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7 22:32:33

경엄

운대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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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신나라 시절2.2. 유수 휘하로2.3. 도적 토벌2.4. 팽총의 난2.5. 장보 토벌전2.6. 외효 정벌2.7. 은퇴

1. 개요

耿弇
(3 ~ 58)

양한교체기 시절 인물로, 후한의 개국공신. 자는 백소(伯昭). 옹주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 출신으로 상곡태수 경황(耿況)의 아들이다.

2. 생애

2.1. 신나라 시절

어릴 적부터 근면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학문을 익혔고, 삭주군[1]의 연솔(連率)[2]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관청 업무도 배웠다. 고대 중국에서 군(郡)을 다스리는 지방관은 그 지역의 군사적 업무도 함께 겸했기에, 연말마다 지방관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대규모 훈련을 시행하였다. 어린 경엄은 군위(郡尉)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기병들에게 기마술과 사격을 가르치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병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2.2. 유수 휘하로

경시 원년(23년), 왕망이 패망하고 경시제 유현이 낙양을 도읍으로 정권을 세웠는데, 유현은 사방으로 자신의 장수들을 파견하여 지역을 관할하게 하면서 툭하면 현령과 태수를 갈아치웠다. 아버지 경황은 왕망의 임명을 받은 지방관이라 매우 불안해하였다. 당시 21세인 경엄은 경시제에게 재물을 바쳐 지위를 공고히 함으로써 시간을 벌어보자며 아버지에게 조언하였다. 경황 또한 이에 동의하여 경엄에게 재물을 싣고 경시제에게로 가가 했다.

경엄이 남쪽으로 이동해 상곡군 송자현(宋子縣)에 이르렀을 때, 한단(邯鄲)에서 점쟁이 왕랑(王郞)이 성제의 아들 자여(子輿)라 자칭하며 거병하였다. 경엄을 수행하던 관리 손창(孫倉)과 위포(衛包)가 경엄에게 "유자여는 성제의 정통이거늘, 어째서 그에게 귀부하지 않고 멀리서 안정을 도모하려는 겁니까?"라 물었다. 이에 경엄이 검을 만지며 말했다.
자여는 부정한 도적이니 결국에는 투항해 포로가 될 것이오. 그러니 나는 장안으로 가서 나라를 받들고 돌아와, 어양(漁陽), 상곡의 병사들을 거느려서 태원(太原), 대군(代郡)으로 가겠소. 그리고 그 곳에서 수 십일이 걸려서라도 돌격기병대를 모집해 마른 나뭇가지를 꺾고 썩은 고기를 자르듯이 오합지졸을 무찌를 것이오. 공들의 거취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보기엔 멸족당할 날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이다.
손창과 위포는 경엄의 말을 무시하고 왕랑에게 투항하였다.

계속해서 장안으로 향하던 경엄은 경시제의 대사마 유수가 노노(盧奴)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말머리를 돌려 북으로 향했다. 마침내 유수를 만난 경엄은 그의 휘하로 들어가 문하리(門下吏)가 되었다. 경엄은 호군(護軍) 주우(朱祐)에게 자신이 상곡으로 돌아가서 군사를 일으켜 왕랑의 수도인 한단을 치겠다 하였다. 주우가 이를 유수에게 전하니, 유수가 웃으며 말했다.
어린 나이에 뜻 밖에도 큰 뜻을 품고 있구나!
유수는 이후로 여러 번 그를 불러 은혜를 더해 위로해주었다. 경엄은 유수에게 감복하여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윽고 유수 일행이 계(薊)에 이르렀을 때, 한단에서 온 왕랑군이 계에 도착했다는 소문을 들은 유수는 얼른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관속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경엄이 말했다.
오늘 우리 병사들이 남쪽에서 왔는데 다시 남쪽으로 돌아간다니 안될 말입니다. 어양태수 팽총은 공과 동향인이고 상곡태수는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두 군에서 1만 기병만 보내준다면 한단의 군사들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유수의 나머지 관속들은 모두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죽더라도 남쪽에 머리를 향하고 죽어야 하거늘, 어찌 북행하여 적의 포대기 속으로 들어가자는 말인가?
유수는 고민하다가 경엄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앞장서서 북쪽 길을 인도해보거라.
그렇게 회의 끝에 모두 북쪽으로 가자 합의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광양왕(廣陽王)의 아들 유접(劉接)이 유수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탐해 계성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버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난리에 경엄을 비롯한 관속들은 각자 흩어졌고 유수는 남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경시 2년(24년), 상곡군 창평(昌平)으로 도망쳐 아버지 경황을 만난 경엄은 유수에게 귀부하도록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경황은 구순(寇恂)을 어양태수 팽총에게 보내 같이 유수를 지원하자 하였다. 팽총의 수하인 오한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팽총을 설득한 덕에 팽총 또한 유수를 따르기로 하고 군사를 보냈다. 구순은 오한과 함께 팽총에게 받은 군사를 거느리고 경엄과 경단(景丹)이 이끄는 상곡군과 합세했다. 이윽고 정비를 마친 뒤, 남행하여 왕랑의 대장과 구경(九卿)과 교위(校尉) 이하 4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또, 관리의 권위를 상징하는 인수 125개, 부절 2개를 노획하고 3만여 명을 참하면서, 탁군(涿郡), 중산(中山), 거록(鉅鹿), 청하(淸河), 하한(河閒) 등 22개의 현을 평정시키고 유수가 있는 광아(廣阿)로 향했다.

이때 유수는 왕랑 세력과 한참 다투고 있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제3의 군대가 왕랑의 군사들을 쳐부수고 광아로 온다는 소식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이내 아군임을 확인한 유수는 매우 기뻐하며 경엄 등을 맞이하고는 말했다.
어양, 상곡의 사대부들과 함께 싸워 큰 공을 이루어주길 바라오
유수는 어양과 상곡의 장수들을 모두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다. 그리고 경황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흥의후(興義侯)에 봉하면서 휘하에 편장(偏將)과 비장(裨將)을 거느릴 수 있게 하였다. 경엄 등은 유수를 힘껏 도와 마침내 한단을 뽑고 왕랑을 처단하였다.

2.3. 도적 토벌

하북을 평정한 유수의 명성이 날마다 높아지자 경시제 유현의 의심은 깊어져 갔다. 유현은 하북에 자신의 측근을 심기 위해 대군태수 조영(趙永)을 장안으로 소환했으나, 경황은 조영을 만나 경시제에게 가지 말 것을 조언하며 그를 유수에게로 보냈다. 그러나 조영이 대군을 비운 사이 장엽(張曄)이 흉노오환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유수는 경엄의 동생 경서(耿舒)를 복호장군(復胡將軍)으로 삼아 대군을 치니, 경서는 장엽을 격파하고 대군을 탈환했다. 조영은 유수 덕에 다시 대군으로 돌아가 태수가 되었다. 이때 신나라 말기 일어났던 수많은 도적단 중 하나인 오교(五校)가 20만 무리를 거느리고 북진하여 상곡군을 노략질하자 경황과 경서가 연합해 이를 격파하였다.

더이상 유수가 위세를 떨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경시제 유현은 사신을 파견해 그를 소왕(蕭王)으로 임명하고, 하북의 병력을 해산한 뒤, 휘하 장수들과 함께 입조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묘증(苗曾)을 유주목(幽州牧), 위순(韋順)을 상곡태수, 채충(蔡充)을 어양태수에 임명해 유수가 다스리는 지방을 자신이 직접 관할하려 하였다. 당시 유수는 한단에서 왕랑이 세워둔 궁궐의 온명전(溫明殿)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경엄은 유수의 침상 앞까지 나아가 말했다.
작금에 경시제가 실정하여 군신들은 음란하고, 제장들은 경기(京機) 내에서 제멋대로 날뛰며, 왕공들은 수도를 휘저으며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천자의 명이 성문을 나서지 못해, 각 지역의 목과 태수들은 함부로 교체되어 백성들은 좇을 바를 알지 못하고, 사대부들은 감히 안심할 수 없습니다. 각지에서 도적들이 일어나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를 겁탈하고 다니니, 재물을 가진 이는 살아서 돌아다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백성들은 무척 괴로워하며 오히려 더욱 왕망을 그리워할 정도입니다. 또, 동마(銅馬), 적미(赤眉) 같은 도적들도 그 무리가 수십만에 달하지만, 경시제는 그들을 토벌하기는 커녕 오히려 패하고 다닙니다. 공께서는 남양에서 일어나 백만 대군을 격파하셨고, 지금 하북을 평정했으니 천부(天府)의 땅을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의로써 정벌하고 발호하여 뭇 사람들이 호응한다면, 천하는 격문을 띄우기만 해도 능히 평정할 수 있을 겁니다.

천하가 제일 중요하므로 유씨(劉氏)가 아닌 다른 성이 얻게 해서는 안됩니다. 서쪽에서 사자가 와 군대를 해산시키라 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절대 따르지 마시길 바랍니다. 현재 관리와 병사들이 많이 죽어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니, 이 엄(弇) 청하옵건대 유주로 돌아가 정병을 모으고 대계(大計)를 도모하시옵소서.
유수는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경엄을 대장군으로 삼고, 그와 오한(吳漢)을 유주로 보내 유주 산하 10군에서 병력을 징집하도록 하였다. 경엄은 상곡으로 가서 위순과 채충을 참수하고 오한은 묘증을 죽였다. 경엄과 오한은 유주에서 징집한 병력을 이끌고 유수를 도와 하북을 종횡무진하며, 동마, 고호(高湖), 적미, 청독(靑犢) 등 수많은 도적단을 격파했다. 이때마다 경엄은 항상 날랜 기병들을 거느리고 군의 선봉에 서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우래(尤來), 대창(大槍), 오번(五幡)의 도적단이 연합하여 하북을 노리자, 유수는 출격해 매 전투마다 승승장구 하면서 여세를 몰아 순수(順水) 근처까지 적을 압박하였다. 하지만 연이은 추격 끝에 사지에 몰린 도적들은 사력을 다해 저항하였고, 계속된 추격전에 지쳐있던 유수의 군사들은 마침내 대패하였다. 도적들은 이참에 유수를 사로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추격했으나 경엄은 유수의 곁을 호위하여 백발백중의 활 솜씨를 자랑하니, 적은 결국 유수를 사로잡지 못하였다. 유수는 범양(范陽)에 보루를 쌓아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다시 용성(容城), 소광양(小廣陽), 안차(安次)에서 도적들을 연달아 격파한 뒤, 계(薊)로 돌아왔다.

유수는 다시 경엄, 오한, 경단, 갑연(蓋延), 주우(朱祐), 비융(邳肜), 경순(耿純), 유식(劉植), 잠팽(岑彭), 채준(祭遵), 견담(堅鐔), 왕패(王覇), 진준(陳俊), 마무(馬武) 등 13장군들을 보내 로수(潞水) 동쪽까지 남은 도적들을 밀어붙였고, 평곡(平谷)에 이르러 두 번 전투를 벌여 1만 3천여 명을 처단하였다. 경엄 등은 우북평군(右北平郡)의 무종현(無終縣)과 토은현(土垠縣)까지 잔당을 추격하다가 돌아가니, 겨우 목숨을 구한 도적떼 잔당들은 흩어져 요서(遼西), 요동(遼東), 심지어는 오환(烏桓)이나 맥(貊)으로 숨어들었으나 그 지역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 소멸하였다.

2.4. 팽총의 난

건무 원년(25년), 유수가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칭제하였다. 경엄은 건위대장군에 임명되어 표기대장군 경단, 강노장군 진준과 함께 오창(敖倉)에서 염신(厭新)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건무 2년(26년), 광무제에 의해 호치후(好畤侯)에 봉해지고 호치, 미양(美陽) 두 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이때 하북 평정에 큰 도움을 줬던 어양태수 팽총이 상이 적음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면서, 똑같이 태수에 머물러 있는 경황에게도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같이 반란을 일으키자 꼬셨지만, 욕심이 없던 경황은 팽총의 사자가 오는 족족 모두 참수하고 반란 제의를 거절하였다.

건무 3년(27년), 연잠(延岑)이 무관(武關)에서 나와 광무제의 영역인 남양을 침노하여 몇 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양현(穰縣)에서 두홍(杜弘)이 그 무리를 이끌고 연잠에게 호응했다. 경엄은 6월에 양현에서 연잠과 두홍의 군대와 싸워 이들을 대파해 3천여 명을 참살했으며, 적군 5천 명을 생포하고 인수 3백 개를 빼앗았다. 두홍은 항복하고 연잠은 기병 몇 기만 대동한 채 동양(東陽)으로 급히 도주해, 남군에서 초여왕을 자칭하던 진풍(陳豊)과 연합하였다.

한편, 어양에서 난을 일으킨 팽총은 어느새 계를 함락하고 연왕(燕王)을 자칭해 북방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으며, 탁군에선 장풍(張豊)이 무상대장군을 자칭하여 팽총에게 호응하였다. 연잠을 무찌른 경엄은 광무제와 용릉(舂陵)을 순시하던 중, '상곡에서 병력을 충당해 어양의 팽총과 탁의 장풍(張豊)을 평정하고, 도적 부평(富平)과 획삭(獲索)을 멸하여 동쪽의 장보(張步)까지 쳐 제(齊) 땅을 얻겠다' 자청하였다. 광무제는 그 뜻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건무 4년(28년), 광무제의 조서를 받은 경엄은 수도에 남을만한 자신의 가족들이 없음을 알고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본래 장군은 출정 전 인질 목적으로 가족을 수도에 남겨두어야 했기에 경엄은 '일단 낙양에 돌아가 가족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상소하니, 광무제가 조서로 답했다.
장군의 집안은 모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고, 가는 곳마다 적을 물리쳐 그 공이 특출나거늘, 어찌 의심하여 나아가지 않고 다시 돌아오려 하는가? 이미 한충장군 왕상(王常)이 탁군에 주둔해 있으니, 그와 함께 적을 물리칠 방책이나 잘 짜보시오.
비록 광무제가 인질 없는 출정을 허락했다 한들, 경황 또한 아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경황은 경엄과 경서의 동생 경국(耿國)을 급히 낙양에 보내 입궁시켜 광무제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수도로 보내오자, 광무제는 흡족하여 경황을 유미후(隃麋侯)에 봉했다. 경엄은 비로소 나아가 왕상, 건의대장군 주우와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가는 길에 망도(望都), 고안(故安)에 있는 서산적(西山賊)의 10여 영(營)을 공격해 모두 파괴하였다.

동년 5월, 경엄의 군대는 먼저 와있던 정로장군 채준, 효기장군 유희(劉喜)의 군대와 합류하여 장풍을 참수하고 탁군을 탈환하였다. 경엄은 일전에 광무제에게 말한대로 동쪽으로 향했고, 채준과 유희(劉喜)는 탁군을 지키기 위해 낭향(良鄕) 주둔했다. 과연 팽총은 먼저 동생 팽순(彭純)에게 흉노기병 2천을 주어 이들을 습격케 하고, 자신은 수만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채준과 유희를 쳤다. 경엄의 아버지 경황은 이를 알고 상곡에서 경서를 보내 팽총을 요격했다. 흉노와 연합한 팽총의 부대가 군도(軍都)를 지날 때, 경서가 이를 발견하고 엄습하여 흉노의 두 왕을 죽이고 부대를 전멸시키자 팽총은 패주하였다.

건무 5년(29년) 2월, 팽총의 노복 자밀(子密) 등 3명이 팽총 부부의 목을 베고 광무제에게로 갔다. 연나라 잔당들은 아들 팽오(彭午)를 얼른 옹립했으나 연의 국사 한리(韓利)가 팽오를 참수하고 광무제에게 항복하면서 팽총의 난은 진압되었다. 경황은 팽총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인정받아 징소되어 광무제로부터 친히 갑제(甲第)를 하사받고, 그 아들 경서는 모평후(牟平侯)로 봉했다. 그리고 대사마 오한을 경엄에게 보내 그를 돕게 했다. 경엄, 왕상은 오한과 힘을 합쳐 평원(平原)에서 부평과 획삭 도적떼를 격파하니, 항복한 자가 4만이나 되었다. 이후 경엄은 조서를 받고 장보를 토벌하기 위해 별동대를 편성해 기도위 유흠(劉歆)에게 지휘를 맡기고, 태산태수 진준의 군대와 합쳐 계속 해서 동쪽으로 향했다.

2.5. 장보 토벌전

동년 10월, 경엄이 조양(朝陽)에서 제하(濟河)까지 다리를 놓아 하수(河水)를 건너 마침내 장보의 세력권인 청주로 진입하였다. 장보는 낭야태수 왕굉을 쫓아내고 제왕(齊王)을 자칭하고 있었는데, 경엄이 온다는 소식에 대장군 비읍(費邑)을 역하에 주둔시키고, 축아(祝阿)에도 군대를 두었다. 그리고 태산(泰山)과 종성(鐘城) 사이로 수십 개의 군영 벌려놓고 경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경엄은 제일 먼저 축아를 쳤는데, 아침부터 성을 공략하여 반나절만에 함락시켰다. 이때 고의로 포위망의 한 귀퉁이를 터 패잔병들이 종성으로 도망가도록 유도했다. 그리하여 축아가 이미 궤멸된 것을 알게 된 종성의 사람들은 크게 놀라 성을 비우고 달아났다. 비읍은 자신의 동생 비감(費敢)을 보내 역하 동부 전선인 거리(巨里)를 지키게 하였다. 경엄은 진격하여 거리 인근에 주둔했는데, 주변에 나무를 많이 베게하면서 갱도와 해자(垓字)를 막아 버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며칠 지나고 어느 날, 경엄의 진영으로 투항해온 비감의 병사가 '대장군 비읍이 구원군을 이끌고 온다'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경엄은 군령을 내려 장비들을 손질하게 하고, 모든 부대에게 3일 후에 거리성을 총공격할 것이라 선포했다. 그리고는 이 명령이 비읍에게 전달되게 하려고 사로잡은 포로의 감시를 느슨하게 하여 이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하였다. 탈옥한 적병들이 돌아가 이를 전했고, 덕분에 경엄의 총공격 날짜를 알게 된 비읍은 직접 3만의 병사를 이끌고 거리성을 구원하러 왔다. 그러자 경엄이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장비들을 손질하도록 명한 것은 비읍을 유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지금 드디어 왔으니, 이는 내가 바라던대로 된 것이다.
경엄은 3천여 병력을 남겨 거리성을 감시하도록 하고, 자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산등성이와 비탈길 위로 진격했다. 그는 방심해있던 비읍의 군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하고 비읍의 목을 베어 거리성에 보이자, 성 안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결국, 비감은 전의를 상실하여 거리성을 버리고 장보에게 도망갔다. 경엄은 적들이 남기고 간 군수품을 수습하고 아직 평정되지 않은 40여 군영을 격파하니, 제남군은 모두 평정되었다.

제왕 장보는 극(劇)을 도읍지로 삼고 동생 장람(張藍)을 시켜 2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서안(西安)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여러 태수들이 보낸 병사 1만을 임치(臨淄)에 모았는데, 두 군영 사이가 서로 40리 정도였다. 경엄은 서안과 임치 두 성 사이에 있는 획중(畫中)에 자리를 잡고 주둔하였다. 서안성은 비록 작으나 견고하고 장람의 군사들은 정예라 쉽게 공략할 수 없지만, 임치성은 크기만 클 뿐 공략할 곳이 만다는 것을 간파한 경엄은 5일 뒤에 서안을 친다는 명을 내렸다. 서안성의 장람은 밤낮으로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그렇게 5일이 지난 이른 새벽, 경엄은 모든 장병들을 깨워 잠자리에서 식사를 하도록 하고 군대를 독촉하여 해가 뜰 무렵 임치성에 도착했다. 서안을 공격하는 줄로만 알았던 호군 순량(荀梁) 등 경엄의 부장들은 경엄에게 서안성을 쳐야 하는 것이 아니냐 물으니, 경엄이 답했다.
그렇지 않소. 서안은 내가 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수비했으나, 우리가 뜻밖에도 임치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소란이 일어날 것이고, 나는 하루 만에 성을 뽑을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임치를 뽑으면 서안은 고립될 것이고, 장람과 장보는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니, 장람은 반드시 도망가게 될 것이며, 이는 소위 하나를 쳐서 둘을 얻는 계책이라 하오. 만약 내가 서안을 공격해도 적의 방어에 막혀 곧바로 성을 함락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적들은 수비를 더욱 견고히 할 것이고 아군의 사상자는 늘어만 갔을 게 분명하오. 또, 운 좋게 함락시켰다 한들, 장람이 정예병을 이끌고 임치의 군대와 합류하여 아군의 허실을 연구한다면, 우리가 적지 깊숙이 들어간 틈을 타 뒤에서 보급로를 차단해 한 달만에 우리와 싸우지도 않고 몰아세울 수도 있소. 제군의 의견은 이런 점을 마땅히 헤아리지 못하였소.
이윽고 임치를 총공격하여 반나절만에 함락시키고 입성하였다. 임치 함락 소식을 들은 장람은 두려워 장보가 있는 극으로 도망쳤다.

경엄은 극으로 진격하면서 전군에 극현을 노략질하지 말라 명령을 내리고 장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는 장보가 먼저 공격하도록 유도하려는 경엄의 계획이었다. 이를 들은 장보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 우래(尤來), 대동(大彤)의 10만 병력으로 그들을 깨뜨리겠노라. 지금 경엄의 군대는 우리보다 적고, 모두 피곤한 상태일텐데 무엇이 두려우랴!
장보는 세 동생 장람, 장홍(張弘), 장수(張壽)와 대동의 두목이었던 중이(重異) 등의 군대를 합쳐, 호왈 20만 대군으로 임치성 동쪽으로 진격했다. 경엄은 치수(菑水)로 나아가 중이와 맞섰다가 짐짓 패한 척하며 병사들을 이끌고 소성(小城)으로 후퇴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 중이는 자신들이 경엄을 격퇴시켰다 판단해 한껏 기세를 올려 추격하자, 유흠이 별동대를 거느리고 중이의 부대를 막았다. 무너진 망대(臺) 위에서 두 군대가 어우러져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경엄은 직접 정예병을 거느리고 마침 동성(東城)을 지나가던 장보의 부대 측면을 돌파했다. 장보의 군사들은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경엄의 다리에도 화살이 꽂혔으나 경엄이 재빨리 단검으로 잘라낸 덕에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투는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고 경엄은 군대를 물려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 경엄은 다시 출진하여 장보의 진영으로 돌격했다. 때마침 노국(魯國)에 있던 광무제는 경엄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와서 구원해주려 했으나, 임치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진준은 경엄에게 성에 들어가 병사들을 쉬게 하고 광무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 청했다. 이에 경엄이 답했다.
승여(乘輿)가 당도하면 응당 신하된 자로서 소를 잡고 술을 들어 백관들을 대접해야 하거늘, 도리어 도적을 토벌하는 임무를 군부(君父)께 넘겨주려 하는 것이오?
그러고는 출격해 장보의 군사와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크게 싸워 마침내 대파하였다. 골짜기와 참호에는 양군의 시체로 가득했으며, 밤이 되고 어두워지자 장보는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경엄은 좌우익에 매복해둔 병사들로 장보를 쳐 거매수(鉅昧水)까지 추격하니, 적군의 시체가 80 ~ 90리에 널리고, 치중 2천여 수레를 노획하였다. 장보는 겨우 목숨을 구해, 자신의 근거지인 극에 도착했고 그의 형제들은 해산하였다.

며칠 후, 광무제가 임치에 당도하여 군사들의 노고를 친히 위로했는데 신하들이 많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광무제는 경엄을 불러 칭찬하였다.
지난 날 한신(韓信)이 역하(歷下)를 격파하여 한의 기초를 다졌는데, 오늘 장군이 축아를 공격하여 제의 서쪽 경계를 모두 차지했으니 그 공은 한신의 것과 비할 수 있겠구려! 한신은 이미 항복한 상대를 공격했으나, 장군은 강한 적을 홀로 격파했으니 한신이 공을 세울 때보다도 어려웠을 것이오. 또, 전횡(田橫)이 역이기(酈食其)를 죽인 뒤 조서에 응하게 되었을 때, 한고제가 조서를 내려 전횡을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원수로 삼겠다 하였소. 장보는 복륭(伏隆)을 죽였으나 돌아와 명을 받든다면, 복륭의 아버지 대사도 복담(伏湛)에게도 조서를 내려 그 원한을 풀게 할 터인 즉, 그 일 또한 서로 매우 유사하오. 장군이 전에 남양에서 천하를 얻을 대계를 건의하였을 때, 짐은 아득하기만 하여 가망없는 일이라 여겼었소. 허나, 뜻을 가졌던 자가 마침내 일을 해내었구려.
여기서 마지막 문장인 유지자사경성야(有志者事竟成也)를 축약하여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마침내 이룬다"는 뜻을 가진 고사성어 유지경성(有志竟成)의 유래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경엄은 다시 군사를 몰아 장보 추격을 재개하였다. 장보가 평수(平壽)로 도망가자, 양왕(梁王)을 자칭하던 유우(劉紆)의 잔당 소무(蘇武)가 1만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광무제가 장보와 소무의 목을 가져오는 자는 열후에 봉하겠다는 현상을 걸자, 불안해진 장보는 소무를 참수하였다. 그리고 상의를 벗고 부질(斧鑕)을 뒤짚어 쓴 뒤 경엄의 군문 앞으로 나아가 소무의 목을 바치며 항복하였다. 경엄은 장보의 군영으로 들어가 수습하니, 치중은 7천 수레였고 병사들은 10만이나 되었다. 경엄은 이들을 모두 해산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광무제는 약속대로 장보를 후작에 봉해 처자식과 함께 낙양에서 살게 하고, 장보의 동생 3명의 항복도 모두 받아주었다. 경엄은 성양국(城陽國)에서 오교 잔당들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제 땅을 완전히 평정하고 낙양으로 개선했다.

2.6. 외효 정벌

건무 6년(30년) 5월, 외효(隗囂)가 서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대장군 왕원(王元)을 보내 농도(隴道)를 점거하게 했다. 농도를 지키고 있던 경엄, 갑연(蓋延) 등 일곱 장수들은 왕원에게 패하여 농(隴)으로 물러났다. 이에 광무제는 명을 내려 경엄 등을 우부풍 칠(漆)로 후퇴하도록 하고, 대사마 오한을 장안에, 정서대장군 풍이(馮異)를 순읍(栒邑), 정로장군 채준을 견(汧)에 주둔시켰다.

건무 8년(32년) 4월, 배치시킨 장수들이 연달아 외효에게 패하자 보다못한 광무제가 친정하여 농우(隴右)에서 외효를 공격할 때, 경엄 또한 광무제와 종군하였다. 승승장구하던 외효는 광무제를 만난 후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고, 끝내 패주하였다. 경엄은 이후 광무제의 명령을 받들어 갑연과 함께 상규(上邽)를 포위하였다.

동년 11월, 서성(西城)을 포위하며 외효와 싸우던 오한과 잠팽(岑彭)이 외효의 장수 왕원과 주종(周宗)에게 대패하고 치중이 모두 불태워졌다. 갑연과 경엄도 상규의 포위를 풀고 후퇴하니, 외효는 다시 세력 뻗쳐 농서군까지 전부 되찾았다.

건무 9년(33년), 광무제가 중랑장 내흡(來歙)을 외효 토벌군 총대장으로 삼았다. 경엄은 내흡의 지휘를 받아 안정(安定), 북지(北地)의 여러 군영과 보루를 쳐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외효가 죽고 기성(冀城)이 함락됨으로써 서방은 평정되었다.

2.7. 은퇴

건무 12년(36년), 경엄의 아버지 경황이 병이 들자 광무제가 친히 수 차례나 병문안을 갔다. 광무제는 경황 집안이 큰 공을 세웠다 하여 경엄의 셋째 동생 경국, 다섯째 동생 경거(耿擧) 모두 중랑장에 임명했다. 경엄을 비롯한 여섯 형제들이 모두 청색이나 자색의 인수를 늘어뜨리고 병든 아버지의 시중을 드니, 당대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일이라 여겼다. 이후 경황이 병사하자 시호를 열(烈)이라 하고, 막내 경패(耿霸)에게 경황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건무 13년(37년) 4월, 대사마 오한이 촉 땅의 공손술을 평정하고 수도로 개선하자, 광무제는 연회를 열고 경엄을 포함한 공신 365명의 식읍을 늘렸다. 적을 모두 평정한 광무제는 문치로 전환하기 위해 우장군과 좌장군을 철폐하니, 경엄은 대장군 인수를 바치고 35세에 은퇴를 청했다. 광무제는 그의 은퇴를 허하였으나 조회에는 참석하게 하였다. 경엄은 더이상 대신이 아니었으나 광무제는 매번 이견이 분분한 사안이 있을 때면 그를 불러들여 의견을 물었다.

영평 원년(58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민(愍).


[1] 본래 명칭은 상곡군. 신나라 시절 잠시 삭주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왕망이 죽으면서 다시 상곡으로 돌아왔다.[2]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면서 만든 관직. 왕망은 지방을 다스리는 관직으로 졸정(卒正), 대윤(大尹), 연솔을 두었는데 그 업무의 범위는 한나라의 태수와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