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9:52:15

왕기(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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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基
(190년 ~ 261년)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평가5. 기타 창작물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무장이며 는 백여(伯輿)로 청주 동래군 곡성현 사람.

2. 정사 삼국지

젊어서 고아가 되어 숙부인 왕옹과 살았는데, 왕옹은 그를 기르는데 깊은 정성을 다했고, 왕기도 효자에다 학문과 품행이 곧고 청렴결백한 인물이라고 평가받았으며, 17세에 군리에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낭야군 경내로 들어가 학문에 힘썼다.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효렴에 천거되어 낭중 벼슬을 하다가 청주자사왕릉이 상주하여 주의 별가가 되었으며, 왕릉에게 조언하여 선정을 베풀도록 했다. 사도 왕랑이 중앙으로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왕릉이 저지했다고 하며, 왕릉에 대한 칭찬의 소리가 청주 땅에 흘렀는데, 사실은 왕기의 협력과 보좌의 결과였다. 이런 공적을 사마의에게 인정받아 초빙에 응하여 중서시랑이 되었다.

조예가 성대한 궁전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피폐하게 되었을 때 궁전 조영에 간언하거나 유학자로서 왕숙과 논쟁했다고 하며, 안평태수로 승진했다가[1] 공적인 사건으로 관직을 떠났다. 대장군 조상의 초빙을 받아 종사중랑이 되었다가 안풍태수가 되었는데 안풍군오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고, 부명하게 방비책을 설치하였으므로 손오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 토구장군의 호를 더하였다.

또한 의 침공에 대해 양주자사 제갈탄에게 조언을 구해 제갈탄을 보좌했다. 오나라는 일찍이 대대적으로 병력을 징발하여 건업에 집결하고, 양주를 쳐들어가 공격하려 한다고 선포했다. 제갈탄은 왕기에게 사태를 예측해 보도록 했는데 왕기는 손권합비, 강하에 갔고 전종여강, 주연양양을 침범했는데, 모두 공을 세우지 못했으며 지금 육손 등은 이미 죽었고, 손권은 연로하여 국내에는 현명한 후사가 없고, 조정에는 계책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즉 손권이 직접 출격하면 국내의 모순이 갑자기 폭발하게 될까 두렵고 장군을 파견하려고 하지만 옛날 장수들은 이미 죽고 새로운 장수들은 아직 신뢰하지 못하니 그의 지지자가 되는 당파를 보충해 자신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다. 과연 손권은 결국 출병할 수 없었다.

240년대 대장군 조상이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리자 왕기는 '시요론'이라는 논문을 지어 충고했고 질병으로 인해 불려 돌아왔다. 이후 하남윤(河南尹)으로 임명되었지만, 관직을 받기도 전에 태부 사마의에게 조상이 처형되었다. 왕기는 일찍이 조상 휘하의 관리로 있었으므로 관례에 따라 면직되었다가 복귀해 상서, 형주자사, 양렬장군이 되었다.

250년[2], 왕창오나라를 공격하자 그 밑에서 주태[3]와 함께 별장으로 참가해 이릉에서 보협을 공격했지만, 보협이 싸우려고 하지 않자 별동대를 편성했다. 별동대로 30만 석의 군량을 탈취해 오의 안북장군 담정을 사로잡았으며, 수천 명의 항복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이릉현을 설치하여 항복자들을 이주시켜 이 공으로 관내후가 되었다. 즉, 이릉성은 공략도 안 하고 이릉을 얻었다.

상창에서 강하로 옮겨 하구를 견제하여 오나라가 침공하기 힘들게 했으며, 치적을 쌓아 남방에서 그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사마사가 정권을 장악하자 허윤, 부하, 원간, 최찬 등을 정치에 협력하도록 할 만한 인물들로 추천해 사마사가 받아들였다.

255년, 조모가 제위에 오른 후 왕기를 승진시켜 상락정후로 봉했다. 관구검문흠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행감군, 가절이 되어 사마사가 이끄는 군의 선두가 되어 식량이 있는 남돈을 공격하는 계책을 진언해 남돈을 점령했으며, 문흠을 악가로 보내면서 관구검의 전력이 둘로 나뉘자 관구검이 있는 항성을 공격해 함락시켜 이 공으로 진남장군, 도독예주제군사가 되면서 예주자사를 겸임했다.

안악향후의 작위를 얻었다가 숙부에게 받은 양육의 은혜가 있어 숙부의 아들 왕교에게 관내후와 영지의 일부를 주는 것을 상주해 인정받았으며, 257년에 진동장군, 도독양예제군사를 겸임하면서 제갈탄반란사마소를 따라 나서서 진동장군, 도독양예제군사(都督揚豫諸軍事)를 대행했다. 당시 대군이 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적군의 병사가 정예였으므로 왕기에게 군대를 집중시켜 보루를 굳게 지키도록 조서를 내렸다. 왕기는 여러 번 나아가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마침 오나라에서는 주이를 제갈탄의 구원병으로 파견하여 안성(安城)에 주둔시켰는데 오의 장군인 주이의 원군 때문에 군대를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해 수춘에 포위하는 것을 유지하도록 주장했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맞아 싸워 오의 무장 우전을 죽였다.

사마소는 진군하여 구두에 주둔하고, 부대를 나누어 포위하였으므로 각 장수들은 각기 자기의 통괄지역이 있게 되었다. 왕기는 성 동쪽과 성 남쪽 두 군대를 지휘하였다. 제갈탄의 식량이 다 떨어졌고, 밤낮으로 포위된 진영을 공격하였지만, 왕기는 그때마다 맞아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시켰다.

사마소는 장수들을 파견하여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인솔하여 깊이 침입하여 당자 등의 자제를 불러 영접하도록 하고 이들을 이용하여 오나라를 전복하는 형세를 만들려고 생각했다. 왕기가 간언하여 말했다.
"옛날 제갈각동관(東關)의 승리에 편승하여 장강 이남의 병사를 다하고 수춘의 신성(新城)을 포위하였는데, 성은 함락되지 않았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강유는 도수 근처에서의 승리를 틈타 가볍게 무장한 병사를 인솔하여 깊숙이 침입하였지만, 식량이 계속 지원되지 못하였으므로 군대는 상규에서 좌절되었습니다. 무릇 크게 승리를 한 후에는 아래 위에서 모두 적군을 경시합니다. 적군을 경시하면 곤란한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적군은 방금 밖에서 패하였고, 또 내부적인 걱정이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수비를 바르게 하고 국사를 생각할 때입니다. 게다가 병사들은 1년이 넘게 출정하였으므로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포로가 되거나 죽은 적군의 수는 10만 명이고, 죄인은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역대의 정벌할 때부터 이와 같이 자기 군대를 보존하고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이미 많다고 생각하고 다시 적군을 추격하여 달려가지 않고 자신의 위풍이 꺾일까 두려워했습니다."

사마소는 비로소 진군하는 것을 멈추었다. 회남이 막 평정되자, 이후 정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와 동무후가 되었다가 부하에게 공적을 양보하여 부하 중에서 장사, 사마 7명이 후가 되었다.

258년에는 어머니를 잃었다가 조서를 내려 그 흉한 소식을 비밀로 하고, 왕기의 부친 왕표의 유해를 맞아 낙양에 합장시키고, 왕표에게 북해태수를 추증했다.

259년에는 정남장군, 도독형주제군사가 되어 신야에 주둔했다.

260년, 조환이 제위에 오르자 식읍을 천호 증가시켜 5천 7백 호가 되고 앞뒤로 아들 두 명이 정후와 관내후로 봉해졌다.

261년에는 오나라의 장수인 등유의 거짓 투항을 간파했다. 사마표 전략에 따르면 이해 3월 양양태수 호열이 등유와 이광(李光) 등의 무리가 항복하고 사자를 파견하고 인질을 보내왔다고 서신을 보냈다. 사마소는 왕기의 제군에게 조서를 내려 호열로 하여금 1만의 군을 감독케하여 형주 의양군 남쪽에 의성에 주둔해 영접케하였는데 왕기는 적의 사항을 의심하여 등유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을 말했고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많은 병사를 동원하여 깊이 들어가서 이에 호응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왕기는 서신을 보내 "이익을 구하기 위해 함부로 적지에 깊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옛날 자오의 역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핍절했던 사례, 강유가 깊숙히 쳐들어왔다가 치중을 기다리지 못하고 병사들이 굶어 군을 상규로 물렸던 사례, 문흠, 당자가 오나라의 중병을 일으켜 수춘에 이득을 챙기려 왔다가 몸이 죽은 사례를 예로 들어 말렸다. 과연 이후에 등유는 투항하지 않았다.

같은 해에 사망해 사공추증되었고 경후(景侯)란 시호를 받았다. 아들 왕휘가 후사를 이었지만, 일찍 죽었다. 함희 연간(264년 ~ 265년), 오등급 작위 제도가 제정되었는데, 왕기의 공으로 왕기의 손자 왕이를 바꿔 후로 봉하고, 동무(東武)의 남은 식읍을 한 아들에게 하사하고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3. 삼국지연의

관로 이야기에 나오고 후한 말 사람으로 나오다가 역사대로 관구검, 제갈탄을 진압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우전일기토로 죽였다.오오 노익장 오오

4. 평가

서진이 세워지고 조서를 내렸는데 왕기는 덕행이 현저했으며 공훈을 세웠고, 또 몸을 닦아 청결하고 소박하였으며 이익을 얻는 산업을 행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중요한 관직에 있었지만 집에는 사사로이 축적하는 일이 없었으니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행위는 더욱 빛나고 있어 세속을 격려할 만한 인물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여 노비 2명을 그의 집에 하사했다.

진수서막은 청결하고 통달하였고, 호질은 평소하는 일이 바르고 순수했으며, 왕창은 군주를 보좌하여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식견과 도량을 갖고 있었고, 왕기는 학문과 품행이 곧고 결백했다며 이들은 모두 지방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사람들에게 칭송되는 빛나는 공적을 남겼고 이들은 국가의 훌륭한 신하이며 당시의 걸출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진남, 진동, 정동, 정남장군 등 외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죽은 후 사공에 추증될 만큼 능력이 있었다.

일중독으로 유명한 왕릉은 주민들 사이에서 훌륭한 관원으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왕기의 가세로 인해 '중원 최고의 관원'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됐다. 사공 왕랑이 이를 알곤 왕기를 자신의 수하로 쓰기 위해 지방직 공무원인 왕기를 국가직 공무원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하지만 왕기를 두고두고 부려먹으려 한 왕릉이 이를 거부했다. 결국 사마의가 "왕기 내가 쓰려고 하는데 좋게 말로 할 때 보내지"라고 한 후에야 왕기는 중앙 관리가 됐다. 이리 하여 왕기는 중서시랑이 되었다.

도독주제군사와 주자사는 보통 분리해서 임명했는데(정확히는 따로따로 임명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왕기는 문무겸전이라 혼자서 다 형주자사와 예주자사 시절에 도독까지 겸임했다. 형주감군(도독 중에서는 급이 낮은 도독) 시절엔 관구검의 난을 토벌하고 예주도독 시절엔 제갈탄의 난을 토벌했다.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할 때 관직이 이색적인데 진남장군과 진동장군에 부절을 가지고 있고 2개 주의 군사를 통괄해서 '정진남장군행진동장군사지절도독양예주제군사'다.

사마소는 자신의 아버지 사마의가 스카웃해서 사마씨의 인물이 된 왕기에게 진남장군 행진동장군 사지절 도독형예제군사 형주목 영예주목을 내리는데 이는 예전 유표가 받았던 관직과 비슷한 수준으로 사마씨의 왕기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사마소는 사실상 대오전선을 왕기에 일임하였다. 사마소가 직할 장군들에게 전투 중 왕기가 지휘하는 26군의 작전 경계선을 넘어 가게 되더라도 왕기가 하는 거 구경이나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사마소는 왕기가 다 알아서 할 거라 확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사도 그렇고 사마소도 그렇고 100% 신뢰하는 유능한 장수가 개념없는 방해꾼의 훼방에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천재는 천재였는지 삼공을 역임한 왕릉, 왕랑은 물론이고 사마의까지 왕기를 스카웃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모습을 보였다. 사마사와 사마소는 왕기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아버지가 왕기를 직접 스카웃했으니 말이다. 사마소의 왕기에 대한 신뢰는 왕기의 능력과 공적 때문이긴 하지만, 더 깊게 살펴보면 사마의의 왕기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5. 기타 창작물

파일:external/kongming.net/260-Wang-Ji.jpg
삼국지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037.jpg
삼국지 12, 13, 14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모든 능력치가 70대이지만 능력치 총합이 높은 편이라 촉한장억, 의 무장인 이전과 같은 급이다. 게다가 아이템 시요론을 장착하고 있어서 지력 또는 정치에서 부가 능력치를 받는다. 전형적인 문무겸비형 장수의 모습을 보이는 타입. 또한 12편에서부터 지력, 정치가 80대로 상향되면서 문관으로도 장수로도 좋은 효율을 보인다.

중년의 무관 이미지로 차용되었는데, 왕기가 무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점이 250년, 즉 60살 쯤이다. 즉 왕릉과 비슷하게 일러스트의 이미지와 본격적으로 활약한 시기가 전혀 안 겹치는 사람들 중 1명.

삼국지 3에서는 장군이 될 수가 있다. 이상하게 수명이 8[4]인데 0으로 취급되어 있어서 수명이 미칠 듯이 짧다. 거의 60대인 장수가 죽는 것마냥 왕기는 40살의 나이로 죽는다. 게다가 리메이크판에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파일:삼국지_6_왕기.png
삼국지 6에서의 최대 능력치는 통솔 76/무력 62/지력 70/정치 63/매력 60. 일러스트가 극강의 베이비 페이스다. 문제는 이 인물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는 60세가 넘어서다. 전술 시뮬레이션 모드에 한 번 등장하는데 이 때가 68세(...).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75/지력 75/정치력 76에 시요론의 정치 +4 보정을 받고 시작한다. 분투, 돌파, 제사, 충차를 가진 준수한 장수. 특히 후반기에 등장하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가치가 높은 장수.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8/무력 75/지력 74/정치력 76/매력 75. 시요론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질 지력은 +2가 되어 76이다. 총합 능력치 378로 전체 41위. 전투, 내정 어느 쪽으로 돌려도 후기 시나리오에선 쓸 만하다. 특기는 농업, 보수, 치안, 돌격, 일제, 진정, 유인, 나선, 위압. 총 9개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78/지력 76/정치력 75/매력 75로 총합 381에 전체 35위. 참고로 삼국지 11에서 전 능력 75 이상인 장수는 곽회, 왕기, 여몽 3명 뿐이다. 적성도 창, 병기 S로 준수하고 특기도 좋은 창장이라서 후반기 무장치고 매우 쓸 만하다. 게다가 모든 능력치가 적당히 높기때문에 영웅집결 같은 시나리오에서 작정하고 육성하면 전 능력치 100을 찍을 수 있으며, 모든 일을 시켜도 적당히 잘 하는 올라운더 A급 무장. 특히 225년 이후 후반기 시나리오에서 빛을 발하는 장수. 이 특기 때문에 창장 왕기라고 불린다.

삼국지 12에서는 PS3판에서 새로 추가됐다. 능력치가 복귀 무장치고 매우 높다. 능력치는 통솔력 77/무력 72/지력 86/정치력 85이며, 전작에 비해 지력과 정치력이 크게 오르면서 더 좋아졌다.[5] 심지어 전법은 전군병격이기 때문에 전장에서도 매우 쓸만하다. 전작보다 무력이 크게 너프가 되었지만 능력치가 정사 기준으로 상향되었기 때문에 위빠들은 환호한다. 만총 등 전군병격을 가진 무장이 또 있고, 안 그래도 창병이 약간 부실한 위나라에게 더욱 쓸 만하다. 일러스트는 검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으면서 바닥에 짚고 있다.

삼국지 13의 능력치는 12편과 같다. 병과적성이 A/A/B로 매우 준수한데, 그에 비해 특기는 농업 3, 순찰 1 뿐. 전투특기가 하나도 없는 점이 뼈 아프다. 전수특기는 농업이며 전법은 창병공격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9, 무력 75, 지력 76, 정치 77, 매력 75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 무력이 3 상승한 대신 지력이 10, 정치력이 8 하락했다. 개성은 붕벽, 태연, 진흥, 농정, 학자, 주의는 왕도, 정책은 화계연구 Lv 4, 진형은 어린, 봉시, 추행, 충차, 전법은 돌격, 경파, 업화, 저지, 충차, 친애무장은 왕릉, 혐오무장은 없다.

파일:전략왕기.png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관로 이야기에 잠깐 한 컷만 등장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우주전함 야마토코다이 스스무로 패러디되어서 나왔다. 패러디 원본을 따라 청년으로 나오는데, 왕기는 처음 등장한 신성 전투 편 시점에서 이미 60세였다. 고관 전투 (2)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신성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죽은 호질의 뒤를 이어 형주자사가 된 인물이며, 엘리트 오브 엘리트라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고 본디 왕릉 휘하에 있었지만 사마의가 간절히 요청하여 간신히 빼온 인재였다고 묘사된다.

왕창의 부름을 받아 주태와 함께 왕창의 작전 설명을 들었고, 이후 왕창의 지시에 따라 양양에서 이릉 공략에 착수했다. 이릉을 지키던 보협이 철저한 방어 태세를 취하자 성은 그대로 두고 근처의 창고들을 모두 접수했고, 그렇게 왕기가 이릉의 거의 모든 식량을 확보하자 자연스레 백성들이 따라왔고 이에 왕기는 그 백성들을 이끌고 이릉 위에 또다른 이릉을 만들어 버리며 이릉 지역을 접수한 것으로 묘사된다.[6]

낙가 전투 편에서는 관구검이 난을 일으켰던 당시 사마사에 의해 난을 제압할 선봉장으로 임명됐다. 지구전을 주장하던 정무와는 달리 적의 예기는 이미 꺾였고, 항성에서 적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음이 분명하다며 이럴 때 해자나 성벽을 쌓으면 아군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으니 속전속결로 강력한 힘을 보여 적이 무릎을 꿇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사가 구체적으로 뭘 할 거냐고 묻자 식량창고가 있는 남돈 점령을 주장했고 사마사가 허락하자 남돈 공략에 착수한다. 이후 사마사가 걱정에 못 이겨 결정을 번복하고 왕기의 진군을 막으려 했지만 왕기는 장군은 전장에서는 군령을 받지 않는 법이라며 화를 내며 빠르게 이동해 남돈을 점령했다.

수춘2 전투 편에서는 사마소의 명을 받아 난을 일으킨 제갈탄 제압을 위해 진건과 함께 수춘을 포위하러 출진했다. 왕기 본인은 남동쪽을 맡고 진건에게는 서북쪽을 포위하라 말하기도 했다. 남쪽에서 주이가 올라오며 오히려 왕기와 진건이 위험에 빠지는 듯했지만[7] 주태와 석포가 주이를 제압하며 위기를 넘긴 것으로 묘사됐다. 그리고 수춘의 제갈탄 등이 지원군을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한 동안 왕기는 참호와 보루의 보수를 거듭해 아예 수춘을 빙 둘러싼 성 하나를 추가로 만들어버린 듯한 모양새를 만들어 식량이 떨어져 결사항전을 시도하려는 제갈탄에게 제대로 물을 먹인 것으로 묘사됐다. 이후 수춘의 상황이 악화일로를 걸으며 사마소가 대놓고 성 앞에 서 있어도 화살 한 대 날리는 병사가 없는 지경이 되자 바로 다음 날 대대적인 공격 명령을 내려 수춘을 완전히 제압했다.

전투외편 7편에서는 콧수염이 자란 모습으로 재등장. 호열에게서 오의 둔장들이 귀순 의사를 표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소가 왕기로 하여금 이들을 영접하게 하려 했지만, 왕기는 이는 지나치게 달콤한 제안이기에 분명 거짓일 거라고 딱 잘라 말했고, 사마소가 이에 납득하였기에 출병하지 않았다.

영안 전투 편에서 왕기가 전에 털어버렸던 보협이 재등장했는데, 왕기 본인은 진작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간단히 언급되기도 했다.


[1] 안평태수 당시 관로와의 일화가 있다.[2] 이때 나이가 무려 60세다![3] 오나라의 주태와는 동명이인[4] 최대 수명은 7이다.[5] 총합이 320유비보다 4 정도 높다. 기거에 자신의 저서 시요론을 장착한다면 지력은 89로 오른다.[6] 왕기가 이릉을 얻는 부분을 본 독자 중 하나는 "문관이기에 가능한 승리" 라는 감상을 남겼다. 확실히 단순 군사력이 아닌 행정 지역을 뺏어오는 방식으로 이겼으니 문관의 발상력의 승리다.[7] 한편 이 때 조모가 이럴 때는 포위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왕기에게 포위를 풀고 북산으로 가서 다시 진을 짜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왕기 본인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포위를 속행, 역으로 참호를 더 깊게 파고 보루를 더 높이 쌓은 것으로 묘사된다. 왕기 본인은 길을 열어 줘서 적들이 성을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방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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