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7:11:09

장량(전한)

[ruby(한삼걸, ruby=漢三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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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후 소하 (酇侯 蕭何) 유후 장량 (留侯 張良) 회음후 한신 (淮陰侯 韓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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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
張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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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문성후(文成侯)
작위 유후(留侯)
(姬)
(張)
(良)
자방(子房)
할아버지 장개지(張開地)
아버지 장평(張平)
고향 영천군 성보현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250년 ~ 기원전 186년

1. 개요2. 생애
2.1. 출신2.2. 진시황 암살 계획2.3. 하비에서
2.3.1. 황석공을 만나다2.3.2. 항백을 만나다
2.4. 유방과 만나다
2.4.1. 조국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2.4.2. 다시 유방에게 가다2.4.3. 유방이 인심을 사게 하다2.4.4. 홍문연
2.5. 항우의 곁에서2.6. 천하를 논하다
2.6.1. 한신, 팽월, 경포라는 장기말2.6.2. 젓가락으로 천하를 설명하다2.6.3. 봉건제 반대?2.6.4. 제후들을 움직여 천하대세를 종결짓다
2.7. 황제의 책사
2.7.1. 유후(留侯)2.7.2. 폐하께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2.7.3. 제국의 수도
2.8. 여후의 부탁2.9. 말년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
5.1. 만화5.2. 게임5.3. 영화5.4. 드라마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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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초한쟁패기부터 전한() 한고조(漢高祖) 시대의 정치가 및 전략가. 본래 한(韓)의 귀족 출신으로, 유방참모로 활약하며 그의 천하통일에 크게 공헌했다. 이 공으로 유후(留侯)에 봉해으며 현재까지 중국사를 대표하는 책략가로 꼽히는 인물.

2. 생애

2.1. 출신

유방(劉邦)이나 소하, 한신 같은 한삼걸 내 다른 인물들이 별볼일 없는 평민 출신인 것에 비해, 장량은 한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들과는 출신 성분 자체가 많이 달랐다. 그것도 그냥 귀족 가문도 아니라, 한나라 최고 명문 귀족이었다. 장량의 조부 장개지(張開地)는 신불해를 재상으로 삼아 한나라의 짦은 전성기를 만들었던 한소후를 비롯하여 선혜왕(宣惠王)·양왕(襄王) 등 세 명의 왕 밑에서 상국(相國)을 지냈고, 아버지 장평(張平)은 희왕(釐王)·환혜왕 두 명의 왕 아래서 상국을 지냈다. 사기색은에서는 장량이 한나라의 공족으로 희성이나[1] 진나라에 쫓겨 성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한신이 강소성 회음 출신이고 소하 역시 강소성 패현[2] 출신인 데 비하여, 장량은 출신이 사기에 명확하게 언급이 되진 않는다. 추측해보자면 장량의 조상들은 바로 아버지 시기까지 한나라의 상국을 지내던 인물인만큼 전국시대 한나라의 수도였던 신정(新鄭)에 살았을 테고, 장량도 여기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BC 230년, 압도적인 기세를 타고 있던 진나라의 군사력에, 장량의 조국 한(韓)나라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장량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고관대작이었으니 장량도 시간이 지났으면 그렇게 되었겠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장량은 벼슬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이 당시 장량의 집에서 일하는 가노(家奴)만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2.2. 진시황 암살 계획

파일:RmztCkI.jpg

그만큼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던 장량이었기에 조국이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복수심에 불타 전재산을 털어 유능한 자객을 찾으러 다녔다. 목적은 원수 진나라의 수괴, 진시황(秦始皇)을 암살하려는 것.

회양(淮陽) 땅에서 잠시 예를 공부했던 장량은 이후 동쪽으로 여행하다가 창해군(倉海君)이라는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 한 명의 역사(力士)를 소개받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창해 역사(滄海力士)이다. 그를 위해 장량은 무려 120근[3]이나 되는 철퇴를 만들어주었고,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수(巡狩)하러 나오는 시기를 노려 마침내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동남쪽인 박랑사(博浪沙)에서 황제를 저격하였다.

그러나 뒤따르던 부거(副車)를 잘못 공격했기 때문에[4] 진시황은 목숨을 건졌고, 암살미수에 대노하여 천하에 대수색령을 내리고 자객이라고 의심가는 인물들은 어김없이 잡아들이게 했다. 장량은 이름과 성을 모두 바꾸고 하비(下邳)로 들어가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몸을 감추었다. 그와 함께 행동한 창해 역사가 어떻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항목에서 보다시피 따로 사기에서 언급이 되진 않는다. 다만 황제를 직접적으로 노렸으니, 만약 잡혔다면 자신은 당연히 곱게 죽지는 못했을 뿐더러 삼족이 날라갔을 것이다.

실로 무협지 같은 일화다. 멸망한 나라의 후예가 전재산을 털어 자객을 찾아다니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에게 역사를 소개받아, 혈혈단신의 몸으로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여섯 나라를 평정한 제국의 황제를 기습한 것이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유방은 고을의 하급관리 소하에게 허풍이나 치고 다닌다고 까이는 백수였고, 번쾌는 개 도살로 먹고 살았다. 그리고 한신은 남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고 있었다(…).

이때 일도 그렇고 젓가락 설교에서도 볼 수 있듯 장량의 성질이 사실 보통이 아닌데도, 이 사건 후에는 어지간해선 자기주장을 삼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행동이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상 깊었는지, 남송(南宋)의 위대한 충신으로 손꼽히는 문천상(文天祥)은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정기가(正氣歌)에서 역대 의사들의 행동을 거론하면서, 장량의 이 일화 역시 '진나라 장량의 추(在秦張良椎)'라고 언급하고 있다.

2.3. 하비에서

2.3.1. 황석공을 만나다

파일:xhArmi5.jpg
다리 위에서 책을 전수받다[5]

장량 한 사람으로 인해 천하가 소란스럽게 되고, 진시황이 눈에 불을 켜고 대수색령을 내리던 판이라 장량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하비로 도망쳤다. 그리고 어느 날 물가의 다리 위를 노닐고 있었는데, 노인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신발을 벗어 다리 아래로 내던지고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내려가서 내 신발 가져와."

황당해진 장량은 순간 그를 패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6][7] 노인인지라 억지로 참고 내려가 신발을 주워 와서 건네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신겨줘" 라며 발을 내밀었는데, 장량은 예의바르게 윗몸을 꼿꼿이 세우고 무릎을 꿇며 신발을 신겨주었다. 그러자 노인은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는데, 이에 충격을 먹은 장량은 떠나는 노인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런데 잠시 후 노인이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가 가르칠 만 하군. 닷새 후 새벽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이에 장량은 황당했지만 무릎을 꿇고 "예"라고 대답했다.

장량은 약속대로 닷새 후 아침에 다리로 가봤지만, 이미 기다리고 있던 노인에게 지각이라며 욕만 된통 얻어먿는다. 다시 닷새 후 보자는 말에 장량은 새벽부터 일찍 다리로 갔으나, 이번에도 미리 기다리고 있던 노인에게 욕만 얻어먹는다. 노인은 또 닷새 후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가버린다.

오기가 생긴 장량은 닷새 후, 아니 나흘 후 해가 저물자 다리로 가서 밤을 샐 각오를 한다. 아니나다를까, 장량이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 노인이 곧 모습을 드러낸다. 노인은 장량을 크게 칭찬하며 책 한 권을 건네 주었다.[8]
이 책을 읽으면 제왕의 스승이 될 것이다. 10년 후에는 뜻을 이룰 터. 그리고 13년 후 젊은이는 나를 제북(濟北)의 곡성산(穀城山)에서 만나볼 수 있으리라! 곡성산 밑에 노란 돌이 하나 보일 것이니, 그 돌이 바로 나다.

그런 말을 남긴 의문의 노인은 홀연히 사라져버렸고 두 번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 책의 이름을 보니, 태공병법(太公兵法)이라는 책이었다. 장량은 기이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이 책을 열심히 보면서 공부하게 된다.

그야말로 소설 등에서나 나올 이야기 랄까 하지만 이 기록은 엄연히 정사(正史)인 사기(史記)에 언급되는 기록이다. 물론 갑자기 텔레포트한 노인의 존재를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믿을 수 없으나, 적어도 장량 사후 불과 100여 년 뒤에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의 시대에는, 이미 그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었다는 정도는 알 수 있다.[9]

장량이 가르침을 받은 이 수수께끼의 인물은 황석공(黃石公)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천하를 통일한 13년 뒤, 장량이 유방과 함께 제북을 가다가, 곡성산 밑에서 황석(黃石)을 발견했다는 후일담 때문에 나온 이야기다. 즉, 그 돌이 바로 노인의 정체였다는 것.

2.3.2. 항백을 만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hang_Liang.jpg
만소당화전(晩笑堂畫傳)의 장량 그림

이때, 하비에서 장량이 만났던 인물 중엔 항백도 있었다. 사실 항백의 정체는 초나라 최후의 명장이었던 항연의 아들이자, 훗날의 서초패왕 항우의 숙부였던 것이다. 이때 항백은 살인죄를 저질러 위기에 처해있었는데, 망국의 귀족끼리 동질감인지 장량은 항백을 숨겨 주어 위기를 벗어나게 해 주었다. 둘은 이때 친분이 생겼는데, 이 친분은 훗날 유방에게 있어 어마어마한 도움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 장량은 사기에서의 기록을 보면 거의 10년간 협객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임협(任俠)으로 얽힌 태도도 분명히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행적 때문인지 사마천은 본래 장량에 대해 '우락부락한 사람이었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훗날 초상화를 살펴 보니 아녀자와 같이 예뻤다고 기록했다. 협(俠)의 세계라면 누가 생각하더라도 상당히 무력을 추구하는 거친 세계인데, 그런 생활을 했던 사람이 여자같이 예쁜 외모였으니 사마천이 놀랄 만도 한 것. 게다가 그냥 이름만 협객이 아니라 실제로 영향력이 꽤 있었는지, 진승이 난을 일으킬 무렵에 사람을 모으자 100여 명 정도가 장량에게 몰려왔다고 한다.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압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 진승이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장초를 건국해서 불꽃을 당기자, 진나라 패망이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장량 역시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하지만 100여 명 가지고 뭘 할 수도 없고, 먼저 일어난 사람에게 붙어보려고 했는데, 당초에 장량이 생각하고 있던 사람은 진가(秦嘉)라는 사람이 초나라에 내세운 가왕(假王) 경구라는 인물이었다.

2.4. 유방과 만나다

그렇게 장량이 진가를 찾아가던 중에 유방과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당시 유방은 옹치의 배반으로 근거지를 잃은 처량한 신세로, 진가에게 붙어먹고 있었다. 장량과 만날 당시 유방은 수천 명을 이끌고 하비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유방은 장량에게 말을 관리하는 자리인 구장(廐將) 직위를 주고 부하로 맞아들인다.

유방과 장량은 출신 배경도 살아온 방식도 너무 달랐으나 의외로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장량은 곧잘 유방을 찾아가서 자신이 익힌 태공병법에 대해 설명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유방은 열심히 경청하고 태공병법을 실전에서 다양하게 활용했다고 한다. 장량은 이전부터 다른 사람들에게도 태공병법을 유세해봤지만, 대부분이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일반적인 전투법과 동떨어졌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가 자신의 병법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장량으로서는 아주 흐뭇한 일이었다.

유방은 병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병법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고는 흥미가 돋아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배운 게 없으니 일반적인 전투법이라는 것도 잘 몰랐고, 장량이 설명하는 태공병법을 의심하는 일 없이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효과가 좋자 더욱 장량을 신뢰하게 되고, 계속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하는 선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장량 역시 자신의 병법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나 기뻤고, 패공(沛公)은 필시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장량은 진가와 경구가 죽은 김에 그냥 유방의 휘하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2.4.1. 조국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

진가는 회계(會稽)에서 올라오던 군웅인 항량에게 털리고 죽었으며 경구도 얼마 못 가 죽었고, 항량은 남은 세력을 자신의 세력에 편입했다. 유방은 당시에 여기저기 나가서 전투하던 중이라 그 피해에 휘말리지는 않았고, 항량이 세력을 잡자 설읍(薛邑)으로 가서 그를 만나 그 세력에 함께하기로 했다.

당시 항량은 초나라의 새 왕제로 회왕을 옹립했었다. 이 모습을 본 장량은 직접 항량에게 발언했다.
장군께서 이미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찾아 왕으로 세우셨으니, 한나라 왕실의 후손들 중 횡양군(橫陽君) 성(成)이 어진 이름을 얻고 있어 그를 한왕으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한왕으로 세워 한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시기 바랍니다.

즉 한나라 왕실의 후손인 한성(韓成)을 한왕으로 인정해주라는 부탁이었는데, 이때 장량은 영리하게 '한나라의 잔존세력을 규합할 수 있다'는 미끼를 내걸어 승낙을 얻어내었다.

멸망한 조국을 부활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장량은 잠시 유방과 떨어져, 한성과 함께 1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몇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곧 진나라 군이 거세게 반격을 하여 근거지를 잃어버렸고, 현재 하남성 부근인 영천(穎川) 일대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다.

2.4.2. 다시 유방에게 가다

이 무렵 항량은 장한에게 대패하여 전사하였고, 송의가 잠시 그 자리를 맡아 조나라를 구원하러 나서는 군대의 상장군이 되었다가, 항우에게 살해당하였다. 그 혼란의 와중에 유방은 초회왕의 명령을 받고 병사를 규합하여 서쪽으로 나아가 관중(關中)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부근인 환원(轘轅)에 이르렀다.

이에 장량도 그 뒤를 따라나서,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양웅(楊熊)의 군사를 격파했다. 이 시점부터 장량은 다시 유방과 함께했으며, 유방은 한성에게는 양책(陽翟)[10]을 지키게 하고는 장량을 데리고 같이 움직이며 완성(宛城)을 공격했는데, 당초에는 완성을 그냥 지나칠 요량이었지만 '후방에 적군을 남겨두면 좋지 않다'는 장량의 발언에 완성을 공격했고, 진회(陳恢)라는 인물이 완성을 지키던 남양 태수를 설득하여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유방 일행은 이윽고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유방이 2만의 군사로 요관(嶢關)[11]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장량은 이를 말리면서 계책을 권했다.
진나라 군대는 아직도 그 세력이 강하여 결코 가볍게 보시면 안될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진나라 장수들은 모두 장사꾼 출신들이라, 장사꾼은 이로써 유혹하면 마음이 쉽게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패공께서 일단 보루를 지키면서, 사람을 앞서 보내 5만 명의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고, 산봉우리에는 모두 깃발을 빽빽이 꽂아 의병(疑兵)을 세우고, 다시 역이기에게 금은보화를 주어 진나라 진영으로 보내 적장들을 이로써 달래 항복을 권유하시기 바랍니다.

계책대로 역이기를 보내 설득하자, 진나라 장수는 싸울 생각을 버리고 항복하여 함께 함양을 공격하자는 말까지 전해왔다. 여기서 장량은 다시 태도를 바꾸어 냉정하게 말한다.
장수는 항복한 것 같은데 부하들까지 그럴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방비가 풀어진 틈을 타서 섬멸해버리십시오.

유방은 장량의 계책을 따라 주저없이 성 안의 군대를 습격하였고, 항복할 생각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던 진나라군은 공중분해되었다. 크게 기세를 드높이고 진군한 유방은 마침내 함양에 입성, 진왕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2.4.3. 유방이 인심을 사게 하다

패현 출신의 건달이었던 유방은, 대제국(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황궁에 들어서게 되자 그 휘황찬란함에 혼을 빼앗겨 어쩔 줄을 몰랐다. 이에 황궁에 머물면서 제대로 고삐 풀린 망나니짓을 한번 해보려던 찰나에, 번쾌(樊噲)가 '그러면 안 된다'고 설득했지만, 유방은 번쾌의 말 따위는 가볍게 씹어버리고는(…) 사치와 향락을 즐기려고 했다. 그때, 장량이 나섰다.
진나라가 포학무도했음으로 해서 패공께서 이곳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무릇 천하사람들을 위해 진나라의 남은 포악한 잔적들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청렴하고 검소한 것을 그 본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막 진나라 도성에 입성하자마자 그 즐거움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말하는 '걸(桀)을 도와 학정을 펼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어떤 일을 행하는 데는 이롭고, 성분이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패공께서는 번쾌의 간언을 받아들여야 하실 것입니다.

번쾌가 간언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던 유방은 장량이 말을 하자 씁 어쩔 수 없지 하며 보물을 놔둔 채, 그대로 함양에서 나와 주변에 주둔하였다. 그렇게 되자 함양 백성들은 군대가 입성해서 일으키는 온갖 문제와 약탈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고, 유방이 여러 현의 사람들을 불러 위로하자 크게 인심이 동하면서 "패공이 진나라 왕제가 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게 되었다.

2.4.4. 홍문연

그러나 좋은 날도 잠시, 신안에서 진나라군을 문자 그대로 모조리 묻어버린 항우는 어마어마한 기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때 유방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항우가 못 오게 함곡관을 막아놓은 상태였는데, 이는 오히려 항우의 어그로만 잔뜩 끌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항우는 무려 40만의 병력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고, 그에 맞서야 할 유방은 10만의 병력이라 싸우면 상대가 되기 힘들었다. 이때, 기막힌 우연이 발생한다. 항우가 유방을 공격하기 직전, 과거 장량에게 도움을 받은 항백은 만일 유방이 박살나면 같이 있는 장량까지 해를 입을까 걱정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일도 있고 해서 항백은 야밤중에 몰래 장량을 찾아와 이 모든 일을 밀고했다.

이에 장량은 나만 도망칠 생각은 없다며 유방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방은 크게 놀라 벌벌 떨었다. 장량이 화가 나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함곡관을 막았습니까?" 따지니 유방은 무안해져서 "생각없는 간신배한테 내가 속아서…"라고 변명했지만 장량은 "그럼 항우를 이길 자신이 있었단 말입니까?" 라고 꾸짖었고 유방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이제 어찌 하면 좋겠소?" 라고 말했다. 이에 장량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고, 항백을 데려와 유방과 만나게 한 뒤 둘의 자식 간에 혼인의 약속을 맺게 하였다.

이후 크게 대접받고 나서 항우의 진영으로 돌아온 항백은 유방을 변호해준다. "패공은 결코 자네에게 거역할 뜻은 없었다네. 지금은 세상이 어지럽고 곳곳에 비적들이 날뛰고 있으니, 안전하게 관문을 막아 백성들을 안심시키려고 했던 것일세." 그 말을 옳다 여긴 항우는 유방에 대한 화를 풀고 싸울 생각을 그만두었다. 유방은 다음 날 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항우를 찾아와 사죄하였고, 여기에는 장량도 같이 따라왔다.

하지만 기분이 풀어진 항우 뒤에는 여전히 범증이 칼을 갈고 있었다. 범증은 지금이야말로 유방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연회가 벌어지는 와중에, 범증은 수 차례 항우에게 눈짓하며 유방을 없애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항우가 계속해서 모른 체하자, 범증은 슬쩍 밖으로 나가 항장(項莊)에게, '검무를 추는 척 하면서 유방을 찌르라'는 명령을 전했다.

항장이 칼춤을 추며 유방에게 접근하자,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항백은 유방을 지키고자 "검무는 둘이서 어울려 추는 것이 더 멋지지 않겠소?" 라고 일어선 다음 직접 검무를 추며 항장에게 맞섰다. 장량이 이를 바깥의 번쾌에게 알리자 번쾌가 난입해 상황이 흐지부지되었고, 덕분에 유방은 위기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직감한 유방은 급히 돌아가길 청하고는 자기 진중으로 가버렸다. 항우는 아직 연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니냐며 의심했지만, 장량이 적당한 말로 수습하며 다시 위기를 벗어난다. 모든 것을 지켜본 범증은 항우가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새파란 어린 놈과는 큰 일을 도모할 수가 없다'며 분통을 터뜨린다.[12]

2.5. 항우의 곁에서

유방은 항우의 결정으로 천하의 벽지인 파촉(巴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때문에 고마움의 뜻으로 각종 재물을 장량에게 주었다. 장량은 모든 재물을 항백에게 가져다 주었고, 항백을 이용해서 촉 지방뿐만 아니라 한중(漢中)까지 유방에게 줄 수 있도록 설득했다. 이에 항우는 한중 역시 유방의 세력에 포함시켜주었다.

하지만 장량은 일단 조국의 부활이 목표였기에, 벽지로 떠나는 유방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사천성 포중(褒中)까지 따라와 유방을 전송하였는데, 이때 떠나기 전 항우의 의심을 덜기 위해 여러 절벽 등에 설치된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권하였다.

유방과 헤어지고 옛 한나라 땅으로 돌아온 장량이었지만, 항우는 한왕(韓王) 성(成)이 예전에 유방과 함께 움직였다는 이유를 구실삼아 그를 한나라 땅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의 세력권인 팽성에 데리고 가버렸고, 어쩔 수 없이 장량도 그런 항우를 따라야만 했다. 간지나는 대신 재수가 없는 칭호인 패왕을 지어서 항우에게 바친 인물이 장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래부터 항우보다는 유방과 가까웠던데다, 장량의 주군인 한왕 성을 유방과 친했다는 이유로 군공에서 배제하는 식으로 푸대접하는 항우가 장량의 마음에 들 리 만무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의 대항마인 유방을 위해 계책을 짜내게 되었다.
한왕(漢王)이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잔도를 불태워 길을 끊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그곳에서 중원이나 관중으로 나올 생각이 없는 듯 합니다.

항우에게 그렇게 말해 유방에 대한 경계심을 줄이게 한 장량은, 이윽고 제나라의 전영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편지를 써서 항우에게 보냈다. 이에 항우는 유방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제나라를 막기 위해 북진하였다. 유방이 진군해온다는 소식이 항우에게 들어가자 '패공은 당초 자기 땅으로 약속받은 관중만 먹을 생각이지 초나라 땅에 관심이 없는 듯함'이라는 보고로 또 다시 항우를 현혹시켜 제나라 원정을 지속. 기어이 초나라 수도인 팽성까지 함락당하는 상황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대략 이때 즈음 한왕 성이 결국 항우에 의해 제거되었고, 장량은 간신히 달아나 서쪽으로 도망쳐 마침 한신을 앞세워 삼진을 돌파하는 유방과 합류하게 된다.

또 다시 헤어졌다 재회한 유방은 장량을 성신후(成信侯)에 봉하였다.

2.6. 천하를 논하다

2.6.1. 한신, 팽월, 경포라는 장기말

기세 좋게 진군하여 초나라의 본거지인 팽성까지 점령했던 유방은, 그러나 곧 팽성 전투에서 항우의 공격으로 엄청난 대패를 당하여 밀려나고 만다. 여후의 오빠인 여택과 장량을 하읍에서 다시 만난 유방은 말안장에 기댄 채로 "내가 천하를 먹으려는데, 누가 나를 도울 수 있겠는가?" 하고 질문했고, 장량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강왕 경포(黥布)는 초나라의 맹장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왕과 틈이 벌어져 사이가 소원한 상태고, 팽월(彭越)은 제왕(齊王) 전영(田榮)과 함께 양나라 땅에서 항우에게 반기를 들었으니 이 두 사람을 급히 불러 쓰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왕의 장수 중에는 오직 한신만이 큰 일을 맡기면 한 방면의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땅을 나누시려고 하신다면 이 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만 초나라를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유방은 즉시 경포에게 수하(隨何)를 보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팽월에게도 별도의 사람을 보내 연락을 계속하였다. 경포로 인해 항우가 초나라로 돌아간 사이 관영·한신 등과 함께 경색 전투에서 초나라의 추격군을 격퇴했으며 또한 위표가 배신하자 한신을 보내 안읍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게 했고, 곧 북벌에 나설 수 있게 조치하였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정말 예언이나 다름없는 장량의 밝은 눈인데 사마천은 이 일에 대해 한왕이 초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 사람의 힘 때문이었다라고 평론하였다.

2.6.2. 젓가락으로 천하를 설명하다

한신이 별동대를 이끌고 쾌진격을 벌이고 있을 무렵, 항우의 본대를 상대하고 있는 유방은 형양 · 성고 전역에서 그 무지막지한 압력을 정면으로 막아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BC 204년, 저 무시무시한 항우를 조금이라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역이기와 대화를 나누었다. 역이기는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옛날 탕왕은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토벌하고 나서 하나라의 후손들을 기(杞)에 봉했고, 주무왕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한 다음 그 후손들을 송(宋)에 봉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나타나 덕과 도를 저버리고 각 제후국들을 침략하여 6국을 멸하고 그 후손들의 대를 끊어 그들은 송곳 하나 세울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대왕께서 진실로 육국의 후예들을 제후로 다시 세우시고 그들 모두에게 제후의 인수(印綬)를 나누어주신다면, 그 나라의 군신들과 백성들은 대왕의 은덕에 감읍하여 대왕에게 달려와 귀의할 것이고, 대왕의 도의를 앙모하여 기꺼이 대왕의 신민이 되기를 자청할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과 정의가 행해지면 대왕께서는 남면하여 패자를 칭하게 될 수 있으며, 초왕은 틀림없이 의관을 정제하여 공손한 태도로 달려와 대왕께 조배를 드릴 것입니다.

즉, 육국의 후예들을 제후로 삼아, 과거의 봉건제를 부활시키자는 것. 이에 유방은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며 제후들에게 나눠줄 인장을 만들게 했다. 그런데 잠깐 외지에 나가있던 장량이 도착했고, 밥을 먹으려던 유방은 식사를 하다 말고 장량에게 '좋은 일이 있다'면서 그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량은 평소답지 않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어떤 놈이 그딴 계책을 올린 것입니까? 그 말대로 했다간 끝장입니다."
"무엇 때문이오?"
"청컨대 앞에 있는 젓가락을 빌려주시면 대왕을 위해 당면한 형세를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그러더니 유방의 앞에 있는 젓가락을 자기가 들어올리고는, 그 젓가락을 하나 하나 꺾어가며 형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옛날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하고 그 후손들을 기(杞) 땅에 봉한 것은 걸왕을 사지에 몰아 넣어 능히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능히 항적(項籍)[13]을 사지에 몰아 넣어 그를 제압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제후들을 새로 세울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무왕상나라주왕(紂王)을 정벌하고 그 후예들을 송나라에 봉한 것은 주왕의 머리를 이미 얻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항적의 머리를 능히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이 은나라에 들어갈 때 상용(商容)이 살았던 마을의 이문(里門)에서 그의 어진 마음을 표창했고, 감옥에 갇혀있었던 기자(箕子)를 석방했으며, 또한 주왕에게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무덤에 흙을 더 쌓아 그 높이를 높여주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능히 성인의 분묘를 다시 새로 쌓고, 현인이 살았던 마을의 이문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며, 재능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모든 문 앞을 지나며 그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거교(鉅橋)의 창고에 있던 식량과 녹대(鹿臺)에 쌓여있던 금품을 꺼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능히 부고 있는 식량과 금품을 모두 꺼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대가없이 베푸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일이 끝나자, 병거를 개조해서 수레를 만들고, 병장기를 모두 거꾸로 세워 창고 속에 넣고 모두를 호랑이 가죽으로 덮음으로써 천하에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훗날 대왕께서는 무력의 사용을 중지하고 문치를 행하여 다시는 병장기의 사용을 금하겠다 다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다시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에 전마들을 풀어놓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천하에 보였습니다. 대왕께서는 전마들을 풀어주어 다시는 그 말들을 전쟁에 쓰지 않겠다 다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돌아와 소들을 도림(桃林) 북쪽 기슭에 풀어놓고 다시는 용병(用兵)의 일로 군수품과 양초를 운반하거나 모으지 않겠다고 천하에 보였습니다. 대왕께서는 수레를 끄는 소들을 영원히 풀어 방목시킴으로써 천하에 군수품과 양초를 운반하거나 모으지 않겠다는 뜻을 보일 수 있으십니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일곱 번째의 이유입니다. 또한 천하를 돌아다니는 선비들이 그의 친척과 이별하고, 그 조상의 분묘를 버리며, 옛 친구들과 떨어져 대왕을 따라 천하를 전전하는 것은 단지 매일 밤마다 한 뼘의 땅이나마 떼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육국(六國)을 복국시켜 한(韓)·위(魏)·연(燕)·조(趙)·제(齊)·초(楚) 등의 후손들을 제후왕으로 세운다면, 천하의 선비들은 되려 각기 그 주인을 섬긴다며 그 친척과 친구 그리고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버릴 텐데, 대왕께서는 천하를 얻기 위해 누구와 함께 싸우려고 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불가한 여덟 번째 이유입니다. 더욱이 지금 초나라보다 더욱 강대한 나라가 없어, 세력이 약한 육국의 제후국들은 결국은 초나라를 다시 따르고 말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그들을 신하로 삼으실 수 있겠습니까? 문객의 계책을 시행하신다면 대왕께서 도모하려고 하는 일은 모두 그르치게 됩니다."[요약]

이렇게까지 설명을 듣자 유방은 먹던 음식을 뱉어버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유생 놈 때문에 하마터면 천하의 공사(公事)를 망칠 뻔 했구나!" 라고 격노하며[15] 만들던 인장을 녹여 없애게 했다. 장량의 이러한 태도는 봉건제에 대한 명백한 반대 의사표시였으며, 이후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후에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했고, 이는 훗날 오초칠국의 난을 거쳐 한나라가 군현제를 실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이때 장량이 봉건제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것은, 한나라가 나아갈 그림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서, 항우는 자신이 봉건제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진나라 멸망 시에 이미 보여주었다. 장량으로 인해 유방은 국가체제의 큰 그림에서 항우와는 다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16].

여담으로 장량은 이를 설명한다고 이유를 하나씩 설명할 때마다 젓가락을 하나씩 부러뜨렸는데 이를 생각해보면 멀쩡한 젓가락을 여덟 개나 부러뜨린 셈이다. 이를 듣고 음식을 뱉은 유방까지 보면 한의 인물들이 상당히 거칠고 과격한 집단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2.6.3. 봉건제 반대?

한나라가 본격적으로 군국제군현제를 운용하면서 중국사의 중앙집권 전통이 시작되다보니, 장량의 젓가락 부러뜨리기 일화가 주나라식 봉건제와 구체제에 대한 반대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젓가락 부러뜨리기를 봉건제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라고 보기는 어렵다. 장량의 말을 요약하자면,
우리는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유민을 분봉한 주나라랑은 다르다. 지금 우리가 초나라랑 싸워서 이길 수 있나? 일단 이겨놓고 땅을 주든지 말든지 해야지, 지금 주면 한나라는 위계질서의 측면에서 다른 나라랑 똑같은 위치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신하들은 어쩔 건가? 우리 애들이 당신을 따르는 건 땅뙈기 얻으려고 그러는 건데, 구 왕족들한테 땅을 주면 당신 신하들이 뭐가 좋아서 당신을 따르겠나? 육국의 옛 왕족들을 그 땅에 봉한다고 해서 걔네들이 바로 우리 편이 되어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왕들은 우리와 항우 사이에서 각을 재기 시작할 거고, 그럼 우리보다 강한 항우 쪽으로 붙을 놈들이 무조건 나올 거다.

정도인데, 딱히 ‘중국을 위해서 봉건제를 결연히 버리고 중앙집권을 해야 한다!’ 같은 말은 보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장량의 간언은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조언이었다. 상대적으로 후달리는 자신들의 상황을 통찰하고, 한나라의 편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는 구 육국 왕들에 대한 분봉은 유방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한 것. 즉 장량이 반대한 것은 여러모로 위험한 육국 왕들에 대한 분봉인 것이다.

장량이 유방의 신하들에 대한 분봉을 주장한 사례는 여럿 있다. 제나라의 뒤통수를 갈겨버린 유수 전투 이후 한신이 제나라의 왕을 시켜달라 하자, 장량은 한신의 팀킬과 하극상 시도에 완전히 극대노한 유방을 진정시키며 한신에게 제왕 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변고가 일어나리라 말해주었다. 또한 고릉 전투 이후, 장량은 유방에게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넓혀 준다면 그들이 협조하리라 조언하였다. 유방은 장량의 모든 조언을 따르며 그들에게 땅을 주었다.

그럼 옛 왕족들에 대한 분봉과 신하들에 대한 분봉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장량은 왕족들에 대한 분봉은 반대했지만 신하들에 대한 분봉은 추천했을까? 그것은 바로 명분의 문제였다. 옛 육국의 왕족들을 제후왕으로 세우는 것은 역이기의 말대로 너무나 명분이 넘치는 일이다. 그래서 문제였다. 장량이 말했듯이, 육국을 되살린다면 천하의 인재들은 자기 옛 조국을 되살린다면서 신나게 달려갈 것이고, 그러면 유방에게 남는 사람은 패현 친구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자기 신하들에게 땅을 주는 것은 다르다. 한신은 그 스스로가 말했듯이 그를 알아봐 준 사람이 유방밖에 없었다. 즉, 한신에게는 뒷배가 유방 뿐이었다는 말이다. 한신의 군사적 업적은 유방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다. 유방이 한신에게 땅을 준다면, 유방이 뺐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왕이 된 이유가 유방 덕이었으니까. 그러나 육국의 왕족들은 혈통 덕분에 현지의 지지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유방이 중앙집권을 위해 그들을 토사구팽하여 땅을 빼앗는 것은 사람들에게 한나라의 침략이자 배신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육국의 왕족을 제후왕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었기에 유방은 그것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유방이 천자로 등극하여 그들의 권한을 가져간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우리나라 왕족의 정당한 권한과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침해하는 비열한 침략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에게 주는 것은 다르다. 신하들에게 땅이 떨어진 이유는 혈통이나 현지 지지 따위가 아니라 온전히 유방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가 그 땅을 가져가는 것은 원래 내 것인데 잠깐 맡겨뒀다가 가져가는 것이 된다. 이때 신하들이 황제에게 반항하면서 땅을 안 주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바로 그런 신하를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욕하게 된다.

만약 이때 역이기의 말을 들어서 육국 왕족들에게 분봉을 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천하 통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재들은 자기 나라를 지키겠다며 유방을 떠나 버릴 것이며, 땅을 받으려 한 신하들은 자기한테는 대체 무슨 땅을 줄 거나면서 반항할 것이다. 정말로 신이 도와줘서 천하통일을 했다고 해도, 중앙집권의 길은 너무나 요원하다. 사람들은 왕들의 권한을 빼앗으려는 황제 대신 자기네 나라 왕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고, 아무도 황제를 도와주지 않게 된다. 결국 고생해서 천하통일을 했다 해도 또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하들에게 분봉해준 원래 역사에서는 어땠을까? 한신은 제왕에서 초왕으로 강등되고, 초왕에서 또 회음후로 강등되고, 끝에는 여후에게 잡혀 죽었다. 그 과정에서 한신은 자신의 억울함과 유방의 토사구팽을 성토한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한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유방 정도만 좀 안타까워하고 끝난다. 제나라 사람들도, 초나라 사람들도, 고향의 회음 사람들 그 누구도, 한신에게 아무 관심도 주지 않는다.

역이기의 말대로, 육국의 옛 왕족들을 제후왕으로 세우는 것은 옛 육국의 사람들에게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장량의 말대로, 유방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일이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장량이 한나라의 중앙집권에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장량이 젓가락을 부러뜨린 것은 유방의 천하통일에 도움 안 되는 분봉을 반대한 것이다.

많은 매체들은 장량의 이 일화를 언급하며 중국의 역사를 내다본 장량의 통찰력을 찬양한다. 그러나 장량이 초한전쟁으로부터 2100년간 이어질 중화 제국의 미래를 내다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량은 미래를 만들었다.

2.6.4. 제후들을 움직여 천하대세를 종결짓다

한편, 이 당시 한신은 위·대·조·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동쪽 끝의 제나라까지 공격하였다. 제나라는 멸국의 위기를 맞이하자 어쩔 수 없이 원수였던 항우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항우 또한 한신이 제나라까지 정복하는 것 만큼은 막아야했기에 용저와 함께 대군을 보냈다. 그러나 한신은 용저가 이끄는 20만에 달하는 초·제 연합군을 유수 전투에서 대파함으로써 결국 하북을 평정하였고, 한신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 명성이 온 천하에 떨쳤는데 이때, 한신은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 즉 임시적인 왕제로 봉해주기를 청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반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제가 이곳의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이 안 되어 후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신의 제안이, 천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사나이의 야심인지, 아니면 진실로 그저 일시적인 계책으로 제안을 하는 일인지, 그 동기에 대해 사기나 한서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협박인지 요구인지 제안인지 애매하게 운을 뗐다는 거다. 이때 유방의 상황을 보자면 사수(汜水)에서 초나라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와 장사 사마흔을 격파했으나, 소식을 들은 항우가 팽월(彭越)을 공격하다 말고 돌아와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7]

게다가 이미 한신은 역이기 사건으로 유방의 의중을 거스른 전례도 있었기 때문에 유방은 몹시 분개했다. 한신의 서신을 가지고 온 사자 앞에서 "이놈이 지금 가왕 시켜달라는 거냐?!" 하고 외치며 앞뒤 생각하지 않고 한신을 공격해버리려고 했다. 이때 곁에 있던 장량이[18] 유방의 발을 슬쩍 밟고 "지금 한신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습니다." 라고 귀띔해주자, 무슨 소린지 알아들은 유방은 화를 참고 (고의적으로) 더 크게 소리쳤다.
"사내 대장부가 왕 노릇을 하려면 그냥 진왕(眞王)이 될 것이지, 무슨 가왕이라는 거야?(大丈夫定諸侯,即爲眞王耳,何以假爲!)"

그리고 곧바로 장량을 한신에게 보내 한신을 제나라 왕제로 임명했고, 곧바로 초나라를 치도록 명령했다. 전쟁은 최후로 접어들었고, 항우는 팽월과 유방의 협공 때문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군량도 부족해졌으며, 또한 한신의 기세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항우는 먼저 유방에게 홍구(鴻溝)[19] 이서의 땅은 한나라에, 그 이동의 땅은 초나라 땅으로 하여 천하를 양분 하자는 제안을 내었다. 유방도 이에 승낙하여, 두 사람은 각자 동쪽과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떠나던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제안으로 항우의 뒤를 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팽월과 한신에게도 연락 하여 움직이기를 권하였다. 그런데 한군이 고릉(固陵)[20]에 이르렀음에도 불구, 팽월과 한신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기만 했고, 유방은 초나라의 반격을 받아 패배했다. 그나마 다행으로 이러는 틈을 타 후방으로 돌아간 관영이 팽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여 항우의 퇴로를 끊어주기는 했다.

유방은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 경포를 통하여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옴으로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이때, 한신은 무려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해하 전투에서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한신은 처음에 초나라 군대에게 밀리는듯 물러나다가, 측면 부대를 이용해 초나라 군대를 요격했고, 다시 본대가 뒤돌아 공격을 퍼부어서 초군을 대파하였다. 결국 항우가 달아나다 자결함으로써 전쟁은 드디어 끝났다.

2.7. 황제의 책사

2.7.1. 유후(留侯)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61위 안평경후 악천추 62위 유문성후 장량 63위 남안장후 선호

전쟁이 종결되자 그때까지 수고한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도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장량은 몸이 아프고 하여 직접 칼을 들고 전쟁터에서 세운 공이 없었는데, 유방은 스스로 장량의 공을 언급하며 칭찬하는 것이었다.
자방은 군중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지었으니 제나라 땅에서 원하는 곳 3만 호를 골라 갖게 하라.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대우였나면, 한나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고 공신 소하가 찬후(酇侯)로 봉해질 때 받은 식읍(食邑)이 7천 호 였다. 조참이나 진평도 1만 호가 넘는 식읍을 하사 받았으나 이것은 여러 차례에 걸쳐 나누어 받은 것을 모두 합친 것이었다. 그런데 장량에게는 무려 3만 호를, 그것도 열국(列國)의 으뜸인 제나라[21]에서 원하는 대로 골라 갖도록 하는 특혜 중의 특혜를 내려주었다.

이런 경위를 살펴보려면 장량과 유방의 관계를 돌이켜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장량은 유방에게 절대로 무엇을 달라고 먼저 요구하지 않았고, 유방을 떠나지 않았다. 그 소하도 한신이 유방에게서 떠날 때 그를 붙잡기 위해 달려감으로써 유방이 그마저 자신을 떠났다고 여겨 낙담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장량의 계책 덕분에 유방은 승리할 수 있었다. 이는 유방 사후에 실권을 모두 가져간 여치와 장량의 관계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장량은 유방과 여후 모두에게 미움을 사지 않았고 오히려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우군이었다. 따라서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유방이 장량을 최고의 공신으로 꼽아 대우하려 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무튼 장량에 대한 유방의 고마움과 신임은 그 정도로 대단했던 것인데, 장량은 이를 사양했다.
원래 저는 하비(下邳)에서 몸을 일으켜 경구를 찾아가다가 도중에 유(留) 땅에서 폐하를 우연히 뵙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저에게 폐하를 만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저의 계책을 받아 주셨고, 다행히 저의 계책은 적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이룬 공이 아니라 폐하의 배려로 인한 일입니다. 그러니 다만 유(留)에 봉해주십시오.
이에 장량은 3만 호 대신, 유방과 장량이 처음 만난 그곳, 유(留) 땅 3천 호 식읍을 갖는 유후(留侯)가 되었다. 비록 스스로 식읍을 낮춰 공신 순위도 62위로 기록되었으나, 이 일화를 보아 하면 순위란 단순히 숫자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유방으로서는 그 부유한 제나라 땅이 아니라, 처음 만난 그곳을 달라고 한 장량에 대해 그야말로 폭풍감동을 해도 무엇 하나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가령 한신이나 팽월만 해도 자기들을 왕제를 시켜주지 않는다고 원군도 보내지 않아 유방을 항우에게 깨지게 했고, 왕제로 임명하자 겨우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해하 전투에 참가한 바 있다. 그러니 이런 여타 공신들에 비해 장량을 각별히 여기고 아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22]

2.7.2. 폐하께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때 유방은 주요 공신들에 대해 상과 봉읍은 주었지만, 그 밑의 공신들은 매일 같이 "내가 잘났다", "아니다 내가 더 잘났다" 하며 공을 다투는 통에 골머리를 썩히며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 유방이 낙양의 남궁(南宮)에 머물며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다리 밑의 모래밭에 일단의 장수들이 모여 앉아 서로 간에 무엇인가를 쑥덕쑥덕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유방은 곁에서 시종하고 있던 장량에게 "저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물었고, 장량은 반역을 모의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유방이 저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묻자, 장량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평민의 신분으로 일어나, 저들의 힘으로 천하를 얻으시어, 지금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봉읍과 상작을 내린 사람들은 모두 소하(蕭何)나 조참(曹參)과 같은 폐하와 가깝거나 총애하는 옛 친구들 뿐이고, 폐하께서 살해한 자들은 모두 살아오시면서 원한을 품은 자들입니다. 지금 군리(軍吏)들이 저들과 같은 사람들의 공로를 모두 계산해 본 바, 천하의 땅을 전부 가지고도 그들 모두에게 봉읍과 상작을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했으므로, 저들은 폐하께서 자기들 모두에게 봉읍을 내려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또 평소에 자기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의심받아 살해될까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삼삼오오 모여서 모반을 하려고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유방이 걱정하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장량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저 무리 중에서 폐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미워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이유를 다른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질문에 유방은 '저 중에서는 (과거 자신을 배신해 유방의 세력을 위기로 몰아넣고 뻔뻔스레 남아있는)[23] 옹치'라고 대답했다. 이에 장량은

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유방이 옹치를 섭방후(什方侯)에 봉하고 주연을 베풀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다른 신하들은 폐하가 원수처럼 여기던 옹치까지 봉토를 받는 걸 보니 우리 차례는 틀림없이 오겠구나 하며 모반할 마음을 모두 버리게 되었다.

사마광은 이 일에 대해 "장량은 틀림없이 모반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었지만, 일부러 말을 안 하고 있다가 유방이 눈 앞에서 사태를 직면할 때 충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누구를 해치지 않게 하고, 아랫사람들은 더이상 불안하지 않게 되었으니 참 좋은 일이다. 간언을 올리는 사람은 장량처럼 해야 한다." 고 평가하기도 했다.

2.7.3. 제국의 수도

이때, 유방은 한나라의 수도를 어디로 할지 고민 중이었다. 대부분 관동(關東) 출신들인 공신들은 관중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낙양이 최고죠." 하고 유방을 설득하는 중이었는데, 여러 공신들이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이러하였다.
낙양의 동쪽에는 성고(成皐)가 있고, 서쪽에는 효산과 민지(澠池)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황하에 의지하고 있고,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마주 대하고 있어 그 험준한 지형과 견고한 성곽에 의지한다면 가히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촌동네 농사꾼 누경이란 자가 나타나 '낙양은 방어에 용이하지 않아 덕이 많은 자에게만 어울리는데, 폐하는 워낙 전쟁만 벌이시던 분이라 전혀 아니올시다. 관중 쪽이 반란 같은 게 일어나도 안심입죠.' 라는 거칠지만 적절한 조언을 올렸고, 이에 고민하던 유방이 마지막으로 부른 사람이 장량이었다. 장량은 둘 중 어디가 낫겠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낙양은 비록 그와 같이 지리적인 이점과 견고한 성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의 땅은 너무 협소하여 사방 백 리에 불과합니다. 또한 토지는 척박하고, 사면에서 적군의 침입을 맞이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땅은 결코 군사적으로 유리한 땅이 아닙니다. ("뭐야, 결국 낙양이 수도로는 부적합하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관중의 동쪽에는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이 있고, 서쪽에는 농산(隴山)과 민산(岷山)이 있어 그 사이의 비옥한 땅은 사방 천 리에 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쪽으로는 물산이 풍부한 파(巴)와 촉(蜀) 두 군(郡)과 접하고 있고, 북쪽에는 호(胡) 땅의 대초원이 있어 능히 가축을 방목하여 기를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삼면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굳게 지킬 수 있고, 단지 동쪽 한 방면만을 통해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제후들이 안정되어 있으면, 하수와 위수(渭水)를 이용하여 관동에서 산출되는 양식과 물자들을 관중으로 수송할 수 있을 것이며, 제후들이 반하여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면 위수나 하수의 순류를 타고 병사들과 그 군수품을 수월하게 수송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천리에 달하는 철옹성과 같은 땅이며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창고입니다. 누경의 올린 건의가 옳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그때까지의 논쟁이 무색하게 즉시 관중에 들어가 장안을 수도로 삼고, 누경에게 자신의 성을 내려 유경으로 부르게 하였다.

2.8. 여후의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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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노인이 태자를 보필하다

유방이 관중으로 들어가자, 장량도 이를 따라갔다. 하지만 본래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장량은 양생법(養生法)[24]을 쓰면서 밥도 거의 먹지 않고 집 밖으로도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이 무렵 유방은 척(戚)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는 문제로 여후(呂后)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태자를 폐하고 새로 다시 임명하는 일이라, 대부분의 공신들은 비판적이었지만 유방의 결심이 너무 확고해서 아무도 함부로 말을 못하고 있었고, 이에 애가 탄 여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폐하는 유후의 말은 무조건 들어줍니다 하자 여후는 오빠인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25]을 장량에게 보내 계책을 물어보았다.

처음에 장량은 "황실 가족의 일인데, 나 같은 사람 백 명이 있다 해도 폐하가 무슨 말을 들으시겠나?" 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마음이 급해진 여택이 장량을 위협하며 뭐든 방법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자 유방이 그토록 초빙하려고 했지만 초빙하지 못한 상산사호(商山四皓)[26]라는 인물들을 초빙하여 태자 옆에 있게 하면 황제를 놀라게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27]

여후는 즉시 많은 재물을 써가며 그들을 초빙했고, 훗날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태자를 바꿀 생각을 하고 있던 유방은, 그들까지 여후가 초빙한 모습을 보자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라고 하며 울면서 태자를 바꾸는 일을 그만두었다.

다만 상산사호와 관련된 이야기는 사기에 일종의 야사처럼 서술된 이야기이고 자치통감에서는 "그 성깔의 유방이 고작 선비 몇 명 불렀다고 깨갱할 리가 없다" 며 상산사호 설의 신빙성을 부정했으며, 유방이 유영을 폐태자하지 않으려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조정 전체가 여후와 유영에게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현대의 관점에서야 여후가 악녀지만 폐태자 당시 여후는 초한쟁패에서 오랫동안 항우의 밑에서 포로 생활을 한 것에 대해 동정적 여론이 강했으며, 멀쩡하게 정통성을 가진 후계자를 유약하다는 이유만으로 폐태자에 찬성할 공신은 없었으니 처음부터 유영이 폐태자될 가능성은 희박했다.[28][29] 그러나 후술할 여후와 장량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상산사호 설의 신빙성은 차치하더라도 장량이 여후의 편(이라기보다는 혜제의 편)을 들었던 것은 확실하며, 장량을 비롯한 공신들의 폐태자 반대가 최종적으로 유방의 결정에 관여했다는 것까지는 추측할 수 있다.

2.9. 말년

장량은 대(代) 땅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정한 황제를 따라 종군하다가 마읍(馬邑)에서 기이한 계책을 내거나, 한신의 반란을 진압한 소하를 상국에 추천하기도 했다. 그 무렵에 장량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고, 이윽고 진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포한 진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다가 천하를 진동시켰다.
오늘 이 세 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고 만호의 봉읍을 받았으며, 그 지위는 열후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포의로 시작한 사람으로는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라 나는 이것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적송자(赤松子)[30]의 뒤를 따라가 노닐고자 한다.
이 '적송자' 언급 때문에 장량이 제때 물러나서 숙청을 피했다는 등의 말이 많은데,[31] 유방은 장량을 숙청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고, 장량도 물러나거나 속세를 떠나기는커녕 계속 장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조언을 했다. 심지어 대외적으로 은퇴한 혜제 시기에도 아들 장벽강을 통해 막후에서 조정을 움직였다는 의혹도 있다. 다만 폐태자 문제로 여후의 편을 든 것이 크게 섭섭했는지는 몰라도 영포의 반란 때 장량이 출병하는 유방을 아픈 몸으로 배웅하면서 초나라의 정병들은 매서우니 앞서 싸우지 말라고 말했으나, 유방은 장량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32] 그리하여 결국 유방은 앞장서 싸우다가 영포군의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덧나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장량은 밥도 거의 먹지 않으면서 몸을 가볍게 유지하고 있었는데, 곧 유방이 세상을 뜨자 태자의 일을 고마워한 여후는 억지로 음식을 먹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이란 날랜 백마가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듯 쏜 살 같은 것(人生一世間, 如白駒過隙)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기를 바라십니까?
이에 장량은 별 수 없이 억지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그 뒤로 8년 뒤에 은거하여 장자제 지역에서 신선처럼 살다가 죽었다. 몸이 약해 골골대긴 했지만 소하나 조참 등이 죽고 난 후에도 살아 있었다. 덧없이 빠른 세월을 뜻하는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는 사자성어는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장량이 다리 밑에서 노인과 만난 13년 만에, 그 노인이 말했던 곡성산(穀城山)을 가보자 그 밑에서 황석(黃石)을 하나 발견했고, 이후에 이 황석을 자신의 스승인 황석공으로 여겨 집으로 가져와 보물처럼 여기며 제사까지 지내주었다. 장량의 후손들은 장량이 죽자 그 황석을 장량과 같이 묻어 주었다.

3. 평가

그의 삶 자체만으로도 흔치 않은 걸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초나라의 항씨 일족에 못지 않은 재상지종의 명문귀족이었지만 평민 출신 호걸들과도 교만함 없이 의기투합하였고, 온갖 호걸들이 부귀영화와 봉작을 탐하여 싸웠으나 정작 자신은 재산이나 지위에 초탈했으며, 망국의 후예였음에도 다른 옛 귀족들과 달리 가문의 기득권을 되찾는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더러, 침략자 진나라에 대항하여 희성한씨 왕가의 부활에 평생을 바쳤지만 옛 열국 체제가 그 수명을 다하였음을 인정하고 유씨의 천하라는 새로운 체제의 창출을 주창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장량의 이런 삶과 정확히 정반대로 살다가 결국 패망한게 항우임을 볼때[33] 항우의 진정한 맞수는 장량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또한 그는 패현 풍읍에서 유방과 함께 일어난 거병동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항우 진영에서 있다가 유방 진영으로 넘어온 귀순용사도 아니었으며 본디 희성한씨 왕가의 재상지종 출신으로서 평민 유방이 이끄는 패현 일당의 입장에서는 파트타임 객원 어드바이저였을 뿐이었음에도 유씨의 천하가 건립되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3대 준걸 중 하나가 된 점은 특기할만하다.

다만 한신은 천재 대장군, 소하는 위대한 재상으로 각각 그 맡은 바가 뚜렷한 데 비하여 한삼걸 중 하나인 장량은 이미지가 명확하지 않아 "장량이 대단하긴 대단하지. 그런데 뭘 했더라?" 같이 행적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의 장자방'이라는 표현의 주인공인 만큼 자신이 모시는 군주를 큰 틀에서 이끌어 천하를 거머쥐게 하는 책사이자 스승의 전형으로서 강태공과 더불어 동아시아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개국 특성상 지도자가 부각되어야 했기에 장량의 업적은 눈에 띄지 못했고, 장량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음을 그의 행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관련 문서들을 대충 훑어보더라도 중국사에서 손에 꼽힐 위대한 업적을 일궜으나 깔끔하게 욕심을 내려놓은 것을 보면, 역사에 조금이라도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동서고금을 통틀어 얼마나 현명한 인물인지 혀를 내두를 지경인데, 이는 역이기의 주장을 젓가락으로 박살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장량은 유방과 함께하며 천하통일을 위한 큰 그림, 즉 대국적인 전략부터 유방의 개인적인 대소사에 이르기까지[34] 유방의 생애에 전체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 옛 진나라의 영토를 빠르게 확보하여 안정적인 근거지를 다진다.
2. 항우로부터 분봉받은 제후들을 외교로 회유하거나 힘으로 꺾어 항우의 세력을 줄인다.
3. 근거지에서 생산되는 물자와 회유한 제후들을 이용해 항우를 끝없는 소모전으로 몰아간다.

소하는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관중에 있으며 관중의 자원을 끊임없이 유방에게 보충해 줬고, 한신은 별동대를 이끌고 위, 조, 연, 제 등 하북의 제후들을 제압해 항우를 고립시켰다. 그들과는 달리 장량은 계속해서 유방의 옆에 머물며 그의 크고 작은 모든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약탈을 금지하고 진나라의 백성들을 위로할 것, 호해처럼 황음무도에 빠지지 말고 진나라의 백성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일 것" 이라고 조언한 장량으로 인해 유방은 진나라 백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팽성 전투에서 최악의 대패를 당한 바로 그 시점에서, 장량의 건의로 경포와 팽월 등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하여 오히려 우군을 더 끌어들여 항우를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항우와 전쟁이 한창인 지금 분봉을 하면 대왕의 신하들이 봉지로 뿔뿔이 흩어질 텐데 누가 대왕을 위해 계속 싸우겠느냐."라고 조언하여 역이기의 봉건제를 거절하도록 한 것은 이후 한나라의 정치 판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으며,[35] 개국 초기에 있을 공신들의 반란과 반발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던 것도 장량의 덕택이었다. 제국의 수도를 관중 지방에 있게 한 것도 장량의 공이었다.

사마천은 천하통일에서의 장량의 공을 사기(史記) 유후세가(世家)에서 이렇게 정리하였다.
장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승리한 것은 유후 장량인 자방 즉 장자방의 계략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인품도 빼어나고 학식도 뛰어나며 기상은 높았으므로 한(韓)나라 출신임에도 중용되었던 것이다. 유후는 하비의 다리 위에서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을 배워 유방을 도와 소하한신과 더불어 한(漢)나라를 세웠다. 그가 세운 계책들은 한결같이 천하쟁패에 승부수를 던질 만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일이 공적을 나누어 말하지 않더라도, 장량은 유방이 내린 거의 모든 결정에 관여하였다. 특이한 점은 유방이 여러 공신들을 의심하고 심지어 소하마저 의심했던 적이 있었음에도, 장량에게는 절대적인 신임을 보였다는 점이다. 유후세가나 사기의 여러 언급에서 장량의 제안을 유방이 거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거절은커녕 심지어 장량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는 식의 기록도 거의 없다.[36] 장량에 대한 유방의 신뢰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여후가 장량에게 조언을 구한 것도 유방이 장량의 말은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대군을 이끌고 하북을 제패한 한신이나, 유방이 없을 동안 본거지인 관중을 그대로 장악하고 있는 소하에 비해 별다른 직책도 없이 유방의 주위에 머물러 있기만 하는 장량은 의심의 여지가 적긴 하다. 그러나 무려 3만 호 식읍을 내려도[37]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유방이 처음 만났던 땅을 달라는 장량의 태도 역시 유방에게 인상 깊게 심쿵 다가왔을 것은 분명하다. 유방은 장량과 함께 뭔가를 논의한 적이 대단히 많았는데, 사마천 역시 황제와 함께 천하 대사를 표시나지 않게 논의한 적이 매우 많았지만, 모두가 천하의 존망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록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했을 정도.

본래 세가나 열전마다 평론을 내리는 사마천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귀신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또한 괴이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 한 노인이 장량에게 병서를 준 일과 같은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며 장량의 신비스러운 행적에 대해 외경심 비슷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38] 사마천은 이렇게 평론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귀신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또한 괴이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 한 노인이 장량에게 병서를 준 일과 같은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가 여러 번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그때마다 장량이 계책을 내어 공을 세웠으니 어찌 그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고조가 "무릇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 짓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고 했다. 나는 장량의 외모가 매우 우람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39] 그의 화상을 보니 참으로 아녀자와 같이 예뻤다. 그래서 공자가 한 말이 있다. "외모로써 사람을 취한다면 내가 담대자우에게 실수를 한 것과 같게 되리라!"
이는 유후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다.
처세술 또한 뛰어나서, 한고제가 공신들을 이성왕으로 봉할 때에도 왕위와 영토를 거부하며 권력에 욕심이 없음을 드러내 훗날 한고제와 여후의 토사구팽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40]

4. 여담

  • 당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흔히 모사, 참모의 대명사로 통한다. 삼국시대 인물인 조조순욱을 '나의 자방'이라 칭한 일이 유명하며, 당태종 역시 위징을 장자방에 비견하는 등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공을 세운 참모나 정치가를 '나의 장자방'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도 유명하다 보니 굳이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뛰어난 계책을 내는 책사를 장자방에 비견하긴 마찬가지다. 조선에서는 정도전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8월 26일 정도전 등의 졸기에 기록되어 있다.
    개국(開國)할 즈음에 왕왕 취중(醉中)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고제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제를 쓴 것이다."[41]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42]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 8월 26일
  • 세조에게는 그 유명한 한명회가 있다. 한명회가 세조의 즉위에 얼마나 공헌했는지를 생각하면 장자방이라는 칭호가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역사를 통틀어 모사로 이름난 인물은 많지만, 대부분은 1) 제대로 된 주인을 못 만나거나(예: 범증), 2) 계책이 실패하여 자신 또는 주군을 망치거나(예: 곽도), 3) 끝내 대업을 이루지 못하거나(예: 제갈량), 4) 대업을 이뤘지만 이후 숙청당하고(예: 순욱) 5) 대업은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숙청을 피해 달아나는(예: 범려) 등 그나마 보신에는 성공한 범려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말로가 좋지 못했다.[43] 반면 장량은 이런 좌절을 겪지 않은데다 과정 역시 상대적으로 깨끗했기 때문에 모사의 이상형으로 여겨진다.[44]
  • 장불의와 장벽강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작위를 상속받은 장불의는 문제 때 불경죄를 범해 후의 작위를 박탈당해 버렸다. 장벽강은 뒷날 유방의 아들 혜제가 죽었을 때 여후가 곡만 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을 보고 승상 진평에게 "태후가 저러는 건 대행 황제(혜제)께 장성한 아들이 없어서 승상과 같은 대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니, 여씨 일족들에게 요직을 주면 태후가 안심할 것"이라 조언했으며 진평은 장벽강의 진언을 따랐다. 그리고 진평은 자기가 박아놓은 여씨를 처단하기 위해 X고생한다[45] 잔뼈 굵은 책략가 진평에게 이 진언을 한 장벽강의 이 때 나이는 15세였으며 시중 직책에 있었다고 한다. 장량이 멀쩡히 살아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장량의 견해를 장벽강이 그대로 진평에게 전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삼국지장초[46], 장익은 이 사람의 후손들이다. 장로를 비롯한 오두미도의 장천사들 역시 장량의 후손을 자칭하고 있다.

5. 대중매체에서

5.1. 만화

  •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수염난 호걸상을 지닌 모사로 등장하는데 오히려 여자같은 미남자 캐릭터는 한신이 돼버렸다.[47] 실지로 장량의 이미지인 모사의 이미지도 한신이 대부분 가져갔으며 한 왕실의 후예로서 한을 부흥시키려는 한신과 유방을 통해 초에 한나라의 복수를 하려는 장량과의 약간의 대립이 있다.[48] 다만, 분명한 것은 여기에서의 장량은 한신의 속마음조차 꿰뚫어 보는 한신보다 한 수 위의 인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49] 이는 작중에서 한신 스스로 인정한 것. 장량을 평가하는 고우영 화백의 시선을 볼 수 있는 대목.
  • <문정후 초한지>에서는 수염이 난 모사로 등장했고 한신은 미남자 캐릭터가 되었다. 다만 한신과 장량의 캐릭터성이 바뀌어서 한신은 유방을 통해 천하를 안정하기 위한 원수의 이미지가 되었고 장량은 한(韓)의 부흥을 위해 분투하는 방랑자의 이미지가 되었다. 장량이 유방 곁에 남아있는 부분은 4~5권 후반부뿐이고 대부분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유방의 곁을 떠나 있었다. 처음에는 진시황 암살 실패 후 한(韓)의 왕제인 한성의 신하로 들어가 그를 도왔지만 역이기유방의 계략으로 일시적으로 유방의 신하가 된다. 그 후 항우의 말에 따라 항우 밑으로 들어가면서 그를 언변으로 조종하여 시황제의 묘를 파헤치게 하는 등의 계략을 부렸는데 홍문연에서 장량의 방해를 받고 가뜩이나 빡친 상태의 항우가 분풀이로 한성을 살해하자 자신 때문에 자신의 임금이 죽었다며 오열하고는 항우를 반드시 궤멸시키겠다며 관직에서 하야한다. 이후에도 한신을 유방에게 보내는 등 암약하다가 유방이 관중을 공략한 뒤 다시 찾아오나 위표, 신양을 설득하고 위나라를 항복시키기 위해 떠난다. 그 후에는 유방이 만용을 부려 팽성 전투를 일으키려 하자 패배를 예언하고 한성의 손자가 근처에 있다는 명목으로 유방의 곁을 떠나 유방이 패퇴하고 나서야 다시 등장하고 이 때부터 정식으로 유방의 신하가 된다. 최후에는 초한전쟁이 길어지고 백성들이 고통받기 시작하자 한 왕조의 부흥이라는 뜻을 접고 한신에게 “부디 이 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며 광무 대치로 한신을 끌어들인다.[50] 마지막 장면에서 “유방의 천하에 자신같은 군사는 방해가 될 뿐”이라며 하야하고 수레를 타고 산으로 떠나는 것으로 완결 씬을 마무리짓는데 부록에서 '이후 산에 들어가 신선술을 익히려다 굶어 죽었다'는 최후가 나온다. 좀 머저리같은 최후로 각색됐다
  • <적룡왕>에서는 미남자 계열로 그려졌는데 여기서는 홍문연 때 항장의 상대를 직접 맡아서 칼춤을 추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항백이 등장하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황석공의 퀘스트를 하는 장면이나 여러 헌책을 하는 등 전체적인 묘사는 비슷하다. 물론 유방이 중심인 작품이라서 후반으로 갈수록 비중이 줄어드는 편이다.
  • 이문열의 <초한지>를 원작으로 형민우가 그린 <이문열 형민우 초한지>에서는 긴 머리카락에 도포를 입은 한푸 스타일의 미청년 책사로 등장한다.
  • <해황기>, <수라문>의 작가인 카와하라 마사토시가 2016년 4월부터 장량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제목은 <용사의 날개(龍帥の翼)>. 부제로 '사기 유후세가이전(史記·留侯世家異伝)'이라는 제목이 붙어서 재해석이나 각색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5.2. 게임

  • <천하제일상 거상>에서는 사계신의 던전인 빙궁에서 나오는데 유방을 섬긴 책사라 그런지 번쾌, 한신의 영혼과 같이 유방의 혼 근처에서 출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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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에이의 <항유기>에서는 최강의 군사로 범증보다 능력치가 조금 우위에 있다. 일러스트도 역사 기록을 반영했는지 미청년 스타일. 이마에 점이 없는 것을 빼면 옆머리가 길쭉한 것이 적룡왕의 장량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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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13,14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인터넷에서 고대무장으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삼국지 9 PS2 이후로[51] 정규 시리즈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시리즈 전반적으로는 와룡 선생의 약간 하위호환인데 자체 지력은 제갈량, 여상(강상)과 더불어 셋뿐인 100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참모였을 뿐 제갈량처럼 직접 군을 지휘한 적은 없어서인지 통솔력은 제갈량보다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사마휘가 제갈량을 평가할 때 강상, 장량이 관중, 악의보다도 위라는 뉘앙스로 언급했는데[52] 장수가 아니라서 무력이 높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감안해도 장량의 능력치는 관중보다 낮은 편. 삼국지 10과 삼국지 11의 일러스트는 어린 소년 같은 모습으로 나온 반면 삼국지 12에서는 약간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통솔력이야 군사를 지휘해본 것에 대한 격차 때문이라쳐도 소수의 인물들과 짜고 직접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한 배짱이나 암살 실패 후 임혐으로 숨어살던 것까지 감안하면 무력만큼은 진짜 백면서생인 제갈량보다 낮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스탯 배분이다. 삼국지 12 때 무력이 40으로 올라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갈량 하위호환인데다 삼국지 14에서는 23으로 도로 처참히 너프됐다. 정치력은 소하랑 맞먹는 급으로 나왔다가 삼국지 14에서 80대로 내려갔다.
  • <삼국지 9> PS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8/무력 6/지력 100/정치력 94 교사, 혼란, 덫, 배반, 환술, 매도, 요술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뒷렬에 배치해서 환술을 쓰는 게 더 좋다.
  •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6/무력 38/지력 100/정치력 95/매력 92에 특기는 19개다. 특기 중에 계략 특기는 저지 빼고 다 가지고 있고, 설전도 위압, 면박 빼고 다 있다. 또한 군사, 명사도 있으니 활용도가 높지만 전장에서는 통솔력이 68이라 턴이 늦게 들어와서 내정이나 전방 태수로 쓰거나, 통솔력을 올려주는 퀘스트나, 책을 주어서 하든가 하자.
  •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5/무력 33/지력 100/정치력 95/매력 91. 병과적성이 노병 S, 공성병기 A 외에는 C. 특기가 신산이라 백출, 주악, 시상 특기 무장만 얻으면 된다.
  • <삼국지 12>에서는 통솔력이 74으로, 무력이 40으로 올라갔다. 제갈량보다 우위가 있는 능력치는 무력 40뿐. 병종은 궁병, 전법은 팔진도. 활용도는 전투력이 낮은 제갈량.
  • <삼국지 13>에서는 설전에서 누적 100승 달성 시 장량이 숨겨진 고대무장에서 해제돼 플레이어가 장량을 사용할 수 있다. 전법은 조조의 장자방이라고 불렸던 순욱과 같은 '왕좌(王佐)'이다. 지력만 100이고 통솔력은 삼국지 12와 같이 70대라 전작보다 전투에서의 활용도가 낮아졌다. 그래도 중신특성은 가장 희귀한 '신산귀모(神算鬼謀)'이다. 능력치는 통솔력 71, 무력 40, 지력 100, 정치력 95. 특기는 상업 9, 농업 8, 문화 5, 설파 9, 교섭 8, 언변 8. 전수특기는 상업에 병과적성은 창병과 기병이 C, 궁병이 S이다. 다만 명성과 중신특성에 비해 귀모가 아예 없다는 점은 의외다.[53]
  •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5/무력 23/지력 100/정치력 86/매력 92로 삼국지 11과 비교하면 매력이 1올랐지만 정치력과 무력이 많이 떨어졌다. 개성으론 황금개성인 신안과 허실 그외의 개성으론 해제, 석병, 지낭이 있으며 전법으론 신산귀모, 화시, 연노, 진정, 충차, 투석이 있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제갈량의 하위호환이다.
  • <삼국지 DS 2>에서는 SP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65/무력 33/지력 100/정치력 92/매력 91. SP무장에만 있는 사기 특기 3가지 중 귀모와 낙뢰 2가지를 달고 나온다. 패왕이 있는 장수랑 붙여놔서 낙뢰를 감상해보자.

파일:조조전 온라인 현자 장량.png
  •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고대 무장으로 등장했다. 병종은 현자. 고유특성인 귀문 특성이 강력해 사기 무장으로 평가받았지만 귀문이 하향되면서 귀문이 계륵 특성으로 바뀐 지금은 코스트값을 못하는 현자라는 평가가 많다.

5.3. 영화

  • 1995년 개봉한 영화 <서초패왕>에서는 항우가 처참한 최후를 마치고 우후가 항우의 시체를 안고 통곡할 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신에게 토사구팽의 이치를 따라서 은퇴해야 함을 권한다.
  • 2012년 개봉한 영화 <초한지: 천하대전>에서는 저잣거리에서 내기를 하다가 소하에게 발탁되어 유방을 돕는다. 한나라 건국까지 유방을 돕는 것은 거의 같으나 한고조 즉위 후 범증의 계략으로 한신, 소하처럼 반역자로 몰려 쫓겨나다 활을 맞고 절벽으로 추락. 죽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유방이 사망하기 전 황궁으로 몰래 들어와 천하를 통일했지만 사람을 지나치게 의심하여 아무도 주위에 남지 않은 지금 모습이 원하던 결말인지를 유방에게 묻고 더이상 아무도 믿을 수 없음을 솔직히 고백한 유방과 화해를 나눈 이후 정황상 옥좌 뒷편에서 유방 사후의 한나라를 안정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후 범증의 지팡이를 가지고[54] 은거기인의 모습으로 항우와 유방의 위패를 관리하다 마침내 한 무리의 학자들에게 초한쟁패의 이야기를 전한 후 항우의 곁에 우미인의 위패를 모셔 두 사람을 재회하게 하고 방랑길을 떠난다. 영화에서 바둑을 책략의 수싸움을 묘사하는 요소로 사용하였기에 바둑의 고수로 설정되어 있으며[55] 전쟁 장면이나 회의 장면 정도를 제하면 대부분의 장면을 바둑두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 2013년 개봉한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에서는 유방이 노망이 들어서 한신까지 옥에 가두자 다른 가신들처럼 이제 늙어서 별볼일 없는 노인네로 보이게 매일 집에서 약을 달이고 본인이 만든 약을 만들어 먹다가 다리가 마비된다. 6년간 옥에 갇힌 한신이 풀려나자 자신의 집안에 들여서 보살펴 주지만 한신은 아직도 유방이 자신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다. 본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하는 수없이 여후에게 결탁하여 군에 남아있는 한신의 수하들과 괴철을 제거하게 하고 소하를 끌어들이라고 권한다. 하지만 한신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한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 집안에 기르는 약초들을 베어가며 울부짖는다.

5.4. 드라마

  • 2012년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중국 배우 곽청이 연기했다.[56] 더빙판 성우는 최정호[57] / 이타토리 마사아키.

    가산을 다 털어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암살자로 첫 등장한다. 창해 역사를 만나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나 실패하고 모두 죽지만 장량은 벼랑으로 뛰어내려 살아 남았다. 이후 패공인 유계가 초군에 병사를 빌리러 가는 길에 마주치며 첫 만남을 가진다. 그러나 항량이 자신을 휘하에 두려고 하자 한(韓) 왕실 부흥에 힘을 보태주면 한은 초를 도울 것이라는 핑계로 항량을 떠나고 패공 유계와는 다음을 기약하며 떠난다. 이후 무안후로 봉해지고 관중으로 진격하던 중 진군과 대치하던 유방과 재회. 이때 유방 진영은 진군에 포위당하였다고 최후를 맞이할 것도 각오하였으나 실은 장량이 이끈 한나라 군이 진나라의 갑주를 입어 위장하고 온 거라 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유방을 따라 군을 통솔하는 자리에 오르지만 통솔력은 높은게 아닌지 장수들의 불만을 제대로 해소도 못 시키고 성 하나를 함락시키자 본인이 통솔과는 거리가 멀다며 통솔권을 내주고 다시 책략이나 조언을 주는 모사로 돌아간다. 이후 유방을 따라다니며 크고 작은 계책을 내주어 도와주고 있는데 홍문연에서도 언변으로 항우를 설득하는 등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 유방을 옆에서 보좌하며 앞길을 제시해 주는 모사 이미지가 강하지만 드라마에서 비중이 한신이나 소하에 비해 심히 떨어지는게 문제. 마지막회에서도 서한삼걸 중 혼자 안 나왔는데 유방이 한신, 소하와 함께 지금의 자신을 만든 인재로 언급은 했다.
  • 2016년 KBS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에서는 성우 석승훈이 연기했다. 초한지 가장 초반부인 박랑사 사건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창해 역사를 고용하고 거사까지 함께한 뒤 도주해 등장이 없다가 하비에서 황석공을 만나는 에피소드에서 등장한다. 진승·오광의 난 이후 혼란기가 시작되자 거병한 유방과 첫 만남을 가진다.[58] 진나라가 멸망한 뒤 홍문연 전에 항백이 암살 모의를 알리자 계책이 있다고 말하고 연회에 참여한다. 다시 종군하며 동행하다가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이후 잠깐 이별한다.[59] 유방이 삼진을 평정한 뒤 다시 재합류한다. 이때부터 역이기와 함께 책사 라인으로 분류되며 가끔씩 개그를 연출한다. 형양 · 성고 전역 때 형양과 성고를 사수해야 되는 이유를 진언했고 광무 대치 때 다양한 전략을 짜내 항우를 열받게 한다. 해하 전투 직전 사면초가의 설계자로 나온다. 천하 통일 이후 산에서 은둔하며 도인 같은 모습을 가끔씩 드러낸 뒤 상산사호에 대해 설명해 준 것을 마지막으로 출연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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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61위 안평후(安平侯) 악천추 62위 유후(留侯) 장량(張良) 63위 남안후(南安侯) 선호


[1] 당시 전국시대에는 왕·공족들이 나라의 고위직을 맡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2] 이곳은 산동성·강소성·하남성·안휘성 4개성이 교차하는 곳이다.[3] 이때의 1근은 2백 그램이었으므로 24㎏.[4] 원래부터 암살의 공포에 시달려왔던 진시황이 일부러 가짜 수레를 여럿 대동하고 다녔다고도 한다. 현대에도 대통령 수준이 되면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 페이크 차량을 몇 대 굴리기도 하니. 초한지를 기반으로 할 경우, '원래는 수레 한 대 뿐이라고 소문이 나서 수레가 여럿일 경우를 고려하지 못했다'는 설정이 나오기도 한다.[5] 마태화보에 실린 그림[6] 유후세가 원문: '欲毆之.'[7] 무려 황제를 살해하려고 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성깔의 소유자였다.[8] 지금과 같은 종이책이 아닌 대나무 가지에 적은 죽간 서적이었을 것이다. 한 권이 아닌 세 권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책이 육도삼략이었다는 설도 있다.[9] 이에 어떤 사람들은 장량이 자신의 명성을 위해 일부러 신비로운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식으로 추측을 하기도 한다. 여하간에 그 내막이야 2200년 뒤의 사람들인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10] 하남성 우현. 한나라의 옛 수도다.[11] 지금의 섬서성 상현(商縣) 서남의 요산에 설치했던 관. 남양분지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관문.[12] 이 소설같은 일화는 일부에서 허구로 보는 시각도 있긴 하나 무려 사기에 적힌 내용이다. 실제로는 더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많은데 자세히는 홍문연 문서로.[13] 항우를 가리킨다. 羽는 자(字), 籍이 이름. 당시 예법으로 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실례였기 때문에 자인 항우가 더 많이 쓰였다. 여기에 대놓고 항적이라고 부른 것은 항우를 깎아내리는 의미에서 쓴 것이다.[요약] 그 성군들이 그런 행동을 했던 건 이미 적을 다 이겨놓고 목만 안 친 상태에서 자비를 베풀며 여유 부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랑 똑같은 짓을 적인 항우보다도 약세인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시행하겠다는 겁니까? 그리고 우리들의 덕이나 능력은 은 탕왕이나 주 무왕만 못합니다. 지금 항우와의 싸움이 한창인 데다 이 전쟁을 압도적인 무력이나 그에 필적할 만한 덕으로 그치게 하실 수도 없으시면서 그 와중에 옛 육국의 제후들을 다시 세우신다면 육국의 제후들은 결국 강대한 초나라를 따르게 될 것이고, 천하의 선비들은 모두 강대한 제후인 항적에게로 몰려가버려 천하통일은 불가할 것입니다.[15] 이렇게만 보면 역이기는 이상주의에만 집착하는 무능한 선비로 보이겠지만, 그 역시 유교적 이상주의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충신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곡창지대인 제나라를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 문제는 외교활동을 하던 중 한신이 제나라를 향한 트롤링을 하는 바람에 그 여파로 당시의 제나라 왕제인 전광의 분노를 사 애꿎은 역이기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16] 당장에 유방만 해도 항우가 분봉한 제후왕이다. 자신이 그 신분으로 이 일을 저질렀는데 그 뒤엔 제2 제3의 자신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17] 이 상황이 사기 회음후열전이나 한서 한신전에는 유방이 형양성에서 포위 당하여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상황으로 묘사가 되는데, 고조본기나 한서 고제기를 보면 이미 형양은 5월 기신의 일이 있었을때 함락 당했고, 한신이 용저를 격파하고 왕제 자리를 요구한 일은 11월의 일이며, 한서의 언급을 보면 당시 유방은 광무(廣武)에서 대치를 하다가 성고에 머무르고 있었다.[18] 한서 한신전에는 진평도 같이[19] 현 카이펑 부근[20] 하남성 태강현[21] 현재의 산둥성 일대. 지금도 이 지방은 곡창지대로 유명하다.[22] 물론 한신과 팽월은 천하가 평정된 뒤, 자신들이 욕심 부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23] 물론 나중에는 유방 쪽에 귀순하긴 했고 공도 나름 세웠다. 그래서 일단은 유방 진영에 있었던 것.[24] 도교나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건강관리법을 말한다.[25] 사실, 여택의 작위는 주여후(周呂侯)고 건성후는 여택의 동생으로 여후의 작은오빠인 여석지(呂釋之)의 작위다. 이 때문에 여기서 나온 여택은 여석지를 잘못 쓴 게 아닌가 하기도 한다.[26]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각리선생(角里先生)[27] 여담으로 여후가 죽자마자 공신들도 이때의 여택처럼 여씨와 친했던 역상을 협박, 그의 아들인 역기를 조종해 여산을 속여 군권을 빼앗은 뒤 몰살시킨다.[28] 그리고 혜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태자로 임명되어 비록 전쟁터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관중 땅을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후계자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여의는 혜제보다도 더 어렸기 때문에 유약함으로 따지면 여의가 더했다. 거기다 혜제는 당시 시점에서는 외척이 배경이 될 수 있지만 여의는 그런 것도 없었다.[29] 다만 고제는 오히려 외척인 여씨들을 탐탁찮게 여겨서 혜제를 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30] 전한시대의 신선. 사마광은 적송자 드립은 황당한 이야기고, 다만 장량이 처신을 잘하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평가했다. 여담으로 이순신이 무과 시험을 볼 때, "장량이 적송자를 따라 가서 놀았다는데, 그럼 장량은 죽지 않았나?"라는 문제에 "안 죽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리고 강목에 보니 장량이 죽었다고 쓰여있던데?" 라고 답변하였다.[31] 그래서 초한지에는 대개 천하통일 이후 장량이 정계에서 물러나 신선을 지향했다는 이야기가 들어간다.[32] 사실 영포는 워낙 거물급 반역자라서 여후도 울면서 혜제 대신 당신이 나서야 한다고 졸랐을 정도였던 만큼 군사들의 사기를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유방이 나서서 지휘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3] 항우는 귀족으로서 예법을 따졌고, 자기 재산과 지위와 가문의 기득권에 집착했으며, 주군인 초의제가 세력확장에 방해가 되자 시해해버린데다, 옛 열국 체제에 무리하게 집착하여 멋대로 18제후왕을 만들고는 결국 패망하였다.[34] 장량과 유방이 나눈 대화는 기록할 수 없이 많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유방이 간간이 보여주는 현명한 판단력도 필시 장량과 대화하며 배우고 깨우친 점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볼 수 있겠다.[35] 사실 이게 진승이 망한 이유였다. 장량으로서는 당연히 피해야 할 일이었고.[36] 유방이 장량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라고 볼 수 있는 기록은 딱 하나 있다. 사기 유후 세가에서 '漢十二年, 上従撃破布軍帰, 疾益甚, 愈欲易太子. 留侯諫, 不聴, 因疾不視事. 叔孫太傅称説引古今, 以死争太子. 上詳許之, 猶欲易之.' '한 12년에 주상이 경포의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왔는데 부상이 더욱 심해지자 태자를 더 바꾸려고 했다. 유후가 간했으니 듣지 않았다. 유후는 병을 핑계로 일을 돌보지 않았다. 숙손통이 고금의 사례를 들어가며 설득하는 등 죽음으로 태자를 위해 맞섰다. 주상이 짐짓 거짓으로 들어주는 척 했으나 여전히 태자를 바꾸려 했다.' 이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장량은 태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상산사호를 초빙하라고 여후에게 말한 것도 여씨 일족이 워낙 적극적으로 부탁을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랬을 뿐이었다. 이 기록은 여택이 간절하게 부탁하자 장량이 어쩔 수 없이 계책을 내준 이후의 기록인데, 본래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던 장량이 태자 문제를 유방에게 이야기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이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은 여씨 일족에게 "부탁한대로 반대는 했다."는 표시를 보여준 뒤 "나 이제 아프니까 뭘 더 할 수 없다."는 제스처를 보여줬다고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태자 문제를 유방에게 이야기했다고 해도 그렇게 애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37] 이는 개국공신들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포상 중에서도 가장 큰 포상이었다. 당장 공신 순위 1등이었던 소하는 7천 호였으며, 조참진평은 겸병을 해서 겨우 1만 호를 넘겼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서 가장 비옥한 지방인 제나라(現 산둥성)에서 자기 마음대로 골라서 가져가라 했으니 고제의 무한한 신뢰를 엿볼 수 있다.[38] 사마천이 노장사상이 강하긴 했어도, 괴이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대완열전' 등에서 "곤륜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장건이 서역에 다녀왔지만 그런 게 어딨었나? 우본기나 산해경에서 말한 기괴한 물체에 대해서 나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배척해버린 사람이다. 애시당초 삼황에 대한 이야기를 사기에서 잘라버린 것도 '말도 안 되는 것 같다.'는 게 이유였고.[39] 위에도 적혀 있듯이 젊어서 진시황의 암살을 계획할 정도로 터프한 면모(?)가 있었다.[40] 단 이 점은 단순히 처세술 이전에, 장량이 물욕이나 권력욕과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란 점 또한 한 몫 한다. 어찌 보면 그런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탁월한 처세술이라 할 수도 있겠다.[41] 한마디로 "유방이 장량을 부린 게 아니라 반대로 장량이 유방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니 한나라를 세운 건 유방이 아니라 장자방이고 난 조선의 장자방이니라."라는 자뻑을 가지고 있었던 것. 정도전의 경우에는 본인 스스로가 이성계를 목적의식을 가지고 찾아갔기 때문에 조금은 이런 생각을 할만 했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유방과 장량의 인연은 우연적인 측면도 있고 장량의 초지는 유방의 한漢나라가 아니라 장량의 조국 한韓나라 부흥에 있던 만큼의 차이가 있긴 하다. 다만 실제 정도전은 조선을 건국할 때보다는 건국 이후에 존재감을 드러냈으니 건국에 세운 공으로 따지면 정도전은 장량에 비할바가 전혀 못된다. 사실 실제 정도전은 장량처럼 책략을 낸적이 없으며 책사 노릇을 한적이 없다. 그런 정도전이 스스로를 장자방이라고 하는거 자체가 어불성설이다.[42] 그러나 바로 다음 문단에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태조실록을 편찬한 이가 정도전을 제거한 이방원이었으니 주관적인 시선이 다소 들어가 있기 때문.[43] 북송태조 조광윤은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 주요 공신들을 공직에서 내치고 명예직에 올렸는데 이것조차 관대함으로 언급될 정도로 피를 본 공신들이 많다. 멀리 갈 것 없이 장량의 당대에 토사구팽이라는 고사가 생길 정도로 한신을 포함한 여럿이 숙청되어 죽었고, 이는 수나라, 당나라, 명나라 등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머리좋은 놈이 없어서 숙청이 없었던 서진팔왕의 난이 일어났다![44] 장량의 선배라고 볼 수 있는 모사도 없진 않다. 대표적인 인물로 황석공과의 일화와 연결되는 장량의 사실상 스승인 책사계의 신화적 인물 강상을 꼽을 수 있고, 구천의 모사였던 범려도 있다. 강상을 제외한 두 사람의 특징을 보자면 장량은 곧바로 '내가 한 게 뭐있나염 허허허 떡 안주셔도 됩니다'라고 겸양하였고, 범려는 구천이 승리하자마자 ''내는 굿바이하겠다'하고 냅다 튀었다. 즉, 공신으로서 '나는 안전해'라고 안심하기보다는 자기 신변 관리도 나름 철저히 했다는 것. 이 와중에 욕심 안 부리고 은둔했다가 돌아와 달라는 불타는 러브콜과 함께 타죽은 공신인 개자추도 있다[45] 애시당초 당시는 여후가 공신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제거하려 들었을 정도로 분위기가 흉흉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공신이 여후와 혜제에게 대들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 거기다 진평도 여후와 여씨들이 설마 유씨 황족들을 이렇게 핍박할 줄은 몰랐을 것이기도 하고.[46] 연의에도 등장하는 광릉태수가 아닌 정사에서만 언급되는 주준의 별부사마.[47] 고우영 화백의 유비-유방은 거의 모양이 같다. 이들은 고화백 본인을 모델로 했다 카더라.[48] 물론 이건 고우영 화백의 착각으로 한나라 출신의 한왕 신이라는 인물이 따로 있다. 한신은 초나라 사람이다.[49] 대표적으로 팽성대전 이후 칩거하는 한신을 거짓 소문으로 밖으로 유인할 때의 '이 사람은 역시 나보다도 한 수 위에 있었는가!'와 한신이 진군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이유가 한 여인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을 장량이 눈치챘을 때의 '장량 이 분은 내 마음 속까지 꿰뚫어보는가!'가 있다. 특히 1번째 장면에서 소하는 한신이 왜 칩거하는지 알아채지 못하는 것과 거짓 소문에 속은 한신이 '적어도 장자방만은 그 정도 사리를 알 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하는 등 소하<한신<장량이라는 작가의 의견을 보여준다. 거기다 장량은 한왕 신의 장례 때 복수를 위해 항적패왕보다 조금 더 살겠다고 다짐하는 연출을 보여주니 더욱 그러하다.[50] 유방이 초와 화친 협정을 맺은 뒤 바로 다음 장에서 장량을 필두로 육가, 진평이 초를 무너뜨리자고 하자 “신의를 저버리자는 거냐”고 놀라면서도 결국 받아들이고 한신, 영포, 팽월에게 출전 준비를 명하자 한신은 “국가 간의 도리라는 것이 있는 법이거늘 유방은 그런 것조차 쉽게 저버리는 인물이었던가”라고 비판하며 오지 않자 “신이 직접 만나 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만”이라면서 부르러 갔다가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이는데 한신은 “이런 애국지사가 이토록 괴로워하는 것은 조국을 포기하고 유방에게 천하를 내주려 함이리라”라고 하지만 화친 파기 얘기는 뭐라고 변명했는지 나오지도 않고 울며 호소하는 연출이 어째 감성팔이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한신이 십면 매복 전략을 장수들에게 설명할 때 “이번에야말로 항우는 죽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컷에서도 검은 배경에 얼굴에도 명암이 드리워진게 다소 악한 느낌을 준다. 물론 본작에서 항우의 발암 행보도 충분히 다루고 자신의 군주의 죽음에 항우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묘사도 나오기는 했다.[51] PS판 삼국지7 신무장등록에서 이름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스탯이 뜬다.[52] 제갈량이 관중, 악의에 비견했다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냐며 의문을 제기하자 이 둘이 아니라 강상, 장량과 비교해야 한다며 올려쳤다. 강상과 장량은 장기적으로 중국을 지배한 주나라와 한나라를 세운 공신이라 일개 제후국의 재상과 장수였던 관중, 악의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듯하다.[53] 게다가 보통 장량보다 한 수 아래로 나오는 범증은 귀모 7레벨이 붙어있다.설정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을정도. 편집을 쓴다면 8 ~ 9레벨 정도 추가하는 것도 좋을 듯 하다.[54] 비록 범증의 계략으로 유방에게 팽당하기는 했으나 서로 초와 한의 책사로서 라이벌이자 친우로 묘사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도 범증이 장량에게 꼭 우리가 대국을 두어야만 하겠냐고 묻는 회상.[55] 다수의 인원과 동시에 대국해서 이길 정도의 실력.[56] 신삼국에서 노숙을 맡았다.[57] 신삼국에서 조비를 맡았으며, 본작에선 같은 배우가 맡은 호해도 맡았다.[58] 작위의 유래가 된 "유현"[59] 이때 잔도를 불태우는데 그 이유를 소하에게 이야기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