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6:16:06

해하 전투

<colbgcolor=#C0C0FF,#2f2f52> 해하 전투
垓下之戰
시기 기원전 202년 12월[1]
장소 중국 안후이 성 쑤저우 시 링비 현
원인 초(楚)에 대한 한(漢)의 최후 일격
교전국 초(楚) 한(漢)
지휘관 항적
항백
환초
종리매
계포
항장
유방
한신
공취
진하
시무
주발
관영
유고
영포
왕릉
장이
팽월
주은
영포
양희
여마동
왕예
양무
여승
노관
병력 약 100,000 명 약 300,000 명
피해 약 80,000 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초(楚)군, 패배. 항적의 사망.
영향 초한쟁패의 종결, 통일 왕조 한나라의 시작.

1. 개요2. 시작
2.1. 초패왕 항우2.2. 초한전쟁 발발
3. 해하 전투의 전개4. 해하 전투의 결말
4.1. 추격 전의 시작, 음릉전투4.2. 회광반조, 동성 전투4.3. 패왕의 최후, 오강 전투
5. 항우는 왜 패배하였는가?6. 해하(垓下)의 위치와 관련한 논란

[clearfix]

1. 개요

파일:해하 전투.jpg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 중 해하 전투를 묘사한 장면.

[ruby(力拔山兮氣蓋世, ruby=역 발 산 혜 기 개 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도다.
[ruby(時不利兮騅不逝, ruby=시 불 리 혜 추 불 서)] 하지만 시운이 불리하니 추(騅)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ruby(騅不逝兮可奈何, ruby=추 불 서 혜 가 나 하)]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ruby(虞兮虞兮奈若何, ruby=우 혜 우 혜 내 약 하)] 우희(虞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항적, 해하가(垓下歌)

중국 초한쟁패기, (漢)과 서초(西楚)가 치른 최후의 회전. 사실상 초한대전의 대단원이라 할 수 있다.[2][3]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치른 마지막 대결로 이 승리로 길었던 전쟁을 종결지었다. 항우로선 스스로 군을 이끌고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지만[4] 이 전투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패배를 당하며 몰락했다. 그럼에도 전투 후, 엄청난 무용을 보여주며 도주에 성공하였으나, 끝에 자결하고 만다.

사기에선 이를 가지고 한 가지 일화를 전한다. 시황제가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홍의동자와 청의동자가 나타나 서로 그 태양을 가지기 위해 싸웠는데, 청의동자가 수차례 때려 쓰려뜨려도 홍의동자는 기어이 다시 일어났고 최후의 일격으로 청의동자를 물리쳤다. 홍의동자는 유방, 청의동자는 항우를 말하는 것으로 그 최후의 일격이 바로 해하 전투다. 당연히 당시 떠돌던 뜬소문 일화를 사마천이 기록한 것일 확률이 높기에, 한나라를 개창한 유방의 위대함을 알리려 한 일화로 보인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 중국에 휘몰아쳤던 대전란은 끝나게 된다. 유방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한신(韓信) 등의 내부 위협 세력을 정리하고, 영포 같은 반란군도 진압하여 한나라의 초석을 깔았다. 하지만 백등산 포위전이 남아있었다.

2. 시작

2.1. 초패왕 항우

춘추시대전국시대(戰國時代)의 난세를 종식시킨 (秦) 제국은 지나치게 혹독한 다스림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지게 되었고, 각지에서 봉기한 세력들은 저마다 기치를 내세우며 진나라와 싸우게 되었다. 진나라는 최후의 명장 장한(章邯)의 활약으로 목숨을 연명했으나, 봉기 세력 중 최강자 항우거록대전의 승리를 바탕으로 진나라의 남은 주력군을 모조리 궤멸시키고, 항복시켰다.

이후, 신안대학살을 자행한 항우는 서진하여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점령했고 자신의 권위를 바탕으로 제후들을 분봉했다. 이때 항우보다 앞서 함양에 입성한 인물이자, 범증(范增)이 가장 경계했던 유방은 당초 항우에게 제거당할 위기에서 항백 등의 도움을 얻고, 홍문연에서 범증이 짜놓은 함정을 정면돌파하여 간신히 그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우와 범증의 견제로 중국의 벽지인 파촉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2.2. 초한전쟁 발발

소하(蕭何) 등의 노력으로 재기의 힘을 얻은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때마침 제나라의 전영(田榮)을 상대하고 있던 항우는 이에 대응하기 힘들었고, 결국 유방은 초군의 본거지인 팽성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항우는 전영을 없애는 일까지는 성공했지만, 본인의 지나친 잔혹스러움 때문에 제나라에서의 싸움이 상당히 길어지고 있었다. (제나라의 사람들이 항복을 하지 않고, 죽기살기로 항전 했기 때문이다.) 결국, 항우는 우선 성양에서 저항하는 전횡(田橫)을 내버려두고 주력 3만을 이끈 채 남하하여 방심하고 있던 유방의 56만 대군을 팽성대전에서 완파하는 데 성공하였다.[5]

위기에 직면한 유방은 소하의 지원을 바탕으로 세력을 추스려 형양(滎陽)을 기점으로 항우와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항우는 다시 형양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유방은 기신(紀信)의 계략을 바탕으로 도주했고, 이후 팽월(彭越)이 후방에서 초나라군을 공격하며 전황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한신조나라(趙) 공략전인 정형전투를 시작으로 하북을 평정하고 있었기에 항우로서는 초조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형양 · 성고 전역 이후 양군은 광무 대치에서 팽팽이 대립했지만 항우는 별 소득을 거두지 못했고, 이후 용저(龍且)의 대군이 유수 전투에서 한신에게 격파당했다. 여기에 여전히 팽월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데다 경포(黥布) 마저 유방에게 회유되어 항우는 불리해진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유방, 한신, 팽월, 경포 등 사방이 적으로 가득찬 항우는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오창(敖倉)의 양식을 장악한 유방은 보급도 수월한 상황이었기에, 항우의 입장에서는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고 해도 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유방은 후공(侯公)을 보내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하자는 협약을 맺자고 하였다. 형양 포위 때는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던 항우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선 결국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승낙했고, 사로 잡았던 태공여후를 보내주었다. 협약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진평은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 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 것으로 협약을 깨고 전투를 하자고 권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항우는 지금의 하남성 태강현(太康縣) 남쪽에 있는 고릉(固陵)에서 그런 유방의 군대를 무찔렀다. 하지만, 직전, 혹은 직후에 관영이 팽성과 주변의 읍을 함락시켰고, 곧바로 진성으로 달려가서 항우의 군대를 막아내고 장수 몇을 죽였다. 기껏 이긴 항우였지만 오히려 피해만 더 가중되고 퇴로마저 끊긴 꼴이 된 셈이다.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했다. 아울러,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고(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써,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6]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한의 연합군은 항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파일:2kr6cJc.jpg
해하 전투 국면

3. 해하 전투의 전개

파일:6zKCQxO.jpg
무비지(武備誌)[7]의 한신해하오군진도(韓信垓下五軍陣圖)

이 전투에 들어서기 전, 양군이 취한 포진에 대해서는 한군의 정보만 알 수 있고, 항우의 포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이후 전개를 보면 항우의 부대는 따로 양익포위를 위한 부대를 배치하지는 않은 듯하다. 항우의 병력은 대략 십 만여 명이었다.

한군의 포진에 대한 정보는 고조본기(高祖本記)에서 그 언급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군은 제왕 한신이 30만의 병력을 앞세우고 선두에 주둔했다. 과장을 고려한다고 쳐도 당시 한신의 세력을 생각하면 상당한 전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한신의 군대 양익에 또다른 부대가 주둔했다. 좌익의 군을 이끈 인물은 요이후(蓼夷侯) 공취(孔藂)였고, 우익의 군대를 이끈 인물은 비어후(費圉侯) 진하(陳賀) 였다.

한신의 군대를 필두로 한 군대가 앞선에 나섰을 때, 유방은 그 후방에 군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그 유방의 뒤로 주발(周勃)과 시무(柴武)가 주둔하여 대비를 해 한신과 유방에 이은 삼중의 벽을 만들었다.
파일:Md1YjDB.jpg
해하 전투의 진행

전투는 한신과 항우의 대결로 시작되었다. 한신이 이끄는 앞선의 부대는 항우의 본대와 맞붙었는데, 이때의 회전에서는 항우가 한신을 압도하여 한신의 군대는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8]

이렇게 되자 자연히 한신의 부대가 뒤로 물러난 만큼 초나라 부대는 깊숙이 들어온 형세가 될 텐데, 바로 이때에 좌익과 우익에 있던 공취, 진하의 부대가 초군의 양 측면을 후려쳤다. 앞선의 부대만을 보고 너무 들어왔던[9] 항우의 부대는 양쪽에서 공격을 받자 당황하여 전세가 불리해졌는데, 이 틈에 뒤로 물러났던 한신의 부대가 다시 돌아와 혼란 상태에 빠졌던 초군을 공격했다.

결국, 삼면에서 받는 포위 공격에 초나라군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10만 명의 병사 중에 8만여 명의 목이 베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남은 초나라 군 역시 포위가 되어버려 빠져나올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초나라 군을 포위한 한나라 군대는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불렀고, 노랫 소리를 들은 항우는 크게 당혹스러워 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그 수효가 많단 말인가?"

마음이 복잡해진 항우는 밤중에 술을 마시면서 슬픔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ruby(力拔山兮氣蓋世, ruby=역 발 산 혜 기 개 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도다.
[ruby(時不利兮骓不逝, ruby=시 불 리 혜 추 불 서)] 하지만 시운이 불리하니 추(騅)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ruby(骓不逝兮可奈何, ruby=추 불 서 혜 가 나 하)]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ruby(虞兮虞兮奈若何, ruby=우 혜 우 혜 내 약 하)] 우희(虞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항우, 〈해하가(垓下歌)〉

항우가 노래를 부르자, 우희(虞姬)도 답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단, 답가의 내용은 <사기>에는 전해지지 않으며, 유명한 아래의 답가는 한참 후 소설인 <서한연의>에서 창작된 것이다.[10]
[ruby(漢兵已略地, ruby=한 병 이 략 지)] 한군이 이미 천하를 다 빼았으매
[ruby(四面楚歌聲, ruby=사 면 초 가 성)]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ruby(大王義氣盡, ruby=대 왕 의 기 진)] 대왕의 의기가 다하셨다면
[ruby(賤妾何聊生, ruby=천 첩 하 료 생)]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우희, 〈해하가〉

그 패왕 항우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항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한다. 정사에는 이후 우미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초한지에서는 우미인 자신이 항우의 걸림돌이 된다며 이 직후 자결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4. 해하 전투의 결말

4.1. 추격 전의 시작, 음릉전투

<colbgcolor=#C0C0FF,#2f2f52> 음릉 전투
시기 기원전 202년 12월
장소 음릉(陰陵) 인근[11]
원인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에 대한 한나라의 추격
교전국 초(楚) 한(漢)
지휘관 항우 관영
참전 장수 - 낭중(郞中[12] 양무(楊武)
기사마(騎司馬) 여마동(呂馬童)
낭중기(郞中騎) 양희(楊喜)
낭중기(郞中騎) 왕예(王翳)
낭중(郞中) 여승(呂勝)
병력 약 100여 명 약 5,000 명
피해 28 명만 생존 피해 규모 불명

항우는 그날 밤으로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를 수 있는 병사 800여 명을 이끌며 한군의 포위망을 뚫었고, 날이 밝은 뒤에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군은 관영(灌嬰)을 시켜 5천여 기병으로 항우를 추격했다.[13] 회수를 건넜을 때는 100명가량 남았고, 어떻게던 달아나던 항우는 음릉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길을 물었지만 항우에게 원한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 노인은 길을 거짓으로 알려주면서 늪지대에 걸려들어 추격군에 다시 따라잡혔다. 이는 민심이 항우를 오래전에 떠났다는 증거라는 말도 있다.[14]
[clearfix]

4.2. 회광반조, 동성 전투

<colbgcolor=#C0C0FF,#2f2f52> 동성 전투
시기 기원전 202년 12월
장소 동성(東城)[15]
원인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에 대한 한나라의 추격
교전국 초(楚) 한(漢)
지휘관 항우 관영
참전 장수 - 낭중 양무(楊武)
기사마 여마동(呂馬童)
낭중기 양희(楊喜)
낭중기 왕예(王翳)
낭중 여승(呂勝)
병력 28 명 약 5,000 명
피해 2 명 도위(都尉) 1 명 전사, 병사 수십 ~ 수백여 명

간신히 빠져나와 동성에 이르렀을 때는 28명만 남았다.여기서 항우는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에게 '난 결코 힘이 없어 패한 것이 아니다. 단지 하늘이 유방을 택했을 뿐.'이라며 홀로 괴물 같은 용맹을 발휘하여 한군 도위와 병사 수백을 썰어버리고 단 2명만 전사한다.
[clearfix]

4.3. 패왕의 최후, 오강 전투

<colbgcolor=#C0C0FF,#2f2f52> 오강 전투
시기 기원전 202년 12월
장소 오강(烏江)[16]
원인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에 대한 한나라의 추격
교전국 초(楚) 한(漢)
지휘관 항우관영
참전 장수 - 낭중 양무(楊武)
기사마 여마동(呂馬童)
낭중기 양희(楊喜)
낭중기 왕예(王翳)
낭중 여승(呂勝)
병력 26 명 약 5,000 명
피해 전멸 수백여 명
결과 초(楚)군, 패배. 항우의 사망.
영향 초한쟁패의 종결, 통일 왕조 한 제국의 시작.

하지만 오강에서 만난 정장이 어서 강동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자고 권유하는 걸 거절한다.그리고 정장에겐 자신의 오추마를 상으로 내린 뒤 남은 26명을 이끌고 추격대에 돌격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해하 전투와 초한전쟁, 항우의 일생 모두가 종결된다.《사기》와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항우는 말에서 내린 후, 한나라 추격군과 정말 최후의 싸움을 벌였는데, 항우 혼자서만 수백여 명의 한군을 죽였다고 한다.

초한지에서는 마지막 28명을 배에 타 달아나도록 명령하였고 오추마는 배에서 울다가 강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초한지의 판본 중에선 이 28명의 부하들은 항우가 처음 거병했을 때부터 항우를 따랐던, 가장 충성심이 강하고 실력이 뛰어난 최측근 병사들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실제 역사 기록에는 이 병사들은 도망치지 않고, 항우의 명령으로 말에서 내린 뒤 짧은 무기만 들고 항우와 함께 한나라 추격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고 나온다.

항우가 자결한 직후 수급은 왕예가 차지했고 나머지 시신 조각은 여마동, 양희, 여승, 양무가 나눠 가졌다. 유방은 5명에게 공평하게 분봉하였다.

해하 전투가 끝난 직후에도 초나라의 잔여 세력이 있었으나 곧 한나라에게 모두 항복하였고, 마지막으로 옛 노나라 지역인 노현(魯縣) 지방이 항우와 의리를 지키겠다며 저항하려 했다. 유방은 유혈 진압하려 했으나 마음을 돌려서 항우의 수급을 보여주며 무혈 항복하게 한뒤 항우를 노공에 봉하고 노현 땅인 곡성(穀城)에 안장했다.

5. 항우는 왜 패배하였는가?

파일:hr4dcrU.jpg
개전 상황을 살펴보면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승부가 나 있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항우는 자신의 실책도 포함해서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노인 책사 범증을 잃었고 용장 영포는 항우의 처사에 반발해 배신했고 맹장 용저는 한신에게 죽는 등 유능한 야전 장군과 지능을 담당하는 참모를 잃어버렸고, 평화조약을 맺고 군대를 해체했다가 다시 부랴부랴 끌어모았기 때문에 한군보다 병력 면에서 열세였다. 한군의 병력은 초군의 무려 3배였는데, 항우가 팽성대전 당시 20배에 가까운 병력 차를 뒤집은 적이 있긴 하나, 해하 전투와는 상황이 달랐다. 팽성에서의 연합군이 통제가 안되는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면 해하에 모인 한군 연합은 대원수이자 명장인 한신이 지휘 및 통제하는데다가 착실한 훈련을 받아 모두가 정예병이었으며, 현장서 뛰는 지휘관들은 영포와 팽월등 실전경험이 풍부한 대제후와 한나라 개국공신들 등 하나같이 실전도 쌓이고 뛰어난 통솔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천하무적의 항우라고 해도 이 전황을 뒤집기는 힘들었다.

전투가 벌어진 상황을 보면, 항우는 한신의 병력과 맞붙었을 때 한 차례의 우세를 점하기는 했으나 한신의 병력을 격파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만약 항우가 한군의 좌우 공세를 차단하고 한신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해도 후방에는 유방의 중군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선봉대가 위기에 몰리면 얼마든지 지원군을 보낼 수가 있었다. 한 발 더 나아가 항우가 일선 병력을 격파하고 유방이 지휘하는 중군까지 돌파한다고 해도, 배후를 지키는 주발과 시무의 군대 역시 항우와 충분히 일전을 치를 수 있는 병력이었고, 따라서 항우는 적을 완전히 이기기 위해서 세 번 이상의 회전을 연달아 치르고 모두 이겨야만 했다. 항우가 병력상으로 유방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실제로도 항우는 일선 병력을 돌파하지도 못했다.

항우가 이 전투에서 한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머쥔다 한들, 한나라의 총지휘부가 몰살당하거나 하지 않는 한 여전히 국면을 뒤집을 수가 없다. 관중에는 소하가 한나라의 기반을 만들어 놓았고, 제나라에서 조참(曹參)이 군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17] 제후들이 싸움의 결과를 보고 초나라에 가담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으로 세력구도를 뒤집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팽월은 항우의 세력이 절정에 달하던 시점에서도 항우에 적대하고 있었으니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 모든 제후들이 항우의 편에 붙을 것이라고 여기기도 무리다.

그러므로 집중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의 상황보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이다. 어쩌다가 이런 싸움을 해야만 했는가, 항우는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었나를 알아보는 것이 이 싸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전투 이전의 상황을 보면, 초나라의 국력 소모도 극심했지만 장기간의 전쟁을 치르는 한나라의 국력 역시 빠른 속도로 고갈되는 중이었다. 실제로 한 고조의 재위기간에는 초한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도 죽을 때까지 전쟁의 후폭풍으로 빌빌대었고 북방의 흉노도 건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참패했다. 고조가 죽은 이후에 국가의 통치 방식도 황로사상에 입각하여 따로 백성들을 건드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란에서 회복되도록 놔두는 것이었다. 진나라를 지탱해주는 풍요로운 관중 지역의 생산력은 대기근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울며 겨자먹기로 오창의 곡식과 (땡처리로 받아온) 파촉 땅의 물자, 그리고 여기저기서 약탈한 것들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다. 본래라면 징집 대상이 아닌 노약자와 청소년까지 병사로 소집했을 정도였다.[18]

한군이 제후 연합군을 구성한 것도 이미 단독으로는 초군을 제압할 능력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한신팽월에게 왕위와 영토를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아군으로 끌어들였고, 장량진평은 초나라에 계략을 걸어 평화협정을 갑자기 파기하고 비겁한 기습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우가 초군을 해체하게 만들어 병력을 약화시켰으며, 그 틈을 타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해하 전투 당시 한나라 역시 아슬아슬하게 국력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한나라의 기반이 된 관중 지역의 생산력과 보급은 분명 우월하지만, 전쟁으로 소모된 국력이란 몇 달, 혹은 몇 년 기다린다고 짠 하고 보충되는 것이 아니다. 한의 생산력을 너무 신화적으로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하지만 초나라의 국력은 한나라보다 더 막장이었는지라 해하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의 상황은 문자 그대로 끝장에 이르러 있었다. 초나라는 4년이나 쉬지 않고 전쟁을 치렀으며, 팽월이 숨쉬듯이 들쑤시며 약탈을 일삼는 초나라 땅에서는 생산력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광무 대치에서 말싸움하는 것을 봐도 계속되는 전쟁에 학을 떼고 있는 것은 유방보다 항우 쪽이다. 초나라의 승리 시나리오는 항우가 해하 전투를 이기고(그것도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력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해야만 한다.) 그 여세를 몰아 단기간에 관중 지역까지 박살내야 한다. 거기다가 그렇게 대승을 거둔 후에도 단독으로 한나라를 끝장낼 힘은 없으니[19] 한나라를 따르던 제후들이 모반하여 완전히 초나라 편에 붙어야 한다. 이쯤되면 삼류 대체역사소설 시나리오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한군 세력의 주요 인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들이 초에 가담할 이유는 없다고 봐도 좋다. 면면을 살펴보면 유방에게 충절을 맹세한 사람, 한 번 초를 배반하고 한으로 돌아선 사람, 항우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한 사람, 항우와 초나라에 복수할 이유가 있는 사람, 항우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져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사람 등등이다. 개인의 사정은 둘째 치더라도, 항우의 포악함과 치졸함을 이미 천하만민이 알고 있으니 초나라에 가담할 리가 없다. 오히려 항우가 계속해서 한군을 격파하더라도, 경포 같은 자가 피폐한 초군을 버리고 돌아서는 경우가 더 가능성이 있다. 물론 해하 전투 시점에서 초나라를 빠져나올 사람은 다 빠져나왔고 항우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만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당시 초군에는 계포와 종리말 등의 장수가 남은 것이 고작이었다.

세력 판도를 살피면서 계속 간을 보던 제후가 없던 것은 아니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제후들이 항우를 지지할 가능성도 있었다. 역사의 승자인 한나라 세력이 부각되고 역사에 이름을 많이 남겨서 그렇지, 항우 역시 한때 중국을 지배한 패왕이므로 당시 항우에게 친화적인 세력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심지어 해하 전투에서 초군이 궤멸한 이후에도 초나라의 잔당이 계속해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궁지에 몰린 항우는 이전과 달리 건방진 태도를 버리고 주변 세력과 화친하려는 제스쳐를 보내기도 했으므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재기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다. 유방이 다른 군웅들을 포섭하기 위해 영토와 지위라는 실리를 보장해준다고 약속했으니, 같은 방식을 쓴다면 항우가 군웅들을 포섭할 가능성 역시 낮지 않다.[20]

이런저런 정황을 따져보면 한나라 쪽에서는 '바로 지금'이 항우와 초나라를 완벽히 끝장낼 타이밍이었다.한나라도 초나라도 피폐한 상황이었고, 해하 전투에서 끝을 보지 못한다면 한나라가 언제 또다시 항우를 격파할 기회를 잡을지 알 수 없었다. 초한 양국이 아무도 승자가 되지 못한다면 제2의 전국시대가 찾아올 가능성도 충분했다. 비록 군웅들이 항우를 싫어하지만 초한의 대립구도가 계속되면 군웅들이 세력을 키우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한나라는 반드시 그 시점에서 확실하게 승부를 봐야 했다.

여담으로 이때 한신을 비롯한 한군의 움직임을 보면, 마치 한니발 바르카칸나이 전투에서 양익포위전술의 전형을 보여준 사례와 거의 유사한 측면이 있다.칸나이 전투와 다른 부분이라고 하면 기병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고 이후의 추격전에서나 이름이 보인다는 정도.[21] 물론 한군이야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이용해서 예비대와 양익 포위 전술을 활용한거고 한니발은 적의 절반밖에 안 되는 병력을 기병대의 전투력으로 커버해서 양익 포위를 달성했다는 차이도 있다.

6. 해하(垓下)의 위치와 관련한 논란

해하(垓下)는 지금의 어디인가?

이 전투가 벌어진 해하의 위치에 대해서는 몇가지 논란이 있다. 영벽(靈璧)설, 녹읍(鹿邑)설, 그리고 진하설 등이 있다.[22] 해하라는 지명이 좀 모호한 측면이 있고, 몇몇 장수들의 기록에서는 진(陳), 혹은 진하(陳下)에서 항우를 격파했다는 식의 언급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되는 것이다.

가장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견해는 곽말약(郭沫若) 등이 주장한 영벽설이다. 녹읍설의 경우는 판원란(范文瀾)[23]이 주장했는데, 사기정의(史記正義)를 기반으로 한 견해다.[24] 판원란은 중국 고전학의 여러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지만, 이 견해를 내놓을 당시에는 중국근대사로 연구의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었던 참이고 또 이 견해 자체가 그가 쓴 중국통사에 관한 저서 속에서 발표된 것이라 학계의 흥미를 그리 끌지는 못했다.
파일:G28H3Gz.jpg

진가외(陳可畏) 등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이 가설들에 대해 반박하고, 현재의 하남성 회양현이 문제의 해하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 주장했다. 사타케 야스히코(佐竹靖彦) 등도 저서인 '유방'에서 그런 견해를 소개했다.[25]

첫 번째 이유는 우선 앞서 말한 장수들의 기록[26]에서 진(陳), 혹은 진하(陳下)에서 항우를 격파 했다는 언급이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로 진현은 해하 전투에 앞서 전투가 벌어진 고릉의 남쪽으로 맞붙어 있는 위치라 전개가 자연스러우며, 초군이 한군의 동진 혹은 남진을 저지하는 군사형세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지를 기반으로 해하 전투의 국면을 다시 보자면 위와 같은 위치가 된다. 위에 있는 해하 전투의 국면과 비교해보면 전투한 위치가 훨씬 서쪽으로 이동해있는것을 볼 수 있다.

이 위치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항우는 적의 포위망에 걸려들어 거의 대부분의 병사를 잃었는데도 불구,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280km를 넘게 관영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도주해서 동성(東城)에 이르고 자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이때의 도주에서 길을 잘못 아는 바람에 더 헤매고, 늪지대에 빠지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도주하는 사람들은 정말 지옥길을 걷는 느낌이었을듯 하다.

그러나 진하(陳下) 전투는 해하 전투와는 별개의 전투로 보이는데, 사기한서의 관영열전에서 모두 관영이 진하에서 항우를 격파한 공로로 식읍 2천 5백호를 받았으며, 그 이후에 해하에서 항우가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했다고 전하므로, 진하 전투와 해하 전투는 별개의 전투임이 분명해진다. 근흡열전에서는 진하에서 항우를 격파한 뒤에 근흡은 강릉(江陵)을 평정했다고 나온다.

즉, 해하 전투 이전에 항우는 이미 진하에서 관영과 근흡에게 한번 패배를 당한 것이고, 그 이후 관영은 유방의 본대에 합류해 해하 전투까지 참전하였으며, 근흡은 남하하여 남군(南郡) 일대를 평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무래도 항우가 해하 전투 이전까지 패전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보는 선입견 때문에, 진하 전투가 있던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1] 바로 그 기원전 202년, 서양에선 자마 전투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에게 패배했다. 당대 동양 최강이던 항우와 서양 최강이던 한니발이 같은 해에 몰락했고, 후일 동서양 고대 제국의 모범이 된 로마 제국한나라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만들어 준 전투들이 같은 시기에 벌어졌다는건 우연이지만 꽤나 흥미롭다.[2] 엄밀히 말하면 이후에도 아직 항복하지 않은 초나라의 세력이 있기는 했다.[3] 노나라같은 경우 항우와의 의리를 지켜 한군 앞에서도 끝까지 성문을 열지 않았으나 이후 고제가 항우의 유해를 보여주자 결국 항복하였다. 이후 항우를 노공에 봉하여 죽은 항우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4] 반대로 말하면 무능한 수하만 남게 된 항우의 용인술이 문제라는 말도 된다.[5] 고작 3만에 56만이 완파된다고?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점은 군대의 제일 중요한 것은 사기고 사기를 유지하지 못하면 와해되는건 순식간이란 것이다. 56만의 병력은 방심하고 있었고, 이때 3만의 정예병이 항우를 필두로 공격해오자 '항우가 정예병을 끌고왔다'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가면서 사기가 한번에 꺽여나가면서 56만명의 병력이 와해되어 버린 것이다.[6] 한신과 팽월이 오지 않아 초조한 상황이라 유방은 한신에게는 제나라 땅을 다 주고 삼제왕(三濟王)으로, 팽월에게는 옛 양나라 땅을 주고 양왕으로 삼는다고 약속했다.[7] 1621년 명나라 모원의(茅元儀)가 15년 동안 고금의 병서(兵書) 2천여 권을 연구, 검토하여 만든 병법서[8] 혹은 의도적으로 한신이 부대를 뒤로 물렸을 수도 있지만. 일단 고조본기에서는 그저 전세가 불리하여 물러났다고만 기록되어 있다.[9] 항우가 좌,우익의 병력을 보지 못했을리도 없는데 신나게 밀고 들어온 점을 보면 한신이 칸나이 전투의 한니발처럼 포위섬멸을 위해 어느 정도 물러서는 척 하면서 항우의 군대를 깊숙히 유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는 항우가 팽성 대전 때처럼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적의 중앙을 깨부수고 뒤에 있던 유방을 잡으려 했을 수도 있다.[10] 정확히는 유방의 신하인 육가가 지은 《초한춘추》의 대목이라 전하나, 후세의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위 항우의 노래가 고시 중간에 兮를 넣는 전형적인 《초사(楚辭)》 스타일의 노래인데 반해, 우희의 아래 노래는 운자까지 잘 맞춘 정갈한 5언시이다. 이런 시가 스타일은 진한교체기에 아직 없었던 양식으로, 적어도 위진 시기에 가서야 자리잡는다. 더구나 초나라 사람들이 초의 멸망을 한탄하며 초의 가락에 따라 부르고 화답했다는 노래가 초사식이 아니라 오언시 형식이라는 것은 그럴법하지 않다[11] 중국 안후이 성 쑤저우 시 정원현(定遠縣) 서북[12] 혹은 낭중기장(郞中騎將)[13] 관영은 기병대장 역할을 맡은 장수이며 유방군 최고의 장수 중 하나였다. 그런 그에게 5천 기병을 주고 추격을 시켰다는 것 자체가 유방이 항우를 반드시 잡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14] 이 노인은 왼쪽을 두 번이나 강조했는데, 죽간을 기록문서로 쓰던 시기라 간결하게 적기 마련인 당시 기록에서 이름없는 노인의 발언을 이리 강조한 것 자체가 사마천이 항우는 민심을 완전히 잃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추측이다.[15] 중국 안후이 성[16] 중국 안후이 성[17] 제나라 각지에서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진압하고 있었다.[18] 한나라에게는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상대가 잠재적인 적을 없애겠다고 노약자건 청소년이건 마구잡이로 학살하기를 밥먹듯이 하는 자였다는 거다. 때문에 백성들은 이 같은 조치에 반기를 들거나 하지 않았다. 한나라 아니면 초나라인데 그 초나라의 군주가 학살 만능주의자에 저꼴이니 한나라 병사가 될 지언정 초나라 지배는 안 받겠다는 게 당연한 심리였다.[19] 단독으로 한나라를 끝장낼 국력이 남아있었다면 그냥 고릉 전투에서 유방을 격퇴했을 때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러긴커녕 그 와중에 진성에서 관영과 붙은 쪽이 당하는 바람에 애꿎은 장수들만 죽었다. 관영은 이때의 공으로 식읍을 받았다.[20] 문제는 이게 어려운 것이 항우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들 다들 넘어갈지가 문제다. 한신이 말했듯 항우는 상 주는데 매우 인색했고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도 알 수 있듯 상주는 재주도 참 가관이었다. 결국 항우 밑에서 싸우고 나서 상을 받을 수 있을 지 말 지도 고민이고 받아도 만족할 만큼 받을 수 있는지가 문제다. 그나마 이 때는 이전의 분봉과는 달리 딱 하나 자기에게 공을 세웠는지 말았는지만 보면 좋다는 심플한 기준만으로 세워도 별 문제는 없겠지만 앞서 말했듯 항우는 상 주는데에 너무 인색했다. 반대로 유방의 경우 한신이 자신을 왕으로 세워달라는 건방진 요구에도 군말없이 해주었을 정도로 화끈했다. 다른 거 필요없이 상을 주는 자세만 봐도 누구에게 붙을 것인지는 이미 정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21] 한군 기병장 관영이 이끄는 기병대로 마지막에 추격 끝에 항우의 목을 거둬간다.[22] 진하의 위치는 앞서 있는 해하 전투 국면 지도의 '진'이라는 지역을 참조하면 된다.[23]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24] 사기정의는 당나라때 쓰여졌다.[25] 다만 이 책은 역사 기록의 왜곡을 이유로 유방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는 까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한신에 대해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아무 근거 없이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등 편향된 모습이 있다. 제나라로 출병하는 한신이 '어려운 전투에 나서는 기쁨'으로 군말없이 움직였고, 역이기와 한신 사이에는 밑도 끝도 없이 우정이 있었다고 하는 등…[26] 열전이나 사기 '표' 등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