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3년
1. 개요
후한 말 군벌인 유장의 부하로 장표의 아버지며 장숙의 동생.익주 촉군 성도현 사람으로 자는 자교(子喬).[1]
2. 정사 삼국지
《익부기구잡기》에 따르면 형 장숙은 위엄이 있고 엄숙하며 용모가 매우 훌륭했지만, 동생 장송은 사람됨이 짧고 작으며 방탕하고 절개와 지조를 익히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식견이 높고 사물의 이치에 밝아 총명하고 과단성이 있어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조조가 형주를 장악하고 중원에서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유장은 조조가 장로를 이용하여 서촉을 침공할까봐 두려워했다. 이에 여러 차례 사절을 파견하여 조조에게 복종의 의사를 밝히고 꼬박꼬박 각종 예물을 바쳤는데, 그러던 중 파견된 사절이 장송이었다. 문제는 장송이 파견된 때가 하필 적벽대전을 앞둔 시기였고, 손권을 관광태울 생각에 푹 빠져있던 조조는 장송을 무시하였다.[2] 관직도 영창군의 비소현령(比蘇―) 자리만을 주었고, 결국 장송이 불만을 품었다.
이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자 장송은 조조와의 관계는 끊고 유비와 제휴할 것을 유장에게 권하였다. 유장이 장송에게 누가 유비에게 사신으로 가면 좋겠냐고 묻자 장송은 평소 자신과 친한 법정을 추천하였다. 이로써 유장은 유비와 연합하였고 이어서 법정과 맹달을 통해 수비할 병사 수천 명을 지원해주었으며 전후로 선물도 막대하게 하였다. 법정이 돌아와 장송에게 이르길 유비에겐 웅대한 계략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둘은 이전부터 유장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남몰래 탄식해왔던 터라 유비를 받들 모의를 하고는 때를 기다렸다.
이후 조조가 한녕태수 장로를 정벌하려 한다는 소문에 유장이 두려워하였다. 장송이 설득하기를, “조조군은 천하무적입니다. 장로의 자원을 이용해 촉을 경략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유비는 같은 종실이고 조조의 오래된 원수이며 용병도 잘합니다. 유비라면 장로를 틀림없이 쳐부술 것이고 그러면 익주는 튼튼해져 조조라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지금 방희, 이이(李異) 등은 자신의 공을 믿어 교만하며 그 마음도 외부 세력에 기운 것 같습니다. 유비를 부르지 않는다면 안팎에서 난을 접해 필패할 것입니다.”라 했다. 주부(主簿) 황권과 종사 왕루가 완강히 반대하는데도 유장은 법정을 시켜 유비를 불러들였다. 법정이 유비에게 유장 몰래 헌책하기를, “장군의 뛰어난 능력으로 유장의 나약함을 틈타십시오. 주의 고굉(股肱)인 장송이 내응하겠습니다. 연후에 익주의 부유함을 바탕으로 험한 지세에 기댄다면 대업도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게 이룰 것입니다.”라 하였다. 유비가 이에 응하였다.
유비가 삼파(三巴)를 거쳐 광한군 부현(涪縣)에 이르렀다. 유장이 직접 보병과 기병 3만여 명을 이끌고 마중 나가 성대한 환영 행사를 벌였다. 장송이 법정으로 하여금 ‘이 자리에서 바로 유장을 덮치는 게 가능하다’고 유비에게 고하게 하였다. 방통 역시 같은 진언을 하였으나 유비는 중대한 일이니 창졸간에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유장은 유비를 행 대사마, 영 사례교위로 추천하고 유비는 또한 유장을 행 진서대장군, 영 익주목으로 추천했다. 유장은 유비의 군사를 늘려주어 장로를 공격하도록 하고 또한 백수군(白水軍)[3]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의 군사는 통틀어 3만여 명에, 수레, 갑옷, 기계, 물자가 매우 많았다.
이 해, 유장은 성도로 돌아갔다. 유비는 북쪽으로 가맹(葭萌)에 도착하고, 즉시 장로를 치지 않고 은덕을 후하게 베풀어 중심(衆心-민심)을 거두었다.
212년, 조조가 동오를 치려 하자 유비는 방통의 계책 중 두 번째 것을 선택해 유수구 전투 중인 손권을 돕겠단 구실로 동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장송은 유비의 진의를 몰랐기에 유비와 법정에게 편지를 써 ‘이제 막 대사가 실현될 참인데 어찌 관두고 가버립니까!’라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장송의 형인 광한태수 장숙이 화가 미칠까 겁이 나 유장에게 이 사실을 밀고해 버렸다. 이에 추악한 정황을 알게 된 유장은 장송과 그의 일가를 다 참해버리고 유비에게로 향하는 교통을 차단하였다. 유비가 이것을 빌미로 유장이 준 병사와 군량을 가지고 자신의 친족을 향해 전쟁을 개시하였다.
배송지가 《삼국지》선주전에 주석을 달며 인용한 위소(위요)의 《오서》(吳書)에서는 법정이 유비와 밀약하기 전에 장송이 먼저 유비를 대면해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 익주의 병기·물자·인마의 수량, 각 요해처의 거리 등 그 허실에 대해 유비가 묻자 모든 정보를 알려주고 지도까지 그려주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유장전〉, 〈선주전〉, 〈법정전〉에 의하면 장송은 유비한테 파송된 적이 없다. 사마광은 통감고이에서 이를 《오서》의 오류로 보아 《자치통감》에 삽입하지 않았다.
3. 삼국지연의
키도 짤막하고, 콧대도 낮아서 볼폼없고, 뻐드렁니까지 난 추남[4]으로 묘사된다. 당시 유장은 한중의 장로가 서촉을 위협하자 잔뜩 쫄아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장송이 나서서 조조를 설득하여 장로의 위협을 제거하겠다고 진언한다. 유장은 그 주장을 받아들여 허도에 파견하였지만, 사실 장송은 유장의 그릇이 변변치 못해 서촉을 지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서촉을 진상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파촉지형도를 제작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그래서 일단 조조를 평가하고자 조조에게 갔지만, 당시 마초를 관광태우고 돌아와 거만해진 조조는 생기다 만 것 같은 놈이 말투까지 불손하다며 냉대한다.[5] 다만 장송의 언변에 흥미를 느낀 양수가 나서서 익주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조의 우월함을 보이기 위해 조조가 직접 집필한 맹덕신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장송은 "이건 조조가 지은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이며[6] 서촉의 삼척동자도 암송하는 병법서"라 이야기했고, 양수가 헛소리 말라며 분노하자 보란 듯이 면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했는데 양수가 책을 넘겨보며 대조하자 하나도 틀리지 않아서 깜짝 놀란다. 이에 양수는 장송에게 "그대와 같은 선비가 익주엔 몇이나 있소?"라 묻자 장송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은 100여 명 밖에 안 되오. 나처럼 재주 없는 인간은 수레에 싣고 말로 될 정도로 많으니 이루 헤아릴 수도 없소."라고 말하며 역시 겸양인 척하며 촉에는 유능한 이가 많다고 자랑한다.
어쨌거나 덕분에 양수의 추천과 설득으로 조조와 다시 만날 수 있었으나,[7] 이미 장송은 조조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었는지 은근슬쩍 조조를 비꼬고 까는 발언을 했다가[8] 분노를 사는 바람에 죽을 뻔 한다.[9] 하지만 양수가 설득한 덕분에 볼기만 맞고 쫓겨났다. 화가 난 장송은 조조를 욕하며 나왔으나, 그렇다고 주군에게 호언장담하고 구원병을 요청하러 나왔는데 빈손으로 익주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어 형주의 유비에게로 향했다. 이때 제갈량은 이미 첩자를 보내 장송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유비에게 진언하여 장송이 도착할 즈음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극진히 대접한다. 이에 감명받은[10] 장송은 유비에게 서촉을 넘기기로 결심한 뒤 "형주를 살펴보매 동쪽으로는 손권이 있어 늘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노리며, 북쪽으로는 조조가 있어 항상 고래처럼 삼키려 드니 이 역시 오래 머무를 땅이 못 됩니다"라며 익주를 취할 것을 제안한다.
유비가 "유장은 같은 혈족인데 어떻게 손을 대겠나"라며 망설이자 "유장은 타고난 성품이 나약해 이미 그 운이 다했다"며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만든 파촉지형도를 헌상하여 진심을 전한다.[11]
이렇게 유비와 합심하고 익주로 돌아와서 법정 및 맹달과 먼저 의견을 공유한 후 유장에게 조조가 익주를 침공할 야심이 있다고 겁을 준 뒤 유비와 동맹하는 것이 좋다고 간언한다. 이에 유장은 혼란에 빠져 곧장 유비군을 익주로 불러들이기로 했고, 그나마 제정신이었던 황권과 왕루 등의 충신들이 '대놓고 역적짓을 하는 놈 말을 믿으면 안 된다'며 만류했으나 유장이 장송의 말만 믿고 씹는 바람에[12][13] 어찌어찌 잘 넘어간다. 하지만 유비는 장송부터 법정, 방통 등이 재촉할수록 더욱 망설였고, 그나마 방통이 제안한 상중하 3가지 계책[14] 중 중책을 따라 거짓으로 형주에 돌아간다고 유장에게 알리고 상황을 보기로 한다.
그런데 장송은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놀라서 유비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밀서를 써서 전달하려고 했는데, 하필 출발하기 직전에 형인 장숙이 갑자기 방문하는 바람에 일단 형을 접대하기로 한다. 하지만 접대 내내 밀서 생각만 하느라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고, 결국 여행의 피로와 취기가 겹쳤는지 도중에 자다가 소매 속에 숨겨둔 밀서를 흘렸는데 그걸 장숙의 시종이 주웠다가 돌아갈 때 주인에게 바쳤다. 당연히 일족 말아먹게 생겼다고 판단한 장숙이 유장에게 일러바치면서 장송은 처형당하고 삼족도 멸해진다.
정사와의 차이점은 우선 용모에 대한 설명. 엄숙한 형과 대비된다고 했지 심한 추남이라는 이야기는 딱히 없는데 연의에선 상당히 못생긴 것으로 묘사한다. 조조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연의에선 유장의 위급함과 혼란을 강조하기 위해 마초를 정벌하고 오만해진 조조를 만나 까대는 것으로 바꿨다. 조조가 '맹덕신서'를 썼다는 것도 실제로는 조조가 손자병법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위무제주 손자병법'[15]이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전하고 있다. 이 책은 당시 널리 통용되었으며 장송이 아니라도 병법 좀 한다는 사람은 다 읽어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16]
4.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장송/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삼국지연의》에서 설정된 자인 영년(永年)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영년은 팽양의 자다. 《화양국지》(삼국지의 배송지주로도 인용되어 있다)에는 장송의 자가 '자교'라는 기록이 있다. 신삼국에서는 이걸 착각하고 극중 장송의 자가 영년인 것으로 나온다.[2] 이 때 양수가 장송에게 조조가 지은 병서를 보여주자 술자리에서 한 번 본 것 만으로도 외워내 양수가 놀라워하며 조조에게 다시 장송을 추천했다는 내용이 일부기구잡기에 남아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연의 부분 참고.[3] 백수군의 '백수'는 광한군 백수현을 가르킨다.[4] 옵션으로 "구리종을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성격은 정사보다는 크게 미화되었는데 용모가 못날지언정 의협심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으며 식견도 상당하다고 표현되었다.[5] 모종강의 해석에 따르면 전에 만난 방통도 추남이었지만, 방통은 연환계를 성사시키기 위해 조조에게 아첨하였기 때문에 조조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고 한다. 남양의 명사라는 명성도 한몫했겠지만 말이다.[6] "이 맹덕신서라는 책의 내용은 본디 전국시대의 이름없는 선비가 쓴 것인데, 왜 승상이 직접 썼다고 거짓말을 하십니까?"라고 대놓고 장송이 조조를 비난하는 판본도 있다.[7] 이문열 삼국지에선 양수가 장송의 재주를 칭찬하다가 그만 맹덕신서 이야기까지 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못마땅한 놈인데 이 일로 인해 심기가 제대로 상했다고 나온다.[8] 다만 마냥 비꼬는 건 아니었고 조조의 그릇이 작은 것인지 큰 것인지 시험해 본 것일 수도 있다.[9]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조조가 호위군을 보여주며 "나의 군세가 정말 당당하지 않은가?"라고 자랑했는데 장송 왈, "과연 승상의 위엄이 높으십니다. 여포와 복양에서 싸우실 때의 일이며, 마초에게 쫓겨 수염을 자르실 때의 일이며, 적벽에서의 일이며, 화용에서 관우를 만난 일이며...(중략)...이 모두 승상의 위엄이 높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들이었습니다!"라며 조조가 참패한 일만 반어법으로 언급하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발언을 하였다.[10]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장송은 본래 유비에게 "약간의" 호감이 있는 정도였으나, 유비가 자신을 극진히 대접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사는 익주(파촉)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도 빼내려 하지 않는 걸 보고 더욱 호감을 느꼈다고 서술하고 있다. 거기다 장송을 배웅할 때 유비 특유의 눈물까지 더해졌으니 그 감동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11] 더군다나 조운과 관우같은 유비의 맹장들이 사자인 자신을 정중하게 호위까지 해 주니 장송 입장에서는 너무 황송하고 몸둘 바를 몰랐던 것이다.[12] 게다가 막상 그들도 조조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대책을 세우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정작 그건 장송이 조조에게 협력을 구하러 가놓고 똥배짱을 부려 원한을 산 것이지만, 당사자인 장송이 입을 열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었다.[13] 장송도 황권과 왕루에게 결코 말빨로 절대 밀리지 않고 반박을 한다. 내용은 "그대들은 근거 없이 유 황숙과 주군을 모함하려고 하는 거요!" 라고 맞받으며 호통을 쳤다.[14] 닥치고 성도로 쳐들어가는 것이 상책, 문제가 생겨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간을 보는 것이 중책, 진짜로 형주로 돌아가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하책이었다.[15] 약칭 위무주손자, 현대식으로 쓰면 손자병법 조맹덕 주석판이다.[16] 즉 현대에 존재하는 물건에 영감을 받고 작가가 소설에서 재창작한 것. 즉 이름만 같은 다른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면 영화 '광해'에 나오는 광해군이 실제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