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06:13:45

조상(삼국지)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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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爽
? ~ 249년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평가
4.1. 긍정적 평가4.2. 부정적 평가4.3. 항복에 관한 평가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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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대신. 는 소백(昭伯)으로 대장군 조진의 맏아들이자 조희, 조훈, 조칙(曹則), 조언, 조애(曹皑)의 형이다. 예주 패국 초현 사람.

힘없는 황제 조방을 좌지우지하고 권세를 부리다 고평릉 사변의 빌미를 제공하고 실각된 뒤 처형당한다.

2. 정사 삼국지

조신한 성품으로 어릴 때부터 황궁을 출입해서 황궁의 예절에 정통했고 무엇보다 조예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근했다. 조진의 아들이라는 점도 있어 황족 대우를 받았으며 조예 사후 조예의 측근이었던 유방손자의 농간 덕에 사마의와 함께 탁고대신으로 병권을 장악했다.

얼떨결에 대국 위나라의 국정 전반을 담당하게 된 조상이지만, 실상 그의 역량이 그가 맡은 지위에 합당한지 어떤지는 미지수였다. 당장 유방손자가 다른 조씨와 하후씨들을 조정에서 쫓아내려 음모를 꾸몄을 때도 조상만은 위협으로 보지 않았기에 위략 등에도 황제의 야심이 있었다고까지 표현되는 조우를 대신할 사람으로 밀어붙였다는 견해까지 나오는 판국이다. 나이로도 사마의의 아들 뻘이었고, 심지어 그의 아들인 사마사,사마소 보다도 더 어렸다. 공적도 거의 전무한 낙하산에 가까웠기에 중량감이 턱없이 부족했다. 조상도 초기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사마의를 아버지처럼 모셨고, 모든 국사를 사마의와 의논하며 독단으로 처리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상이 보정대신이 되면서 하안을 필두로 조비, 조예 시절 소외되었던 인사들이 대거 기용됐는데[1], 이들은 사마의와 조상의 대립구도를 부추겼고, 이에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로 임명하도록 상주한다. 이 상주는 받아들여져 사마의는 태부로 승진했는데, 표면상으론 승진이었지만 태부는 명예직에 가까웠으므로 사마의는 사실상 실각한 셈이었다. 또 이 때를 기점으로 이부상서에 하안, 정서장군에 하후현, 정동장군에 왕릉, 정남장군에 하후유를 배치하며 황권을 보좌할 세력을 정립했다. 거기에 조상 개인의 능력은 몰라도 그가 좌우에 심복으로 두고 부릴 수 있었던 당대 최고의 석학들, 하안과 하후현의 존재는 조상의 정치를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기적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조상 본인 자체는 사마의와 달리 별다른 공적이 없는 낙하산 인사였기에 한계가 뚜렷했고, 이에 244년하후현과 함께 촉나라를 공격했으나 흥세 전투에서 왕평, 유민의 반격으로 참패하고 만다. 참패하고 돌아온 조상은 일족들로 도성의 군사를 장악하게 하고 더욱 위세를 부리며 사치와 향락에 빠진다. 동생 조희가 간언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때 조상의 부하 이승이 사마의를 방문했는데, 사마의는 병이 위중한 척했다. 이승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실이라 여겼다. 이승의 보고를 받은 조상은 사마의를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았다.

결국 249년 정월 사마의가 일으킨 고평릉 사변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장제는 조상에게 편지를 보내어 병권만 내놓으면 사마의가 절대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한다. 조상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환범은 외병을 불러 맞서자고 했고 사마 노지, 주부 양종도 이를 말렸지만, 조상은 결국 병권을 반납한다.

군사를 해산하고 조상이 말했다.
"나는 별로 잃는 거 없이 부가옹(富家翁, 돈 많은 늙은이)으로 살 수 있다."
환범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소리내어 울며 말했다.
"조자단은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당신이 낳은 자식들은 개새끼나 송아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쩌다 오늘날 당신의 자식들에게 연좌되어 일족이 멸망하게 된 겁니까!"

하지만 곧 사마의에게 역모죄로 트집을 잡혀 추포된 이후 일가족이 몰살되었다. 장제는 조진의 제사를 끊기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조상을 살려주자고 진언했지만 사마의가 들어줄 리가 없었고, 결국 이 일로 마음의 병을 얻은 장제 또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게 된다.

3. 삼국지연의

239년에 조예가 죽을 때 사마의와 함께 자신의 아들이자 다음 황제인 조방을 보좌하도록 부탁받았다. 하지만 심복 하안의 진언으로 사마의로부터 실권을 빼앗아 권력을 휘둘렀고 사마의의 노쇠를 가장한 연기에 속아 안심하고 번번이 사냥을 개최했다.

그러나 249년에 황제 조방과 함께 사냥을 나와 있던 와중에 고평릉 사변의 사마의의 쿠데타로 병권을 빼앗겼고 부하 환범이 조방을 끼고 사마의를 토벌하도록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결국 사마의에게 일파 모두 붙잡혀 삼족이 처형당했다.

다만 희대의 실책인 흥세 전투는 생략된데다, 조진이 워낙 초라하게 나왔기에 독자들은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흥세 전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조상 정권은 그다지 위축되지 않았고, 고평릉 사변 직전까지도 이렇다 할 사건이나 사고 없이 건재해 보였다. 게다가 정사의 기록상으로도 주로 조상 일파의 사치나 권력의 남용 등 개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비난하는 경향이 강한데, 당나라 대의 기록인 진서의 기록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기사도 보이기 때문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마씨가 세운 서진 왕조의 치하에서 조상의 실정이 과장되었으며, 실상은 조상과 그 일파가 기존 기득권을 가진 주류 호족들의 이해를 침해하는 개혁을 실시하였거나 그런 시도를 하여 반발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된다.[2]

조상이 사마의에게 순순히 정권을 넘기고 출두한 것에 대해서도 환범이 울면서 조진은 훌륭했지만 그 자식들은 개나 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내 일족까지 망쳤다라고 한탄하는 등 대놓고 유약하고 어리석은 결정이었다는 식으로 묘사되는데, 당시 도성을 장악한 사마의는 태후를 협박해 조상을 역적으로 선포한 상태였다. 보정 체제는 어린 황제 대신 보정대신과 태후가 정사를 보는 것인데, 환범 등의 계책은 어린 황제를 끼고 있던 보정대신 조상도 허창으로 옮겨가 사마의를 역적으로 선포하며 맞대응하고 지방의 군대를 소집하고 지지세력을 결집해 맞서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말은 중앙에 기반을 가진 조상 일파가 지지기반인 중앙군을 사마의에게 홀라당 뺏긴 상황에서 고작 어린 황제 하나를 믿고 허창까지 이동해 지방 장군들의 힘을 빌어 사마의를 치자는 것인데, 조상이 그렇게 발악한다면 사마의 또한 멍청이가 아닌 이상 대응을 안할 리 없기에 태후를 협박해 새로 황제를 옹립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낙하산 출신에 흥세 전투에서 참패하며 체면을 구기고[3] 중앙군까지 잃은 조상 vs 중앙군을 장악한데다 이전부터 각지에서 무공을 떨치고 태후의 명을 빌어 조상의 실정을 탄핵하는 역전의 노장 사마의 구도가 되지만, 조상이 문제가 있긴 했어도 동탁 손침 마냥 인간성을 상실하진 않았기에 인망이 아예 없진 않았고 황제인 조방 역시 나이가 어리고 혈통이 불문명하다는 약점은 있어도 뒤에서나 말이좀 나오는 수준이였지 폭정을 저지른다거나 하는 식의 큰 문제는 없었고 어쨌든 조예의 양자였기에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여서 그럭저럭 황제로 받아 들여지고 있었고 당시 사마의는 겨우 낙양 주변에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조상의 직위가 대장군인 만큼 대장군부가 있는 허창으로 가서 황명을 앞세우고 비상명령을 발동했다면 판세가 뒤집어졌을 가능성도 컸다. 환범은 조상에게 황제를 끼고 있는 장점을 이용해 허창으로 가서 외병을 불러들이고 허창에 가면 무기가 있고 군량은 자신의 직임인 대사농을 이용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고 훗날 사마씨에 반기를 드는 세력들까지 고려해 봤을 때 적어도 세력 자체는 조상이 앞서는 형태라 어떻게든 황제와 함께 허창으로 가서 반 사마의 세력을 있는대로 모아서 최대한 발악한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위나라 자체가 완전히 두 동강 나는 내전이 되는 것이고 사마의 역시 어중이 떠중이는 아닌지라 장기전이 될 가능성도 높은데 이렇게 될 경우 국적인 촉한동오가 얼씨구나 하고 그 기회를 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조상의 투항은 나름대로 나라를 살리기 위한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4.2. 부정적 평가

장제의 편지를 보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조조가 기반을 마련하고 조비가 세운 나라를 사마의에게 넘겨버린 인물이 어떻게 구국의 결단을 할 수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조상은 흘러가는 상황을 오판 한 채 그저 자신이 면직되는 것에 그칠 뿐이라고 예측하는 등 안이한 자세를 보였고, 결국 자신은 물론 관련된 인물들의 삼족이 모두 처형당하고, 조위 황실까지 사마씨에게 먹혀버렸다. 실제 긍정적 평가에서도 나오지만 고평릉 당시 조상이 항전의지를 가졌다면 꽤나 승산이 있었다. 그저 처음부터 조상이 그럴 만한 그릇이 아니었던 것뿐. 조예가 이를 염두에 두고 죽기 전에 손례를 보좌역에 임명했던 거지만 부족한 처사였다.

비슷하게 황족의 권한 증가를 요구한 조경의 상소도 그냥 무시했다.

거기에 조상 자신이 그나마 세운 황실 보위 세력은 조상이 항복함으로서 모두 와해되었다. 조상은 정권을 잡으며 정서장군에 하후현, 정남장군에 하후유 등을 세워 조예 이후 시들했던 황실 친족 위주의 군권을 다시 세우려 했지만 막상 조상 자신이 항복함으로서 조씨가 가지고 있던 모든 군권을 내려놓은 꼴이 되었다. 이는 고평릉 사변 이후 정서장군이 곽회, 정남장군이 왕창으로 바뀌면서 현실화된다.

조상 정권을 재평가하는 측에서도 하안, 하후현 등을 필두로 한 조상파의 핵심 인사들을 조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조상 본인은 그리 평가가 좋은 편이 아니다. 무난한 성격으로 인망도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자체적으로 국정을 주도할 만한 역량이나 배짱은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 진수 등의 기록에서도 조상 자체는 평범한 인물이라 감히 사마의에게 거역할 생각조차 못했으나 하안 등 주위 측근들의 부추김에 넘어간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유장과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사람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끝내주게 무능하다는 점과 삼국지의 주요 인물인 유비사마의를 띄워주기 위해 은근히 평가가 깎인 면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나 당장 정사 삼국지만 그의 이런 점을 지적한 게 아니라 한진춘추, 세어, 위씨춘추, 간보진기, 위말전, 위략 등의 주석을 봐도 그리 평가가 썩 좋지 않으니 한나라의 정권을 통솔하고 주변인들을 잘 제어하고 규합한 인물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비교대상인 유장처럼 말이다.그 유장 또한 수하의 유능한 인재였던 장송, 법정 등이 적극적으로 유장을 배신해 유비에게 나라를 넘겼으니 군주로써는 낙제점 수준이 맞다. 유장은 그래도 곧바로 나라를 뺏긴것도 아니고 어느정도 저항을 하다가 빼앗긴 것이고 유비의 배려로 인해 본인과 일족의 목숨만은 건졌고 아들인 유순촉한에서 관직 생활까지도 한 것에 비해 조상은 삼족이 멸문당했기에 조상이 더 처지가 심했다고 할 만하다.

실제로 고유, 왕관, 장제, 손례, 노육, 손자[4]와 같은 구신들은 물론 양호, 신창, 진태 등 여러 인물들이 조상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5] 이들이 야심을 품고 사마의에게 동조했다고 하기에는 그럴 만한 사람들도 아닌데다 진태 같은 경우는 오히려 훗날 사마씨와 대립했다. 이 점에서 구신들이 사마의에게 동조한 것은 조상 일파에게 무언가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리고 동기야 어찌되었든, 조상이 당시 조정의 중신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도 큰 실책을 범한 것이 된다.

4.3. 항복에 관한 평가

조상이 더더욱 안좋은 평을 듣게된 이유는 위에서 말한 정치를 못했다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조상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정권을 넘긴 탓이 더 큰 편이다.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그냥 항복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론 본인과 측근의 삼족이 멸족된 건 물론이고 조위 멸망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

다만 이점에 대해서는 좀 자세히 따져볼 필요는 있다. 일단 허창에도 군사는 제법 되고 훗날의 수춘삼반이나 조방의 친위 쿠데타 등 사마씨에게 대항하거나 내외부에서 그들을 싫어하는 세력은 꽤 존재했기에 허창으로 넘어가서 의병을 모아 사마씨에게 대항했다면 정말 승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때문에 조상이 순순히 군권을 넘기면 권력만 거두고 살려주겠다던 사마의의 약속을 믿은 걸 가지고 멍청한 겁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정사 기준으로 조상이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선 환범 등이 허창으로 가서 항전하자고 주장한게 후대인 입장에선 현명한 계책으로 여겨지지만, 당시 조상과 그 측근들은 실전 경험이란게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흥세 전투로 거하게 말아먹고 체면까지 구긴 상황이었다. 반면 사마의는 제갈량의 북벌 당시에 그와 맞서 싸우거나 공손연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능력 면에서는 조상 형제와 비교도 안되는 당시 위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다.

역시 사마의의 아들들도 아버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조상 형제와는 비교도 안되는 능력자들이었다. 즉, 사마의 정도 되는 사람이면 그들이 허창으로 가서 항전할 가능성도 예측 하고 있었을 것이고 사마의라고 순순히 당해줄리도 없다.이런 상황에서 어느쪽이 더 승산이 높은지는 명확하며,무엇보다도 가족이 다 도성에 남아있고 병사들과도 전부 단절 됐으니 겁이 나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그렇게 해서 내전이 일어났으면 국적인 촉한동오가 얼씨구나 하고 그 기회를 노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결론적으로 사마의에 비해 조상의 군사적 능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인데 그런 조상이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황제 하나를 끼고 허창으로 넘어간다 해도 과연 사마씨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기대할수 있겠는가? 그나마 환범이 사마의에게 꾀 주머니라는 평가를 받을만큼 능력은 괜찮긴 했다지만, 환범은 기껏해야 군사를 감독하는 것 정도만 해봤지 애초에 무관도 아니었고 다른 장수를 따라 전쟁에 참여하거나 전쟁터에 나간 적은 더더욱 없었다. 한마디로 실전 경험이 없다는것. 게다가 일단 허창으로 넘어가서 사마의에게 대항했다가 그대로 패배할 경우 괘씸죄 때문에라도 상황이 더 안좋게 흘러갈 가능성도 컸다. 오히려 이렇게 되면 나는 조상에게 기회를 줬는데 조상은 배은망덕 하게도 나에게 대항하다가 일이 안풀리니까 황제를 끼고 내분을 일으켰고, 패배하고 나서야 그제서야 항복을 한다는 식으로 사마씨에게 조상 일파를 처단할 명분만 더 만들어 주는 꼴이었다. 조상 입장에선 이길 가능성도 거의 없는 싸움에 지고서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역적'이 되어 투항하느니 차라리 가능성 없는 싸움은 포기하고 사마의의 자비를 조금이나마 기대하는게 당시 상황상 더 나을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조상이 쥐고 있었던 패라고 해봐야 출신 성분조차 불분명한 황제인 조방을 데리고 있었다는 점 하나인데, 이것도 황제가 실제로 실권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나 의미가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는 낙양의 곽태후가 실권을 쥐고 있었고, 그와 별개로 황제도 태후와 사마의를 지지하는게 옳으니 낙양으로 돌아가자 하면 조상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다른게 아니라 당장 십상시의 난 당시 소제가 그렇게 행동했다.

더욱 중요한 건, 후대의 사람들이야 이후 전개를 알고 있으니 사마의의 목적이 제위 찬탈인 걸 알고 있겠지만, 당시 시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우선 조상이 사마의를 그렇게 대놓고 핍박한 적이 없었다. 삼국, 대군사 사마의를 비롯한 후대의 삼국지 창작물에서는 극의 재미를 위해 조상을 포함한 조씨 황족들이 수십년 동안 사마의를 엄청나게 괴롭혀대서 사마의가 참다참다 결국 터진 것처럼 묘사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남아있는 사료에서 그런 묘사는 거의 없다. 비록 사마의의 실권을 빼앗긴 했다지만 명예직일 망정 벼슬은 올려줬고, 그외에 뭔가 핍박을 가하지는 않았으며 아들인 사마사와 사마소를 비롯해 사마의 측근들과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왔었고 하안의 발언이나 행동으로 보면 그들을 아예 멸족하고 권력에서 배제하려는게 아니라 사마씨를 조상 정권에 흡수하려던 형태로 보인다. 그러니까 딱 견제하기만 할뿐 그이상으로 뭔가 압박을 가하거나 목숨을 거두려고한 적은 없었다는 말. 따라서 사마의가 들고 일어나긴 했지만 단순히 실권을 뺏기고 명예직으로 쫒겨난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거라고 이해했기에 저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정권만 내어주면 끝날 상황이라고 믿은 것이다.

역성혁명이란건 후한 말처럼 기존 왕조가 통치에 실패해서 체제가 완전히 망가지고 민생이 파탄난 상황에서나 정당화되는 일인데, 이때 조위의 체제는 그 정도로 불안정하던 상황은 아니었기에 찬탈의 명분이 전혀 없었다. 비록 그때까지도 천하 통일은 엄두도 못냈고 천하 통일은 고사하고 제갈량의 북벌로 오히려 고생하거나, 기껏 본인들이 군사를 끌고간 석정 전투, 흥세 전투 등에서 대차게 말아 먹었고 서주 대학살 등으로 민심이 조조에게 등을 돌렸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후한말이나 삼보의 난 당시 처럼 개막장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조위는 꾸역꾸역 촉한의 북벌도 막아내고 있었으며, 더불어 삼국중 위가 국력이 가장 강했고 체제도 나름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인 조방도 출신 성분이 불분명 하다는게 문제였지 후한의 영제조선연산군처럼 암군이나 폭군인 것도 아니었고 이 혈통 문제도 뒤에서나 말이 나오던 수준이였지 황제의 정통성이나 재위문제 까지 번질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난세와, 배신, 거병이 판을 쳤던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 사마씨 가문만큼 명분없는 찬탈도 드물다고 욕을 먹은 게 바로 조상이 겪었던 고평릉 사변과 이후 사마씨 일족의 제위 찬탈임을 떠올려보자. 명분을 중시하는 청류파 출신인데다가 조비와 조예 두 선대 황제의 총애까지 잔뜩 받았던 사마의가 아무런 명분도 없이 찬탈을 위한 반역을 저질렀다고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고, 당시 조상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거라고 기대하는게 오히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실제로 사마씨 일족은 역성혁명의 명분이 너무나도 부족했고, 어떻게든 찬탈 명분을 만들기 위해 사마씨는 삼국 통일을 서둘러야만 했으며 통일의 공로를 명분으로 선양을 받았다. 그럼에도 결국 백주대낮에 황제를 죽인 것과 더불어 선양의 명분이 너무나도 부실한 탓에 사람들에게 권위와 정통성을 잘 인정받지 못해서 건국하자마자 망조가 들었다.

'조상 일당이 원로 공신 사마의를 이유 없이 핍박하고,[6] 황제를 잘못 모시고 국정을 망쳤다'는 명분을 내걸고 일으킨 사마의의 정변에서 수괴라고 지목당한 조상과 그 일파가 일체의 저항을 포기한채 순순히 병권을 반납하며 항복까지 했다.[7] 이런 상황에서 사마의가 자신의 명분에 입각해 행동한다면 훗날의 현무문의 변처럼 주모자급은 정리하되 나머지는 포옹하거나 살려주는 그러니까 조상과 최측근 몇 사람만 숙청, 그것도 뭐 죽이느니 삼족을 멸하느니 같은 살벌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명분론에 입각한다면 그냥 파직만 시키는 수준이 한계였다.

만약 그 이상을 저지른다면 '거짓 명분을 내걸고 남들을 속이는 역적임을 스스로 천하에 자백하는 꼴'이다. 조상은 자기 나름대로 '사마의가 자기 이름을 그런 악명으로 더럽히지 않고 명분에 충실하게 움직일 것'이라는 기대 하에서 상식적인 판단을 한 셈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될경우 비록 우두머리인 조상이나 그의 형제는 일시적으로 파면 당해도 하후현 하후패를 비롯한 조위의 측근이나 조상 일파였던 인물,사마씨를 싫어하는 인물들 상당수는 남아 있으니 완전히 사마씨에게 권력이 넘어 가지는 않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당장은 사마의의 권력이 다소 강해지겠지만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건 아니라 그들을 어느정도는 견제할수도 있을 것이며 시간이 지나서 황제인 조방이 장성하여 직접 친정을 하게 되면 조상의 자손들이 벼슬길에 다시 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 2년후에 사망하므로 사마의가 사망하거나 벼슬에서 물러난후 조상일파가 반격을 시도하거나 사마의 사후 사면 받아 벼슬길에 다시 오를 가능성도 있었다.즉 여러가지를 계산해본결과 당장은 파면 당하겠지만 그이상의 불이익은 없고 이조차도 나중에 순탄하게 해결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판단 자체는 그럭저럭 현명했지만 사마의 일족이 명분없는 찬탈은 물론 (고의는 아니라고는 해도) 대낮에 황제를 대놓고 창으로 찔러죽일 수도 있을 정도로 비상식적인 악인들이라는걸 간파하지 못한게 실책이었을 뿐. 환범이 조상을 비난한 걸 보면 사마의 일족의 이런 면모나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는걸 예상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당대에는 그런 의견은 매우 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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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 그들 중 조상의 측근이라 부를 사람은 하안, 필궤, 정밀, 등양, 이승이 있었다. 아버지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필궤를 제외하면 전부 조위 공신들의 자제들이며, 하안은 사실상 조조의 양자였기에 전부 어렸을 때부터 왕래가 있던 사이였다.[2] 조상 일파의 정치가 구체적으로 어떤 식이었는지 알려주는 기록는 없지만, 적어도 하후현의 경우 관리선발의 투명성과 분권을 중심으로 하는 내정개혁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시행되지는 못하였던 듯하며 이후 사마의에게도 권유하나 거절당한다.[3] 그것도 그냥 패배한 것도 아니고 이미 제갈량이 죽은 지 한참 지난 촉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가 참패해 이 싸움으로 잃고 죽은 자가 많았고 관중이 텅 비었다"고 서술하고, 〈한진춘추〉에 따르면 "동관 오른편으로는 인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적혀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수뇌부조차 간신히 도망쳤으며 이 전투로 말미암아 20년 가까이를 위는 수세로 일관하는 처지가 될 정도로 조상의 체면을 잔뜩 구긴 전투였다.[4] 유방과 더불어 조상 일파가 정권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도 말년에는 조상의 정치를 별로 좋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유방과 함께 사임하고, 고평릉 사변 이후에는 유방과 함께 관직에 복귀한다.[5] 장제의 경우 조상이 항복하기만 하면 사마의가 살려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해 조상을 설득했으나 이후 사마의가 조상을 죽여버리자 죄책감을 갖고 얼마 후 사망한다. 그렇지만 딱히 조상 일파의 행동에 찬동하는 면은 없었다.[6] 그마저도 실권만 거두었을 뿐 벼슬은 올려줬으며 사적으로 핍박을 한적은 없고 오히려 나름대로 신경쓰는 모습도 보여줬다.[7] 그리고 조상이 문제가 있는건 사실이었지만 동탁 이각 곽사 급의 개망나니는 아니었고 단지 낙하산 인사에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점뿐인데, 그 이상의 죄를 묻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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