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9 10:47:32

혜능

慧能
638년 2월 27일(정관 12년 2월 8일) ~ 713년 8월 28일(선천 2년 8월 3일)
1. 개론2. 진실은
2.1. 반론
3. 육조혜능의 두개골

1. 개론

중국 선종(禪宗) 불교의 육조(六祖)이다. 혜능의 이야기와 그의 설법을 엮어 책으로 낸 것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이다.

영남의 신주 출신(현재의 중국 광동성)으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以生起心(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했다.

불교에 귀의하기 위해 오조 홍인(五祖 弘忍)이 머무르던 풍무산에 찾아가 절의 행자로서 8개월간 나무꾼 일을 하고 불경을 들으며 생활했다. 홍인은 자신을 받아주길 청하는 혜능에게 "남만인(남쪽 오량캐)이 어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라고 물었고[1], 이에 혜능은 "불성에 남북의 구분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해서 행자로 머물 수 있었다.

하루는 홍인은 의발[2]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게송을 지어오게 했는데 제자 중 가장 깨달음이 깊었던 신수(神秀)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벽에 붙였다.
몸은 보리수[3]
마음은 명경대라[4]
부지런히 털어내어[5]
먼지[6] 일지 않게 하리라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動拂拭
勿使惹塵埃

홍인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신수의 게송대로 수행할 것을 명하면서도, 정작 신수에게는 따로 "문턱에는 이르렀으되 이를 넘지는 못했다."라고 평했다.[7]

이를 본 혜능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그 아래에 붙였다.[8]
보리는 본디 나무가 아니요[9]
명경 또한 대(臺)가 아니다[10]
본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디서 티끌이 일어나리오[11]

菩提本無樹
明鏡亦非台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이를 본 오조 홍인은 다른 제자들이 혜능을 해할까 염려하여 "이 게송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이를 지운 뒤[12], 밤에 그를 불러 의발을 전하니 혜능은 그날 밤으로 절을 떠났다. 다음 날 의발이 혜능에게 넘어갔음을 알게 된 제자들은 격노하여 혜능을 추적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이 중 군인 출신의 '혜명'이라는 법명을 가진 한 제자가 거의 혜능을 잡을 뻔했고 혜능은 "의발이 탐난다면 가져가시오"라면서 의발을 두고 도주하였다. 혜명이 의발을 집어들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이에 혜명은 혜능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돌아온 혜능은 설법을 해 주었고, 혜명은 감명을 받아 물러났다. 혜명은 훗날 혜능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의 법명을 피휘하여(이름에 같은 '혜'자가 겹치는 것을 피하여) '도명'이라 고쳤다.

도주한 혜능은 세속 사람의 모습으로 은둔하다가 광주의 법성사(法性寺)에 들어갔다. 어느 날 인종 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을 보고 한 승려는 '저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승려는 '저것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혜능은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인종 법사는 정체를 물어보았고, 혜능은 자신의 정체를 말하고 의발을 보여주었다. 이에 인종 법사와 다른 승려들은 혜능에게 예를 표하고, 혜능에게 정식으로 비구계를 내리고 삭발하였다. 이 것으로 혜능은 공식적인 육조가 되었다.(이 구절은 이후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서 초반 나레이션으로 각색되어 쓰인다)

그리하여 선종은 이후 신수를 중심으로 한 북종선과 혜능 문하의 종단인 남종선으로 갈리었다.

2. 진실은

위의 내용들은 한국 불교, 더 나아가 동북아 선 불교계에서 최근까지 주류였던 이야기들이다.

왜 이렇게 표현하는가 하면,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혜능이 선종의 적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황에서 출토된 회창 법난 이전/육조단경 편찬 이전의 선종 문헌 자료들에서는 하나같이 신수를 정통으로 놓고 있다. # 또한 신수 역시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당대에 높은 고승이자 당 황실과 귀족들의 초청을 자주 받아 여러 법회를 열고 화엄학을 기반으로 선종 사상을 발달시킨 인물이다. 현재까지도 선종이 사상적인 부분에서는 화엄종의 영향이 크다는 것만 봐도 신수의 영향을 알 수 있다. 돈오와 점수의 일치 역시 신수가 일찍이 주장했던 것이다. 지금도 신수의 후예격인 능가선법(楞伽禪法) 계열에서는 신수를 6대조로, 그 제자 보적을 7조로 본다.

그런데도 신수가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은 후대의 문제였다.
북종선 자체가 후대로 올수록 점점 입지가 쇠약해지고 신수의 문하의 법맥이 5대밖에 가지 못한 데 반해 남종선파는 크게 득세하였고, 그 시작은 혜능의 제자였던 남종선의 7조 하택 신회가 '남종은 돈오고 북종은 점수다'라고 주장하면서 신수를 폄하하고 달마의 직계제자로 자신의 스승 혜능을 6조로 내세우고 혜능의 업적들을 부풀리고 미화하기 시작한 것. 하택신회가 본래 신수의 제자였고, 10대 때 혜능 밑으로 간 것도 제자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한 신수의 권유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13]
참고로 하택신회는, 안록산의 난 당시 군대에 끌려가기 싫어하는 백성들에게 승려가 되는 도첩(승적)을 대량으로 팔아 그 돈을 당 황실에 바쳐 환심을 사고 정치계 인맥을 넓혔다.

그러나 이후 혜능의 다른 제자인 남악회양 밑에서 나온 마조도일의 홍주종이 당나라 불교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선종의 주류가 된 남종선 자체가 혜능의 또다른 제자들인 남악회양과 청원행사, 그리고 회양의 제자인 석두희천과 청원행사의 제자 마조도일을 시작으로 오가칠종으로 갈라지면서 각자 7조를 내세우면서 자신이 중국 선종의 공인된 7조가 되려던 하택신회의 꿈은 깨진다.[14][15] 이 때문에 지금도 선종의 법맥을 논할 때 육조혜능까지는 공통적이고 일반에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후로는 의견이 분분하고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16]

이러한 추세는 경전을 경시하고, 체계적인 수행 이론보다는 대중성에 치중한 남종선이 압도적으로 세를 불려 북종선을 점차 흡수하고, 남종선에서 후대 선종의 주류를 차지하는 조동종, 임제종 등이 다 남종선에 기반을 두다 보니 자연히 남종선을 띄우고 북종선 계열을 천대하면서 이런 경향이 더욱 굳어져 버린 것. 이게 본격적으로 깨어진 것은 현대에 들어 불교학이 발달하고 돈황 문서들이 출토된 이후이다. 신라에도 8세기경 처음 들어온 선종은 북종선 계통이었다.

현대에는 간화선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 북종선이 새로이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나 남종선이 주류가 된 이후 오래 전부터 비판되던 승려들의 막행막식[17] 비판 부분에서도 다시 빛을 보는 추세. 깨달음 자체를 강조하는 남종선이 주류가 된 이후, 선종 승려들의 막행막식 문제에 대한 지적은 상당히 뿌리가 깊다.

2.1. 반론

현재 북종선의 신수가 재평가받고 있고 또 실제로 그는 당나라 황실과 조정대신들한테서 존경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혜능이 아닌 신수를 정통으로 삼고 있다'라고는 결론 내릴 수 없다.
또한 하택신회가 문제가 많고 또 혜능이 널리 알려진 게 전적으로 하택신회 때문이라는 뉘앙스로 위에서는 서술되어 있는데, 북종선도 재평가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그것보다는 선종이 이후 조동종, 임제종 등 수많은 걸출한 명안종사(明眼宗師)들을 배출한 영향이 크다.
그리고 하택신회가 잘못이면 하택신회를 비판해야지 같은 남종선 계열인 홍주종과 신회를 대립구도로 모는 것은 합당치 않다.

3. 육조혜능의 두개골

하동의 쌍계사에는 육조정상탑전(六祖頂相塔殿)이라고 해서 안에 불상이 아니라 7층짜리 석탑을 모신 전각이 있는데, 이 탑이 신라의 승려 삼법(三法)[18]이 주도해 당에서 육조혜능의 머리뼈를 가져와 모셨고 후대에 그 자리 위에다 지었다[19]는 전승이 있는 탑이다. 안에는 후대에 그린 육조혜능의 초상화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쌍계사에서는 이 탑의 연기를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禪宗六祖慧能大師頂相東來緣起)[20]라는 기록으로 전승하고 있는데,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삼법은 신라 성덕왕 때의 승려로 낭주군(朗州郡)[21]의 운암사(雲巖寺)라는 절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평소 당의 선승 육조혜능의 이름을 듣고 그를 한번 뵙고 싶어했지만, 육조혜능이 개원 2년(714년)에 입적하였다는 소식에 고명한 승려를 뵙지 못함을 한탄했다.

그러다 삼법은 금마군 미륵사의 승려 규창(圭晶)이 당에 들어갔다가 가지고 돌아온 육조혜능의 저술인 『법보단경』의 초본을 읽게 되었는데, 『법보단경』에 육조혜능이 "내가 입적하고 5, 6년 뒤에 누가 와서 내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다"라는 기록이 나오더란다. 이에 삼법은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 전에 자신이 그것을 신라로 가져와 신라에서 길이 모시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서라벌로 가서 영묘사(靈妙寺)의 비구니 법정(法淨)을 만나 자신의 계획을 털어 놓았고, 법정 비구니도 이에 찬성하면서 2만 금을 내주었다.

삼법은 즉시 상선을 구해서 바다를 건너 당으로 들어갔다. 기록은 개원 10년(722) 5월의 일로 전하고 있다. 3개월 후 소주(韶州)의 보림사에 이르러 삼법은 육조탑 앞에 자기의 소원이 성취되도록 빌었는데, 이레째 되는 날 밤에 한 줄기의 빛이 육조탑 꼭대기에 머물다가 동쪽 하늘로 가로질러 뻗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겠다고 기뻐하면서도 절 안에 보는 눈이 많아서 육조혜능의 머리뼈를 빼돌리기 어렵겠다고 걱정을 했다.

그러던 중 같은 신라인으로 백률사의 승려인 대비(大悲)가 마침 홍주 개원사 보현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삼법은 곧장 대비를 찾아가 자신의 계획을 밝혔는데, 대비 역시 삼법의 계획에 찬성했지만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국인들도 육조혜능이 "내 입적하고 5, 6년 뒤에 분명히 누가 내 머리를 가져갈 사람이 있다"라고 한 예언을 잘 알고 있어서 탑을 만들 때에 얇은 철판과 보포를 겹겹으로 감싸고 탑문도 단단하게 봉하고 엄중히 감시하며 지키고 있기 때문에 여간 뛰어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이다.[22]

이 무렵 개원사에는 장정만(張淨滿)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힘이 굉장히 장사였고 몸이 날랜 사람이었는데, 마침 어버이 상을 상해서 장례 치를 돈이 없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대비가 삼법에게서 1만 금을 받아 부조로 전해 주어 장정만은 고향으로 가서 어버이 장례를 치르고 올 수 있었고, 대비는 그에게 육조혜능의 머리뼈를 가지고 오고 싶다는 뜻을 은밀히 전했다. 장정만은 "끓는 물에 들어가고 타는 불을 밟으라 해도 마다하지 않겠다. 내가 당신에게 은혜 입은 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즉시 보림사로 향했고, 다음날 육조탑 앞에 도착해서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감탑의 문을 열고 육조혜능의 머리뼈를 꺼내 개원사로 돌아와 대비에게 전달해 주었다.

삼법과 대비 두 승려는 그 날 밤에 육조 혜능의 머리뼈를 짊어지고 절을 빠져나와 낮에는 숨고 밤에 길을 거는 식으로 항주에 도착해 배를 타고 신라의 당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운암사로 돌아온 삼법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대비와 함께 영묘사로 가서 법정 비구니에게 이를 보여 주었다. 그날 삼법의 꿈에 오색의 구름에 휘감긴 어느 노승이 나타나서 "나의 머리가 이 땅에 온 것은 불국(佛國)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삼법은 그 이튿날 대비와 함께 동쪽 지리산으로 갔다.

이때가 12월이라 눈이 온 산에 쌓여 길이 막혀 있었는데, 어디에서 온지 모르는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했고, 그 길을 따라가니 동굴에 석문이 있었고 문안에는 샘물이 솟고 있어 마치 봄 날씨 같았다. 그리고 삼법과 대비는 이곳에 육조혜능의 머리뼈를 봉안하기로 했다. 장차 탑을 세우기로 했는데, 그 날 밤에 삼법의 꿈에 나타났던 노승이 또 삼법의 꿈에 나타나 "탑을 세워 현창하지 마라. 비문을 만들어 기록하거나 새기지도 마라. 무명무상이 제일이니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돌로 함을 만들어 그 안에 육조혜능의 머리뼈를 넣고 깊숙히 묻어 안치하였다.

삼법은 이곳에 암자를 짓고 그곳에서 머물렀다. 대비도 몇 개월 뒤에 백률사로 돌아가 입적하였다. 그리고 삼법도 17년 뒤에 입적하였다. 삼법의 장례는 운암사에서 이루어졌다.

삼법이 육조혜능의 머리뼈를 돌함에 넣어 봉안하고 지은 암자는 그뒤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민애왕 때에 진감국사가 이 터에 다시 창건하고 육조 혜능의 정상을 봉안한 그 위에 육조진전을 건립하였다. 라는 것이 동래연기의 기록이다.

실제로 육조단경에 육조혜능이 “내가 입적하고 수십 년이 지나면 어떤 사람이 내 머리를 취하려는 절취 사건이 벌어지고 동방보살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에 제자들은 입적한 혜능 스님을 다비하지 않고 마포로 감싸고 옻칠을 해 살아있을 때 모습 그대로 보존했으며, 머리가 도난당하지 않도록 목과 머리 부분에 특별히 철을 덧댔다. 그리고 김대비라는 신라의 승려가 장정만이라는 사람을 고용해 육조혜능의 머리를 취하려다 발각돼 붙잡혔고, 이들을 엄벌하려는 현령을 육조혜능의 제자 영도 선사가 설득해 사면했다는 내용은 중국 측 문헌들에도 기록이 나와서 교차검증이 가능하지만, 동래연기는 여기서 더 이어서 김대비가 육조혜능의 머리뼈를 빼돌리려다 실패한 뒤에 다시 신라에서 삼법이 찾아와 개원사에 머물던 김대비 스님을 찾아가 논의했고 제2차 계획에 착수해 성공함으로써 혜능 스님의 머리를 쌍계사에 모실 수 있었다고 나온다.

다만 아주대학교 변인석 교수는 2012년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禪宗六祖慧能大師頂相東來緣起)의 본문 연구라는 논문에서 이 내용은 ‘동래연기’의 작자가 ‘육조단경’ 등에 나오는 김대비, 장정만, 동방보살 등 용어를 토대로 교묘하게 각색한 것임을 밝혔다. 이에 대한 중국 측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지금까지도 진신이 훼손되지 않고 전해져 온다는 정황과 기록들이 오랜 세월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정말 머리가 없어졌다면 어떻게 후대 황제까지도 진신을 찾았겠냐는 것이다. 여기에다 ‘동래연기’가 각훈 스님이 썼다지만 ‘해동고승전’의 수준에는 전혀 못 미치며, ‘동래연기’ 원본은커녕 목록조차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도 근거로 들었다.

그리고 이 일화는 육조혜능에 대한 신라인들의 지극한 존경심, 나아가 중국에서 선종이 쇠퇴해 자취를 감추었을 때 동이(東夷)에서 물으면 된다는 중국 선사의 말처럼 한반도가 중국을 넘어 불교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자부심과 선종에 대한 정통 의식에서 생겨난 이야기라는 것이다. #


[1] 당시까지 광둥성남월 지방과 문화적 및 민족적으로 동질감이 컸기에 남만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2] 가사와 바리때로, 불교에서 제자에게 정통을 삼기 위해 전하는 것이며 초대 달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전한다. 달마는 2조 혜가에게 6대에 이르러서 의발 전수가 끝날 것이라 예언했다.[3] 사념처 수행 중 신념처를 상징한다.[4] 사념처 중 심념처를 상징한다.[5] 올바른 계행과 정진력이 동반된 수행을 상징한다.[6] 번뇌를 상징한다.[7] 불교 수행에서 몸과 마음을 계행과 정진으로 깨끗이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의 본질을 보다 투철하게 통찰(위빠사나)해내기 위해서이다. 통찰하고 나면 몸에도 마음에도 고정된 자성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신수는 계행과 정진만 언급했을 뿐, 통찰을 마친 후의 결론에 대해서는 딱히 게송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홍인은 이를 간파해내고서 이렇게 평했다.[8] 본인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글을 아는 다른 사람에게 대필시켰다고 한다.[9] 보리수의 어원이 된 '보리(bodhi)'가 본래 불교적 깨달음을 의미한다는 점을 이용한 언어유희이다. 육신에 자성이 없음을 상징한다.[10] 마음에도 고정된 자성이 없음을 상징한다.[11] 몸에도, 마음에도, 수행에도, 번뇌에도 모두 자성이 없어 무언가를 따로 이루고자 집착할 바가 없음을 알았음을 선언하는 게송이다. 이는 반야심경의 요지와도 맥락이 같다.[12] 재밌게도 불교적으로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13] 사실 깊이 파고 들어가면 달마 항목에 나오듯이 선종 자체가 실증적인 정통성 면에서는 아무런 정통성이 없다.[14] 일단 당나라 조정에서는 당나라 덕종이 선종의 7조로 인정하고 신룡사라는 절에 비석과 예찬문을 만들어 놓으면서 인정하긴 했다.[15] 여담으로 규봉종밀의 경우 홍주종이 직계가 아니라 주장했지만 이 사람은 중국 화엄종의 5조면서 동시에 자신이 하택신회의 하택종의 적통을 이었다고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자기 대에서 법계가 끊어지면서 중국 화엄종의 맥이 단절되고 만다.[16] 참조 기사:하택신회 선사 ‘공인’…홍주종 득세로 잊혀.[17] 莫行莫食. 선종 승려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것.[18] 의상대사의 제자라고 전한다.[19] 1800년대에 승려 용당이 인근 목암사에 있던 석탑을 옮겨와서 지었다고 한다.[20] 해동고승전으로 유명한 고려의 승려 각훈의 저술이라고 전한다.[21]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이다.[22] 대비는 예전에 육조혜능의 입적 직후에 그의 유해를 봉안하고 감탑(龕塔)을 세우는 것을 옆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