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2:12:30

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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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읍경후(昌邑景侯)
滿寵
만총
파일:만총석상.jpg
시호 <colbgcolor=#ffffff,#191919>경(景)
작위 관내후(關內侯) → 안창정후(安昌亭侯) →남향후(南鄉侯) → 창읍후(昌邑侯)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滿)
(寵)
백녕(伯寧)
생몰기간 ?년 ~ 242년
고향 연주(兗州) 산양군(山陽郡) 창읍현(昌邑縣)
태위 재임기간 239년 3월 ~ 242년 3월

1. 개요2. 생애3. 평가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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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중신으로 는 백녕(伯寧). 시호는 경후(景侯). 만위, 만병의 아버지.

2. 생애

18세 때 군(郡)의 독우가 되어 현의 사람 이삭(李朔) 등이 군대를 끌고 백성들을 침범하자 태수가 만총을 보내 법으로 다스려 그치게 만들었고, 고평현의 현령 때는 독우 장포(張苞)가 뇌물을 받고 행정을 그르치자 그를 체포해 고문치사(!)에 이를 정도로 처벌하고는 그대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다.

조조연주(兗州)를 평정하자 부름을 받고 종사가 된다.

196년에 조조가 헌제를 옹립하고 대장군이 되자 만총을 허현현령으로 삼았으며, 그때 조홍의 빈객 일부가 허현에 있어 그들이 조조의 일족인 조홍의 위세를 믿고 법을 자주 어겼다. 그것을 본 만총이 이들을 모두 잡아가두자 조홍이 사면을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조홍은 조조에게 가서 호소했는데, 조조가 만총을 부르자 만총은 조조가 그들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릴 것임을 알아채 이들을 재빨리 죽였고 조조는 마땅히 다른 자들이 만총을 본받아야 한다고 칭찬한다.[1]

그 뒤 태위까지 지냈던 양표원술과 내통할 것을 의심[2]한 조조가 그를 압송해 만총에게 심문하게 했다. 이에 순욱공융 등이 양표에게 형벌을 가하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만총은 대꾸도 하지 않고 법대로 엄하게 심문해서 순욱과 공융은 매우 화를 냈다.

하지만 며칠 뒤 만총은 조조를 만나,
양표를 심문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사형에 처해야만 되는 자는 먼저 그의 죄를 명백히 밝혀야만 하는데, 이 사람은 사해 안에서 명성이 있으므로 만일 죄가 명확하지 않으면 명공은 반드시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사로이 명공 때문에 애석해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고, 조조는 그 날 중에 양표를 사면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순욱, 공융은 오히려 만총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조조와 원소가 싸웠을 때 여남에서 계속 원소를 지지하는 무리들이 발호하자[3] 여남태수로 만총을 임명한다. 그 곳에서 무리들을 상대로 싸움을 해 모두 평정한다.

조조는 그 이후 여남태수이통을 임명하고 만총을 소환한 듯하나[4] 이통이 죽은 뒤 만총은 여남태수에 복귀한다.

그 후 완성후음이 반란을 일으키고 관우가 북상하고 관우가 양양(襄陽)을 포위했을 때, 만총은 이를 요격하기 위해 출병한 조인을 지원해 번성에서 관우에 저항했다. 조인, 우금은 한수에서 대치했고 만총은 번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수의 범람으로 대패하자 조인은 번성에서 고립된 채 포위당했으나 형세가 매우 위급했다. 장마로 성벽이 물에 잠기자, 조인은 성에서 탈출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에 만총은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진언했고, 조인은 그의 조언을 따라 농성을 계속했다. 결국 지원군 서황이 도착해서 함께 관우의 번성 포위망을 풀었다.

그 뒤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양무장군이 되고 신야에 주둔하게 된다. 그 뒤 조비가 남하해 와 싸울 때 종군해 부대를 지휘한다. 이곳에서 적의 복병이 와서 화공을 쓸 것을 예측한 뒤 대비했는데 과연 그날 밤에 복병이 오자 이것을 격퇴한다.

222년부터 꾸준히 승진하면서 식읍이 증가했고, 가절월까지 받기에 이른다. 224년에는 전장군이 되었다. 228년예주자사가 되었다가 229년에는 손권이 사냥한다는 소식을 듣고 북상해 의 영토를 침략할 것을 예상하고 대비를 해 손권이 그냥 물러가기도 했다.

229년 가을에 조휴석정에서 주방의 거짓투항에 속아 남하하자 만총은 적의 유인이라 파악하고 조정에 서찰을 보내 조휴를 말린다. 하지만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조휴는 이미 고립된 뒤 격파당했고 만총은 조휴를 구원해 탈출시킨다. 이 일로 인해 조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만총은 조휴의 직무를 대행한다. 그해 만총이 여남을 지날 때는 백성들이 만총을 사모해 수많은 이들이 만총의 뒤를 따라 황제가 친위대 천 명으로 그의 호위를 하게 했다고 한다.

230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을 때 만총은 예주, 연주의 병력을 소집했고 손권은 군대를 물렸다. 조정에서는 군을 해산하라고 명했으나 만총은 이것이 계략이라고 판단했고, 과연 손권은 10여 일 후 다시 돌아와 공격했다. 그러나 만총이 대비를 단단히 해 놓았으므로 이길 수 없었다.

231년에 손권의 부하 손포가 항복을 청해 양주자사로 있던 왕릉이 그를 맞이하려 들었으며, 왕릉과 만총은 이 때 사이가 나빴다. 왕릉의 지지자들은 만총이 게으르고 늙고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고 따라서 조예는 그를 불러 과연 그런지 확인하려 했는데, 만총은 수도로 떠나기 전 왕릉에게 편지를 써 손포의 항복은 거짓이니 대비를 하라고 당부했고 왕릉이 듣지 않자 만총은 자신의 부하로 있던 장리에게 왕릉이 군을 요청하면 주면 안 된다고 해 왕릉이 군을 얻지 못하자 한 명의 독장과 부하 700명만 보내 손포를 맞이하러 갔고 과연 손권군이 복병으로 공격했으므로 반이 죽고 퇴각했다.

조정에서 만총을 만나본 조예는 만총이 여전히 총명한 것을 보고 돌려보내려 하자 만총은 늙었음을 들어 조정에 남아있기를 청했다. 조예는 염파 등을 예로 들며 왜 이들과는 반대로 늙었음을 들어 남아있길 원하는가 하면서 다시 돌려보낸다.

육손여강을 공격하자 구원해야 한다고 했는데[5] 만총은 이것이 자신의 본군을 꾀어내려는 계략이라고 생각해 본군을 이끌고 남하하면서 양구에서 견제했고 손권군은 물러났다.

233년에 기존의 장료가 수비하던 합비성이 자주 포위되고 그럴 때마다 대군으로 구원했기 때문에 기존의 성을 파괴하고 30리 떨어진 요새에 새로운 성을 지어야 한다고 간언했으며, 장제가 이것은 적의 기세를 높여줄 뿐이라고 했으나 조예는 만총의 진언이 더 낫다고 생각해 구 합비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성을 짓게 한다.

그 뒤 위군이 합비의 신성으로 옮기자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상륙했다. 이때 손권은 위가 성을 옮긴 것을 오군의 위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병력을 도열하고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를 예측한 만총이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손권이 이럴 때 기습했으므로 오군은 대패하고 손권은 배 위로 달아난다.

234년에 손권이 다시 합비의 신성을 공격했을 때는 조예에게 상황이 위급하다며 원군을 청하는 한편 수십 명의 용사를 모집해 손권 진지를 야습하고 성곽 공격 무기를 불태워 적을 퇴각시킨다. 235년에 손권군이 그 근방에서 둔전을 하자 만총이 대군을 출동하여 기습, 많은 이들을 죽이고 군량을 불사른다.

238년에 노령으로 소환되어 태위로 승진하고, 242년에 사망하는데 재산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남은 재산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조예가 그에게 금을 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총의 녹읍은 엄청나게 많아 조창이 왕으로 봉해졌을 때 받은 녹읍이 1만 호였었는데 만총은 왕이 아니면서도 9천 6백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것은 등애, 장로, 종회, 조창에 이은 다섯번째로 많은 식읍이었다. 등애와 종회가 촉을 멸망시킨 엄청난 공이 있고 장로는 한 때 한 지방의 군주였고 조창은 조비의 동생이자 왕이였다는 걸 고려해보면 만총은 사실상 위를 섬긴 모든 무관/문관들 중 최고 수준의 식읍을 받은 것이다.

간접적이지만 제갈량을 물 먹인 적도 있다.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계획은 촉오 연합군이 동시에 위를 협공하는 것이었다. 만총이 조예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사전에 오의 군대를 소수 병력으로 교란시켰으며 손권은 조예의 친정을 듣자마자 병력을 후퇴시켜 제갈량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6] 삼국지연의에서는 결국 크게 낙심한 제갈량이 혼절까지 한다.

후사는 만위가 이어받았으나, 만위의 아들인 손자 만장무사마소가 심기에 거슬렀다는 이유로 몽둥이로 때려죽였고, 만위를 서민으로 강등했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원통해 했다고 한다. 그만큼이나 만총의 명성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별개지만 아들, 손자와 함께 키가 8척(188cm)이나 되었다고 한다.

3. 평가

전선에 나섰을 때는 무관으로서 조인이나 오자양장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군공을 세웠고 후방에 있을 때는 문관으로서 행정-사법 분야에서 큰 활약을 했으나, 이런 다방면의 활약 때문에 특징이 없어서 연의에서 단역에 그친 연의의 피해자이다.

적의 책략을 간파하는데 매우 뛰어나 육손 같은 최상위 기책사들의 책략도 무효화시켰을 정도였으며, 적을 공격할 타이밍을 포착하는 것에도 뛰어나, 만총이 합비 수비를 책임질 때는 손권은 단 한 번도 만총의 벽을 넘지 못했다.

상당한 원칙주의자로 법을 거스르면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법대로 집행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식읍을 상당히 많이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죽었을때 남은 재산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 이러한 원칙주의적인 성격 탓인지 그의 출세는 상당히 더딘 편이었으며 조조의 창업 공신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늦게 임관된 장수들이 만총보다 더 높은 직위를 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불만을 품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고 그 결과 노년에 들어 지위가 높아져 군사도독, 태위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원칙고수/신중형 인물로 비록 약간은 더디지만 완벽한 일처리가 특징인 인물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원소와 조조의 결전 당시 신속함을 바탕으로 고작 500의 병력을 모아 20개의 성벽을 공략하고, 반란군의 지도자들이 모이게 만들어 일거소탕함으로써 원소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던 여남군을 단번에 평정한 바가 있다. 이를 보았을 때 급박한 상황에서의 빠른 대치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니, 여러모로 만능형 인물.

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무관 쪽 행보는 그저 제갈량이 북벌할 때 그의 계획을 간접적으로 엿먹이는 역할로만 나올 뿐 존재감이 미미하다. 활약상만 봐도 대오 전선에서 사실상 원맨 캐리 수준으로 오의 공격을 막아냈는데도 비중이 별로 되지 않는 편. 때문에 연의의 피해자 목록에 기재되어 있다. 대신 문관 쪽 행보가 많이 늘어난다. 서황과 친구라는 설정으로 그를 설득하여 귀순시키고[7],[8] 조조와 유비에게 공손찬의 죽음을 전하는가(...) 이건 셔틀같다 하면, 관우를 타도하기 위해 위와 오가 연계할 때도 사신으로서 활약한다.[9] 읽다 보면 문관인지 장수인지 애매한 느낌이 든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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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조 입장에서는 친족인 데다가 가산을 털어서 자기의 기반을 마련해주기까지 한 조홍을 대우해주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보니 제아무리 죄를 저질렀어도 조홍의 빈객을 무작정 처벌하기는 다소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만총이 서둘러 형을 집행해버렸으니, 우선 그 덕분에 규율의 엄함은 섰고 동시에 조조는 조홍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뉘앙스는 취했지만 만총이 독단적으로 형을 집행했다고 변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총이 조조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잘 긁어준 셈.[2] 양표아내원술의 여동생이었다. 당시 양표의 나이는 56세로 조조보다 10살 정도 위였다. 하지만 양표는 조조보다 더 오래 살았고 나이 80세가 넘어 죽는다. 그는 양수가 처형된 뒤 조조와 대면한 뒤 마음이 아픈 심정을 애둘러 표현하기도 했다.[3] 여남은 원씨의 본가가 있던 곳인 데다 원소가 묘지기 하면서 6년간 머물며 인재를 모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원소에 대한 지지가 강했다.[4] 만총이 기반을 잡은 뒤엔 싸움에 능한 무장인 이통을 여남태수로 두는 것이 더 나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5] 여강은 위와 오의 지역이 나뉘어 있었다.[6] 합비 점령 없이는 어차피 북벌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합비를 돌파하지 못하는 손권이 제갈량과 함께 무엇인가를 해 볼 상황이 안 됐다. 사실 제갈량이 계획하기 이전에 손권이 합비에 쳐들어 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제갈량과 호응해 합비를 쳐들어 간 것은 이번에도 일어난 일. 그리고 여전히 박살났다. 손권의 군사적 재능이 없기도 했고 합비를 공격하면 항상 배후의 연주, 예주, 청주의 부대가 동원되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손권은 이런 상황에서도 기만책까지 써가면서 응전했지만 이때마다 결정적으로 패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보니 손권 역시 합비를 공격하고 나서 간만 보고 돌아가는 일도 꽤 많았다. 당장 234년의 경우 조예가 정예 중앙병력을 서쪽으로 보내고 남은 후방 병력을 가지고 친정한다는 소릴 듣자마자 그냥 군대를 빼버렸으니... 손권보다 더 나은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제갈각의 경우 20만 군대를 동원하긴 했으나 그 자신의 불찰로 인해 철저히 털리고 몰락하던 게 당시 손오의 군사적 상황이었다.[7] 이때 서황에게 '양봉의 목을 가져가면 조조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며 은근슬쩍 양봉을 죽이자고 제안하나 서황은 '아무리 내가 조조에게 귀순한다 해도 지금까지 섬겼던 사람을 죽일 순 없다.'며 거절, 이에 만총이 '내가 잘못했네. 자네야말로 진정한 충의지사일세.'라며 사과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황의 충의지사적인 성격을 뒷받침하는 부분.[8] 이것은 이전에 있었던 동탁의 명을 받은 이숙여포에게 정원을 배신하라고 설득하는 장면과 굉장히 유사하다. 다만 여포는 그 배신에 응한 것도 모자라 아예 정원을 죽여서(...) 그 목을 동탁에게 갖다바치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 반면 서황은 배신에는 응했으나 차마 자기가 섬기던 양봉을 죽이지 못하고 본인만 양봉 진영에서 벗어나 조조에게 귀순한다는 점에서 패륜아 여포와 충의지사 서황의 차이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인다. 반면 만총은 이숙과 똑같이 부하에게 주군을 배신할 것을 종용하는 음험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9] 이때 만총은 현실적으로 사신으로 갈수 없는게 번성에 갇혀 조인의 지휘 하에 수성 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