 성장에 대응하기 위한 임시직 성격이 강했으나 이후 파견이 계속되면서 공식적인 관직체계에 흡수되고, 이에 따른 규정이 구비되면서 상설직화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태종 13년에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1] 전국시대를 다룬 사서에서는 감무 이후에도 승상이라는 용어 말고, 이전에 쓰이던 재상직인 우서장, 좌서장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2] 한대의 하남군으로 이수(伊水), 낙수(洛水), 하수(河水)가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3] 공자의 제자 가운데 효행으로 이름높은 증자[4] 진 무왕의 병사라고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진 무왕이 구정의 무게를 재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