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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현제

고대 중국의 행정체계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봉건제 군현제 군국제 주현제


1. 개요2. 역사

1. 개요

군현제()는 진나라 시황제가 실시한 지방 행정 제도이다.

다른 말로 군(郡)현(縣) 외에 주(州)도(道)를 넣어 주현제(州縣制), 주군제(州郡制), 도주제(道州制) 등 행정구역의 명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지만 본질은 같다.

영토를 군, 현 등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하고 군주가 직접 임명한 임기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할 지배하는 형태의 제도이다. 주나라 때 실시된 봉건제를 대신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제도.

2. 역사

2.1. 중국사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는 다양한 부국강병책을 펼쳤고, 그 일환으로 지방의 통치를 제후, 공경대부에게 세습 영지로 분봉해주는 제도가 아닌 군주가 직접 임명하는 비세습적인 지방관을 통해 직할 통치를 수립하고자 하는 정책이 다양하게 실시되었다. 초나라는 소국들을 병합하고 현을 설치했으며, (晉)은 군을 설치했다. 전국칠웅도 모두 비슷한 직할 통치를 시도하였으며, (秦)에서 상앙의 개혁을 통해 최초로 광역행정구역인 군과 하위 행정구역인 현을 두는 군현제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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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36개 군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뒤 전국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직접 태수를 파견하여 직할 지배하는 제도를 통해 막강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한 것이다.

시황제 26년(기원전 221), 진나라는 육국을 평정한 후 어떠한 정치제도를 실행해야 통일제국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당시에는 통일 제국을 유지한 역사적 경험이 부족했기에 대다수 사람들은 주나라봉건제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경험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여러 신하가 의견을 내 서로 대립하는 방안이 난무하는 정국이 형성되었다.

승상 왕광은 주나라봉건제를 계승하여 몇몇 제후국을 세우고 황자들을 제후왕으로 봉할 것을 주장했다.
제후들이 막 무너졌지만 연, 제, 초의 땅은 너무 멀어서 왕을 두지 않으면 그들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여러 아들을 왕으로 세울 것을 청하오니 황상께서 허락해 주십시오.

이에 여러 신하가 좋은 방법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위 이사는 이 의견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주나라 왕이 봉한 동성 제후가 참으로 많사오나 이후 서로 소원해지더니 서로 공격하여 치는 것이 원수와 같았습니다. 제후들은 멈추지 않고 서로 죽이고 정벌 했지만 천자는 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모두 군현이 되었으며 자제들이나 공신들에게 그곳의 부세로 후한 상을 내리신다면 매우 쉽게 통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에 두 마음을 품은 이가 없도록하는 것이 안녕을 유지하는 술수입니다. 제후를 두는 것은 다스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말했다.
천하에 전쟁이 멈추지 않아 모두 고생한 까닭은 제후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는데 또다시 제후국을 세우는 것은 전쟁의 조짐을 싹 틔우는 것이니 안녕과 휴식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 이사의 의견이 옳다.

이사가 주장한 군현제는 전국을 군으로 나눈 후 그 아래에 현을 두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통치체제였다. 현을 통한 중앙의 직접지배는 춘추시대 중기[1]에 처음 등장했고, 전국시대에 군현제적 지배[2]를 확립했다. 군현제의 실시는 군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질서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진나라의 군은 지역의 특성에 따라서 2개로 나눌 수 있는데 중원 바깥에 새롭게 세워진 변군(邊郡), 5군과 진나라가 있었던 지역, 즉 중원에 설치되었던 내군(內郡)으로 나눌수 있었다. 내군은 다시 구현(舊縣, 춘추전국시대 혹은 그 이전의 국이나 읍에 유래하는 현)과 신현(新縣, 철기와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새롭게 세운 현)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습속이 강하게 남아있는 구현에 대해서는 기존의 통치 조직등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앙의 문서 행정 및 지배가 그대로 이식되었을 뿐 아니라 토착세력을 군현조직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군사적, 경제적 필요 등을 고려한 뒤 강력한 통제를 실시할 곳으로 선정되면 그곳에는 중앙집권적 통치질서를 이식하기 위해 사민(徙民)과 같은 적극적인 방식이 사용되었다. 사민이랑 점령한 곳의 주민을 내지로 강제 이주시켜서 점령지역의 전통적 습속을 약화시키는 한편, 그 자리에는 자국 농민이나 죄수 등을 이주시키는 정책이다. 이와 비슷하게 진나라는 통일 이후 천하의 부유한 호 12만을 함양에 일시적으로 이주시키는 강간약지(強幹弱枝, 줄기를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함, 정치에 있어 중앙을 강하게 하여 지방을 제어함) 정책을 펼쳤다. 시황제는 이를 통해서 반란의 구심점을 사전에 제거하고, 전국의 재산을 함양으로 모을 수 있었다.

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나라를 36개군[3]으로 나누었다. 군 아래에 현을 두고, 현 아래에 향을 두고, 향 아래에 정과 리를 두었다. 군에는 지방관은 군수와 그 보좌역으로서 문서와 사법을 관장하는 군승, 군사를 주관하는 군위, 군수를 감찰하는 감어사를 두었다. 군현의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했고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는 관리로서 세습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임명권은 황제가 장악했다.[4]

군수와 군위를 구별한 것은 군현에서 행정, 사법, 군사를 담당한 관리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한 것 이다. 시황제는 이를 통해서 1차로 부패를 막고, 2차로 반란을 막는 효과를 기대했다. 한편 조정은 별도의 감사기관을 전국적으로 운용함으로서 지방행정기관을 감시했다. 이러한 황제의 명령은 군현제 덕분에 조정의 삼공구경(三公九卿)을 거쳐서 군, 현, 향, 정, 리 까지 직접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시황제의 가혹한 통치 때문에 시황제 사후 통일 진나라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전국시대의 여러 국가가 부활하였다.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이미 부활한 국가들과 더불어 각지에 18개의 왕국을 분봉하면서 다시 봉건제로 회귀하였다.하지만 전국시대때 그랬던 것처럼 촉한땅에서 독자적 통치권을 얻은 유방이 세력을 키워 다시 뒤엎는 상황이왔다.

이후 초한전쟁을 거쳐 중국을 재통일한 한나라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도읍과 가까운 요충지는 군현을 설치하여 직할지배하고, 도읍과 먼 지역에는 제후왕을 봉분하여 봉건제를 실시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한나라는 계속해서 제후국들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제후국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킨 오초칠국의 난이 진압되면서 제후국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고, 한무제 이후 봉건제는 유명무실화되어 군현제가 확립되었다.

제후국은 이후에도 중국의 역사 내내 존재했다. 그러나 제후는 실권을 가지지 못한 명예직에 가까웠다. 물론 제후들에게 별도의 식읍을 수여하기는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유재산에 가까웠지 독자적인 주권을 보장받지는 못했다. 실제 제후국의 통치는 황제가 임명한 지방관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사실상 군현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외에 중국과 인접한 주변국을 제후국으로 지정하고 그 통치자에게 형식상의 책봉을 행하는 조공 제도가 확립되었으나, 이는 실제 중국의 국내 통치 방식과는 별개의 형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조공 문서 참고.

우리가 잘 아는 한사군 역시도 중국의 군현제와 연관이 있다.

군현제는 위진남북조시대까지 이어졌다가 수나라가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이후 전국에 주현제를 실시했다. 한때 군현제로 되돌아간 적이 두 차례 있었으나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주현제가 완전히 정착했다. 군은 송나라 때까지 군명으로 남아있었으나 원나라를 기점으로 군명이 폐지되어 사라졌다.

2.2. 한국사

삼국시대 각 국가들은 중국과 교류하면서 중국의 군현제 체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똑같이 가져오지는 않고 삼국의 풍토에 맞게 변형해서 도입하였다. 백제는 웅진백제 시대에 도성을 고마라고 부르고 속읍을 담로라고 부르며 전국의 담로는 22개인데, 이는 중국의 군현제와 같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백제 멸망 당시에는 전국이 5부(部) 37군(郡) 2백 성(城)에 76만 호(戶)로 편제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라의 경우는 전국을 소경, 주, 군으로 편제했다.

한국사의 군현제 근간은 사실상 통일신라기에 성립되었다.[5] 다만 그렇다고 고구려백제의 행정제도가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리셋된 건 아니다. 통일 직전 삼국 영역 중 옛 백제 지역은 신라식 행정 체제로 편성되었으나, 기본 근간은 백제식 방군성제를 거진 그대로 따랐기 때문. 백제가 옛 침미다례를 경계해서 영암 대신 영암 세력의 분가인 나주 세력을 지원하다가, 나주 세력도 견제가 필요하다 싶어지니 광주를 주로 키웠는데, 통일신라도 정작 전남 일대를 지배하게 되자 백제와 똑같이 광주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 물론 이후 신라가 꾸준히 새로 설정, 적용한 체제를 개량한 게 옛 백제, 신라 지역의 경우 이후 시대로 쭉 직결된 건 맞다.

신라는 삼국시대엔 없었던 현 단위를 전국에 설치했다. 신설, 분화된 촌락을 호구와 토지를 기준으로 현이나 향과 부곡 등 군현제의 하부 단위로 편제시켜 민에 대한 직접 지배를 진전시켰다. 현 중에서 큰 거점 도시들을 군으로 하고, 특히 작은 고을들은 군이 관할하는 현으로 했는데 이렇게 따로 있는 현 이외에 군에 속한 현을 영현(領縣)이라 불렀다. 그리고 군과 현들의 상위에 있는 광역 행정단위로 전국에 9개의 주를 두었고 이 주들 각각의 중심도시 역시 주로 이름붙였다. 여기에 별개로 지방의 거점 도시 5곳을 작은 수도라는 소경으로 두어서 9주 5소경을 두었다. 신라의 행정구역 체계는 주와 군이 중심이기 때문에 주군제라고도 부른다.

태봉궁예는 통일신라의 제도를 개량하고 자신이 획득한 영토에서 통일신라보다 좀 더 촘촘하게 군현을 설치했다. 이후 고려는 궁예 때 신라의 제도를 개편한 것이 오히려 혼란을 초래했다고 하여 초기엔 신라의 군현제를 수용했고 중앙 정부 조직도 신라식으로 되돌렸다가, 오히려 그게 불편하다고 여겨졌는지 몇 년 못가서 다시 궁예식으로 되돌아갔다.[6] 초기에는 신라의 제도에서 약간의 변화만 있었다가 성종 때 중국 군현제와 동일한 형태로 개편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곧 취소되었고, 현종 때인 1018년 전면 개편하여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과 파견되지 않은 속현으로 전국을 구분하였다. 주 아래에 군과 현이란 두 종류만 있었던 신라 때보다 종류가 많아져 도 아래에 경, 목, 부, 도호부 등 다양한 단위가 등장했다.

[1] 춘추시대의 현은 변경을 방위하는 군사 거점의 성격이 강했다.[2] 진나라의 개혁가 상앙은 31개 현을 설치해 준현제적 지배를 확립했다.[3] 이후 40여 개 군으로 증설했다.[4]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면서 일정 기간마다 교체가되고 세습도 되지않으니 특정 지역의 관리는 독자적 세력을 키울 수가 없다. 봉건제 시절 특정 지역을 지배하면서 군주 노릇하던 제후의 위치를 일개 월급쟁이 관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5]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2002, p. 27[6] 사실 궁예의 개편이란 것도 주로 신라 제도를 형편에 맞게 개량한 것이라 큰 틀에선 신라 제도가 맞긴 했지만. 훗날 고려가 주로 참조하기 시작한 당나라 제도의 영향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