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19:14:05

유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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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조조를 따르기 전까지2.2. 조조 휘하에서2.3. 조비 휘하에서2.4. 조예 휘하에서
3. 삼국지연의4. 미디어 믹스

1. 개요

劉曄
(179(?)년 ~ 234(?)년)[1]

고대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며 자는 자양(子揚)으로 유도의 아버지.

방계 황족으로 광무제의 후손이다. 그의 조상은 광무제의 7남이자 폐후 곽씨의 소생 부릉질왕 유연(劉延)으로, 양주 구강군 성덕현 출신이다. 이렇게 한나라 황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조조 휘하의 참모로 활약했다.[2] 흔히 참모발명가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정사에 기록된 젊었을 때 일화들을 보면 다소 무법자스러운 면모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삼국지 조조전의 영향으로 발석차로 대표되는 공성병기 개발자의 이미지가 강한데, 정사에서는 발석차나 공성병기 같은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3] 조조 휘하에서도 조조 생애 후반기에 이르러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후술되었지만 관도대전에서 발석거를 개발해 활약하는 것은 연의의 허구이며, 정사에서 나타나는 유엽은 주로 적절하고 날카로운 헌책을 짜는 참모의 전형이었다.

2. 정사 삼국지

2.1. 조조를 따르기 전까지

7살 때 어머니 수(脩)는 심한 병중에서도 아버지의 시비를 제거하기를 유언했다. 결국 13살 때 그 시비를 죽이고 그 목을 가져가 어머니 묘에 참배했다.

유엽은 노숙과 친구였는데, 함께 회남에서 수만 명의 무리를 모으고 세력을 떨치고 있던 정보(鄭寶)[4]를 섬길 것을 권했고 노숙은 승낙했으나 노숙은 결국 중도에 주유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손책을 섬겼다.

그래서 유엽이 정보와 행복하게 살았냐면 그러지 않았으니, 한편 정보가 백성을 핍박해 백성들이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려고 했는데 유엽이 고귀한 집안이며 명사이므로 유엽을 협박하여 이를 주도하게 하려고 했다. 당시 유엽은 불과 20살로 속마음으로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조조가 양주에 사자를 보내었는데 유엽은 사자를 뵙고 양주의 사정을 설명하고 며칠 더 머무르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가 수백명의 무리를 데리고 쇠고기와 술로 사자를 맞이하여 대접하자 이에 유엽은 정보의 무리들을 연회를 베풀어 그의 수하들은 좌중의 문 밖으로 서게 하며 술과 밥을 차려놓고 정보과 자신만은 집 안으로 술자리에 참석했다. 유엽은 몰래 건장한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정보가 술에 취한 틈을 타 정보를 모살하려 했다. 그러나 정보가 술을 마시지 않아 정신이 말짱하여 틈을 노리기 어렵게 되자 직접 정보의 머리를 베고 문 밖으로 나가 정보의 무리들을 위협하면서
조공(조조)의 명령이 있으니 감히 함부로 행동하는 자는 정보와 마찬가지로 다스리겠다!

그렇게 정보를 따르는 무리들은 흩어져 달아나게 되었다. 나중에 유엽은 정보의 진영을 찾아가 설득하여 주인을 잃은 정보의 무리들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왕실의 지파이므로 사병을 거느리려 하지 않고, 얻은 무리를 여강태수 유훈에게 넘겨주었다.

손책유훈에게 뇌물을 주어 상료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유엽은 이것이 유훈이 상료를 공격하러 나간 틈에 여강을 거저 먹으려는 손책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유훈에게 이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조언했으나, 유훈은 마침 원술의 잔당 등 귀의한 무리가 갑자기 늘어나 식량이 부족했으므로 이를 듣지 않았고 상료를 공격하다가 과연 손책의 공격을 받아 본거지인 환성을 잃고 조조에게 도주했다.

2.2. 조조 휘하에서

여강에는 산적 진란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조조가 여러 번 토벌군을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조조가 수춘에 이르자 여러 부하들은 진란을 내버려 둘 것을 조언했는데, 유엽은 조조에게 진란을 무찔러 위세를 보일 것을 조언했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맹장을 써 진란을 토벌하고 돌아오면서 유엽을 사공창조연[5]에 임명했다.

이후 별 기록이 없다가[6] 조조가 장로을 토벌할 때 주부로 전임되었다. 한중 땅은 길이 험하고 또 군량이 다했으므로 조조는 철수하면서 유엽에게 후군을 감독하게 했다. 유엽은 장로를 이길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군량을 끊어 퇴각하지 못하게 했다. 과연 조조는 장로를 무찌르고 한중을 평정했다.

유엽은 조조에게 한중 점령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을 촉을 치도록 권하고, 또 촉이 안정되어 제갈량이 재상이 되고 관우, 장비가 지휘관이 되면 그때에는 이미 늦어 근심거리가 된다고 조언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고 돌아갔다. 유엽은 행군장사가 되었고 영군을 겸했다.[7]

2.3. 조비 휘하에서

조조가 죽고 조비가 즉위하자 맹달위나라에 투항하여 조비의 총애를 받아 신성태수가 되었다. 하지만 유엽은 맹달에겐 충성심이 없고, 또 신성군은 국경의 요지이므로 이를 반대했으나 기각되었다. 그리고 그 맹달이 훗날 배신을 한다.

관우가 죽고 유비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조비가 묻자, 다른 신하들은 모두 유비가 한동안 나서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유엽만이 유비는 오나라에게 자신이 강대함을 보이려 할 것이며, 유비와 관우의 사이는 겉은 신하의 관계지만 은혜의 베풂을 보면 부자 관계와도 같다며 유비가 반드시 관우의 복수를 할 것이라고 예견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유엽은 어찌 보면 유비 일파에 대한 스페셜리스트같은 느낌이다.

이릉대전이 발발하자 유엽은 오나라는 외부의 공격 때문에 위나라에 칭신했다며, 그들의 곤궁함을 틈타 공격하면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고 했다. 조비는 유엽의 말을 듣지 않았고 과연 오나라는 이릉대전 후에 불손한 태도로 돌아선다.

조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유엽은 이제는 오나라를 칠 수 없다며 조비를 말렸지만, 조비는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오나라 정벌에 실패한다. 이후 224년 조비의 남정 당시 손권이 오지 않겠느냐는 조비의 말에 대부분의 중신들이 손권이 직접 올것이라고 말했지만 유엽은 손권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이 맞았다. 조비는 유엽의 계책이 맞았다면서. 내가 촉, 오를 멸망시킬 수 있도록 염두에 두었다면, 단지 그들의 사정을 아는 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2.4. 조예 휘하에서

조비가 죽은 후 조예가 다음 황제가 되었는데, 그 때까지 조예가 워낙 수수께끼의 존재였던 터라, 유엽이 만나서 이야기를 한 후에 다른 신하들에게 조예의 인물평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8] 다만 이 시기 유엽은 청년기의 호방함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줬던 전성기의 행적이 무색하게도 다소 불우하게 최후를 맞는다.

초기에 조예는 유엽을 매우 중히 여기고 가까이 했다. 이후 조예가 유엽에게 촉나라를 정벌하는 것에 관한 의견을 물었는데 이 때 유엽은 조예에게는 정벌할 수 있다고 답하고 물러나와서 다른 신하들 앞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의견을 같이 했다. 조예는 유엽이 촉을 정벌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에 다른 신하들을 불러 촉을 정벌하는 것에 관한 의견을 물었는데 다른 신하들은 당연히 반대하였다. 조예가 유엽은 촉을 정벌 가능하다고 했다고 말하자 다른 신하들은 유엽은 우리와 있을 때는 정벌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고 답했다. 이상함을 느낀 조예가 유엽을 다시 불러 이에 대해 묻자 유엽은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중대사라 다른 신하들에게 떠벌리지 않고 비밀로 했을 뿐인데 섣불리 다른 신하들에게 의중을 드러내면 안된다고 오히려 화를 냈다. 그러자 조예는 유엽에게 사과했지만 이로 인해 유엽에게 의심을 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조예에게 유엽은 충성을 다하지 않고 황상이 뜻하는 바를 잘 살펴 좇아가서 그에 영합한다면서, 유엽을 시험해 보고 유엽이 황제가 질문한 것과 반대되면 황제의 뜻에 합치되는 사람이지만 매번 물어볼 때마다 그렇다고 하면 유엽의 마음이 영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물은 것을 반대로 대답하면 항상 황제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고 매 질문마다 동의하면 아부하는 본래의 심정은 반드시 도망할 곳이 없다고 했는데, 이에 조예가 유엽을 시험했더니 그 심정을 드러내 조예와 소원하게 되면서 유엽은 쫓겨나서 대홍려가 되어 근심하다가 죽었다.

3. 삼국지연의

젊을 적 노숙과 교류하거나 정보를 토벌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오히려 유엽의 성인 유씨와 그의 자인 자양을 섞어 '유자양(劉子揚)'이란 별도의 인물로 만들어 노숙과 교류하는 것으로 등장시켰다.[9] 곽가의 추거로 조조를 섬겼으며 관도대전 당시 발석거[10]를 개발하여 심배가 쌓은 토산을 무력화시킨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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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년에 원술이 패망하고 유훈이 원술의 잔존 세력과 유엽에게서 얻은 정보의 잔존 세력을 흡수해 손책이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유엽이 정보를 잡아 죽일 때 나이가 스물 남짓이라고 했기 때문에 추정하는 생년이다.[2] 여담으로 후한의 황족 유우와 먼 친척 뻘인데, 그의 조상은 광무제의 장남이자 폐후 곽씨의 소생이었던 동해공왕 유강(劉彊)이다.[3] 소위 위빠를 자처하는 삼국지덕후들조차도 자주 착각하는 부분이다.[4] 잘 알려진 손씨 3대를 섬긴 막료 정보와는 동명이인이다.[5] 일종의 사공의 비서라고 보면 된다.[6] 조조의 중대한 사건들이었던 관도대전이나 하북 평정, 적벽대전, 그리고 마초 토벌전에 이르는 시기까지 거의 15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뭘 했는지 아예 기록이 없다. 전장에서 종군하거나 헌책을 하기보다는 후방에서 일상적인 행정업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 주석 《부자》에 따르면, 7일 후 촉에서 온 투항자가 유비가 두려워하는 자들을 참했음에도 촉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고 전했고, 조조는 유엽에게 촉을 쳐도 좋은지 물었는데 유엽은 이제는 안정되었으니 칠 수 없다고 답했다. 고작 일주일만에 상황이 바뀐 것이다.[8] '진시황이나 한무제와 비슷해보이지만 자질은 부족해보인다'라고 평했다. 다만 이 일화는 훗날 지어낸 이야기라는 의견도 있어서 맹신하면 안된다. 다만 자치통감에는 이 내용이 실려있다.[9] 대신 유엽의 자는 같은 발음의 한자인 阳자로 개명당했다.[10] 원소군은 벼락소리를 내는 수레라는 뜻으로 벽력거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