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20:23:50

관구검의 난

관구검·문흠의 난 | 毌丘儉文欽之亂
수춘삼반의 일부
시기
255년
장소
양주 구강군 수춘현
교전세력
사마사 일파관구검 일파
지휘관
사마사
왕기
등애
종회
제갈서
제갈탄
관구검
관구전
문흠
문앙
손준
유찬
정봉
지원세력
손오
결과
관구검의 난 진압
영향
회군 도중 사마사의 사망으로 사마소의 권력 승계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반란과 토벌 시작3.2. 손오의 개입과 반란 토벌
4. 결과5. 사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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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조위 후기 수춘삼반의 두번째 반란.

조위의 무장 관구검양주자사 문흠과 함께 회남 반역향 수춘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관구검-문흠의 난이라고도 한다.

2. 배경

관구검은 하후현, 이풍 등과 친하게 지냈고 문흠은 조상의 동향인이었다. 하지만 조상은 고평릉 사변으로 실각한 뒤에 숙청당해 죽고 이풍은 사마사 제거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역시 숙청당해 죽었으며 하후현 또한 이에 연루되어 처형된다.

결정적으로 황제 조방마저 폐위되고 고귀향공 조모가 옹립된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관구검과 문흠은 위나라의 권력을 틀어쥔 사마씨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3. 전개

3.1. 반란과 토벌 시작

255년 정월, 수십 장에 이르는 혜성이 나타나 서북쪽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오(吳), 초(楚)의 분야에서 떠올랐다. 관구검, 문흠이 기뻐하며 이를 자신들에게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다.

12일, 태후 명원황후의 조서를 칭탁해 대장군 사마경왕(司馬景王, 사마사)의 죄상을 적어 여러 군국(郡國)에 돌리고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회남(淮南)에 주둔중인 장수(將守,수비장)들을 위협하여 관리, 백성들을 모두 수춘성(壽春城)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성 서쪽에 제단을 만들고 삽혈(歃血)하며 거병할 것을 맹세했다.

이후 노약자들을 나눠 수춘성 지키게 하고 본인들은 5-6만 군사를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서쪽으로 (項)[1]에 이르렀다. 관구검은 항현의 성을 굳게 지키고 문흠은 바깥에 있으면서 유병(游兵,유격병,기동부대)으로 활약했다.[2]

관구검은 제갈탄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예주(豫州)의 관리와 백성들의 지원을 요청했는데 제갈탄은 사자를 단칼에 베어버린다.[3]

사마사는 공경(公卿)들을 모아 토벌할 계책을 모의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은 대다수가 여러 장수를 파견하여 이를 격파하자는 것이었다.[4]

오직 부하왕숙만이 사마사가 직접 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마사가 따르지 않으려 하자 부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초(淮楚) 지역의 병사들은 날래고 관구검 등은 전력을 기울여 멀리 싸우러 왔으니 그 예봉을 당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 장수들이 전투를 하다보면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는데 대세를 놓고 한 번 실수하게 되면 즉시 공의 대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에 25일, 사마사가 직접 난을 진압하러 나선다.[5]

사마사 본인은 중군(中軍)과 외군(外軍)을 통수해 관구검군을 치고, 따로 제갈탄(諸葛誕)을 시켜 예주(豫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안풍진(安風津)에서 수춘(壽春)으로 가게 하고, 정동장군(征東將軍) 호준청주(靑州)서주(徐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초(譙), 송(宋) 사이로 출병하여 관구검의 귀로(歸路)를 끊게 했다.

이후 사마사는 여양에 머무르면서 왕기를 선봉으로 세워 진군하게 한다. 사람들이 모두 관구검과 문흠은 사납고 교활하므로 직접 싸우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자 왕기에게 조서를 내려 진군을 멈추도록 했다.

그러자 왕기는
“관구검 등이 전군을 이끌고 내지로 깊숙이 침입하여 공격할 수 있는데도 오랜 기간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들의 간사함과 허위가 이미 드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군의 위엄과 무예를 과시하여 백성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고 진군을 멈추고 높은 보루를 쌓아 마치 두려워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병사를 사용하는 형세가 아닙니다. 만일 침략당한 백성이나 또는 주(州)군(郡)의 병사들이나 가족이 적병의 포로가 된다면 다시 흩어지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며, 관구검 등에게 협박을 받은 자는 자신의 지의 무거움을 생각하고 감히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병사를 사용할 수 없는 땅에 멈추게 하여 사악한 사람들의 근거지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나라가 이 기회를 빼앗는다면, 회남(淮南)은 우리나라 소유의 영토가 되지 않을 것이고, 초(譙)ㆍ패(沛)ㆍ여(汝)ㆍ예(豫)는 위험하여 안정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계책상의 큰 실패입니다. 군대는 당연히 신속히 나아가 남돈(南頓)을 근거지로 해야만 합니다. 남돈에는 큰 저각(邸閣)이 있는데, 계산해 보면 군사들이 40일간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이 있습니다. 견고한 성을 갖고 저장된 곡물을 이용하여 선수를 쳐서 적의 전의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을 평정하는 중용한 수단입니다.”

왕기가 여러 차례 청하였으므로 곧 나아가 은수(濦水)를 점거할 것을 허락했다.[6]

윤 1월 1일, 은교(濦橋)에 주둔하니, 관구검의 장수 사초(史招)와 이속이 서로 뒤이어 항복하여 왔다.[7]

왕기가 또 진언했다.
“전쟁에는 졸속(拙速)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공교롭게 하고 더디게 오래한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현재 밖으로는 강적이 있고, 안으로는 반란을 일으킨 신하가 있습니다. 만일 당시에 결정하지 못한다면, 사태의 깊고 얕음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장군(將軍)이 신중함을 지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신중함을 지키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도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견고한 성을 근거로 하고 보루를 지켜 국가가 축적한 식량은 적의 식량이 되는 한편, 우리 군사들은 먼 곳에서 식량을 운송하니, 크나큰 실책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사는 군사들이 도착하여 집결한 후에 결정하려고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왕기가 말했다.
“장군은 군대 안에 있으므로 당신의 명령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적이 얻으면 이익이 되고, 우리가 얻어도 이익이 되는 땅, 이것은 성을 빼앗는다는 말로 남돈이 바로 이와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곧장 진군하여 남돈(南頓)을 점거했다. 관구검도 항(項)으로부터 출발하여 남돈을 차지하려고 했으나, 출발하여 10여 리 되는 곳에서 왕기가 먼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항으로 돌아왔다.

3.2. 손오의 개입과 반란 토벌

이 무렵인 윤 1월 9일, 제갈각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오나라손준은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수춘(壽春)을 습격하려고 한다.

연주자사로 있던 등애는 관구검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재빨리 낙가성으로 달려가 부교를 만들고 사마사가 여양에 도착할 무렵에 성을 점거한다. 이때 등애가 거느린 병력이 만여 명이었다고 한다.[8]

관구검은 등애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문흠에게 병사를 지휘하여 등애를 습격하게 한다. 이에 사마사는 함매(銜枚)[9]하게 하고 재빨리 낙가(樂嘉)로 달려갔다.

문흠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낙가로 가다가 사마사의 군대를 마주친다.

이때 문흠의 아들 문앙이 문흠에게 말했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때이니 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에 2대(隊)로 나누어 밤중에 협공했다. 문숙이 장사(壯士)들을 이끌고 먼저 도착해 사마사를 큰 소리로 부르니 군중(軍中)이 놀라 어지러워졌다.

문흠이 문앙과 합류하기 전 중앙조정의 사신으로 파견된 X맨 윤대목은 문흠에게 사마사의 안질을 누설하며 좀만 더 버틸 것을 암시했으나, 이를 알지 못한 문흠은 그를 쫓아내었다.

하지만 문흠이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고 때마침 날이 밝자 문앙과 문흠은 군을 이끌고 후퇴하고 사마사는 군대를 보내 추격하게 한다.

그러자 문앙은 문흠에게
먼저 그 기세를 꺾지 않으면 달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는 기병 10여기와 함께 적진으로 뛰어들어 선봉을 꺾고 진세를 무너뜨리니 그가 가는 곳마다 적군이 흩어져 달아났다고 한다.

문흠은 문앙의 활약으로 추격이 무뎌지자 그 틈을 타서 도망간다.

하지만 사마사가 사마련에게 기병 8천을 이끌고 문흠군의 옆구리를 치게 하고, 악침은 보병을 거느리고 그 뒤를 끊게 하자 문흠군은 궤멸하여 항복하는 자가 속출했다.(윤 1월 16일)[10]

문흠은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간신히 살아남았고 오나라에 항복한다.(윤 1월 19일)[11]

한편 왕기는 문흠이 낙가를 공격하며 군이 나눠진 틈을 타서 관구검이 지키는 항성을 공격한다.[12] 관구검은 문흠이 싸움에서 패했다는 말을 듣고 밤중에 도주하지만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일반 백성(民)인 장속에게 화살을 맞고 죽은 뒤 목이 경도(京都)로 보냈졌다.(윤 1월 21일)[13]

오나라의 손준은 제갈탄이 수춘을 점거하자 다시 물러나고 위나라의 장군 조진(曹珍)이 이를 추격하나 고정(高亭)에서 오나라에 대패한다.

이 전투에서 정봉여거가 활약했는데 정사에 나오는 정봉의 활약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정봉이 말에 타고 긴 창(矛)을 들고 적의 진중으로 돌입하여, 수백명의 머리를 베고, 군기(軍器)를 노획했다.

하지만 오나라의 장수 유찬은 병 때문에 미리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제갈탄의 장수인 장반에게 고파(菰陂)에서 따라잡힌다.

유찬은 이기지 못할 것을 알고 조카를 먼저 돌려보낸 후 탄식한다.
내 싸움엔 항상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 이처럼 병이 깊으니, 진실로 천명(天命)이구나!

그리고 마침내 해를 입으니 이때 73세였다.

4. 결과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사마씨의 손실은 컸다. 문앙이 쳐들어왔을때 놀라서 영 좋지 않은 눈이 빠진 사마사는 당시에는 이빨로 옷을 물어 뜯으며 버텼지만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윤 1월 28일[14]/29일[15]허창에서 사망한다. 이에 위나라의 황제 조모는 사마씨의 권력 세습을 저지하고 황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마소는 허창에 남고 부하가 군대를 통솔하여 낙양으로 되돌아오라고 한다.

하지만 종회의 계략으로 사마소가 대군을 지휘하여 상경하여 무력시위를 벌이자 조모는 사마소를 축출하는데 실패하고 결국 2월 5일에 사마소를 대장군 녹상서사로 임명하며 사마씨 정권은 안정적으로 이어진다.

한편 수춘에서는 위나라가 본인들을 처벌할까봐 도주하거나 오나라로 넘어가는 백성들이 많았다. 이에 위나라는 윤 1월 29일에 관구검과 문흠에게 속아서 참가한 자들은 처벌하지 않겠다고 말해 민심을 달랜다.

삼국지에는 윤 1월 29일에 사마사가 죽었다고 나오고 진서 경제기는 그 전날인 28일이라 나오는데 만약 사마사가 29일에 죽었다면 사마사는 죽기 직전에 해당사항을 처리하는 것으로 관구검의 난을 마무리 했다는 뜻이고 28일이라면 마무리는 사마소가 처리한 것이 된다.

이 반란은 낙가에서 관구검, 문흠이 허튼짓을 하지 않고 장기전으로 유도하며 초반에 어느정도 선전했더라면 오나라의 간섭전쟁과 사마사의 죽음까지 겹쳐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가능성도 있었다. 사마씨 입장에서는 관구검, 문흠이 무능했던 것이 천만다행일 지경이다.

관구검의 난을 토벌한 제갈탄2년 뒤 똑같은 수춘땅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관구검의 난에서 생존한 문흠, 문앙 부자는 이후 제갈탄의 난에 참전했다가 문흠은 제갈탄에게 살해당하고 문앙 형제는 결국 도로 위나라에 투항한다.

5. 사서의 기록

5.1. 정사 삼국지

二年春正月乙丑,鎮東將軍毌丘儉、楊州刺史文欽反。戊寅,大將軍司馬景王征之。癸未,車騎將軍郭淮薨。
2년(255년) 봄 정월 12일(을축일), 진동장군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다.

25일(무인일), 대장군 사마경왕이 이들을 정벌했다.

30일(계미일), 거기장군 곽회(郭淮)가 세상을 떠났다.

閏月己亥,破欽於樂嘉。欽遁走,遂奔吳。甲辰,安風津都尉斬儉,傳首京都。
윤달 16일(기해일), 낙가(樂嘉)에서 문흠을 쳐부수자, 문흠은 도주하여 오나라로 달아났다.

21일(갑진일), 안풍진(安風淮)의 도위(都尉)가 관구검(儉)을 참수하고 머리를 수도로 보내왔다.

壬子,復特赦淮南士民諸為儉、欽所詿誤者。以鎮南將軍諸葛誕為鎮東大將軍。司馬景王薨于許昌。
29일(임자일), 또 회남의 사대부와 백성들 가운데 관구검과 문흠에게 속은 사람을 특별히 사면해 주었다. 진남장군 제갈탄(諸葛誕)을 진동장군으로 삼았다. 사마경왕이 허창에서 사망했다.

二月丁巳,以衞將軍司馬文王為大將軍,錄尚書事。 甲子,吳大將孫峻等衆號十萬至壽春,諸葛誕拒擊破之,斬吳左將軍留贊,獻捷于京都。
2월 5일(정사일), 위장군 사마문왕을 대장군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임명했다.

12일(갑자일), 오나라 대장 손준(孫峻) 등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수춘(壽春)에 도달했지만, 제갈탄이 이들을 맞아 싸워 격파시켰으며, 오나라 좌장군 유찬(留贊)을 죽이고 승전보를 수도로 보냈다.

秋七月,以征東大將軍胡遵為衞將軍,鎮東大將軍諸葛誕為征東大將軍。
가을 7월, 정동대장군 호준(胡遵)을 위장군에, 진동대장군 제갈탄을 정동대장군에 임명했다.
「삼소제기」링크
당초 관구검(毌丘儉)은 하후현(夏侯玄), 이풍(李豊) 등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양주자사(揚州刺史) 전장군(前將軍) 문흠(文欽)은 조상(曹爽)의 읍인(邑人,동향인)으로, 효과추맹(驍果麤猛,용맹과감하고 거칠고 사나움)하여 수차례 전공을 세웠고 (적과의 전투에서의) 노획품을 부풀려 (보고하길) 좋아해 이로써 (조정의) 총상(寵賞,영총과 포상)을 구했으나 대부분 허락되지 않자 원한(怨恨)이 날로 심해졌다. 관구검이 이를 헤아려 문흠을 후대하여 두 사람의 우의가 돈독해졌고 문흠 또한 감격하여 (관구검을) 떠받들고 성심으로 대하며 두마음을 품지 않았다.

정원(正元) 2년(255년) 정월, 수십 장에 이르는 혜성(彗星)이 나타나 서북쪽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고 오(吳), 초(楚)의 분야에서 떠올랐다. 관구검, 문흠이 기뻐하며 이를 자신들에게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다. 마침내 태후(太后)의 조서를 칭탁해 대장군 사마경왕(司馬景王,사마사司馬師)의 죄상을 적어 여러 군국(郡國)에 돌리고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따로 주둔하던 회남(淮南)의 장수(將守,수비장)들을 위협하고 아울러 크고 작은 관리, 백성들을 모두 수춘성(壽春城)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성 서쪽에 제단을 만들고 삽혈(歃血,희생의 피를 마시거나 입술에 바르는 것)하며 칭병(稱兵,거병)할 것을 맹세했다. 노약자들을 나눠 (수춘)성을 지키게 하고 관구검, 문흠은 스스로 5-6만 군사를 거느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서쪽으로 항(項)[16]에 이르렀다. 관구검은 (항현 성을) 굳게 지키고 문흠은 바깥에 있으면서 유병(游兵,유격병,기동부대)으로 활약했다.

대장군(大將軍)(→사마사)이 중군(中軍)과 외군(外軍)을 통수해 관구검군을 치고, 따로 (진남장군 도독예주인) 제갈탄(諸葛誕)을 시켜 예주(豫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안풍진(安風津)에서 수춘(壽春)으로 향하게 하고 정동장군(征東將軍) 호준(胡遵)은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초(譙), 송(宋) 사이로 출병하여 그의 귀로(歸路)를 끊게 했다. 대장군은 여양(汝陽)[17]에 주둔하며 감군(監軍) 왕기(王基)에게 전봉(前鋒,선봉)의 제군(諸軍)을 지휘해 남돈(南頓)[18]에서 관구검군을 기다리게 했다.

이제 제군(諸軍)들이 모두 견벽(堅壁)한 채 더불어 싸우지 않아 관구검, 문흠은 진격하여 싸울 수 없고 퇴각하자니 수춘이 습격받을까 두려워 돌아갈 수도 없었으니 계책이 궁해져 어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회남(淮南)의 장사(將士,장졸)들은 집이 모두 북쪽(→중국 내지)에 있어 중심(衆心,뭇 사람들의 마음)이 저산(沮散,꺾이고 흩어짐,궤산)하여 항복하는 자가 계속 이어지니 오직 회남(淮南)에서 새로 귀부한 농민(農民)만이 그를 위해 부려질 뿐이었다.

대장군이 연주자사(兗州刺史) 등애(鄧艾)를 보내 태산(泰山)의 제군(諸軍) 만여 명을 지휘해 낙가(樂嘉)에 이르러 약세를 보여 그를 유인하고는 대장군이 곧이어 수([洙])로부터 도착했다. 문흠이 이를 알지 못하고 과연 밤중에 와서 등애 등을 습격하였는데 때마침 날이 밝아 대군(大軍)의 병마(兵馬)가 많은 것을 보고는 이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대장군이 효기(驍騎,용맹한 기병)를 풀어 추격하여 그를 대파하였고 문흠은 달아났다. 이 날 관구검은 문흠이 싸움에서 패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밤중에 달아나고 무리가 붕괴하였다. 신현(愼縣)[20]에 도착했을 때 좌우의 사람과 병사들이 점차 관구검을 버리고 떠났고 관구검은 홀로 동생인 관구수(毌丘秀), 손자 관구중(毌丘重)과 함께 물가의 풀숲에 숨었다.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일반백성(民)인 장속(張屬)이 나아가 활을 쏘아 관구검을 죽이고 그 목을 경도(京都)로 보냈다. 장속은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 관구수, 관구중은 달아나 오나라로 들어갔다. 장사(將士)들 중 관구검, 문흠에게 박협(迫脅,협박)되었던(위협받아 뒤따랐던) 자들은 모두 귀항(歸降,투항)했다.

관구검의 아들인 관구전(毌丘甸)은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였는데 앞서서 관구검이 장차 군사를 일으키려 꾸미는 것을 알고 몰래 가속(家屬)들을 빼내어 거느리고는 신안(新安)[21]의 영산(靈山) 위로 달아났다. 이를 따로 공격하여 격파하고 관구검의 삼족을 멸했다.

문흠(文欽)이 달아나 오나라로 들어가니 오나라에서 문흠을 도호(都護), 가절(假節), 진북대장군, 유주(幽州牧), 초후(譙侯)로 삼았다.
「관구검전」링크
정원(正元) 2년(255) 봄,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다. 어떤 사람은 사마경왕(司馬景王) 자신이 평정할 필요는 없고, 태위(太尉) 사마부(司馬孚)를 파견하여 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직 부하와 왕숙(王肅)만은 그에게 권했다. 그래서 사마경왕은 친히 정벌하러 갔다.

부하는 사마사에게 함께 출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했지만 사마사가 따르려 하지 않았다. 부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초(淮楚) 지역의 병사들은 날래고 관구검 등은 전력을 기울여 멀리 싸우러 왔으니 그 예봉을 당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 장수들이 전투를 하다보면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는데 대세를 놓고 한 번 실수하게 되면 즉시 공의 대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 당시 사마사는 눈에 난 혹을 막 째었는데 상처가 몹시 심했다. 부하의 말을 듣더니 결연히 일어나 말했다.

“내가 수레를 불러 급히 동쪽으로 가겠다.” - 「한진춘추」

부하로써 상서복야(尚書僕射)를 대리하도록 하여 함께 동쪽으로 갔다. 관구검과 문흠을 격파시킨 것은 부하의 책모가 있었다. 사마경왕(景王)이 죽자, 부하는 사마문왕(司馬文王)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돌아가 사마문왕의 정치를 보좌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종회전(鍾會傳)에 있다.
「부하전」링크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기를 행감군(行監軍)ㆍ가절(假節)로 임명하고 허창(許昌)의 군대를 통솔하도록 했다. 그는 허창으로 가서 사마경왕(景王)과 만났다. 사마경왕이 말했다.

“그대의 예측으로 관구검 등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 같소?”

왕기가 대답했다.

“회남(淮南)의 반역은 관리와 백성들이 난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관구검 등이 사람들을 속이고 협박하여 눈앞에서 처형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무리를 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대군(大兵)이 임한다면, 반드시 그 땅은 붕괴되고 와해될 것이고, 관구검(儉)과 문흠(欽)의 머리는 조회가 끝나지 않아서 군문(軍門)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사마경왕(景王)이 말했다.

“옳소.”

곧 왕기(基)에게 명하여 대군의 선봉이 되도록 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관구검과 문흠은 사납고 교활하므로 직접 싸우는 것은 곤란하도록 했다. 왕기에게 조서를 내려 진군을 멈추도록 했다. 왕기의 판단은 다음과 같았다.

“관구검 등이 전군을 이끌고 내지로 깊숙이 침입하여 공격할 수 있는데도 오랜 기간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들의 간사함과 허위가 이미 드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군의 위엄과 무예를 과시하여 백성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고 진군을 멈추고 높은 보루를 쌓아 마치 두려워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병사를 사용하는 형세가 아닙니다. 만일 침략당한 백성이나 또는 주(州)와 군(郡)의 병사들이나 가족이 적병의 포로가 된다면 다시 흩어지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며, 관구검 등에게 협박을 받은 자는 자신의 지의 무거움을 생각하고 감히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병사를 사용할 수 없는 땅에 멈추게 하여 사악한 사람들의 근거지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나라가 이 기회를 빼앗는다면, 회남(淮南)은 우리나라 소유의 영토가 되지 않을 것이고, 초(譙)ㆍ패(沛)ㆍ여(汝)ㆍ예(豫)는 위험하여 안정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계책상의 큰 실패입니다. 군대는 당연히 신속히 나아가 남돈(南頓)을 근거지로 해야만 합니다. 남돈에는 큰 저각(邸閣)이 있는데, 계산해 보면 군사들이 40일간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이 있습니다. 견고한 성을 갖고 저장된 곡물을 이용하여 선수를 쳐서 적의 전의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을 평정하는 중용한 수단입니다.”

왕기가 여러 차례 정하였으므로 곧 나아가 은수(濦水)를 점거할 것을 허락했다. 도착한 후에 또 진언했다.

“전쟁에는 졸속(拙速)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공교롭게 하고 더디게 오래한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현재 밖으로는 강적이 있고, 안으로는 반란을 일으킨 신하가 있습니다. 만일 당시에 결정하지 못한다면, 사태의 깊고 얕음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장군(將軍)이 신중함을 지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신중함을 지키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도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견고한 성을 근거로 하고 보루를 지켜 국가가 축적한 식량은 적의 식량이 되는 한편, 우리 군사들은 먼 곳에서 식량을 운송하니, 크나큰 실책인 것입니다.”

사마경왕(景王)은 군사들의 집결 도착을 기다린 후에 결정하려고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왕기가 말했다.

“장군은 군대 안에 있으므로 당신의 명령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적이 얻으면 이익이 되고, 우리가 얻어도 이익이 되는 땅, 이것은 성을 빼앗는다는 말로 남돈이 바로 이와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곧장 진군하여 남돈(南頓)을 점거했다. 관구검 등도 항(項)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시 남돈으로 가서 다투려고 했지만, 출발하여 10여 리 되는 곳에서 왕기가 먼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항으로 돌아와 지켰다. 당시 연주자사(兗州刺史) 등애(鄧艾)가 낙가(樂嘉)에 주둔하고 있었다. 관구검은 문흠에게 병사를 지휘하여 등애를 습격하도록 했다. 왕기는 그 세력이 둘로 나뉘어졌음을 알고 진군하여 항으로 갔으므로, 관구검의 군대는 곧 패하였다. 문흠 등이 이미 평정된 후, 진남장군(鎮南將軍)ㆍ도독예주군사(都督豫州諸軍事)로 승진하고,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임하였으며, 안락향후(安樂鄉侯)로 승진되어 봉해졌다.
「왕기전」링크
후에 관구검과 문흠이 반란을 일으켜 제갈탄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예주(豫州)의 관리와 백성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제갈탄은 사자를 베고 천하에 공포하여 사람들이 관구검과 문흠의 흉악한 음모를 알도록 했다. 대장군(大將軍) 사마경왕(司馬景王)은 동쪽 정벌에 오르면서 제갈탄으로 하여금 예주(豫州)의 군대를 지휘하여 안풍진(安風津)을 건너 수춘(壽春)에 도착했다. 수춘에 있던 10만여 명의 백성은 관구검과 문흠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모두 성문을 부수고 나와 산과 연못으로 흩어져 떠돌았으며, 간혹 오나라로 흩어 도주해 들어가기도 했다. 제갈탄은 회남에서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다시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ㆍ의동삼사(儀同三司)ㆍ도독양주(都督揚州)로 임명되었다.
「제갈탄전」링크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고 달리기 잘 하는 병사를 파견하여 서신을 보내 대중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했는데, 등애가 그 사람을 죽이고 아울러 신속히 군대를 나가게 하고 우선 낙가성으로 달려가 부교를 만들었다. 사마경왕이 도착하자, 그대로 낙가성을 점거했다. 문흠의 대군은 위의 대군보다 늦게 왔으므로 성 아래에서 패배하였다. 등애는 그를 병두까지 추격하였고, 문흠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오나라 대장군 손준 등은 10만 대군이라고 외치며 장강을 건너려는 형세를 나타냈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를 보내 비양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등애는 적군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요해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신속하게 부정으로 옮겨 주둔하였으며 태산태수 제갈서등을 여장으로 파견해 막아 싸우도록 하여 적을 달아나게 했다.
「등애전」링크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군 사마경왕이 동쪽 정벌에 나섰는데, 종회는 종군하여 기밀 사무를 담당하였고, 위장군 사마문왕은 대군의 뒤쪽을 담당했다.

사마경왕이 허창에서 죽자, 사마문왕이 육군을 통솔하였고, 종회는 참모(모신)가 되어 계략을 짰다. 당시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상서 부하에게 명하여 동남쪽은 금방 평정되었으므로 위장군을 허창에 머물게 하여 중앙과 지방의 구원병이 되도록 하고, 부하는 군사들을 인솔하여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종회는 부하와 상의하여 부하로 하여금 표를 올리도록 하는 동시에 즉시 위장군과 함께 출발하여 낙수 남쪽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사마문왕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으며, 종회는 황문시랑으로 승진시켜 무정후로 봉하고 식읍 3백호를 주었다.
「종회전」링크
二年春正月,魏鎮東將軍毌丘儉、前將軍文欽以淮南之衆西入,戰于樂嘉。
2년(255년) 봄 정월, 위의 진동장군(鎮東將軍) 관구검, 전장군(前將軍) 문흠(文欽)이 회남(淮南)의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침입하여 낙가(樂嘉)에서 싸웠다.

閏月壬辰,峻及驃騎將軍呂據、左將軍留贊率兵襲壽春,軍及東興,聞欽等敗。壬寅,兵進于橐臯,欽詣峻降,淮南餘衆數萬口來奔。魏諸葛誕入壽春,峻引軍還。
윤달 정월 9일(임진일), 손준은 표기장군(驃騎將軍) 여거(呂據), 좌장군(左將軍) 유찬(留贊)과 군대를 이끌고 수춘(壽春)을 습격하려고 했다. 군대가 동흥에 이르렀을 때, 문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일(임인일), 군대가 탁고(橐臯)까지 진군하자, 문흠이 손준에게 투항해 왔고, 회남의 잔여 세력 수만 명도 오나라로 달려왔다. 위나라의 제갈탄이 수춘으로 진입하자, 손준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二月,及魏將軍曹珍遇于高亭,交戰,珍敗績。留贊爲誕別將蔣班所敗於菰陂,贊及將軍孫楞、蔣脩等皆遇害。
2월, 위나라 장군 조진(曹珍)과 고정(高亭)에서 마주쳐 교전했는데, 조진이 크게 패했다. 유찬은 제갈탄의 별장(別將) 장반(蔣班)에게 고파(菰陂)에서 패했다. 유찬과 장군 손릉(孫楞), 장수(蔣脩) 등이 모두 해를 입었다.
「삼사주전」링크
오봉 2년(255),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과 문흠(文欽)이 부대를 인솔하여 반란을 일으켜 위나라 사람들과 낙가(樂嘉)에서 싸웠다. 손준은 표기장군(驃騎將軍) 여거(呂據)와 좌장군(左將軍) 유찬(留贊)을 인솔하여 수춘을 습격했다. 그러나 마침 문흠이 패배해 항복했으므로 군대를 돌렸다.

오서(吳書)에서 이르길:

중략

손준이 회남을 정벌할 때, 유찬에게 절(節)을 주고, 좌호군에 배수하였다. 수춘에 이르지 못하여, 길에서 발병하였기에, 손준은 수레와 치중(車重)을 거느리고 먼저 돌아오도록 하였다. 위장 장반(蔣班)이 보기(步騎) 4천으로 유찬을 추격하였는데, 유찬은 병이 깊었으므로 진을 정비할 수 없었으므로, 반드시 질 것을 알고는, 곡개(曲蓋)와 인수(印綬)를 풀어 조카에게 주고 돌려보내며 말하길,

"내가 장수가 된 이래로, 적을 파하고 기를 빼앗았으나, 일찌기 진 적은 없었다. 지금 병이 깊고 병사는 약한데다가, 수 또한 비교할 수 없으니, 너는 어서 가거라. 모두 죽는 것은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다만 적을 쾌하게 할 뿐이다."

조카가 받지 않자, 칼을 뽑아 베려 하니, 그제서야 떠났다.

일찌기 유찬은 장수가 되어, 적을 만나면 반드시 먼저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소리를 높여 노래부르니, 좌우가 이에 응하였고, (노래가) 그치면 나가서 싸우니,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패배를 맞게 되자, 탄식하며 말하길,

"내 싸움엔 항상 방법이 있었는데, 지금 이처럼 병이 깊으니, 진실로 천명(天命)이구나!"

마침내 해를 입으니, 이때 73세였으며, 사람들이 모두 깊이 안타까워하였다. 두 아들 유략, 유평은 나란히 대장이 되었다.
「손준전」링크
위의 장군 문흠(文欽)이 항복해 오니, 정봉을 호위(虎威)장군으로 삼고 손준(孫峻)을 따라 수춘(壽春)에 가 맞이하게 하고, 적의 추격군과 고정(高亭)에서 싸웠다. 정봉이 말에 타고 긴 창(矛)을 들고 적의 진중으로 돌입하여, 수백명의 머리를 베고, 군기(軍器)를 노획했다. 안풍후(安豊侯)로 올려 봉했다.
「정봉전」링크
오봉(五鳳) 2년 (255), 여거는 부절을 받고 손준 등과 수춘(壽春)을 습격했다. 여거는 돌아오는 길에 위나라 장수 조진(曹珍)을 만나 고정(高亭)에서 격파시켰다.
「여범전」링크

5.2. 진서

원본 경제기의 날짜에는 오류가 많다. 취소선은 원래 진서에 나오는 날짜, 기울임체는 중화서국본 교감기에 의거하여 수정한 날짜다.
2년 봄 정월, 혜성이 오초(吳楚)의 분야(分野)에 나타나 서북쪽 하늘을 달렸다.

진동장군(鎭東將軍) 관구검(毋丘儉)과 양주자사(揚州刺史) 문흠(文欽)이 거병(擧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태후(太后)의 조령(詔令)이라 빙자하여[矯] 격문을 군국(郡國)에 돌렸으며, 서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여 (서로) 맹세하고는 각기 자식 4명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 이로써 구원을 청하였다.

2월, 관구검과 문흠이 무리 6만을 이끌고 회수(淮水)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경제는 공경(公卿)들을 모아 토벌할 계책을 모의 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은 대다수가 여러 장수를 파견하여 이를 격파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직) 왕숙(王肅)과 상서(尚書) 부하(傅嘏), 중서시랑(中書侍郎) 종회(鍾會)는 경제에게 몸소 갈 것을 권하였다.

무오일(戊午日)무인일(戊寅日)[22], 경제는 중군(中軍) 보기(步騎) 10만 여명을 통솔하여 이를 정벌하였다. 두 배의 길을 (낮과 밤을) 겸하여 행군하여(倍道兼行), 세 곳의 군대를 불러 진(陳), 허(許)의 교외에 크게 모았다.

윤월, 갑신일(甲申日)[23], 은교(濦橋)에 주둔하니, 관구검의 장수 사초(史招)와 이속(李續)이 서로 뒤이어 항복하여 왔다. 관구검과 문흠은 군대를 옮겨 항성(項城)으로 들어가니 경제는 형주자사(荊州刺史) 왕기(王基)를 보내어 남돈(南頓)을 점거하여 이로써 관구검을 압박하게 하였다. 경제는 벽을 두터이 쌓고 누대를 높게 하여, 동쪽의 군대가 모이기를 기다렸다. 제장들이 진군하여 그 성을 공격할 것을 청하니 경제가 말하기를

“제군은 하나는 알고 있으나 둘은 모르오. 회남(淮南)의 장사(將士)들은 본래 반역할 뜻이 없었소. 다만 관구검과 문흠이 종횡가의 사적(事蹟)을 따라 밟고, 장의소진의 설(說)을 배워, 원근(遠近) (각지의 사람들이) 호응(呼應)할 것이라 말했던 것이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날에 회북(淮北) 지방이 따르지 않고, 사초와 이속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와해되었소. 안으로 어그러지고 밖에서 배반하니 반드시 패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인데, 고단한 짐승은 싸울 것을 생각하는 (법이니), 속히 싸우려 한다면 다시 그들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오. 비록, 반드시 이기리라 말했으나 다치는 사람 또한 많을 것이오. 또한 관구검 등은 장사(將士)들을 기만하고, 온갖 방법(萬端)으로 속이고 있으니, 잠시 더불어 지구전을 펼치면 (그들을) 속인 정황(情況)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오. 이것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오.”

(경제는) 이에 제갈탄(諸葛誕)은 예주(豫州)의 모든 군대들을 거느리고 안풍(安風)에서 수춘(壽春)으로 향하게 하였고, 정동장군(征東將軍) 호준(胡遵)은 청주(青州)와 서주(徐州)의 모든 군대를 끌고 초(譙)와 송(宋)의 사잇길로 나가게 하여, 그 퇴각하는 길을 끊게 하였다.

경제는 여양(汝陽)에 주둔하고 연주자사(兗州刺史) 등애(鄧艾)를 보내어 태산(太山)의 모든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진군하여 낙가에 주둔하게 하였으니, 약한 것을 보여 그들을 유인하기 위함 이었다. 문흠이 진군하여 장차 등애를 공격하려 하자, 경제는 함매(銜枚-병사들이 떠들지 못하게 입에 물리는 재갈)하게 하고 재빨리 낙가(樂嘉)로 달려가 문흠과 서로 조우하였다.

문흠의 아들 문앙은 나이 18세로 용맹이 삼군(三軍)에서 으뜸이었는데 문흠에게 말하기를

“(경제의 군대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을 때, 성에 올라가 북을 치기를 청하오니, 이를 공격하면 깨트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모의하기를 마치고 실행하였는데 세 번을 양성하였으나 문흠은 (도착하지 못하여) 응전 할 수 없었다. 문앙은 퇴각하여 (문흠과) 서로 더불어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경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문흠은 도망갈 것이오.”

하고 군령을 내려 정예한 군사로 이를 추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문흠은 경험 많은 장수(舊將)이고, 문앙은 어리나 정예합니다. 병사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으니 잃은 것이 없는데 어찌 도망가겠습니까?” 하였다.

경제가 말하기를

“ ‘첫 번째 북소리에 (기세가) 일어나고, 두 번째 북소리에 (기세가) 쇠하며, 세 번째 북소리에 (기세가) 바닥나 법이라’ 했소. 문흠은 세 번 북을 울렸으나, 문흠은 응전하지 못하였소. 그 기세가 이미 꺾였는데 달아나지 않고 (그들이) 무엇을 기다리겠소?” 하였다.

문흠이 장차 달아나려 하니 문앙이 말하기를

“먼저 그 기세를 꺾지 않으면 달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함께 날랜 기병 10여기를 데리고 선봉을 꺾고 진세를 무너뜨리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병사들이) 흩어져 달아났으므로(披靡) 마침내 이끌고 퇴각하였다. 경제가 좌장사 사마련(司馬璉)을 보내어 날랜 기병 8천을 통솔하여 (문흠군의) 측익(側翼)을 추격하여 (치고), 장군 악침(樂綝)으로 하여금 보병을 거느리고 그 뒤를 끊게 하였다. 사양(沙陽)에 도달할 때 까지 여러 차례 문흠의 군진이 무너졌고, 노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니 문흠은 큰 방패(楯)로 가리고 달아났다. 그 군대를 크게 깨트리니 무리가 모두 과(戈)를 던지고 항복하였고, 문흠 부자와 휘하의 장수들은 달아나 항성을 지켰다. 관구검이 문흠이 패했다는 것을 듣고 무리를 버리고 밤에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안풍진(安風津)의 도위(都尉)가 관구검을 추격하여 베었고, 그 머리는 경도(京都)로 보냈다. 문흠은 마침내 오나라로 달아나 회남은 평정되었다.

처음에, 경제의 눈에 종기가 나서 의원으로 하여금 이것을 째게 했다. 문앙(文鴦)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서 눈이 빠져 나왔다. (그러나 경제는) 육군(六軍)이 두려워할까 저어하여, 옷으로 (눈을) 가렸고[蒙], 통증이 심해지니 이빨로 옷을 물어뜯으며 (참았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윤월(閏月), 병세가 위독하여지니 문제로 하여금 모든 군대를 총괄하게 하였다. 신해일(辛亥日)[24], 허창(許昌)에서 붕어(崩御)하니 이때 나이 48세였다.
「경제기」링크
관구검(毌丘儉),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대군이 동정하여 사마소는 중령군(中領軍)을 겸하여 낙양을 지켰다.

경제(景帝:사마사)의 병이 위독할 때 사마소가 경도로부터 차도를 살피러 왔는데 위장군(衞將軍)에 봉해졌다. 경제가 붕어한 후에 천자가 사마소에게 명해 허창에 진수하고 상서(尚書) 부하(傅嘏)로 하여금 육군(六軍)을 이끌고 경사로 돌아오게 하였다. 사마소는 부하(傅嘏)와 종회(鍾會)의 책략을 채용하여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낙양에 이르러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케하고 시중(侍中),도독중외제군(都督中外諸軍),녹상서사(錄尚書事)를 더하고 조정을 보좌하며 검을 차고 신을 신은채로 대전에 들수 있게 하였다. 사마소는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문제기」링크

[1] 예주 여남군 항현[2] 삼소제기, 관구검전.[3] 제갈탄전.[4] 진서 경제기.[5] 삼소제기, 부하전.[6] 왕기전[7] 경제기[8] 등애전, 관구검전.[9] 병사들이 떠들지 못하게 입에 물리는 재갈.[10] 삼소제기, 진서 경제기.[11] 삼사주전, 진서 경제기.[12] 왕기전.[13] 관구검전.[14] 진서 경제기[15] 삼국지 삼소제기.[16] 예주 여남군 항현[17] 여남군 여양현[18] 여남군 남돈현[洙] 삼국지집해 : 조일청(趙一淸,청) 왈, 洙(수)는 許(허)의 오기로 의심된다. 노필(삼국지집해 저자)이 보건대, 洙(수)는 汝(여)로 적어야 맞다. 윗 문장에서 ‘대장군이 여양(汝陽)에 주둔했다’ 했으니 바로 이것이다.「진서」경제기(사마사)에서는 ‘경제가 여양에 주둔하고 잠군(潛軍)으로 함매(銜枚,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군사들에게 하무를 물림)하여 곧바로 낙가(樂嘉)로 나아갔다’ 하였다.” (趙一淸曰 洙疑許之誤 弼按洙當作汝 上文大將軍屯汝陽是也 晉書景帝紀 帝屯汝陽潛軍銜枚, 徑造樂嘉.)[20] 여남군 신현.[21] 홍농군 신안현.[22] 1월 25일.[23] 윤 1월 1일[24] 윤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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