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기원전 207년 음력 11월[1] 현 중국 허난성 뤄양시 신안현에서 항우가 자행한 대규모 포로 학살. '신안의 갱'이라고도 한다. 문헌상 무려 20만이나 되는 비무장 포로들이 야밤에 저항도 못 해보고 습격으로 파묻혔다.이 학살로 인해 초한전쟁의 결말이 정해졌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실책으로, 장평대전 당시 진나라(秦)의 백기가 자행한 학살과 함께 고대 중국에서 전쟁포로에게 저지른 전대미문의 학살 사례로 손꼽힌다.[2] 게다가 뒤에 언급되겠지만 사실 학살은 신안의 진나라군에 한해서만 자행된 것도 아니었다.
2. 전개
2.1. 진나라의 몰락과 장한의 항복
거록대전 |
그러한 여러 부흥군 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은 단연 항량이었다. 진나라에게 멸망한 초(楚) 최후의 명장 항연의 아들이었던 항량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기반을 쌓아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으며, 초회왕을 옹립하여 망국의 한을 갚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한과의 싸움에서 결국 전사하고 말았으며,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항량의 조카로 엄청난 용력을 가진 젊은이, 항우가 되었다.
송의(宋義)를 살해하고 군권을 모조리 손아귀에 쥔[4] 항우는 이후 북상을 감행, 조나라(趙) 구원전에 참여하였다. 당시 장한은 수하의 장수 왕리를 파견하여 조나라를 압박하던 참이었는데, 항우는 이 거록대전에서 실로 초인과도 같은 용력을 떨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 인해 장초 멸망 후 여러 제후들에게 가해졌던 장한의 엄청난 압력은 삽시간에 걷히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감한 지경에 처해진 건 장한이었다. 장한은 극원(棘原)[5]에 진을 치고 항우와 대치 상태를 이루었으나, 형세가 그리 좋지 않아 퇴각하거나 하다못해 추가 보급이라도 원했지만 당시 황제였던 무능한 군주 호해(胡亥)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장한을 여러 번 꾸짖기만 하였다. 조고의 사탕발림으로 인해 장한이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줄 알고 있었던 호해에게 퇴각이나 추가 보급 같은 이야기는 매우 뜬금없었던 것. 답답한 장한은 현재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부하인 사마흔을 보내 일의 자초지종을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사악한 간신 조고가 장악한 지 오래였는데, 조고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난리가 호해의 귀에 들어가는 일을 막고, 그저 호해가 먹고 놀며 즐기는 일에만 정신이 팔리게 하였다. 그래야 부재 중인 황제를 대신해서 자신이 전권을 부릴 수 있기 때문.[6] 만약 장한이 승리할 경우 이세 황제가 자신을 쫓아내고 장한을 그 자리에 앉힐까봐 두려웠던 데다, 이때 이미 유방이 무관의 지척까지 다가온 상황이라 조고는 진나라에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있어서 장한이 항복한 바로 다음 달에 자기 손으로 호해를 죽이고 진나라를 유방에게 팔아치운 뒤 조나라로 떠나고자 할 정도였으니[7] 장한에겐 더 이상 용무가 없었던 것이다. 사마흔은 함양에 도착하여 3일간 기다렸으나 답변이 없자 불안감을 느끼고 곧바로 도망쳤는데, 일부러 길을 다른 곳으로 돌아서 도망쳤다. 실제로 조고는 사마흔을 잡으려고 했으나, 결국은 잡지 못했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사마흔은 장한에게 충고했다.
조고가 조정 안에서 정사를 독단하고 있어,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반군과 싸워 이긴다면 조고는 우리의 공을 시기할 것이고, 이기지 못한다면 그 책임으로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한편, 조나라의 진여 역시 장한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진나라의 명장 백기는 남정하여 언(鄢)과 영(郢)을 함락시켜 초나라를 동쪽으로 내쫓았으며, 북정하여 장평에서 조나라 대장 조괄을 죽이고 그 군사 40여만을 구덩이에 묻었소.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고, 땅을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했으나 결국은 진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되었소. 몽염은 장군이 되어 북쪽의 융인(戎人)들을 몰아내고 유중(楡中)의 수천 리 땅을 넓혀 불세출의 큰공을 세웠으나 그 역시 양주(陽周)에서 참수되었소. 그 이유는 진나라에는 공을 세운 사람이 너무 많아 그들에게 모두 봉지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을 이용하여 주살했기 때문이오.
장군이 진나라의 대장이 된 지 3년 동안, 수하의 군사 수십 만을 잃었으나 제후들은 서로 규합하여 그 군사들은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소. 오랫동안 이세의 눈과 귀를 막으며 아첨을 일삼았으나, 나라의 정세가 위급하게 되어 이세황제로부터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조고는 장군이 오랫동안 안전만을 고려하여 수비로 일관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살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 장군을 대신하여 이세로부터의 화를 면하려 하고 있소.
지금 장군이 밖에 나와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는 동안 조정내부와 틈이 벌어져 비록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고 또한 공을 세우지 못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장차 하늘이 진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있는 사람이나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소.
오늘 장군이 안으로는 직간을 할 수 없고, 밖으로는 나라에서 버림받은 장수가 되어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소? 장군은 어찌하여 병사들의 방향을 바꿔 제후들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나누어 왕이 되어 남면하면서 고(孤)를 칭하지 않으려고 하시오?
장군 자신은 형구(刑具)에 엎드려 요참형을 당하고 가족들은 주륙을 당하는 것과 어찌 견줄 수 있단 말이오? ─ 『사기』 「항우본기」 中
장군이 진나라의 대장이 된 지 3년 동안, 수하의 군사 수십 만을 잃었으나 제후들은 서로 규합하여 그 군사들은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소. 오랫동안 이세의 눈과 귀를 막으며 아첨을 일삼았으나, 나라의 정세가 위급하게 되어 이세황제로부터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조고는 장군이 오랫동안 안전만을 고려하여 수비로 일관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살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 장군을 대신하여 이세로부터의 화를 면하려 하고 있소.
지금 장군이 밖에 나와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는 동안 조정내부와 틈이 벌어져 비록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고 또한 공을 세우지 못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장차 하늘이 진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있는 사람이나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소.
오늘 장군이 안으로는 직간을 할 수 없고, 밖으로는 나라에서 버림받은 장수가 되어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소? 장군은 어찌하여 병사들의 방향을 바꿔 제후들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나누어 왕이 되어 남면하면서 고(孤)를 칭하지 않으려고 하시오?
장군 자신은 형구(刑具)에 엎드려 요참형을 당하고 가족들은 주륙을 당하는 것과 어찌 견줄 수 있단 말이오? ─ 『사기』 「항우본기」 中
장한은 처음에는 이러한 제안들을 의심스럽게 여겨, 시성이라는 인물을 사자로 보내 항우와 협상을 했지만 이루어지진 않았다. 이에 몇차례 교전이 벌어졌고, 항우는 진나라 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장한은 다시 항복 의사를 밝혔고, 마침 군량이 떨어져가던 항우는 이를 승낙하였다.
장한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항우[8] |
이에 장한과 항우는 은허(殷墟)[9]에서 직접 만나 항복에 관한 의식을 치렀다. 이 자리에서 장한은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왈칵 눈물까지 흘리면서 조고의 일을 이야기 하였고, 항우는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해서 진나라를 향해 진격하게 하였다. 이렇게 항우와 장한 두 명의 걸물, 그리고 초나라와 진나라의 대결은 좋게 끝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진짜 사후처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2.2. 사망 플래그
앞서 진나라는 엄격한 법률로 여러 사람들을 대단히 못살게 굴었고, 당시 진나라에 대항하던 제후군의 병사들은 이러한 압제에 오랫동안 억눌려서 지내고 있었다. 또한 항우가 이끌던 초나라 병사들 중에는 여산에서 벌어지는 공사에 끌려가서 개고생을 했거나, 멀고 먼 국경까지 끌려가 춥고 서러움을 견디며 수비병으로 지내거나 만리장성 공사에서 혹독한 대우를 받다가 가족이 굶어 죽었다는 걸 알고 눈이 뒤집혀 탈주하여 부흥군에 합류한 이가 많았다. 그런 병사들이 비록 투항병이라지만 진나라 병사들에게 좋은 심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항복한 총사령관인 장한은 왕에 임명되고 사마흔 역시 상장군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던 상황으로 보면 당시 진나라 항복군은 일반적인 포로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후군의 병사들은 이러한 진나라 병사들을 마치 포로나 노예처럼 대하면서 수많은 모욕을 주었다. 진나라 병사들은 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수치와 부끄러움보다도 '이러다가 정말 우리 죽는 것 아니야?' 라는 불안감이었다. 그 때문에 진나라 병사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렇게 수군거렸다.
장한 장군 등이 우리를 속여서 제후군에게 항복을 했다. 오늘 우리가 진군을 파하고 관중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제후들은 우리들을 그들의 노예로 삼아 동쪽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부모, 처자는 진나라로부터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관중은 유방에게 점거당하고 진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지만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깜빡했는지 유방이 항우 쪽에 별다른 연통을 보내질 않았기 때문에 제후군 측은 여전히 진나라의 수비군과 싸워서 무찔러야 관중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 초조한 분위기는 결국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이런 불온한 움직임은 곧 여러 장수들에게 포착되었고 소식은 결국 위로 올라가서 항우에게 전해졌는데, 항우는 경포(黥布)와 포장군(蒲將軍)을 불러 대응 방법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장한, 사마흔, 동예를 제외한 모든 포로를 죽이는 것이었다.
여전히 수가 많은 진나라 항졸들이 아직도 마음속으로 우리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관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우리들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일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장한, 장사(長史)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 등 세 사람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야 되겠다.
그리고 진나라 항졸들에게 약속된 마지막 황혼이 지기 시작했다.2.3. 시작은 신안대학살이나 끝은 함양대학살이라
그래서 초군은 야밤에 진나라의 (항복한) 병졸들을 습격하여 20여 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신안성(新安城) 남쪽에 묻어 버렸다.[10] ─ 『사기』 「항우본기」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다가 신안(新安)에 당도하자 경포를 시켜 깊은 밤을 이용하여 (장한이 데리고 항복한) 진나라 군졸 20여만 명을 습격하고 묻어 버렸다. ─ 『사기』 「경포열전」
학살당하는 진나라군 |
전한시대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 일을 간략하게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는지라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는데, 경포열전에서의 기록을 보면 항우의 명령을 받고 일을 직접 시행한 사람은 경포로 보인다. 항우본기, 경포열전에서는 야밤을 틈타 기습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장평대전의 학살을 비롯해 대학살을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인지 곡필인지 너무 잔혹해서 쓰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당시 학살의 이유에 대해 항우 본인의 언급은 '복종하지 않는다.'였지만 이미 그 이전 대치 상황부터 군량이 부족하다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군량 문제가 큰 것 같다. 이미 거록대전 때 송의가 진나라와의 싸움을 한 달이나 지체했고 항우가 거록대전 당시 배수진을 치는 과정에서 군량을 대부분 없애버렸다. 또한 항우의 숙부인 항량을 살해한 진나라 군대의 총책임자 또한 장한이었기에 그의 목숨만 보전해주는 대신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20만의 병력을 몰살하는 것으로 복수극을 저질렀다.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상장군 자리를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초나라에서도 제대로 지원해줄 리 없었다.[11] 거기다 초의제가 '관중을 가장 먼저 함락시킨 자를 관중왕으로 삼겠다'는 약속 때문에 유방이 앞서나간 상황에서 시간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주위의 성을 쳐서 식량을 빼앗거나 오창을 차지해 그곳의 곡식을 먹으면서 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다고 좋은 선택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유방은 적진인 함양에 들어가면서 약법삼장을 약속한 것만으로 관중에서 지지를 얻었으며, 포로가 된 진나라 병사들은 본래 아방궁에서 채찍 맞아가며 공사한 인부들에다 진나라에 징용당한 옛 6국 출신도 많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병사들의 불만을 설득해서 함양 공격에 앞장세울 수도 있고, 감당이 안된다면 그냥 포로들을 풀어줘서 고향에 돌려보낸다는 방법도 있기 때문.
다만 군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포로를 대량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순이므로 처음부터 계획된 배신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장한은 더더욱 비참해진다.[12][13]
대학살 이후 항우는 서쪽으로 전진했고 잠시 유방의 부대와 대치한 후에 홍문연(鴻門宴)이라는 해프닝을 겪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함양에 입성했고 진나라를 진왕 자영과 백성들을 처형하는 함양대학살로 멸망시켰다. 이미 같은 초나라였던 유방에게 앞서 항복했던 진왕 자영은 시황제/이세황제/조고가 저지른 만행들을 뒤집어쓰고 시해[14]되었으며, 아방궁에도 불을 질렀는데 불은 3개월이 지나서야 꺼졌다.[15] 항우는 아방궁에 있던 온갖 보물과 여자들을 거두어 들이고 다시 동쪽으로 물러났는데, 이 행동에 대해 항우의 신하인 한생(韓生)[16]이 충고했다.
관중은 험산과 큰 강에 의지할 수 있고, 땅은 비옥하여 패왕의 도성으로 삼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미 진나라의 궁전은 항우가 다 태워먹은 후라 함양은 허허벌판이었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항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귀하게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을 입고 밤중에 걷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자 한생은 어이가 없어 이렇게 비웃고 말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들은 관을 쓴 원숭이와 같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구나! (人言 楚人沐猴而冠, 果然)
이 말을 들은 항우는 화가 치밀어 한생을 가마솥에 삶아 죽여 버리고 기어코 동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17]
팽성은 삼국지의 서주에 해당하는 곳으로, 삼국지에서도 허구한 날 공격받고 털리기 일쑤였던 것에도 알 수 있듯 평화로운 시대라면 모를까 전란의 시대에서 군벌의 본거지로 삼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사방팔방이 탁 트인 평야라서 도시가 성장하기는 좋지만 전쟁에서 방어하기가 어렵기 때문. 규모가 큰 평야성일수록 방어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초한쟁패 당시 허구한 날 한나라 쪽에서 항우의 본거지에다 공격이 날아온 건 우연이 아니다.[18] 이후 유방도 비슷하게 공격받기 쉬운 낙양에 자리잡으려다 누경의 말을 듣고 좀 더 안정적인 장안에 자리를 잡았다.
함양을 불태우는 항우 |
2.4. 초나라군의 잔혹성과 그 원인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이 대학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항우에게 '학살은 안된다.' 라며 말리는 측근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금의환향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 고사마저 진나라인을 학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항우에게 한 조언이 아니다. 진나라인을 실컷 학살하고 나서 폐허가 된 함양을 버리고 떠나는 항우를 만류하면서 나온 고사다.물론 항우가 중국사에서 손 꼽을만한 잔혹한 학살자이기는 하나 항우의 측근들, 심지어 머리가 그나마 잘 돌아간다는 평을 들었던 범증마저 신안대학살과 그 이후 함양에서의 학살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항우가 별 다른 내부의 잡음 없이 순조롭게 신안대학살, 함양 입성 후 학살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항우의 측근들과 휘하의 병사들에게 진나라에게 당한만큼 갚아주자는 심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고 볼 수 있다.
전국시대 당시 진나라의 학살도 항우의 학살 못지않게 잔혹하였는데, 항우와 달리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는 평을 듣는 백기마저 후대의 하안에게 '백기론'이라는 저서로 비난 받았을정도다. 저서의 내용은 '이렇게 학살을 하면 도대체 앞으로 누가 항복하냐? 진나라가 통일을 하고도 빠르게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는 내용으로 이는 항우가 제나라 정벌때 들었던 말과 정확히 똑같다. 이러한 평과 사기의 기록을 미루어보아[19] 당시 항우와 그를 따르던 자들이 진나라에 가진 복수심은 상상을 초월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항우의 신안대학살이 당시에도 통쾌한 복수만으로 여겨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유방을 비롯한 항우와 조금 거리를 둔 자들은 이 학살에 경악하여 항우를 극렬히 비판했다. 게다가 상술하였듯이 신안대학살에서 진나라인만 학살 당한 것도 아니었고... 시간이 흘러 초한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그나마 복수의 대상이라 여겨진 진나라가 아닌 다른 국가의 포로와 민간인들에게도 학살로 일관한 항우는 완전히 민심을 잃어버려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결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적어도 항우의 곁에 있던 측근들과 휘하의 초나라 병사들은 진나라인을 학살하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진나라가 다른 나라에 엄청난 원한을 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관중에 남을 것을 청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초나라 사람을 두고 원숭이 같다고 한 한생을 다시 보면 그 원숭이같은 초나라와 손잡을만큼 진나라 타도에 대한 갈망이 국가 간 감정보다 더 컸다는 걸 의미한다.
3. 영향
진나라의 항복한 군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에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그 장수들을 왕으로 봉했으니 그 죄가 여섯째다!
사기 고조 본기. 광무 대치 당시 유방이 항우의 열가지 만행을 비난할 때 했던 발언.
사기 고조 본기. 광무 대치 당시 유방이 항우의 열가지 만행을 비난할 때 했던 발언.
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만이 목숨을 건짐으로 해서 진나라의 부형[20]들은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오늘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三秦)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사기 회음후 열전. 한신이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항우를 이길 수 있는 여건들을 설명할 때 했던 발언.
사기 회음후 열전. 한신이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항우를 이길 수 있는 여건들을 설명할 때 했던 발언.
보통 항우의 학살을 이야기하면 진나라군 20만을 학살한 이야기를 주로 언급한다. 가장 많은 사람이 학살됐고 명분도 가장 없었던 것이 바로 이 학살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죽하면 한신이 나중에 이걸 거론하면서 항우와의 대결에서의 승리를 확신했겠는가. 심지어 이러한 학살은 항우에게 처음이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항우의 학살이 고대의 전쟁사에서 유독 악질적인 행위로 평가받는 이유는 항우는 적군이나 포로를 상대할 때보다도 무력화된 민간인에게 이유없이 더 악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항우는 신안대학살 외에도 이미 학살 전력이 여러 번 있었다. 항량이 살아있던 시절 항우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이라는 곳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쉬울 것 같았던 싸움은 성안 사람들이 힘을 모아 싸움으로서 의외로 어렵게 전개되었는데, 기어코 성을 함락시킨 항우는 성 내의 모든 사람들을 구덩이에 파묻고 죽여 버렸다. 그리고 이후 항보 전투에서 장한을 격파한 후 추격하는 과정에서 성양을 다시 몰살시켜버렸다. 이러다보니 초회왕 측은 '항우가 지나가는 곳마다 남아나는 사람이 없다'고 치를 떨었고, 진나라 내지에까지 소문이 쫙 퍼져서 유방이 진나라 정벌 도중 만난 완성 지역의 태수는 '초나라 놈들은 항복해도 다 파묻어 죽인다고 들었다.'라면서 유방이 안전을 약속하기 전까지는 결사항전하려다 차라리 자살하려고 했다. 항복하든 저항하든 모조리 죽이고 본다면 당연히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항우는 이 전대미문의 포로학살을 벌인 후에 함양에 입성한 후에도 학살을 자행했고 이후에도 초한쟁패를 치르면서 여러차례 학살을 저질렀다. 특히 함양의 경우엔 얼마나 집요하게 뒤집었는지 바로 다음해에 대기근이 터져서 쌀 한가마니에 무려 1만전이 넘어갔고, 먹을 게 없어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뜯어먹는 아비규환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후 신안에서의 학살이 있던 후에 제나라를 공격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나라의 전영(田嬰)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에서 항우는 항복한 전영의 병사들을 모조리 파묻어 생매장하고 점령지의 제나라인들을 눈에 띄는 족족 몰살시켰다. 이러한 면으로 볼 때 신안에서의 대학살은 급작스러운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항우가 밥먹듯이 자행하던 만행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다못해 포로만 학살했다면 무장 병력에 대한 처리 문제와 식량 부족이라는 핑계라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점령지의 민간인을 이렇게 집요하게 죽인 것에는 도저히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시간과 수고를 더 들여서 얻는 거라곤 납세자와 세금이 줄어드는 손해뿐이다.
무엇보다 장한이 부대를 일으켰을 때의 주력 병사들은 여산에서 일하던 죄수들이었다. 여기서 죄수들은 말이 죄수이지 실제로는 징병된 노동자들로 주로 돈이 없어 세금을 제대로 못 냈다던가, 여건이 안되어 만리장성 노역에 제때 못 왔다던가 같은 이유로 온 경범죄자 내지는 무고한 자들이 태반이었다. 사실 근대 시기인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범죄가 중한 자들은 무조건 사형이었고 특히 진나라 법은 당시 기준으로도 사형을 남발했다는 걸 생각하면 여산에서 노역하던 자들의 대다수가 경범죄자 내지는 누명 쓴 사람들이라는 것은 뻔했다. 거기에 학살된 인원 중에는 진나라 출신이 아닌 구 초나라 출신을 포함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장한은 진승과 오광의 난을 진압하고자 여산의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을 도와서 전공을 올리면 노역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말하며 징병했다.
당시 항우 밑에 있던 영포도 여산에서 노역을 하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모아 무리를 지어 세력을 만든 자고 유방도 여산으로 노역자들을 호송하다 중간에 튀어서 세력을 만든 자다. 반대로 말하면 전국 6국에서 모인 언럭키 유방, 영포들이 당시 진나라 군대에 상당수 있었으며 따라서 이를 잘만 이용하였다면, 항우는 이 반감을 이용해서 초나라에 대한 민심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었다. 이는 진나라 본토의 민심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죄수 출신 진병들이 다른 열국 출신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진나라 조정의 군대였으며 진나라 본토 출신의 병사도 적지 않았다. 이런 조정의 군대가 초나라에게 항복하고 제대로 초나라 군대로 대접받고 당당한 '해방군'으로 싸운다고 정해보자. 당연히 진나라 본토 사람들은 진나라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상당히 상실하고 항우와 초나라에게 지지를 표했을 것이다. 아래에 언급하듯이 당장 유방이 이렇게 해서 민심을 확보했다.
그런데 문제는 항우가 여기서 학살이라는 최악의 방법을 저질러버렸던 것이다. 이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봐도 지극히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윤리적으로도 용납받지 못할 짓이었다. 아무리 고대의 윤리관과 인권 개념이 현대와 다르다고는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륙내는 짓은 당대의 윤리관에도 도를 한참 넘었다. 장평대전에서 백기가 벌인 학살이 두고두고 비난받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21][22] 상술했듯 유방은 광무 대치 당시 항우의 학살을 죄악으로 규정하며 규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의했을 정도다.
이러한 학살로 항우가 얻은 이득은 당장의 수고로움을 던 정도밖에 없었고, 장기적으로는 항우에게 큰 악영향을 끼친다.
우선 진나라는 망국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과거 열국을 호령하던 생산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전국칠웅이 쟁패할 당시 진나라의 생산력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압도했고 수도가 갈려나갔어도 진나라 전역을 놓고 보면 전성기 시절의 힘은 남아있었다. 만일 항우가 진나라 사람들을 잘 대했다면 진의 영성 조씨가 쫓겨난 자리를 대신 차지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문제는 신안에서 저질러진 도살 행위가 널리 알려지면서 진나라 사람들은 크게 분노하며 항우에게 모조리 등을 돌려버렸다. 특히 항우는 함양에서 만행을 부린 뒤 진왕 자영과 영성 조씨들을 학살했다. 이러니 진나라 백성들이 항우에게 품었을 분노가 더욱 커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유방이라는 대안까지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항우는 관중을 포기하고 팽성으로 돌아갔으며 구 진나라를 삼진으로 나누어 사마흔, 동예, 장한에게 분봉시켜 관중이 항우에게 복종할 이유도 없어졌다.
항우가 한나라 출신 한생의 말대로 관중을 나라의 본거지로 잡고 직접 통치했다면 압제를 하든 관용을 베풀든 가능했다. 관중에 머물지 않기로 한 이상 진을 그대로 뒀다가는 바로 들고일어날 게 뻔하니 힘을 약화시키고자 삼진으로 나눈 것은 이해가 가능하지만 애초부터 학살로 대진관계를 파탄내지 않았다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진나라 백성들은 이세황제와 환관 조고에 대한 원한은 컸을지언정 오백 년 동안 진 땅을 통치한 영성 조씨 일족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했다. 그런데 삼진을 통치하는 자는 영성 조씨가 아니라 진 장수였다 항우에게 항복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 사마흔, 동예, 장한이었다. 거기다 포로학살 때문에 이들의 부하들도 모두 잃은 상황이었다. 관중 사람들은 삼진의 제후들을 매국노로 인식했다.
피지배민들의 분노가 정점인 상황에서 지배자가 이를 억누를 힘도 대처도 없다면 결과는 보나마나다. 홍문연 사건에서 8개월, 한고조 세력이 한중으로 들어간 지 겨우 4개월 만에 한고조는 한중에서 나와 삼진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이를 막을 삼진의 군대는 모두 신안에 묻혔으니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저항한 게 장한이었지만 그를 따르고자 하는 병사가 없으니 결국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제나라에서의 학살도 마찬가지였다. 항우는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들을 생매장하고 힘없는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모조리 묶어 포로로 만들어 버리고, 많은 고을에서 학살을 자행했는데 제나라 사람들은 항우에게 겁먹은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초에 반기를 들면서 결사항전하고 전횡(田橫)이 수만 군세를 일으켰다. 결국 항우가 제나라에서 시간을 잡아먹는 사이 한고조가 팽성을 털어버렸고, 팽성대전에서 한군을 격파해 기를 꺾고 성을 되찾아 일단 피해를 최소화했으나, 한군이 전투 때마다 무수히 죽어나가도 얼마 후 새로 편성된 한군이 항우를 죽이러 다시 쳐들어오는 일이 반복된 끝에 결국 항우는 모든 병력을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항우가 저지르는 학살들은 게릴라를 뿌리뽑기는커녕 저항만 키웠다. 초한쟁패 후기 항우는 외황(外黃)을 공격하는데 쉽게 항복되지 않자 15살 이상은 모두 죽이려고 했는데 13살의 아이가 항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나운 팽월이 우리를 해칠 수 있기에, 외황(外黃)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 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황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항우는 외황의 주민들을 학살하지 않고 용서해주었는데, 이후 항우가 동쪽으로 진군하자 여러 성들이 항복했다. 즉, 항우가 학살을 일삼던 것은 항우가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하고자 했던 행위가 아니라, 그냥 정치고 뭐고 그런 거 몰랐던 것이다. 항우가 무언가 깨닫건 말건, 이미 때는 늦었다.
반면 한고조는 서초패왕과 대조되는 처신과 인식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도적떼들에 가까웠던 한 군대가 약탈과 유린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았는데, 장량이 한고조에게 고하자 한고조는 함양에 들어가는 것을 그만두고 인근에 머물렀다. 이외에도 세 가지 법만 남기고 모두 폐지한 간단한 법제를 실행하여[23] 가혹한 법에 지쳐있던 진 국민들을 배려하고 자영을 후히 대우해서 진 사람들의 민심을 손에 넣었다. 그나마 항우가 항복한 자영을 죽이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그를 포함하여 수많은 진나라 백성들을 죽인 건 물론이거니와 함양에서 진시황의 무덤까지 파헤치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니 진 사람들이 누구 편을 들지는 보나마나였다.
초한쟁패에서 한고조는 관중을 장악한 뒤 관중의 자원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팽성 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직후 병력이 모자라자 징집 대상에서 빠져야 할 어린아이와 노인들까지 병사로 징집하고 때마침 관중에 대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등 아수라장인 상태였음에도 관중은 별다른 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관중의 민심을 다잡은 소하의 공적도 크지만 항우에 대한 구 진나라 백성들의 증오심이 그만큼 대단하였고 때문에 항우의 적인 한고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고 볼 수 있다.[24]
항우의 학살은 여러 차례 만행으로 언급되고, 유방은 이걸로 항우를 매도했으며, 한신은 전략적 관점에서 한이 중원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삼진을 무너뜨릴 요소로 평가하는 등 당대에도 주목을 받았다. 도무지 옹호할 수 없는 학살이었던 것. 그러나 항우는 자기가 한 짓이 자기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지 전사할 때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 사기 항우 본기
즉, 나는 잘못 없고 그저 싸우기만 했는데, 지금 내가 망하게 된 것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하늘이 나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살 관련한 부분만 해도 그렇고, 그외에 항우의 여러 실책을 고려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말.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전혀 이해를 못했던 것이다. 항우가 패망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사마천을 비롯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항우의 인식에 대해 이러한 평을 남겼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이에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사마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초가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하늘아!'라고 하였다니, 믿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대답하였다. "한은 여러 정책을 다하였고, 여러 정책은 여러 명의 힘을 다하게 하였지만, 초는 여러 정책을 싫어하고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오. 다른 사람을 다하게 하는 사람은 이기고, 스스로 다하는 사람은 지는 것이오." 그러니, 하늘이 무슨 까닭이겠소. ─ 양웅[25]
4. 매체
드라마 초한전기에도 42화에 신안학살이 나온다.장한이 항복한 이후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는데, 20만명이나 불어난지라 진격속도가 늦어진 데다, 원래 군량도 부족한데 숫자만 늘어난지라 항우 입장에선 이래저래 골치아픈 상황이었다. 게다가 진나라 병사들에겐 형편없는 식량이 지급되자 진나라 병사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가 몇몇 병사들이 난동을 피우기도 한다. 신안에 도달할 때쯤 항우는 진나라 병사들의 배급을 초나라 병사들 것과 같게 지급하라고 지시하나, 이미 병사들의 불만은 끝에 도달했고, 결국 몇 천 명의 진나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용저가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개박살나고 용저 혼자 간신히 살아남는다. 물론 반란은 곧 진압된다.
이 사건 직후 항우는 부하 장수들을 불러놓고 진나라 병사들을 어찌 처리할지 의논하는데, 항우가 다 죽이자고 하자 범증도 별 수가 없었는지 항우의 의견에 따른다. 결국 병사들을 골짜기에 몰아넣은 뒤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병사들은 찔러 죽이다가 막판에는 기름을 뿌려서 다 태워버린다. 항우는 이 광경을 보면서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죽은 초나라 장병들의 명복을 비며 어쩔 수 없이 죽인 거라고 정신승리를 시전한다. 진짜 싸이코패스다.
이전에 나온 양성 학살에서 항우는 '망국의 한'이라는 미명 아래 진나라 사람들을 학살한 것을 되려 자랑스러워하다 못해 스스로를 합리화하기까지 해 숙부에게 손찌검까지 당했으나 신안대학살에선 범증이 '저들을 보십시오. 님이 행동에 따라 부하가 될 수도, 적이 될 수도 있음. 천하가 그런 거임'이라는 말에 깨달은 바가 있는지 상당히 그들을 배려했으나 일이 틀어지자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으로 묘사했다. 이후 43화 초반부까지 우희의 품 속에서 흐느끼는 항우가 나오는 등 항우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묘사했으며, 그 부하들 역시 충격을 심하게 받았는지, 원래는 경계근무를 서야 하는데 그런 거 쌩까고 술을 퍼마시는 한신에게 종리매가 아무 말도 못하는 등 초나라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상반된 묘사를 보여준다. 실제 역사랑은 달리 항우에게 상당한 옹호를 해주고 있다.
다만 학살이 시작되기 직전에 진나라 병사들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조카와 같이 진나라 군대로 종군했던 삼촌이 화살맞고 죽어가는 조카를 살려보려고 애쓰는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 그 외에도 구덩이 안에 몰린 병사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찌됐건 잔인한 학살극이란 사실도 빠트리진 않았다.
문정후 초한지에서도 나오는데, 전개 순서가 조금 바뀌어서 항우의 찌질함이 더욱 강조된다.
여기서는 장한 이하 진나라 군대를 흡수한 뒤 팽성에서 군사를 정비하고서 진나라로의 진격을 시작했기 때문에 식량 문제는 없었다. 진나라 투항병들이 자신들을 화살받이로 내세우는 항우의 군대가 싫다며 차라리 유방 휘하에 있는 게 낫다고 궁시렁 대는 것을 엿들은 항우가 격노해서 영포에게 일을 명령한 것으로 나온다. 그것도 범증 앞에서.
몰살 전개도 꽤 악랄하게 나온다. 진나라 20만 투항병들을 모조리 시켜서 거대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거의 완성된 구덩이 속에 있던 진나라 투항병들을 초나라 군사들이 모조리 죽이고 그대로 흙으로 메워버렸다.
경악하는 사마흔과 동예, 그리고 장한한테 일이 그렇게 됐으니 그대들은 새로운 군사를 맡아 임무를 다해 주시오.라며 변명조차 안하는 항우가 압권.
5. 여담
비슷한 사건으로는 조조의 관도대전 이후 포로 생매장이 있다. 이것 때문에 하북에서 조조의 민심이 안좋아져서 하북 백성들이 원가를 따라 도망쳤고 결국 조조는 하북 민심을 살리기 위해 세금을 내려서 떨어진 민심을 회복시키려고 했다.[1] 출처 사기집해[2] 그나마 백기는 45만에 달하는 전쟁포로가 여러모로 애물단지였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진과의 전쟁을 준비할 인원으로 고스란히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학살을 저지른 것이며, 이는 진나라 몰락의 단초가 됐을지언정 단기적으로는 전략적 성공이었다. 그러나 항우의 신안대학살은 민심을 유방에게 고스란히 넘길 뿐인, 손해만 보는 단순한 분풀이에 불과했다.[3] 초한대전 후 2번째로 통일에 성공한 한나라는 인력과 재물이 풍부한 관중을 정부로, 파촉을 배후보급기지로 삼고, 방어와 공격시점 선택에 유리한 함곡관을 세워 패권을 유지한 건 진나라와 같으나, 무리하게 관료제를 도입하다 역량을 소모하고 반란이 일어나 멸망한 진의 사례를 참고해 진, 파촉, 삼진 지역을 직할로 두고 나머지 연, 초, 오월은 분봉하는 군국제를 시행하고 이후 여유가 생길 때 점진적으로 직할령에 통합한다.[4] 원래 초나라는 사실상 항량이 세운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항량이 자만하다 전사하고 나서는 초회왕의 친위세력이었던 구 초나라 귀족들이 헤게모니를 잡았고 그 중에서도 이들이 내세운 이들이 바로 송의였다. 송의는 항량이 잇따른 승리로 오만해져서 판단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항량이 있던 곳에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는데 그때 항량이 전사했으므로 왕명에 따라 초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항우를 사실상 핍박하고 움직이는 것을 막았으며 정작 송의 자신은 자기 아들을 동맹국인 제나라로 보낼 때 화려한 잔치를 발였는데 이에 대해 초군 병사들은 눈꼴시게 생각했다. 이들은 원래 항량을 보고 온 자들이라서 전쟁에는 나가지도 않으면서 거들먹거리는 구 초나라 귀족들보다는 같이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항량의 조카이기도 한 항우를 지지했고 항우는 이들을 데리고 송의를 쳐 죽였다.[5] 지금의 허베이성 핑샹현(平鄕縣) 남쪽[6] 이미 일전의 이사는 일의 전말을 고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고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오히려 살해당하였다.[7] 가장 중요한 유방에게 무시당해서 무산되긴 했다. 먼저 접촉한 쪽이 유방이라는 기록도 보면 유방 혹은 장량이 조고를 낚았을 수도 있다.[8] 이문열의 초한지에 나오는 삽화다.[9] 옛 상나라의 도읍지가 있던 곳이다.[10] 다만 20만이나 묻힐 크기의 구덩이를 하룻밤 사이에, 그것도 기습하면서 팔 순 없으므로 '구덩이를 파서 죽였다'는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11] 애시당초 송의, 유방이 다 항우를 견제하기 위해 초의제가 내세운 인물들이다.[12] 하지만 항우는 생애 대부분을 즉흥적으로 행동했지 그런 식으로 계획을 짜고 미래를 읽으면서 움직이는 인간은 아니었다. 당장 초인목후이관의 고사가 왜 나왔는지 생각해보자.[13] 항복 당시 장한 측의 군량으로 해결되었다가 다시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다.[14] 이는 실수였는데 자영은 진나라를 망국까지 타락시킨 간신인 조고를 처치하고 왕위에 올랐던지라 대중의 지지도가 괜찮은 편이었다.[15] 소설 초한지에서는 항우가 진나라의 상징이자 시황제의 타락한 이유로 불로 태워 진나라의 천하는 무너졌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함이었다고 언급하는 작품도 있다.[16] 이름이 아니라 한나라 출신 선비라는 뜻이다.[17] 초한전기에선 대국을 볼 줄 모르고 금의환향에만 정신이 팔린 항우에게 실망한 한생에게 항우가 역정을 내며 팽형을 내리자 "어차피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라고 말하고 항우를 비웃으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는다.[18] 반면 항우의 진격은 항상 성고, 형양에서 막혔는데 이 두 도시가 관중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므로 결코 우연이 아닌 것.[19] 항우의 학살이 너무나 잔혹하여 조금 묻히는 감이 있으나, 사기의 기록만 보아도 당시 진나라가 벌인 학살은 단기적인 성공을 거둔 것과는 별개로 잔혹함이 신안대학살에 뒤지지 않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악수가 되었지만. 또한 초나라는 초회왕은 납치당하고 경양왕 시절에는 백기의 침공으로 진나라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왕릉을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20] 이 시기의 병력은 농민이나 죄수 출신이며, 그것도 중죄인은 거의 다 사형이 원칙이라 노역에 종사하는 죄수는 대부분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었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런 사람을 20만이나, 그것도 정당한 이유도 없이 죽였으면 원한을 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 사실 진나라의 형법과 처벌 자체가 억울한 죄수들을 양산하는 체제에 가까웠다.[21] 조나라를 약화시킨다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고 진나라의 천하통일을 앞당기는데 큰 기여를 한 백기마저 후대의 중국인들에게 명장으로는 인정 받을지언정 크게 비판 받았다.[22] 심지어 백기 본인조차 조정의 명령으로 죽게 되었을 때 내가 왜 죽어야 하냐며 한탄하다가 자신이 조나라 사람들을 학살한 것을 기억하고 그럴 만했다고 후회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23] 살인하면 사형, 상해를 입히면 중죄, 절도범은 구금. 다만 이후 한 왕조를 건설한 뒤에는 이것만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하여 진나라 법을 다시 도입하였는데, 그렇다고 FM대로 한 건 물론 아니고 너무 가혹한 처벌기준과 빡빡한 규정을 완화하여 사람들이 어지간해서는 지킬 수 있을만한 수준으로 고쳐서 시행했다.[24] 의외로 장한은 한고조의 삼진 정벌 당시 금방 무너지지 않고 팽성 전투는 물론 안읍 전투까지 일어나고 무려 9개월이 지날 때까지 폐구성에서 농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음에도, 관중 사람들은 그런 거 없이 장한을 외면하고 고제에게 호응했다.[25] 양웅은 한나라 시대의 인물로 당시에 박학하다고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이 평론은 양웅의 저서 법언(法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