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6 23:57:20

유분자


전후한 과도기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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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없음
시호 없음
연호 건세 (建世, 25 ~ 27)
유(劉)
분자(盆子)
생몰 기간 10년 ~ ?
재위 기간 25년 ~ 27년
1. 개요2. 제위3. 여담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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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한경시제 정권이 몰락한 후 적미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한의 황족. 태산군 식현(式縣) 출신으로, 한고제의 손자 성양경왕 유장의 후손이다. 할아버지 유헌(劉憲)은 원제에 의해 식후(式侯)에 봉해졌고 아버지 유맹(劉萌)이 그 뒤를 이었으나 얼마 안가 황위를 찬탈한 왕망에 의해 봉국이 폐지되었다.

2. 제위

천봉 5년(18년), 번숭(樊崇)이 거(莒) 땅에서 수백 명을 모아 거병했는데, 때마침 우두머리를 잃은 여모의 무리가 가세하면서 거병한 지 1년만에 1만여 명의 무리를 거느렸다. 또, 청주와 서주에서 대기근이 발생해 방안(逄安), 서선(徐宣), 사록(謝祿), 양음(楊音)이 각기 거병해 번숭에게 호응하니 그 무리가 수 만에 이르렀다. 이들은 번숭과 합쳐 태사 왕광과 경시장군 염단의 군대를 격파해 승승장구하며 지역을 약탈하고 다녔고, 훗날 자신들의 눈썹을 붉게 물들여 적미라 일컬었다.

경시 원년(23년), 적미가 세력을 한창 확대해갈 때, 식현을 약탈하면서 유분자와 그의 두 형 유공(劉恭), 유무(劉茂)를 납치해 군중에 두고 있었다. 곤양대전으로 대륙이 한 차례 진동하자, 적미군은 경시제에게 투항했다. 형 유공은 어려서부터 《상서》를 공부하여 어느정도 학식이 있어, 경시제가 그를 시중으로 삼고 식후에 봉해 함께 장안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적미군에 남아 그대로 찬밥 신세가 된 유분자와 유무는 우교졸리(右校卒吏) 유협경(劉俠卿) 휘하에 배속되어 군영 내에서 소를 기르는 일을 하며 다른 적미군 일원들로부터 우리(牛吏)라 불렸다. 이때 자신에게 소 기르는 일에 적성이 있음을 알게 된 유분자는 소를 방목할 때마다 많은 양의 풀을 실어 소 등에 얹어 군영으로 복귀하고는 했다. 그는 천성이 어질어 적미군의 소를 방목하면서도 매번 그들이 주변 민가의 곡식을 함부로 뜯어먹지 않도록 주의하였고, 소 위에 올라타는 것을 자주 즐겼다고 한다.

경시 3년(25년), 경시제를 배반한 적미군이 홍농에서 그의 군대를 연달아 격파하고 화음에 이르렀다. 적미군 군영 내에서 무당이 성양경왕 유장에게 복을 빌던 중 신내림을 받고는 황제를 옹립해야 한다 외쳤다. 적미군 중 이를 비웃는 자들이 있었는데, 하나둘 원인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니 적미군 진영 내에서 소란이 일었다. 장수 방양(方陽)은 삼로[1] 번숭에게 경시제를 대신하는 새 천자를 세우도록 권했다. 비록 한나라 재건이라는 거창한 뜻 따위 없었지만 분란을 잠재우고 싶었던 번숭은 제장들과 의논 끝에 새 황제를 옹립하기로 하고, 적미군 내에서 성양경왕 유장의 후손 70여 명을 찾았다. 후보로 오른 이들 중 소를 치던 유무와 유분자, 서안후(西安侯) 유효(劉孝) 이 셋이 제일 가까웠다. 번숭 등이 말했다.
"듣자하니 과거에는 천자의 장병은 상장군(上將軍)이라 칭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부적에 "상장군"을 적고는 그것을 접어 제비로 만들었다. 이후 후보자 인원에 맞게 두 개의 제비를 추가로 접어 모두 대나무통 안에 집어넣고, 세 사람을 단상에 세워 나이 순대로 제비를 뽑게 하였다. 제일 어렸던 유분자는 마지막으로 뽑았는데 그가 당첨 제비인 "상장군"을 뽑자, 모든 장수들이 그 앞에 엎드려 황제로 받들었다. 당시 15살이었던 유분자는 머리가 산발에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녔으며, 옷도 다 해진 옷에 땀과 황토에 절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적미군 무리가 일제히 엎드리니 두려워 황제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형 유무가 제비를 잘 간직하라고 하자, 제비를 이빨로 물어뜯어 버리고 유협경에게 돌아가 소 치는 일을 계속 하려 하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하늘의 뜻에 맡긴답시고 제비를 뽑았던 것이기에 황제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유협경이 그에게 붉은 겉옷을 대충 입히고 마차에 태워 돌려보내니, 결국 황제로 즉위할 수밖에 없었다.[2]

제위에 오른 유분자는 연호를 건세(建世)[3]로 개원했다. 엄연히 황제를 옹립한 지라 적미군의 제장들은 관직을 받아야 했는데, 문제는 대장인 번숭이 일자무식하여 이런 일은 잘 몰랐다. 이에 옥리 일을 해본 적 있는 서선에게 위임했다. 유분자는 서선의 지시에 따라 서선을 승산, 번숭을 어사대부, 방안을 좌대사마, 사록을 우대사마에 임명했고, 나머지 양음 이하 장수들 역시 모두 적당한 관직을 주었다. 이렇게 유분자를 옹립한 적미군은 다시 진군하여 경시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장수 장앙(張卬)과 연대해 장안성을 공격했다. 이윽고 동도문(東都門)이 무너지면서 장안성은 함락되었고, 경시제는 적미군에게 항복하며 옥새와 인수를 유분자에게 바쳤다. 적미군의 제장들은 경시제를 곧바로 죽이려 들었으나 식후 유공이 제지해 그만 두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경시제 유현은 장사왕에 봉해졌다.

경시제의 항복을 받은 후, 유분자는 장락궁에 거주하였으나 마음이 편치 못했다. 적미군의 장수들은 조회 때마다 서로의 공적이 더 뛰어나다 언쟁하며 황제 앞에서 칼을 뽑아 대궐 기둥을 찍어댔고, 적미군의 병사들은 장안성에서 백성들을 약탈했다. 또 한번은, 번숭 등이 유분자를 정전(正殿)에 강제로 앉혀두고 중황문에 병사를 배치시킨 뒤 연회를 크게 열었는데, 취기가 오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무리들은 서로 돌아가며 일어나서 축전을 읽었다. 하지만 적미군의 장수들 중 글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라, 아예 딴청을 피우거나 등을 돌려 모른 척 했다. 연회 자리가 난잡해지자 참다못한 대사농 양음이 칼을 뽑고 외쳤다.
"모두 쓸모없는 노친네들 뿐이구나! 오늘 군신의 예를 갖추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거늘 오히려 더 난잡해졌도다. 아이들끼리 노는 자리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난잡할 수 있겠는가!"
양음의 이 발언은 당연히 다른 장수들을 도발하게 되었고 서로 칼을 뽑아 싸우면서 연회는 난장판이 되었다. 중황문 밖에서 세워둔 병사들도 소란을 듣고 뛰어들어와 싸우는 장수들을 말리기는 커녕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정신없이 주워먹었다. 보고를 받고 출동한 위위 제갈치(諸葛稚)가 100여 명을 베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눈 앞에서 죽어나가는 것을 본 유분자는 그 날 밤새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유분자는 중황문 밖을 절대 나가지 않았다.

이때 당시 궁궐 정원 안에는 수백에서 수천 가량의 궁녀들이 있었는데, 적미군은 이들이 도망갈 수 없도록 나가는 곳을 막아버렸다. 꼼짝없이 정원에 갇힌 궁녀들은 정원에 심어둔 식물 뿌리를 캐먹거나 연못의 물고기들을 잡아먹었고, 굶어죽은 궁녀의 시체는 정원에 그대로 묻었다. 그나마 유분자 곁에 있던 악공들은 유분자가 사람을 시켜 자신의 양식을 나눠준 덕에 아사하지 않을 수 있었다. 형 유공은 적미의 횡포를 보고 머지않아 패망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는 자신과 형제들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동생 유분자에게 가 제위를 내려놓는 법을 은밀히 교육하였다.

건무 2년(26년) 정월 1일, 번숭 등 모든 간부들이 회의를 위해 모였다. 식후 유공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제군께서는 이 유공의 아우님을 제위에 올리셨음에, 성하께서는 분명 덕성이 심후하신 분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 근 1년간 효란(肴亂)이 극심하여 성하께서는 하루도 편치 않으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해서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성하를 다시 평민으로 돌리시고, 제군께서는 다시 살피셔서 현명하고도 지혜로운 자를 찾아 옹립하심이 나을 듯합니다."
번숭 등은 그 청을 기각하며 말했다.
"이는 모두 저희들의 죄입니다."
유공도 포기하지 않고 재차 부탁했지만 적미군의 제장 중 하나가 외쳤다.
"식후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나 보구려!"
이에 유공은 두려워 곧장 자리를 떠났다. 황제 유분자는 어전에서 내려와 옥새와 인수를 바치고 제장들에게 통곡하며 제위에서 내려오고 싶다 간청하였다. 번숭 등 수백 명은 그에게 연민을 느껴 머리를 조아리고 슬퍼했지만 그의 청은 들어줄 수 없어, 그를 부축해주고 다시 옥새와 인수를 주었다. 이 날 이후로 적미군이 자중하여 나가지 않자 떠났던 백성들은 황제가 총명하다며 다시 장안으로 모였다. 그러나 20여 일만에 적미군이 참지 못하고 약탈을 재개하니 이전과 같았다.

장안성에 식량이 다 떨어지자 적미군은 지금까지 약탈한 보물들을 가지고 장안을 뜨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더이상 쓸모 없어진 황궁을 불태우고, 자신들의 무리가 백만 대군이라 떠들며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유분자는 말 3마리가 모는 왕의 수레를 타고 이동하면서 기병 100명의 호위를 받았다. 적미군은 남산(南山)에 도착해 성읍들을 노략질하며 경시제의 장수였던 엄춘(嚴春)을 미(郿)에서 격파하고 그를 죽였다. 그들이 안정과 북지를 지나 양성(陽城)에 이르렀을 때, 폭설을 만나고 눈이 골짜기를 메우면서 많은 이들이 동사하는 바람에 다시 방향을 돌려 장안으로 갔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수많은 한나라 황릉을 도굴하고 여태후의 시신을 훼손하였다. 광무제가 보낸 대사도 등우가 욱이(郁夷)에서 이들을 요격했으나 되려 패하고 운양(雲陽)으로 물러났다. 그 해 9월, 적미군은 장안에 다시 입성해 불타지 않은 궁을 골라 보금자리로 삼았다.

당시 한중왕 유가(劉嘉)를 쫓아내고 한중을 차지한 무안왕 연잠(延岑)이 산관(散關)에서 나와 두릉(杜陵)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좌대사마 방안이 10여 만 대군을 거느리고 연잠을 쳤다. 등우는 적미군이 연잠을 치러간 틈을 노려 장안성을 치고 유약한 황제 유분자를 사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우대사마 사록의 구원군이 밤에 도착해 장안성 고가(槁街)에서 등우의 뒤를 치니, 등우는 패하여 달아났다. 연잠은 살해당한 경시제의 장수였던 이보(李寶)와 군대를 합쳐 두릉에서 방안과 교전했지만 대패하여 1만여 명이 전사하였다. 이보는 방안에게 사로잡혀 투항하고 연잠은 도주했다. 그러나 이보의 투항은 거짓 투항이었고 연잠과 내통해 방안이 진영을 비운 사이 그의 진영을 장악해버렸다. 이로 인해 적미군 10여 만이 사망하고 방안은 수천여 명만 데리고 장안으로 귀환했다. 그 해 12월, 삼보가 완전히 황폐해져 더이상 식량을 구할 길이 없게 되었다. 남은 적미군 20여 만은 동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유분자를 모시고 장안을 떠났다. 이때 적미군이 나올 것을 예상한 광무제는 파간장군 후진 등을 서쪽 길인 신안(新安)에 주둔시키고, 건위대장군 경엄을 남쪽 길인 의양(宜陽)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두 길목 중 하나가 공격받으면 다른 한쪽이 공격받은 쪽을 구해주기로 하였다.

건무 3년(27년) 정월, 등우가 하북을 넘어 호(湖)에서 적미군을 쳤지만 또 패했다. 적미는 이후 남쪽으로 진군하다가 마침내 서정대장군 풍이에 의해 효저(崤底)에서 크게 격파당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잔당들은 서둘러 더 남쪽으로 달려가 의양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곳에는 미리 지키고 있던 경엄의 군대와 함께 광무제의 친정군도 당도해 있었다. 놀란 적미군은 좌절하여 식후 유공을 보내 투항을 청했다. 이윽고 유분자는 승상 서선 이하 30여 명의 관리와 함께 겉옷을 벗고 전국옥새와 경시제의 7척 보검 등을 광무제에게 바치며 항복했다. 광무제는 항복한 적미군의 병장기를 전부 모아 의양 서쪽에 쌓게 했더니, 그 높이가 웅이산(熊耳山)과 맞먹었다.

광무제는 굶주린 적미군을 가련히 여겨, 현주(縣廚)에게 명해 항복한 적미군 10만 명을 배불리 먹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광무제는 낙수(洛水) 가에 병마를 벌려놓고 유분자와 적미군의 관리들을 몰아넣어 위협하며 말했다.
"스스로 당연히 죽지 않을 것이라 여겼느냐?"
이때는 이미 병장기를 전부 몰수당한 상태라 모든 적미군들은 적잖이 당황했는데 유분자가 침착히 답했다.
"응당 죽을 죄를 지었으나, 어떤 분께서 용서해주셨습니다."
광무제가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영리한 아이로다. 우리 종실 중에는 어리석은 자가 없구나!"
뒤이어 번숭과 서선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대들은 항복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원한다면 다시 한 번 실력으로 승부를 결정해도 좋다. 짐은 그대들에게 항복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번숭과 서선은 모두 고개를 조아려 진심으로 항복했음을 맹세하니, 광무제가 다시 말했다.
"경들이야말로 철중쟁쟁(鐵中錚錚), 용중교교(傭中佼佼)의 자들이요."
여기서 나오는 철중쟁쟁(鐵中錚錚)용중교교(傭中佼佼)는 모두 범인(凡人)들 중 조금 나은 자를 뜻하는 고사성어로 쓰이게 된다. 이리하여 적미를 항복시킨 광무제는 유분자와 주요 간부급은 모두 처자식과 함께 낙양 인근에서 살게 하고, 그들에게 사택 1채와 밭 2경을 하사했다. 훗날 번숭과 봉안은 모반을 꾸미다가 참수되었지만 서선 등 나머지 간부들은 거주지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사망하였다. 다만, 경시제를 목 졸라 살해한 사록은 식후 유공에게 죽임을 당했다. 유공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경시제의 복수를 하고 스스로 감옥에 들어갔지만 광무제가 그를 사면하였다.

유분자는 숙부인 조왕(趙王) 유량(劉良)의 낭중(郞中)이 되었다. 후에 병으로 눈을 실명하자 광무제가 그에게 형양(滎陽) 균수관(均輸官)의 땅을 하사하여 그곳에서 거주하도록 하였으나 언제 사망했는지 알 수 없다.

3. 여담

그의 친형 유공의 최후는 그리 좋지 못했다. 후한에서 후작을 지내던 경시제의 세 아들들은 표면상 적미군의 수장이었던 유분자가 아버지를 죽였다 오해하여 그를 무척 원망했다고 한다. 특히 막내인 수광후(壽光侯) 유리(劉鯉)는 광무제의 차남 패왕(沛王) 유보의 총애를 받았는데, 당시 유보는 사방에서 초빙해온 엄청난 수의 빈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리가 아버지의 복수를 원한다 설명하자 유보는 빈객들을 이용해 유분자의 형 유공을 죽여버렸다. 당연히 광무제는 극대노하여 수도에 있던 유강을 포함한 5명의 아들을 모두 자신의 봉국으로 내려가게 하고, 여러 왕들의 빈객 중 1천여 명을 이 사건과 연루시켜 주살하였다. 결국, 사록을 죽여서 경시제의 원수를 갚았던 유공이 그 아들에게 살해당하는 아이러니한 사건이 되었다.

유분자의 묘는 1970년까지도 존재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문화대혁명때에 홍위병들에게 박살난 것으로 보인다.

4. 둘러보기(계보)

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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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권 「황보숭주준열전(皇甫嵩朱儁列傳)」 72권 「동탁열전(董卓列傳)」 73권 「유우공손찬도겸열전(劉虞公孫瓚陶謙列傳)」
황보숭 · 주준 동탁 유우 · 공손찬 · 도겸
74권 「원소유표열전(袁紹劉表列傳)」 75권 「유언원술여포열전(劉焉袁術呂布列傳)」
원소 ,원담 · 원상, · 유표 유언 · 원술 · 여포
76권 「순리열전(循吏列傳)」
위립 · 임연 · 왕경 · 진원 · 왕환 · 허형 · 맹상 · 제오방 · 유구,유광, · 유총 · 구람 · 동회
77권 「혹리열전(酷吏列傳)」
동선 · 번엽 · 이장 · 주우 · 황창 · 양구 · 왕길
78권 「환자열전(宦者列傳)」
정중 · 채륜 · 손정 · 조등 · 선초 · 서황 · 구원 · 좌관 · 당형 · 후람 · 조절 · 여강 · 장양 · 조충
79권 「유림열전(儒林列傳)」
유곤 · 규단 · 임안 · 양정 · 장흥 · 대빙 · 손기 · 구양흡 · 모장 · 송등 · 장순 · 윤민 · 주방 · 공희 · 양륜 · 고후 · 포함 · 위응 · 복공 · 임말 · 경란 · 설한 · 두무 · 소순 · 양인 · 조엽 · 위굉 · 동균 · 정공 · 주택 · 손감 · 종흥 · 견우 · 누망 · 정증 · 장현 · 이육 · 하휴 · 복건 · 영용 · 사해 · 허신 · 채현
80권 「문원열전(文苑列傳)」
두독 · 왕륭 · 하공 · 부의 · 황향 · 유의 · 이우 · 소순 · 유진 · 갈공 · 왕일 · 최기 · 변소 · 장승 · 조일 · 유량 · 변양 · 역염 · 후근 · 고표 · 장초 · 예형
81권 「독행열전(獨行列傳)」
초현 · 이업 · 유무 · 온서 · 팽수 · 삭로방 · 주가 · 범식 · 이선 · 왕돈 · 장무 · 육속 · 대봉 · 이충 · 무융 · 진중 · 뇌의 · 범염 · 대취 · 조포 · 상허 · 양보 · 유익 · 왕열
82권 「방술열전(方術列傳)」
임문공 · 곽헌 · 허양 · 고획 · 왕교 · 사이오 · 양유 · 이남 · 이합 · 단예 · 요부 · 절상 · 번영 · 당단 · 공사목 · 허만 · 조언 · 번지장 · 선양 · 한열 · 동부 · 곽옥 · 화타 · 서등 · 비장방 · 소자훈 · 유근 · 좌자 · 허자훈 · 해노고 · 장초 · 왕진 · 학맹절 · 유화평
83권 「일민열전(逸民列傳)」
상장 · 봉맹 · 주당 · 왕패 · 엄광 · 정단 · 양홍 · 고봉 · 대동 · 한강 · 교신 · 대량 · 법진 · 한음노보 · 진류노보 · 방공
84권 「열녀전(列女傳)」
환소군 · 조아(趙阿) · 반소 · 이목강 · 조아(曹娥) · 여영 · 마륜 · 조아(趙娥) · 순채 · 조원강 · 숙선웅 · 채염
85권 「동이열전(東夷列傳)」 86권 「남만서남이열전(南蠻西南夷列傳)」 87권 「서강전(西羌傳)」
부여국 · 읍루 · 고구려 · 북옥저 · · 남만 · 서남이 서강
88권 「서역전(西域傳)」
구미국 · 우전국 · 서야국 · 자합국 · 덕약국 · 안식국 · 대진국 · 대월지국 · 고부국 · 천축국 · 동리국 · 율과국 · 엄국 · 엄채국 · 사거국 · 소륵국 · 언기국 · 포류국 · 이지국 · 동저미국
89권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 90권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
남흉노 오환 ·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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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숭이 거병하면서 본인을 삼로(三老)라 칭했고, 이는 자연스레 적미군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이 된다.[2] 당시 제 지역에는 유장을 신으로 모시는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고, 원래는 유장의 후손들이 종묘를 짓고 조상을 제사지내던 것일 뿐인데, 유장은 후손이 많아 그의 사당도 많았고 본인의 인기도 많았기 때문에 민간신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에서 나온 도참설에 따라 유장의 자손을 황제로 세우려 했을 뿐이라, 장성한 유무나 유효보다는 15살 목동 출신의 어린 나이로 적미의 지도자들이 꼭두각시 황제로 삼기 좋은 그를 택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주작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3] 혹은 건시(建始)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