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14:19:07

황소의 난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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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be673> 황소의 난
黃巢之 亂
당말농민기의 | 唐末農民起義
Huang Chao Rebellion
<colbgcolor=#a48252,#271327> 시기 875년 (희종 2년) ~ 884년 (희종 11년)
장소

강남(중국) 일대

황하 유역
원인 당 조정의 가혹한 조세 정책
교전세력
(진압군)
<rowcolor=black>
(반란군)
주요인물
지휘관

희종 (당 황제)
주온
이극용
왕탁
지휘관

황소
왕선지
상양
결과 진압군의 승리
영향 멸망, 5대10국시대 도래

1. 개요2. 발단3. 전개4. 결말5. 그 후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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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의 난의 전개

1. 개요

황소의 난(黃巢之亂) 또는 당말농민기의(唐末农民起义/唐末農民起義)[1]는 중국 당나라 말기인 875년에서 884년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안 그래도 무너져가던 당나라에 사형선고를 내린 사건이다. 후대의 이자성의 난과 함께 수도를 점령한, 몇 안 되는 민중 반란이기도 하다.

2. 발단

당시 당나라는 최후의 중흥군주라 불리는 선종의 사망 이후 국가 막장·멸망 테크를 타고 있었다. 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은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꿋꿋이(...) 유흥을 즐겼으며 의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희종 역시도 암군의 길을 걷고 있으니 당연히 민심은 개막장. 반란도 끊이지가 않던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당나라를 지탱해주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소금이었다. 현대에야 소금이 흔하지만 전근대 시절의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야말로 금값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소금 전매(소금의 국가적 독점 판매)에 몰두, 소금값의 30배 폭등을 이뤄내며 총재정 수입의 절반 이상을 벌어들이는 쏠쏠한 상황. 그러나 소금을 반드시 먹어야 하는 가난한 백성들은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 상황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일확천금을 위해 소금밀매업자들이 비밀결사의 형식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당나라는 재정수익을 위해 소금밀매업자들을 염적(鹽賊)으로 강력히 처벌하기 시작했고 잡히면 사형이라는 강경처벌이 잇따르자 밀매업자들은 사생결단을 내리게 된다.

3. 전개

당시 한족들은 간신들에 의해 농민으로 격하되는 일이 많았고 격하된 농민들은 성씨는 가지고 있었으나 소작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이민족 군사들에게도 급여를 주기 위해 신분차별을 더욱 심하게 하였고 수 많은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며 노역에 시달렸다.마침 희종 원년에 대기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하남성산둥성 접경 부근의 소금밀매업 을 하던 귀족이였던 왕선지(王仙之)는 실업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다.[2] 이윽고 이번 사건의 주인공, 황소산둥성에서 호응하면서 반란군의 기세는 더욱 커진다. 그런데 둘의 군대가 하나로 뭉쳐 산동과 하남 일대를 공격하자 당나라군의 어그로는 최대치로 증가했다.

결국 둘은 군대를 나눠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진군하기로 하지만 서쪽, 즉 낙양을 향해 나아가던 왕선지는 당나라 중앙군의 강력함에 놀라 벼슬을 주겠다는 당나라에 항복했다가 다시 당을 배신하여 관군에 저항하다 패배하여 전사했고 그의 목은 희종에게 바쳐진다. 그리고 목숨을 부지한 채 황소에게로 도망쳐온 왕선지군의 패잔병들은 황소 부대와 합류하여 황소를 왕으로 추대했다.

황소의 군대가 하나로 합쳐져 다시 하남성 일대를 향해 진군하려 하자, 당나라는 즉시 낙양 일대로 수십만 대군을 소집하여 황소군을 포위섬멸하고자 한다. 황소는 이 정보를 듣자 중앙군을 치지 않으려는 심플한 생각으로 하남진군을 포기하고, 남하한다.
파일:external/blogfiles2.naver.net/zd.jpg
황소 반군의 진격로.
남쪽으로 광주(광저우)까지 이르렀던(여기서 외국 상인들이 거의 제노사이드 수준의 피해를 당했다고도 한다) 황소군은 남부에 전염병이 돌자 이를 계기로 북상하고, 천년도 더 뒤의 대장정을 방불케 하는 6년 간의 대모험 끝에 880년, 충천대장군(沖天大將軍) 황소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동관(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코앞)을 점령한다. 이렇게 되자 수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관리들은 도망가고 희종마저도 성도로 피신하기로 결정한다.

파일:external/cfs2.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JHT3pAZnMy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NzUuanBnLnRodW1i&filename=75.jpg
장안에 입성하는 황소

며칠 뒤, 장안의 서문으로는 당나라 황제가 빠져나가고 동문으로는 백성들의 환호와 함께 황소가 무혈입성하는 기이한 풍경이 벌어진다. 수도 장안이 함락당한 것이다. 군기를 엄중히 하여 장안성의 민심마저 자기 것으로 만든 황소는 국호를 대제(大齊), 연호를 금통(金統)으로 하여 황위에 올라선다.[3] 장장 7년간의 대장정 끝에 그가 천하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4. 결말

황소군이 중국 남부를 휘젓고 있을 때, 아주 큰 실수 하나를 했다. 바로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은 것.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애초에 황소의 군대는 당나라 주력군을 피해서 전국 일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켰다면 각개격파 당했을 것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군편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주둔병력이 흩어지거나 또 다른 왕을 자처했을지도 몰랐던 것이 현실.[4] 이런 상황이었기에 황소군이 떠나면 다시 관군이 찾아왔고, 결국 황소군이 장안에 눌러앉았을 땐 이미 사실상 포위상태가 된 것이다. 사실 황소군은 계속 움직여야 유지되는 상황이었으며 수도인 장안을 점령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 눌러앉은 것은 전략적 실책이었던 셈이다.

황소는 매우 당황한다. 더군다나 경제적 기반마저 갖지 못한 상황이라 황소의 제국은 너무나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특히 당나라 조정이 각 지역에서 급히 병사들을 징발하여 반격에 나서자 안 되겠다 싶었던 황소는 그의 심복, 주온(朱溫)을 출병시켜 관군을 격퇴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주온은 당나라에 깔끔히 투항해 버린다.

이에 황소군의 정세는 극도로 악화되고 투르크사타족 출신의 장수 이극용(李克用)을 비롯한 토벌군에 의해 결국 황소군은 3년간의 항쟁 끝에 장안을 내버리고 탈주한다. 황소군은 하남성 일대로 파고 들어가 투쟁을 계속했지만 884년 진주(陳州, 하남 회양)에서 관군에게 대패하며 태산 낭호곡(狼虎谷)에서 황소가 자결하면서 반란은 끝을 맺는다.

5. 그 후

관군에 큰 힘이 된 주온은 난 진압의 일등공신으로서 희종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고 여러 절도사직을 겸하게 되었으며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으니, 그가 바로 주전충이다. 또한 장안 탈환의 일등공신인 이극용은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그나마 당 제국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강남(중국)이 초토화되자 당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반란 진압 23년 후인 907년, 주전충은 황제에게 양위받아 후량을 건국하면서 당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황소의 난의 여파는 한반도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안사의 난 이후 동서양 국제무역은 장안 중심의 육로를 통한 관무역에서 남중국 중심의 해로를 통한 사무역으로 전환되었는데, 강남 해안가를 휩쓴 황소의 난은 이 해상무역마저 피폐화시켰던 것이다. 당이라는 거대제국마저 무너지는 상황에서 신라라고 멀쩡할 리 없었으니, 결국 몇 년 지나지 않아 진성여왕이 즉위하자마자 신라 조정은 극심한 재정난 속에 지방 통제력을 잃고 급기야는 곳곳에서 이 지방세력들이 거병하는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다.

6. 여담

  • 최치원토황소격문을 지었다는 것이 바로 이 황소의 난이다. 하지만, 그 토황소격문은 절도사 고변의 이름으로 나왔고, 황소가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관군의 추격을 피해 동쪽으로 달아난 황소는 군량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을 납치하여 마구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를 흑색선전으로 보는 주장도 있는데, 해당 사료에서 기록한 식인 방식이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황소군은 용마채라는 거대한 맷돌을 만들어서 사람을 갈아버려 군량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짐승이든 사람이든 일단 죽여서 식용하려면 핏물을 제거하고 내장과 체모를 제거하는 등의 정상적인 도축 과정은 거쳐야 먹을만한 게 나온다.[5]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갈아버리면 인육, 뼛가루, 모발, 분뇨, 담즙을 포함한 각종 체액 등이 혼합된 뭔가가 나올 뿐이고 그냥 살덩이를 베어내는 것보다 과정도 훨씬 더 귀찮다. 적어도 사서에 기록된 식인 방식 자체는 명백한 거짓이라고 볼 수 있다.
  • 신당서 예문지에 따르면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면서 당나라 황실도서관이 불타서 장서 수만권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황소(당나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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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중국에서 쓰는 표현. 일반 중국인에게 '황소의 난'이라고 하면 '백제부흥운동'을 '부여풍의 난'이라고 부른 것처럼 무슨 사건인지 잘 모른다.[2] 왕선지는 소금밀매를 하면서 벌은 막대한 돈을 뿌려 쉽게 병사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3] 다만, 이때 황제 즉위식을 하는데 필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죄다 도망쳐 숨어버리는 바람에 병사들이 을 수백 번이나 울리는 방식으로 즉위식을 했다고 전해진다.[4] 이는 초한지 시대를 개막한 진승 오광의 난 때 그대로 나타났었는데, 혈통이 매우 중시 됐던 전근대시절에 민초에 불과했던 진승과 오광은 권위라는 게 없었고 군사를 나누는 족족 장수들이 독립을 해버렸다.[5] 그나마 핏물 제거는 제대로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내장은 일단 식용한다고 해도 먼저 따로 적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