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색전투를 승리로 이끈 관영(灌嬰) |
[clearfix]
1. 개요
京索之戰중국 초한쟁패기 시절 벌어진 한(漢)군과 초(楚)군의 전투.
2. 배경
진(秦) 제국이 멸망하고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할 무렵, 초나라의 초회왕(楚懷王)은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 사람이 왕이 될 것이다." 라고 공언하였다. 이에 유방(劉邦)은 수하들을 이끌고 누구보다 먼저 관중에 입성하는데 성공했지만, 거록전투(巨鹿之战)에서 엄청난 승리를 하고 서둘러 진격해 온 항우(項羽)의 세력은 가히 압도적 그 자체였기에 유방은 쪽도 못쓰고 홍문연에서 목숨만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 이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유방은 파촉으로 그야말로 내던져졌고, 복수를 위해 이를 갈며 절치부심하게 된다.한편, 중국의 지배자가 된 항우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분봉 조치의 엉망으로 여러 제후들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게중 가장 불만이 컸던 제나라의 전영(田榮)은 항우가 분봉한 왕들을 모조리 쫓아버리며 항우의 천하에 가장 먼저 반발을 드러내었다. 장량(張良)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항우는 최대의 위협인 유방을 내버려두고 우선 제나라를 상대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이미 천하의 명장 한신(韓信)을 대장군으로 임명했고, 치밀한 소하(蕭何)의 준비와 함께 반격의 신호탄을 날리고 있었다. 유방은 파죽지세로 삼진 등을 평정했고, 이후 진격하는 길에 있는 위표, 사마앙 등을 모조리 격파하며 항우가 없는 초나라의 본거지, 팽성을 빈집털이 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팽성 점령 후 전쟁은 끝난 것이나 다름 없다는 태도로 방심을 하고 있던 유방의 호왈 50만 연합군을 항우는 단 3만 병력으로 요격, 이 팽성전투(彭城之戰)에서 유방은 압도적인 대패를 당하며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달아날 수 있었다. 이후 유방은 하읍(下邑) 지역에 있던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과 만나 간신히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우선 형양으로 물러났다.
3. 전개
유방이 이곳에서 패잔병등을 모으는 한편, 때마침 소하 역시 팽성의 변고를 전해 듣고 병역명부에도 올라오지 않은 사람들을 싹 몰아서 보내주었다. 본래 군대는 만 23세면 병역명부에 올리고, 쉰여섯 살이면 퇴오(退伍) 시키는것이 관례였는데,[1]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23세가 안되는 사람들이나 숸여섯 넘은 노인도 모조리 싹 보냈다는 이야기.[2]
이렇게 병력을 모으고는 있었지만 당시 상황은 상당히 급박하였다. 팽성전투의 엄청난 승리 이후 초나라군은 달아나는 한군을 끝도없이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 한나라군은 형양과 성고를 기점으로 삼아 방어선을 형성하고, 형양 주변의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초나라군을 막기 위해 전투를 치렀다.
당시 한군은 소하의 지원병과 더불어 유방이 여러 장수들과 직접 나서 사기가 꽤 오르기는 했지만, 적의 기병대가 상당히 많다는 점은 우려되는 부분이었다. 기병이라는것이 꽤 고급병종이고 일반 백성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것은 물론이고 말을 키우기도 힘들다는 점을 생각하자면 오합지졸 농민들을 모아 놓은 한군은 기병이 부족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에 유방은 한군에서도 새로 기병대를 창설해서 초나라의 기병대를 막아세우려고 했는데, 과거 진나라 출신으로 중천(重泉) 사람인 이필(李必)과 낙갑(駱甲)이 경험도 있고, 현재 교위(校尉)의 신분이기도 하여 적절하다고 여겨 그들을 기병대장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필과 낙갑은 자신들이 진나라 출신이라, 아무래도 진나라에 대해 불만이 아직도 많은 병사들이 자신들을 뒷담화까고 따르지 않을것이 우려되어 이를 고사하고, 대신 유방의 측근 중에 말을 잘 타는 사람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자신들은 그 대장을 보좌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유방은 관영이 나이는 좀 어리지만 전투 경험이 많으므로[3] 중대부(中大夫)로 임명하고, 이필과 낙갑을 좌우교위로 삼아 그를 보좌하게 하여 형양 동쪽에서 초나라의 기병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관영은 별동대를 이끌고 초나라군의 후방을 치며 초군의 보급선을 괴롭히게 된다.
이 전투에서 관영이 대활약한것은 분명하나, 총대장은 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회음후 열전에서는 패잔병을 이끌고 형양에 온 한신이 경읍과 색읍에서 초군을 물리쳤다고 해석할 만한 언급이 있기 때문.
4. 전투 이후
팽성대전 이후 끝장나기 직전이었던 유방은 이 경색전투의 승리로 어떻게든 초나라군의 서진을 멈출 수 있었다. 한편, 유방의 부하인 수하(隨下)가 비슷한 시기에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를 회유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경포는 항우에 대한 반기를 들며 초나라군을 몇달간 붙잡아 놓게 된다.경색전투의 승리와 경포의 이탈로 얻은 시간 동안 유방은 어느정도 패전을 수습하고 기반을 잡은 후, 한신을 파견하여 안읍전투에서 위표를 물리친 후 한신의 북벌을 시작하고, 본인은 형양 · 성고 전역에서 항우의 본대를 붙잡아 놓게 된다. 이렇게 되어 초한전쟁은 일종의 2라운드를 맞이하였다.
5. 초한지
초한지에서는 이 전투를 전차전으로 각색하였다. 한신이 대장군으로 복귀한 뒤 항우를 형양성으로 유인하기 위해 계책을 내는데, 한나라 장수들을 회유하기 위해 온 초나라 사신에게 거짓 투항하겠다며 서신을 주는데, 실제로는 항우를 도발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분노한 항우는 병력을 이끌고 형양성 인근으로 출정하지만, 한신은 전차를 동원해서 항우의 부대를 포위 섬멸하고 항우도 전사할 위기에 몰렸으나 범증이 보낸 포장군이 구하러 오면서 간신히 살아서 도망친다.[1] 권중달 자치통감 2권 pp. 65 주석.[2] 이는 당연히 백성들의 불만을 초래하기 쉬웠지만 한나라에게는 다행히도 상대가 적으로 간주되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학살하길 좋아하는 항우였기에 백성들도 죽기 싫어서 한나라의 편을 들어줘서인지 소하의 재주 덕인지 그런대로 따랐다고 한다.[3] 관영이 비단장수였던 것을 생각하면 묘하지만, 그때가 워낙 험한 세상이라 돌아다니면서 교역을 하려면 어지간히 싸움을 잘해야 했을거라고 분석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