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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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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弼
226년 ~ 249년

1. 개요2. 생애3. 일화4. 평가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왕개의 손자이자 왕업의 아들, 왕굉의 동생.[1]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으로 자는 보사(輔嗣).

2. 생애

어려서부터 총명하면서 배우기를 즐겨 십여 살 때 유가도가의 이치에 대한 논의를 좋아했으며, 문필이 좋아 예능이 있었고, 투 머치 토커 변론을 좋아하였으며 이에 능했기 때문에 부하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천박하였지만 온화하였고, 주연을 좋아하였으며, 음률에 통달하였고, 투호를 잘했다.

하안이 그를 만나보고 감탄하여,
"공자께서 젊은 후배가 무섭다고 했거늘, 이 사람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라고 말했으며, 성인은 정이 있으면서도 거기에 걸림이 없어 성인에게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고 하는 하안의 주장(성인무정설)에 반대했다. 도가의 학설에는 하안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를 넘는 설도 많았다고 하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을 비판하여 당시의 지식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하안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정작 하안이 실세로 있던 당대 정권의 최고권력자 조상에게 배척당했다. 정시(正始) 연간에 황문시랑이 누차 결원됐는데 하안은 가충, 배수(裴秀), 주정(朱整)을 이미 쓰고 다시 왕필을 쓰는 것에 관해 의논하였다. 당시에 정밀(丁謐)이 하안과 더불어 다퉜는데[2] 고읍의 왕려를 조상(曹爽)에게 추천했고 조상은 왕려를 기용하였다. 이에 왕필을 대랑에 보하였다. 처음 제수됐을 때 조상을 만나 독대를 청했는데 조상은 좌우를 물렸고 왕필은 더불어 도를 논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도록 다른 화제로 옮기지 않아 조상은 이로 말미암아 왕필을 비웃었다. 당시에 조상이 조정의 업무를 오롯이 하여 당파가 더불어 같이 등용됐는데 왕필은 통달 준매하여 이름이 높은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얼마 후 왕려는 얼마 있지도 않고 병으로 죽었고 조상은 왕침을 왕려의 대체로 삼았다. 왕필은 마침내 문하에 있지 못하게 됐고 하안은 이 때문에 탄식하고 한스러워 했다.

도덕경》, 《주역》 등의 고전에 주석을 달았는데, 세설신어에 따르면 노자의 주석을 달던 하안이 왕필이 노자의 주석을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쓰던 것을 그만두고 도덕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또한 하안, 하후현 등과 함께 현학청담 기풍을 창시해 정시지음(正始之音)이라 일컬어졌다. 이 정시지음에 속한 인물들은 위나라 후기 사회,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왕필이 대성에 있던 시간이 적고 일을 해서 성과를 내는 것 역시 그가 잘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더욱 뜻을 두지 않았다. 회남 사람 유도(劉陶)는 종횡가의 학설을 잘 이야기하여 당시의 추앙을 받았다. 매번 왕필과 이야기하면 항상 왕필을 굴복시켰다. 왕필은 하늘이 내려준 재주로 탁월하여 그가 얻은 것은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천성이 온화하고 조리 있었으며 연회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고 음률을 이해하였으며 투호에 능했다. 그가 도를 논함에 있어 문장을 쓰는 것은 하안만 못했지만 자연히 얻은 심득에 있어서는 하안보다 많았다. 왕필과 종회가 친하게 지냈는데 종회는 논의를 함에 있어 정밀한 사고를 근본으로 하였는데 매번 왕필의 고상한 식견에 굴복하였다. 왕필은 주역의 해설을 썼는데 영천 사람 순융이 왕필의 대연의를 비난하였다. 왕필이 그 뜻을 답하며 편지를 썼는데 희롱하며 말하길
「무릇 밝음이 족히 깊고 미묘한 곳을 찾고 끝까지 달할 수 있지만 자연의 본성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안자의 분량은 공자가 예측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만났을 때 기쁘지 않을 수 없었고 잃었을 때 슬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항상 그 사람(공자)을 협소하게 생각해 감정을 도리에 종속시켜 따르게 하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은 마침내 자연이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족하의 분량이 비록 가슴속에 정해졌다고 하나 한 달정도 못 보면서 어찌 그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 이토록 많습니까? 그러므로 공자가 안자에 대한 것이 가히 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왕필은 노자의 해설을 쓰면서 노자지략을 지었는데 (노자를 해석하는데) 통일된 원리가 있었다. 특히 철학책에 주석을 달면 본문보다 주석이 많아(철학이 많은 논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 읽기 불편한 경우가 많은데, 왕필의 노자 주석은 본문과 주석의 분량이 거의 같아 왕필이 노자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덕론을 저술하고 주역을 해설하는데 있어 왕왕 심오하고 아름다운 언사를 사용하였다. 왕제가 담론을 좋아하였는데 노자장자를 비난하였다. 항상 말하길
「왕필이 해석한 주역을 보면 깨우치는 게 많다.」

하였다. 그러나 왕필은 사람됨이 천박하고 물정을 몰라 처음에 왕려(王黎), 순융(荀融) 등과 더불어 잘 지냈는데 왕려가 그의 황문랑을 빼앗자 이에 왕려를 원망하였고 순융과도 또한 좋게 끝나지 않았다.

정시 10년 조상이 폐해지고 송사 문제로 면관당했다. 그해 가을에 역질(천연두) 때문에 죽었으니 당시의 나이가 24세로 아들이 없이 후사가 끊겼다. 왕필의 죽음을 사마사가 듣고는 수일동안 탄식하였으니 그 식견이 높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이 된 것이 이와 같았다.

3. 일화

하안과 관련해서 하안이 지은 도덕론과 관련된 일화 이외에도 세설신어에는 하안의 집에서 담론을 논한 일화와 배휘와 대화한 일화가 있다.

하안의 집에서 담론을 논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하안이 이부상서가 되었을 때 지위와 명망이 높아 당시에 담객들이 가득찼는데, 왕필은 이 당시에 20살도 채 안된 풋사과 나이였지만 하안을 찾아갔으며, 하안도 왕필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지난 번의 담론에서 제기된 이론중에 논리적으로 가장 뛰어난 것를 골라 왕필에게 "이 이론에 대하여 나는 논리적으로 지극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다시 반론을 펼 수 있겠냐?"라고 묻자 왕필은 곧바로 반론을 펼쳤고, 이를 들은 좌중의 사람들은 하안이 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필은 스스로 문제 제출자와 응답자가 되어 자문자답을 하면서 담론을 전개했는데, 좌중의 사람들 모두가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배휘와 대화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왕필은 약관의 나이에 배휘를 방문해 배휘가 "대저 무(無)라는 것은 진실로 만물의 바탕이 되는 바로서 성인은 기꺼이 언급하려 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끊임없이 부연 설명했으니 왜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왕필은 "성인은 '무'를 체득했고 '무'는 또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유(有)'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노자와 장자는 아직 '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부족한 바를 설명했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배휘와 관련된 일화는 학문적으로도 의의가 있는데, 현학의 경향을 설명하는 주요 예시가 된다. 배휘의 말처럼 대저 그전까지의 유교에서는 무니 현이니 하는 따위의 글자에 대해서 학자들은 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휘가 무와 성인의 관계에 대해서 논급한 것은 그 당시의 학문적 경향이 이미 고전 유교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왕필의 답변은 더욱 현학적이라 할 수 있다. 성인 즉 공자는 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왕필은 성인이 무를 체득했으나 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논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또한 왕필이 부연하기를 노장은 부족했기에 부족한 바를 항시 설명했다지만, 공자가 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왕필의 해석대로라기보단 공자가 무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과는 무관하거나 무심했다고 여기는 편이 사리에 맞다. 왕필이 무를 논함에 있어 그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았던 공자를 끌어들인 것은 공자의 지위를 건드리기보단 공자의 위치와 학문을 빌어 노장의 사상을 뒷받침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노장이 언급한 것을 공자는 언급치 않은 이유가 공자는 노장보다 훨씬 더 잘 파악해서, 즉 그것이 설명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는 얘기니까.[3]

일찍이 상서랑에 임명되었다가 처음에 왕려, 순융 등과 사이가 좋았지만 왕려가 자신의 황문시랑을 빼앗았다고 여겨 왕려가 왕필을 증오했으며, 순융과 끝까지 좋게 지내지 못했다.

249년 조상과 하안이 피살되자 이에 관련되어 면직되었다가 가을에 역질로 죽자 사마사는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라고 탄식하면서 식견 높은 사람들도 이를 애도를 했다고 하며, 아들이 없어 가문이 단절되었다.

《주역》에 주석을 달았다. 주역의 수많은 주석들 중, 왕필의 주석은 공자의 십익(十翼)이후, 우번역 등과 함께 최고의 주로 꼽혔으며, 고려, 조선 시대 잡과 과목에도 들어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워낙 어린 나이에 주석을 달 정도로 천재였는데, 이성을 알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덕경 주석을 할 때 여성성기를 이해하지 못한 흔적이 있다. 왕필이 《도덕경》을 주석한 나이는 16살.

모두까기 인형 손성이 평하길 '주역이라는 책은 신비의 극에 이르고 (만물의) 변화를 아는 것으로 천하의 지극히 정밀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를 더불어 하겠는가? 세상의 해설이라는 것은 대체로 모두 망령되이 함부로 한것이다. 하물며 왕필같이 견강부회에 가까운 언변으로 불명확하게 대충 현묘한 뜻을 논하고자 함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그 대충의 뜻을 서술하는데 있어서는 화려한 언사가 눈에 가득차지만 음양에 나아가서는 심오한 도리가 들리지 않고 6효의 변화, 여러 상들의 본받은 바나 일시, 세월, 5기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있어서 왕필은 전부 생략하고 많이 관련되지 않았다. 비록 볼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아마 장차 큰 도에는 누가 될까 두렵다'고 했다.

유명록에는 정현을 비웃다가 역질에 걸려 죽은 일화가 있다. 내용 자체는 그냥 가십이지만, 당대인들부터 왕필의 정시현학이 선대의 고루한 정현류 양한유학을 비판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왕필이 역의 주석을 지을 때 번번이 정현을 고루한 유생이라면서 영감쟁이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현의 유령이 나타나 젊은 나이에 경솔하게 문구를 견강부회하면서 나를 함부로 책망하냐고 했다.

정현이 떠나자 왕필은 속으로 몹시 두려워했고 얼마 후 역질에 걸려 죽었다.

4. 평가

철학사적으로 보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조숙한 천재. 왕필 이외에 철학사에서 이름을 남긴 철학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40대 이후에 주저서와 사상을 완성했고, 몇몇 천재적 인물들도 20대 후반 이상은 되어야 유의미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예술이나 전쟁, 수학, 과학 분야의 경우 종종 십대부터 활약한 조숙한 천재들이 등장하곤 했지만 철학의 경우 왕필을 제외하면 십대 시절 족적을 남긴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빨리 죽는 바람에 자신만의 뚜렷한 사상을 남기는데는 실패하여 요절한 것이 매우 안타까운 비운의 인물.

또한 왕필은 조위 후반 조상 일파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논제(귀무론, 본무론)를 많이 저술하는 등 위진남북조 철학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왕필은 왕숙의 증손자로서 그의 학문을 가학으로 이어받았고, 황제권에 대한 회의와 참위에 대한 부정이라는 사상을 계승해 주역의 상수론을 부정하고 주역의 괘를 중심으로 만물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주역을 해석하는 것을 벗어나 '효'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사고할 것을 주장한다. 또 그는 학문적으로 하안의 현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하안과는 달리 유가의 성인 유정론을 인정했다.


[1] 박물기에 이르길 왕찬(王粲)과 족형 왕개(王凱)가 더불어 형주로 피난왔는데 유표(劉表)가 그의 을 왕찬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으나 그의 모습이 추하고 성격이 소략한 것을 꺼려서 왕개가 풍모가 있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왕개와 결혼시켰다. 왕개가 왕업을 나았으니 왕업은 유표의 외손자이다. 채옹(蔡邕)에게 책이 있어 거의 만 권에 이르렀는데 말년에 여러 수레에 실어서 왕찬에게 줬고 왕찬이 죽은 이후에 상국연 위풍모반을 일으켰는데 왕찬의 아들이 위풍의 난에 연루되어 이미 주살당하자 채옹이 줬던 책은 모두 왕업에게 돌아갔다. 왕업(王業)은 자가 장서(長緒)로 지위가 알자복야에 이르렀다. 아들인 왕굉(王宏)은 자가 정종(正宗)으로 사례교위를 지냈다. 왕굉은 왕필의 형이다.[2] 정밀은 조상일파 중 조상과 가장 친했고 항상 하안을 무시하고 있었다.[3] 하안은 성인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 논의가 굉장히 정밀하였고 종회 등이 논술하였다. 왕필은 더불어 동의하지 않고 성인이 다른 사람보다 무성한 것은 신명(神明)이고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은 오정(五情)이라고 여겼다. 신명이 무성하기 때문에 충화(沖和)를 체득하여 무(無)에 통하고 오정이 같기 때문에 슬픔과 기쁨으로 사물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즉 성인의 감정은 사물에 응하되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 그 얽매이지 않음으로 바로 다시 사물에 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잘못이 많은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