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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의 삼국시대에 조위 후기 수춘을 기반으로 일어난 3번의 반란을 통틀어 부르는 역사적 용어.2. 특징
왕릉의 난(251), 관구검의 난(255), 제갈탄의 난(257)의 순서로 일어났다. 수춘에서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3번이나 반란이 일어난 것. 모두 사마씨에 대항한 반란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왕릉은 사마의를, 관구검·문흠은 사마사를, 제갈탄·문흠은 사마소를 겨냥했다는 차이점이 존재했다.수춘에서 유난히 반란이 많이 일어난 이유는, 수춘은 손오를 견제하기 위한 위나라의 대오전선의 군사요지이자 인근의 행정 중심지로써 많은 병력과 물자를 보유했던 중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최전선의 합비가 워낙 튼튼한 요새라 오나라의 공세를 잘 막아냈지만, 만약 합비가 따이면 그 뒤로는 탁 트인 개활지라서 북벌한 오나라에게 회수 이북에서 황하 이남까지 줄줄이 다 점령당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길이 험지라서 방어가 수월해 평소에는 많은 병력을 배치해둘 필요가 없었던 대촉전선에 비하면, 개활지가 많은 대오전선에는 평소에도 많은 병력을 배치해야만 했고 그것이 수춘 지역의 지방관 및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킬 만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반대로 반란을 진압하러 오는 중앙군의 병력을 막기 좋은 길목도 별로 없었기에 하나같이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서 진압하러 오는 사마씨에게 진압당했지만.
수춘삼반에 대한 트라우마는 서진 초기에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탄의 난 이후 회남을 지키고 있던 석포가 오나라의 이간책으로 반역을 꾀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양호의 변호에도 사마염은 석포를 의심했는데, 사마준이 손삭을 통해 석포에게 조정에서 석포를 처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알려줬고 사마준이 조언한 내용[1]을 석포가 받아들였다. 이후 의심을 거둔 사마염은 석포의 작위는 유지시키되 군권만 박탈하는 조치로 끝났다.
3. 왕릉의 난
수춘삼반의 첫째 반란. 251년 과거에 동탁을 주살했던 왕윤의 조카인 왕릉이 고평릉 사변으로 조위의 국정을 장악한 사마의에게 반발하여 조조의 아들인 초왕 조표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던 사건이다.4. 관구검의 난
수춘삼반의 둘째 반란. 255년 조위의 무장 관구검이 문흠과 함께 사마사 정권에 반하여 회남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관구검-문흠의 난이라고도 한다.5. 제갈탄의 난
수춘삼반의 셋째 반란. 257년 조위의 무장 제갈탄이 조위의 양주자사 악침을 죽이고 사마소 정권에 반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손오에 투항했던 문흠이 원병으로 참전했기에 제갈탄-문흠의 난이라고도 한다.[1] 군사권을 내놓고 도정에 나가서 대죄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