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6:51:20

노육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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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의 사공(司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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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毓
노육
시호 성후(成侯)
작위 관내후(關內侯) → 고곽정후(高郭亭侯) → 대량향후(大梁鄕侯) → 용성후(容城侯)
최종직위 사공(司空)
성씨 (盧)
(毓)
자가(子家)
종형 최염(崔琰)
생몰기간 183년? ~ 257년 3월[1]
고향 유주(幽州)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공 재임기간 256년 10월 ~ 257년 3월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조조 시절2.3. 지방 태수 생활2.4. 인재 등용2.5. 조방 시절2.6. 조모 시절
3. 평가4.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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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조위의 인물이며 자는 자가(子家)로 노식의 4남이자 유주 탁군 탁현 출신. 손례와는 같은 군 출신인데, 둘은 나이가 서로 비슷하고 임관 시기도 비슷했지만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2년에 아버지 노식이 죽고 노육은 열 살의 나이로 고아가 되는데, 공손찬원소의 싸움에 휘말려 두 형마저 죽는다. 거기다가 유주와 기주에는 기근까지 들어 노육은 형수와 형의 아들까지 보살펴야 했으며, 그런 환경에서도 그의 학식과 품행을 칭찬받는다.

2.2. 조조 시절

211년 조비가 오관중랑장에 임명될 때 문하적조에 임명되며, 그 때 최염은 같이 군부에 들어온 손례와 노육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리면서 노육을 천거하니 노육은 기주주부가 된다.
손례는 성글고 밝고 격하며 강인해 결단에 능하고, 노육은 청렴해 사리에 밝고 끊임없이 연마하니 모두 삼공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그가 기주주부가 되어 활동할 당시에는 도망친 사람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탈주 사병에 대해서는 무거운 죄와 함께 연좌제로 처자식에까지 죄를 주던 상황이었다. 한 번은 백이라는 여자가 남편의 집으로 시집온 지 며칠 밖에 안되어 얼굴도 못 봤는데, 남편이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리는 연좌제에 따라 아내에게 사형을 판결하자 노육이 반발하며 말한다.
무릇 여인의 감정은 남편과 직접 만난 후에 애정이 생기고, 부인이 된 후에 의리가 두터워집니다. 때문에 시경에서는 '그대를 보지 못하니 나의 마음 슬프구나. 그대를 본 후에는 나의 마음 편안하구나.' 라고 했습니다.
예기에서는 '선조를 제사지내는 묘에 가지 않은 부인이 죽으면 그 여자의 집으로 돌려보내 안장시키고, 부인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백 등은 살아서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 슬픔이 있고, 죽어서는 부인이 되지 못한 통한이 있을 텐데, 관리들의 의론은 이들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부부가 된 후에는 어떤 죄를 더할 것입니까?
그리고 예기에서는 '형벌을 시행할 경우에는 가볍게 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의 죄를 처벌할 때는 가벼운 것을 따르는 것이 통례라는 말입니다.
상서에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어찌 죄의 판결을 가볍게 하게하고 과실을 범하는 것이겠는가?' 라고 했는데, 이것은 형벌의 과중함을 걱정한 것입니다. 백 등이 모두 예빙을 받아 이미 남편의 집으로 들어갔다면 그녀를 형벌에 처할 수 있지만 죽이는 것은 너무 무겁습니다.

이런 노육의 상소를 들은 조조는 노육의 경전에 대한 이해도를 칭찬하면서 그의 주장을 긍정하며, 노육을 승상법조의령사로 임명했다가 이어서 서조의 영사로 전임시켰다. 213년에 조조가 위공으로 임명되어 위나라가 세워지자 노육은 이부랑으로 임명된다.

2.3. 지방 태수 생활

220년에 조조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조비가 즉위하자 황문시랑이 되었으며, 곧 지방으로 나가 제음의 상이 되고 양과 초 두 군의 상이 된다.

그 때 조비가 초 땅이 자신이 고향이라면서 백성들을 초 땅의 척박한 강제로 이주시켜 둔전을 시행해 고향을 번영시키려고 하자 노육은 그 곳에서의 백성들의 빈공한 생활을 보고 표를 올려 그들을 비옥한 양땅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는데, 조비는 그의 말에는 따랐으나 크게 실망하고 마음속으로는 노육을 원망한다. 그리고 조비답게 그를 좌천시켜 이주한 백성들을 관리하게 하고 수양전농교위에 임명한다.

그래도 노육은 그런 조비의 행동에도 굴하지 않고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신의 원 목적이었으므로 직접 가서 시찰하고 좋은 밭을 선택해 살도록 해서 백성들은 그를 신뢰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는 곧 안평, 광평태수로 승진하며, 그가 광평태수로 임명되고 3일만에 명함을 장전에게 보내려고 들자 노소가 반대하지만 그는 주부를 시켜 서신과 함께 술과 양고기를 보낸다. 이번 임지에서도 은혜와 교화를 폈다고 한다.

2.4. 인재 등용

조예가 황제로 있던 234년에는 수도로 돌아와 시중이 되었으며, 유소가 법률 제정의 명령을 받고도 쩔쩔매고 완성을 못하고 있으니 노육은 표를 올려 고금의 법률을 논하면서 법률에는 하나의 생각만이 있어야지 두 종류의 해석이 존재해 간사한 관리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감정을 갖을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 당시 황제인 조예고당륭 등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계속 세우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노육이 이것을 보고 진언을 한다.
신이 듣기에는 군주가 총명하면 신하는 정직하고, 옛날 성왕은 자신의 허물을 듣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에 감히 간언하는 북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지금 신하들은 살펴 권하는 것을 다하고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신 등이 고당륭에 미치지 못합니다. 고당륭 등의 유생들은 강직하다고 불리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노육이 3년 동안 재직하면서 계속해서 정책적인 의견으로 충돌이 잦았는데, 조예가 이에 반응해서 조서를 내린다.
사람들의 재간에 근거해 적합한 관직을 주는 것은 성명한 제왕들도 어려워했던 것이고, 반드시 훌륭한 보좌가 있어야 적임자를 뽑아 부적임자를 대신하도록 할 수 있다. 시중 노육은 천성이 바르고 곧으며, 마음이 공평하고 행위가 단정하므로 자리에서 게으르지 않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노육을 이부상서로 임명하라.

그리고는 자신이 있던 자리인 시중의 후임을 추천하라고 하는데, 노육은 처음에 정충을 추천한다. 그리고 조예는 그는 이미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며, 그러자 노육은 원무와 손옹을 추천하고 조예는 손옹을 발탁한다.

그리고 후에 제갈탄등양을 비롯한 사총팔달의 무리가 위세를 떨쳤는데, 그들을 싫어한 조예가 중서랑의 공석이 생기자 명성은 땅에 그린 빵과 같이 쓸모 없는 것이라면서 오직 노생(노육)만이 제대로 된 임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천을 명한다. 이에 노육은,
명성은 특별한 사람을 부르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지만 평범한 선비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평범한 선비는 가르침을 존경하고 선을 흠모한 연후에 유명하게 되므로 그들을 증오해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은 신하는 특별한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충분하지 못하며, 또 명성에 따라서 평범한 인물을 살피는 것을 직물 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 후의 일을 당연히 조사해야 됩니다.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탄핵하거나 상주함에 있어서 말로써 하고, 그 말의 허실에 대해 명확하게 조사를 할 경우에는 공적을 갖고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관리의 성적을 평가하는 법은 폐지되었고 비난과 칭찬의 평판에 따라서 나아가고 물러남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진위가 혼란스럽게 섞여 있고, 허실이 서로 구분되지 않은 것입니다.
조예는 이 말을 받아들여 관리를 평가하는 제도를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237년에 진교의 죽음으로 생긴 사도의 공석에 조예는 다시 한 번 노육에게 인재 추천을 요구하는데, 노육은 관녕을 추천한다. 그러나 조예는 이를 거부하면서 다음으로 추천할 사람을 물으니
돈독하고 품행이 지극한 사람은 태중대부 한기이고, 맑고 정직한 사람은 사예교위 최림이며, 충정이 있고 순수한 사람은 태상 상림입니다.

그러자 조예는 이런 그의 추천에 한기를 뽑아 사도로 임명한다.

이같은 노육의 인물에 대한 태도와 선발 태도는 우선 성품과 품행을 든 후에 대담과 재간에 이르었는데, 황문 이풍이 이를 보고 노육에게 꼭 이렇게 해야 되는 까닭에 대해 묻는다. 노육이 이에 답해
재간은 선을 행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큰 재간은 큰 선을 이루고, 작은 재간은 작은 선을 이룹니다. 지금 재간이 있다고 칭찬했지만 선을 행할 수 없다면 이것은 재간을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이풍은 크게 공감한다.

2.5. 조방 시절

239년에 조방이 즉위하자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 후 조상이 권력을 잡을 시기에 사총팔달 시절부터 노육과 사이가 좋지 않던 조상 일파는 노육의 직책을 복야로 옮기고 하안을 노육의 후임으로 임명한다. 오래지 않아 노육을 정위에 임명해 지방으로 내쫓는데, 이 때 노육의 속관이 작은 죄를 범하자 사예로 있던 조상파의 일원 필궤는 조문을 뒤져 노육을 법에 따라 처벌한다며 내쫓는다.

그런데 여기서 노육의 인수를 먼저 거둬들인 뒤에 황제에게 보고하는 패기 넘치는 행위를 저지른다.

노육은 광록훈이 되었다가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 일파가 처리된 후 사마의는 노육에게 사예교위를 대행해 조상의 일을 처리하게 하며, 이어서 노육은 이부상서로 임명되었다가 봉거도위의 관직을 더하면서 고곽정후로 봉해져 복야로 전임된다. 하지만 252년에 사마사의 지시로 이풍과 함께 선발과 등용을 관장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여기에 광록대부의 관직이 더해진다.

2.6. 조모 시절

254년에 조모가 즉위하자 대량향후로 봉해지고 한 아들을 정후로 봉하며, 255년 관구검의 난이 일어나 사마사가 이를 정벌하러 갈 때 노육은 조정의 일을 총괄하고 시중의 관직이 더해진다.

256년에 중병으로 관직을 사직하려 하지만 오히려 256년 10월에 사공으로 승진해 최염의 말대로 삼공의 직위에 올라 왕찬, 왕관, 왕상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리고 조모는 이어서 사자를 보내 노육에게 인수를 주고 노육을 용성후로 봉하니 노육의 식읍은 2천3백 호에 이르며, 얼마 안되어 257년 3월에 세상을 떠나 손자 노번이 뒤를 잇고 시호를 성후라고 했다.

3. 평가

그의 명성은 손례와 비슷했지만 서막보다는 낮았다고 한다. 진수는 오랜 기간 자리에 있으면서 간언을 잘하고 사리를 분명히 했으니 모두 그들의 직책에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평했다.

구주인사론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신당서에서는 이 책을 명가(제자백가)로 분류했다. 이로 보아 그의 학문적 배경 역시 짐작할 수 있다.

4. 창작물에서

4.1. 삼국지 시리즈

파일:노육.jpg
삼국지 14 일러스트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4부터 등장하고 능력치는 통솔 30, 무력 23, 지력 71, 정치 79, 매력 78이며 일러스트는 아버지처럼 두 손으로 죽간을 들고 있다. 개성은 절약, 법률, 교화, 안목, PK에서는 자비 개성이 추가되었으며 주의는 예교, 정책은 본초학 Lv 3, 진형은 학익, 투석, 전법은 대갈, 고무, 투석, 친애무장은 최염, 혐오무장은 손례다.

4.2.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서는 수춘2 전투 편에서 이름만 언급된다. 전대 사공으로 수춘2 전투 편 시점보다 얼마 전에 죽었다고 언급된다.

4.3. 삼국지톡

파일:삼국지톡 노육.jpg
의외로 삼국지톡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젊은 모습으로 조비의 과외교사로 등장한다. 다소 소란스럽게 양아버지 조조를 맞이하는 하안에게 대왕의 아들로서 엄숙히 행동할 것을 당부하지만, 그런 하안에게 젊은 꼰대라고 디스당하며 목이 졸린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그에게 예절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이에 조조는 젊은 노식을 쏙빼닮은 노육과 하진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하안을 보며 젊어진 듯한 느낌을 받아 그들을 안고 웃으며 하안에게 사과하라고 한다.[2]

하지만 노육이 조식양수와 함께 부정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내심 조식을 후계자로 정해두고 있었던 조조를 분노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난세를 바로잡을 정직한 임금를 내려달라는 말을 하면서 조조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리는 바람에 한번만 더 말을 함부로 하면 네 아버지의 시신을 파내서 사냥개 먹이로 줘버리겠다는 패드립을 듣고 만다.[3] 독자들이 강직한 이 양반 닮았다 카더라

조비 즉위식 때 하안, 조홍과 같이 술을 마시며 축하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유비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해하고 어이없어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만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4]

[1] 10살 때 고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버지 노식이 192년 사망.[2] 당시 조조는 가후만 눈치챘지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권력을 내려놓기 두려워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상태였다.[3]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는 노육에게 경고하기 위해 던진 말일 뿐이지 전투 중에도 노식 무덤에 들러 절을 할 정도로 노식을 존경한 조조는 절대 그런 짓을 실행에 옮기기는 커녕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안도 노육에게 속으로 조조가 노육에게 분노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다.[4] 노육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제자가 조조의 아들이라 그렇지 아버지가 누굴 가르쳤는지를 떠올리면 씁쓸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